제1부 백년빙곡氷谷

장혜영

9장 압록강을 넘어서삼복 철에 접어들면서 무더위는 밤이 되어도 식지 않았다. 낮 동안의 폭염에 이글이글 달아올랐던 시의 아스팔트도로들과 콘크리트건물들이 밤이 되면 깊숙이 내장된 열기를 방출하면서 날씨는 서늘하기는커녕 더구나 후텁지근했다.
최덕구 중대장은복차림을 한 채로여서 숨 막히는 찜통더위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는 권총을 허리춤에 차고 중대부를 나왔다. 동녘이 희붐히 밝는 걸 보면 새벽이 된 듯싶었다. 그래도 밖은 집 안보다 서늘하다.
“중대장 동무, 저도 함께 갑시다.”
어느새 장 교도원이 허리띠와 권총을 어깨에 둘러메며 뒤를 따라 나왔다.
“장 교도원동무도 잠이 안 오지?”
“예. 시내경비상황이나 시찰합시다.”
2중대가 소속된 469연대는 심양 입성 후 공업단지구역인 철서鐵西지역 수비를 담당하고 있었다.
새벽거리는 한산하고 잠잠했다. 이따금 경비병들이 둘씩 짝을 지어 도시를 순찰 도는 모습만 눈에 띌 뿐 아직 행인의 흔적이라곤 없었다. 금방 입성했을 때와는 달리 인젠 전쟁의 흔적도 가시고 질서도 잡히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흘러 지어 권태롭기까지 하다. 군인에게 평화는 권태와 싫증을 느끼게 할 뿐이다. 그래서 최덕구 중대장은 무덤 같은 이 도시에 흐르는 평온과 고요를 볼 때마다 불만과 답답함으로 가슴이 부글부글 괴어오르곤 했다. 언제까지 여기 죽치고 앉아 보초나 서야 하는 건가. 작년 11월 2일에 입성하여 벌써 8개월이나 넘게 이곳에서 하는 일 없이 주저앉아 있다. 저도 모르게 짜증을 버럭버럭 내다가도 자신은 명령에 복종하는 걸 천직으로 여기는 군인이고 더구나 병사들을 이끄는 중대장의 직책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치미는 불만을 가까스로 억제하곤 했다.
그때 강촌마을의 은파강에 지주 한상권을 밀어 넣어 죽인 후 그는 곧장 아버지가 가르쳐 준 휘남현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6촌 숙부는 고향을 찾아 조선으로 귀국한 지 오래었다. 당시 휘남현에서는 독립 4사의 휘남현성공격전투가 승리적으로 끝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의지가지없게 된 최덕구는 독립 4사 1연대에 입대하였다. 그 뒤 부대를 따라 유하, 화전, 집안, 환인점령전투와 동계작전에 참가하였으며 장춘해방전투와 심양공격전에 참가하여 수많은 군공을 세우고 중대장까지 되었다.
그런데 독립 4사가 166사로 되고 동북군구의 지휘를 받는 지방부대로 개편, 심양위수부대로 지방에 떨어지게 되면서부터 최덕구 중대장은 한 번도 전투에 참가해보지 못했다. 그 동안 변한 것이 있다면 1, 2, 3연대를 496, 497, 498연대로 부대명칭을 바꾼 것뿐이었다. 부대는 심양성에 주둔하여 도시 사회치안을 유지하고 동북국과 동북군구사령부와 중요 당정기관의 경비를 수행하고 민정사업을 하는 등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거리를 뚜벅뚜벅 걸어가던 최덕구 중대장은 문득 길 옆 어느 구멍가게 앞에 쭈크리고 앉아 훌쩍훌쩍 울고 있는 군인을 발견했다. 군인은 고개를 떨어트리고 훌쩍훌쩍 울다가는 술병을 들고 술을 마시곤 했다. 중대장은 얼핏 보고도 그가 자기 중대의 맹호소대장 유병철임을 알아보았다.
“아니, 이 자식이 순찰은 돌지 않고 저기 쭈크리고 앉아 술을 처마시고 있어! 야, 이놈아! 너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냉큼 정신 차리고 일어나지 못해!”
최덕구 중대장은 다짜고짜 그에게로 달려가 발길로 엉덩판을 걷어차며 거친 욕설을 퍼부었다. 인민해방군부대에서는 전사나 부하에게 매질이나 욕설을 하지 못한다는 규정이 있었지만 천성적으로 거친 최덕구 중대장은 화만 나면 규정이고 뭐고 까맣게 잊고 본성을 드러내곤 했다. 그 때문에 몇 번 비판도 받고 경고도 받았지만 하도 전쟁판에서 용맹했기에 연대장이 번마다 변호하고 눈 감아 주었다.
“에끼 이 사람, 연대장의 체면도 좀 봐줘야지. 인민의 군대가 국민당군대처럼 해서야 되겠어.”
연대장의 책망을 들을 때마다 난폭한 성격을 고쳐야겠다고 다짐했지만 문턱만 넘으면 그 다짐을 까맣게 잊어버리곤 했다.
강술에 곤드레만드레 취한 1소대장 유병철은 고개를 들고 흐리멍덩한 눈으로 직속상급인 중대장을 쳐다보면서도 담이 커져 두려워하는 기색이라곤 없다.
“때리긴 왜 때립니까? 국민당 장교도 아니고.”
“뭐라고? 이 망할 놈이! 오늘 죽고 싶어. 군인이 명령은 수행하지 않고 술을 처마시고 있으면서도 뭘 잘했다고 대답질이야. 너 같은 놈은 총살감이야!”
최덕구 중대장은 얼굴에 시퍼렇게 독이 올라 허리춤에서 권총을 쑥 뽑아들었다.
“제기랄, 누군 총이 없나!”
유병철 소대장도 벽을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서더니 모젤을 꺼내려고 손으로 총지갑을 더듬었다. 술에 취해 몸이 잘 말을 듣지 않는 모양이다.
“왜들 이럽니까? 두 사람 다 참으시오. 말로 해야지. 적아모순도 아니고 인민 내부모순인데, 혁명동지 간에 서로 총부리를 겨누다니요. 군율을 어긴 것이 있다면 상부에 보고하여 처분 받으면 되지 않습니까.”
장 교도원이 그들 사이를 막아서며 다급히 쌍방을 제지했다.
“개자식! 오늘 장 교도원 덕분에 숨이 붙어 있는 줄 알아라!”
사실 최덕구 중대장은 1소대장을 제일 애지중지했다. 이병철 소대장도 그걸 모르는 바 아니다. 두 사람 다 성미가 불같아 마주서기만 하면 싸웠지만 속으로는 서로를 존경했다. 그래서 다툴 때뿐이고 돌아서면 금방 웃으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성이 났을 때 중간에서 말리는 사람이 없으면 사고가 발생할지도 모를 위험성이 존재했다. 그때마다 장 교도원은 둘 사이에서 위험수위를 적당히 조절해주는 중재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속에서 불이 활활 붙어 술을 좀 마셨기로서니 무슨 죄가 됩니까. 군대가 싸우지 못하고 도시구석에 들어박혀 경비나 서고, 씨발! 속이 답답해서 곪아터지는구려. 전쟁이 끝났으면 집에 보내주던지. 고향에는 결혼 첫날밤에 두고 온 아내와 연로한 부모가 계신단 말입니다. 아니면 전쟁판으로 내보내주던지. 이거라고야 속에서 불이 나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주먹으로 가슴을 텅텅 두드리고는 또 술병을 거꾸로 들고 꿀떡꿀떡 들이켰다.
“자식, 누군 똥집이 편해서 이러고 잠자코 지내는 줄 알아. 군인의 천직은 명령에 복종하는 거라는 걸 1소대장 동무도 잘 알잖아. 속이 터지고 불에 타서 재가 되어도 참아야지. 아직 지주, 자본가와 반동분자들이 완전히 타도되지 않았는데 벌써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다니, 그것도 말이라고 씨버려!”
최덕구 중대장은 해방이 되자 쥐도 새도 모르게 남쪽으로 도망친 한종수를 염두에 두고 말했다. 그놈을 잡아 곱단이와 형님과 누이동생을 위해 복수하기 전에는 절대로 손에서 총을 놓을 수가 없다고 한 두 번만 다짐한 것이 아니었다.
“자, 담배나 한대 피우고 어서 일어나 순찰임무를 수행해. 술은 제대해 집에 가서 마셔도 얼마든지 시간이 있을 거니까.”
최덕구 중대장은 장교들에게만 공급되는 권연 한 갑을 유병철 소대장의 손에 쥐어주었다. 키가 껑충하고 깡마른 최덕구와 키가 작달막하고 암팡진 유병철 소대장이 마주앉은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중대장 동지, 연대장 동지의 명령입니다.”
그때 느닷없이 등 뒤에서 군례를 붙이는 소리가 절도 있게 들려왔다.
최덕구 중대장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의 우묵하게 꺼져 들어간 두 눈은 수면부족으로 충혈 되어 있고 얼굴은 영양실조로 누렇게 떠 있었다. 살집이 빠진 체구는 더구나 멋없이 가늘고 껑충해 보였다.
“무슨 일이요?”
“중대장 이상 간부는 급히 사단사령부로 집합하라는 연대장 동지의 명령입니다. 교도원 동지도 함께 참가하랍니다.”
연대 부 연락병은 열대여섯 살 정도밖에 안 되는 앳된 소년이었다. 군복을 착복했지만 품이나 길이가 다 커서 팔소매와 바짓가랑이를 세 겹이나 거두었고 어깨에 멘 38식보총은 땅바닥에 끌렸다.
“알았소.”
두 사람은 구보로 중대본부로 달려와 말을 타고 사단사령부로 향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은 예감이 들며 최덕구 중대장은 공연히 흥분하여 채찍으로 말 엉덩이를 연신 때렸다. 투덕투덕! 군마는 신나게 심양의 아침거리를 질주했다. 거리에 나오기 시작한 시민들이 갑작스런 군마의 질주에 놀라며 길을 비켜섰다. 그동안 겉으로는 평화의 연속인 것처럼 보였지만 내적으로는 심상찮은 움직임들이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벌써 부대 내의 노약자나 병약자들을 대량으로 색출하여 제대시켰으며 적지 않은 간부들은 지방간부로 전직시켰다. 그리고 줄어든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지방부대 중에서 7월초 주하조선족중대를 보충 받아 산포대대에 소속시켰으며 목단강에서도 천여 명 조선족청년들을 받아들여 신병훈련소에서 군사훈련을 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이 모든 사실들을 미루어볼 때 뭔가 비밀리에 거창한 군사계획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했다.
사단사령부는 일제시대의 야마토호텔에 자리 잡고 있었다. 군사회의 참가자들은 호텔 접견실에 삼삼오오 모여앉아 수군거리고 있었다. 회의실 정면 벽에는 스탈린과 모택동, 주덕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그 밑에는 테이블 몇 개를 연결하여 사단 지휘관들의 특별좌석을 따로 설치했다. 이미 연대장 이웅표와 정치위원 한일해도 도착해 있었다.
한일해 정치위원은 최덕구 중대장을 보자 주먹으로 어깨를 툭 치며 의미 있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기쁜 소식입니까? 정치위원 동지.”
“그래. 우리 호랑이 중대장이 좋아할 기쁜 소식이야.”
조금 후 사단간부들이 정치위원 방호산을 옹위하고 단으로 나왔다.
회장은 물 뿌린 듯 조용했다. 폭발전야의 침묵 같은 긴장된 분위기였다.
“뭘 저렇게 꾸물대는 거야! 제기랄.”
잔뜩 진장되어 귀를 기울이고 어서 기쁜 소식이 공포되기를 고대하던 최덕구는 그만 참지 못하고 짜증을 버럭 냈다.
“우리 166사는 원래 관내에서 나온 팔로군의 의용군 제1지대에 그 연원을 두고 있습니다. 당시엔 조선혁명을 위해 입북하려고 북상했으나 당의 결정에 따라 부대확충과 중국혁명을 돕기 위해 남만에 남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부대의 김웅 지대장, 안빈 참모장, 주연 정치주임, 왕자인 지대장 등 우수한 지휘관들은 이미 조선으로 나가 조선혁명을 위해 헌신하고 있습니다. 우리 부대도 전 동북이 해방된 좋은 형세 하에 조선혁명을 위해 조국으로 귀국할 것을 당 중앙에서 결정을 내렸습니다.”
정치부주임의 발언에 갑자기 회장 안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최덕구 중대장은 너무 감동되어 저도 모르게 두 눈에 눈물이 글썽해졌다.
드디어 조국으로 귀국하게 되었구나!
그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앞장서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손바닥이 터지라고 손뼉을 쳤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박수소리는 오래도록 그칠 줄 몰랐다. 전체 기립박수를 했다.
“다들 자리에 앉으십시오. 지금부터 정치위원 동지의 연설이 있겠습니다.”
방호산 정치위원의 수척하고 무표정한 얼굴은 몹시 피로해 보였다. 그러나 군인의 강인함과 위엄과 절도와 풍도가 당당했다.
그는 유창한 중국말로 연설을 했다.
“조국이 우리를 수요합니다. 우리는 중국혁명을 위해 프로레타리아국제주의 사명을 훌륭하게 완수하고 이제는 조국과 인민의 부름을 받고 영광스러운 귀국의 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20분가량 되는 그의 발언이 끝나자 또다시 장내에는 요란한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최덕구 중대장은 중대부로 돌아오는 길에 장 교도원에게 말을 건넸다.
“이제야 부대원들의 불평불만을 풀어 줄 수 있게 되었네. 그놈 난쟁이 표범도 더 이상 술을 마시고 훌쩍훌쩍 울 지 않게 되었군. 허허허……”
부대원들은 아니나 다를까 전쟁터에 나간다는 소식을 접하고 신명이 났다. 1년이 다 되는 평화환경에 지루함을 느끼고 있던 장병들의 사기는 충천했다. 그러나 조선으로 이동한다는 사실만은 병사들에게 비밀로 부쳤다.
저녁 편에 부대별로 나뉘어 밀폐된 유개화물열차에 탑재되었다.
장병들은 어두컴컴한 화물차 안에 콩나물시루처럼 빽빽이 들어앉았다. 화물차 구석에 구멍을 뚫고 간이화장실로 사용하도록 했다. 화물차 내에서의 담화를 금지시켰음으로 차내는 조용했다. 레일을 두드리는, 기차바퀴의 덜커덩거리는 마찰음만 단조롭게 들릴 뿐이었다.
최덕구의 마음은 벌써 압록강을 넘어 남쪽 땅 고향마을로 달려갔다. 어서 빨리 가서 남녘땅을 해방시키고 내 손으로 한종수를 잡아 인민의 이름으로 처단하고 싶었다.
군용열차는 국경도시 단동역에서 잠시 정차했다. 그제야 부대원 전체를 향해 목적지가 남방이 아닌 조선이라는 군사비밀이 공개되었다.
최덕구는 압록강 대안의 새벽 어스름 속에 어렴풋하게 드러난 조국 땅을 바라보며 감격에 겨워 만세를 불렀다. 다른 장병들도 모자를 허공중에 던지며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울상이 되거나 불평불만을 토로하는 병사들도 적지 않았다.
“장강전선으로 국민당군대와 싸우러 간다더니 우릴 속인 겁니까. 부모처자를 다 버리고 조선엔 왜 간다는 겁니까?”
“난 고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집에 보내 주세요. 중대장 동지.”
어린 병사들은 훌쩍훌쩍 울기까지 했다.
“이 자식들아! 지금 무슨 망발을 하고 있는 거야. 너 소대장이란 놈부터 이따위 소릴 하니 대원들이 저럴 수밖에.”
최덕구가 버럭 언성을 높이자 장 교도원이 그를 막아 나섰다.
“됐습니다. 모두들 진정하십시오. 조선의 독립과 해방은 우리 조선사람 모두의 사명입니다. 영토완정을 통한 조국의 완전한 해방을 이룩하기 전까지는 우리의 혁명임무는 끝나지 않습니다. 동무들, 조국은 우리를 부릅니다. 조국이 부르는데 자그마한 가정이나 생각해서야 어찌 혁명전사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조국이 있어야 다시는 망국의 백성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최덕구는 가래를 퉤 뱉고 유병철을 한번 흘겨보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그도 늘 입보다는 주먹이 앞서는 자신을 장 교도원에게 비할 때마다 자격지심을 느끼곤 했다.
개자식, 주둥이로 벌어먹는 놈 같으니!
연대장의 명령에 따라 중대원 전부는 군복상의를 벗고 적삼바람에 차에 올랐다. 무기도 회수하여 다른 차량에 집결시켰다.
“왜들 군복을 벗기고 총까지 회수하는 거지? 우릴 군대에서 내쫓으려는 건가?”
“그게 아니고. 중국인민해방군이 조선인민군으로 넘어간다는 사실을 군사비밀에 붙이기 위해서일 겁니다. 해방군복장에 무기를 휴대하고 입북하면 공화국공민들이 금방 알아볼 테니까요. 소문이 날까봐 그러는 겁니다.”
장 교도원은 병사들의 의혹을 차근차근 풀어주었다.
최덕구 중대장은 못들은 척 하고 담배만 뻐끔뻐끔 빨아댔다. 건너가면 건너갔지 어떤 놈들이 무서워 도둑놈처럼 숨어서 행동하나 싶은 불만이 속에서 불뚝거리는 걸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
큰일은 못할 놈들이야!
홧김에 젖은 담배를 이로 질근질근 씹어댔다. 매콤하고 씁쓸한 엽초 냄새가 싱그러웠다.
새벽이 되어서야 신의주역에 전원 하차했다. 부대는 새벽의 조용한 틈을 타 인민군접대장교의 안내에 따라 각기 정해진 주둔구역으로 이동했다. 최덕구 중대가 배속된 1대대는 압록강변의 본부동에 위치한 신의주상업고등학교 2층이 배정되었다. 여장을 풀자 주먹밥과 통조림이 막 배달되었다. 종일 굶었던 차라 음식은 눈 깜짝할 사이에 동이 났다.
그러나 이튿날부터는 부대 군수품과 군량수송을 맡은 대원들을 제외하고는 또다시 모두들 임시병영 안에 격리되었다. 외출이 금지된 상태라 종일 하는 일 없이 교실 안에 박혀 있어야만 했다. 주민들과 만나지도 못하게 했고 거리구경도 금지시켰다. 군량과 군수품을 마차에 실어 나르는 군인들도 중국말을 못하도록 엄단했다. 그러나 중국말로 길들여진 말들은 중국말이 아니고는 부릴 수가 없었기에 주민들은 귀에 선 말을 하는 사람들을 이상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최덕구는 창문가에 마주앉아 애꿎은 담배만 연신 태웠다. 아침에 주먹밥을 한 번 주고는 하루 종일 급식이 중단되어 배 안에서 꼬르륵, 꼬르륵, 소리가 났다. 병사들은 배가 고프다고 아우성을 질렀다.
“데려다 놓고는 싸움도 하기 전에 굶겨죽일 작정인가. 먹이지 않고 무슨 힘으로 싸우란 말이요. 소도 먹여야 똥을 눈다고, 빌어먹을 놈들! 우릴 이렇게 박대할 거면 왜 데려왔어. 집으로 돌려보내 줄 거지.”
최덕구 중대장은 대대장한테 찾아가 한바탕 고아대다가 경위병에게 등을 떠밀려 나왔다. 종일 화가 나 씩씩거리고 있는데 해가 저문 뒤에야 인민군전사 몇 명이 들어오더니 계급장이 없는 인민군복 몇 묶음을 던져놓고 나갔다.
되는 대로 하나씩 집어 입었다. 군복이 몸에 맞지 않았다. 커서 팔소매와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린 사람, 작아서 종아리와 팔뚝이 벌겋게 드러난 사람…… 참나무 잎을 삶은 물에 초록색을 염색한 군복천은 물감이 골고루 들지 않아 보기 흉하게 얼룩덜룩했다. 그래도 중국에서 입던 해방군복장보다는 새것이어서 그런대로 몸에 걸치고 있었다.
“혁명을 위해서라면 옷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 지금은 남반부를 해방하는 과업이 우선이니까 참아!”
최덕구는 제법 지휘관답게 대원들의 불평을 제지했다. 그까짓 군복 같은 건 덕구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네 사람 뿐이었다. 곱단이와 한종수 그리고 여동생 향란이와 한종철이다. 수많은 전투를 거치며 수많은 적을 살상했지만 따지고 보면 개인적으로는 그와 아무런 원한이나 앙숙이 없는 중국인들이었다. 그들이 무산계급의 적이라는 정치적, 군사적 면에서는 의미가 있을지 모르나 그 자신의 사적인 원한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전투들이었다. 그와 직접적 관계가 있는 전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될 것이다. 한종수와의 생사판가름도 승부가 갈릴 것이다.
네놈이 도망쳐 보았자 내 손바닥 안이지. 흥, 기다려라! 네놈이 끝장날 날도 오라지 않을 것이다.
그날을 고대하는 최덕구 중대장에게는 굶주림보다는, 군복보다는 복수의 순간이 하루빨리 다가오지 않고 지루한 세월만 허송하고 있는 사실이 가슴 아팠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입북부대에 김 장군이 친히 시찰을 나왔다. 부대시찰을 끝낸 김 장군은 부대간부들을 집결시켜놓고 의미 있는 연설을 했다. 최덕구 중대장은 최고 지도자의 연설 속에서 남반부해방에 대한 메시지를 읽으려고 청각을 바싹 도사렸다. 아직 30대의 젊은 나이인 장군은 소탈하고 풍채가 늠름하고 기풍이 도도하여 사람들의 환심을 살만 했다. 그만한 패기라면 남반부에 도사린 미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인민들을 지주, 자본가의 압박 속에서 구해낼 것만 같은 믿음이 갔다.
“나는 오늘 동무들과 다시 만나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제 655군부대 장병들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참으로 충실하였으며 조 중 두 나라 인민들의 전투적 단결을 강화하는데 크게 이바지하고 조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장군의 우렁찬 목소리는 회의 참석자들의 박수에 의해 자주 중단되었다. 어떤 간부들의 눈에는 감격의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그러나 최덕구 중대장은 남반부 해방에 대한 말이 나오기만을 고대하느라 정신이 긴장되어 있었다.
“동무들은 전투경험을 가졌다고 하여 자만해서는 안 되며 조국에 돌아왔다고 해서 평화분위기에 안주해서도 안 됩니다.”
그렇지. 평화분위기에 안주해서야 안 되지. 고통 받는 남반부인민들을 하루속히 한종수 같은 놈의 억압 속에서 해방시켜야 하구 말구.
최덕구 중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장군님, 명령만 내리십시오!
“동무들은 전투에서 단련되고 수많은 전투경험을 쌓았지만 정규적인 군인생활은 해보지 못했습니다. 이 면에서는 정규화 된 인민군대생활을 먼저 시작한 동무들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인민군 창건 당시부터 인민군대에 복무한 군인들은 정규군대의 면모를 기본적으로 갖추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그들에게서 허심하게 배우는 것이 좋습니다.”
덕구 중대장은 밖으로 쑥 빼들었던 목을 쭈르륵 접어 들였다. 뭘 배운다는 건가? 언제 한가하게 집에 들어앉아서 배울 시간이 있는가? 그냥 내려 미는 거지. 가슴 속에서 불만이 꿈틀거렸다. 여유 있게 기다리기엔 너무나 인내성이 부족했다. 그만큼 조급했다. 한종수를 만나 복수도 해야 하고 집으로 돌아가 곱단이를 만나기도 해야 했다.
그러나 장군의 우렁우렁한 목소리는 확성기의 기능까지 빌어 강당이 쩌렁쩌렁 하도록 울려 퍼졌다.
“동무들이 실제 적과 맞닥뜨려 싸워본 경험은 있지만 현대적 장비로 무장된 정규군과는 전투를 못해봤으며 또 정규화부대의 전투를 조직하고 지휘해 본 경험도 없습니다. 이제부터 현대전에 맞는 훈령강령에 따라 체계적으로 군사훈련을 진행해야 합니다.”
우렁찬 목소리에 확성기가 찢어질 것만 같았다. 박력 있고 결단성 있는 목소리와는 달리 장군은 연설하는 동안 내내 얼굴에 밝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평화로운 분위기를 보아서는 조만간은 잔인한 전쟁 같은 건 일어날 것 같지 않아 최덕구 중대장은 공연히 마음이 불안해졌다.
체계적인 군사훈련이라! 제기랄, 썩어빠진 군사훈련 좋아하시네. 싸움은 언제 하고?
최덕구는 부르쥔 주먹으로 창문턱을 내지르며 투덜거렸다.
마지막으로 장병들의 배고픔을 덜어 주기 위한 군량보급문제에 대해 몇 마디 구체적 담보를 한 다음 장군의 연설은 끝났다. 결국 최덕구 중대장은 지도자의 연설에 걸었던, 남반부해방에 대한 기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맥없이 회장을 나와 병영으로 돌아왔다.
며칠 뒤 장교계급장이 내려왔다. 최덕구 중대장은 소성 두 점 중위 중대장 계급장이 내려졌다. 그러나 장 교도원은 소성 한 점 소위 부중대장 계급장을 달아 주었다. 그 바람에 장 교도원은 의기소침해져 신의주를 떠나 재령으로 이동할 때까지 얼굴에 낀 그늘이 걷히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해방군계급은 군사 간부와 정치 간부의 계급이 같을 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에 정치 간부가 군사 간부보다 실권이 더 있었으니 말이다.
“내 계급장과 바꾸고 싶네그려. 난 이따위 중위고 소위고 상관이 없는데 말일세.”
최덕구 중대장은 말 그대로 계급장에는 연연하지 않았다.
부대는 계급장 때문에 잠시 동요를 거치고는 얼마 뒤 남쪽의 사리원 쪽으로 군사이동을 했다. 최덕구네 중대는 496연대가 인민군 6사단 13연대로 개편됨에 따라 1대대에 소속되었다. 사단장에는 원 166사의 정치위원이던 방호산 장군이 임명되고 참모장에 노철룡 총좌, 문화부사단장에 홍림 총좌가, 13연대장에는 평소 그를 사랑하던 한일해 상좌가 발령받았다.
6사단 본부는 사리원시에 주둔하고 13연대는 재령 명신중학교와 오상상업학교에 나누어 주둔했다. 이곳에서 소련 군사고문의 감독 하에 제대훈련과 행군훈련 등 소련식 군사훈련에 들어갔다. 최덕구 중대장은 하루빨리 남반부해방의 날이 돌아오기만을 고대하며 말없이 간고한 훈련을 참고 견디었다.
재령에서 재래식 무기도 전부 소련제로 바꾸었다. 최덕구는 권총과 자동소총 각각 한 자루씩을 분배받았다. 최덕구 중대에는 중화기로 최대 사거리 7,000m, 유효발사속도가 1분에 80발인 12.7mm의 고사기관총까지 배당이 되었다. 새로운 소련제 무기로 장비되고 소련식 군사훈련을 받은 병사들은 사기가 충천했다. 명령만 내리면 당금이라도 남반부를 쳐내려가 조국을 통일할 기세들이었다.
6월부터는 열차와 도로를 통해 군수물자를 실은 트럭, 마차, 수레들이 육속 남행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난생처음 보는, 독소전쟁에서 위용을 떨쳤다던 그 유명한 T-34 전차도 있었다. 집채 같은 괴물이 드르릉, 드르릉, 지축을 울리며 한길을 달리는 모습을 보며 인민군 장병들은 환성을 질렀다. 주민들을 동원하여 교량을 수축하고 군용도로를 견고하게 다졌다. 이름 모를 군부대들도 끊임없이 남쪽으로 이동했다. 이 모든 이례적인 군사적 행동은 전쟁의 날자가 코앞에까지 박두해왔음을 일반군인들까지 예측할 수 있을 만큼 그 범위가 날이 갈수록 확대되었다.
최덕구는 신명이 났다. 훈련에서도 누구보다 솔선 적이 되었다.
그러던 6월 초의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부대 전체에 비상동원령이 발령되었다. 부대가 학교운동장에 집합하니 연대장 한일해가 하계전투훈련이 시작되었으니 실, 붕대, 머큐롬 등 비상 군수품을 모두 휴대하고 남쪽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최덕구네 중대는 바로 38선 이북경계 초소인 송악산기슭에 천막을 치고 주둔했다. 금천까지 오는 동안 최덕구는 산골짜기와 비탈마다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탄약상자들과 포탄상자, 휘발유통과 기타 군수품들이 은폐되어 있는 것을 보고 드디어 전쟁이 눈앞에 박두해 왔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설렜다.
부대는 골짜기에 천막을 치고 은폐한 채 보급품으로 제공되는 주먹밥과 통조림을 먹으며 밤낮으로 참호를 구축했다. 참호를 파는 데는 주민들과 학생들도 동원되어 군인들을 도왔다. 38선 너머로는 총을 든 군인들과 물동이를 인 아낙네들의 모습까지 빤히 건너다 보였다.
한종수 이놈! 기다려라. 오래지 않아 이 어른이 네놈을 처단하러 갈 테니.
최덕구는 멀리 남쪽하늘을 쳐다보며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갈았다.
6월 중순의 어느 날, 최덕구 중대장은 탄약 공급문제 때문에 사단본부로 찾아갔다. 그런데 그날따라 사단본부는 경계가 심했다. 각 부대의 대대장급 이상의 군관들이 연이어 사령부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1대대장과 문화부대대장도 말을 타고 나타났다.
사단 고위 장령들은 사령부에서 나가 앞뜰의 넒은 잔디밭에 원을 그리고 빙 둘러 앉았다. 긴장된 분위기에서 최덕구 중대장은 무언가 당 중앙의 중대한 결정이 내려질 것이라는 예감을 받고 흥분으로 전신을 떨었다.
조금 뒤 사단장 방호산을 위시하여 홍철 문화부사단장 등 고위간부들이 잔디밭에 나타났다. 방호산 장군의 얼굴은 비장해 보였다. 날카로운 콧날과 예리한 눈빛 때문에 오늘따라 더구나 강인해 보였다. 얼굴은 살기가 없지만 몸집은 군마처럼 튼튼하고 건장한 사내였다.
“동무들, 지금부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김두봉 위원장동지의 방송연설이 있겠습니다. 모두 조용하고 경청하기 바랍니다.”
그리고는 그 자신도 잔디밭 위에 앉았다. 사단참모들과 부관들도 그 뒤에 둥그렇게 자리 잡고 앉았다.
최덕구도 사단사령부 문 앞 어귀에 쭈크리고 앉았다. 도대체 무슨 연설일까?
김두봉의 연설은 먼저 국내외 형세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중국 공산당의 승리와 공화국 북반부의 민주주의건설의 승리에 대해 찬사를 쏟았다. 이어 미 군사고위관리들이 동경에서 가진 회합을 통해 조선에서의 전쟁수행의 시기 및 방법과 대만점령을 인정하는 문제를 논의한데 대해 폭로했다.
“동지들, 6월 18일 미국무경 덜레스는 38선을 시찰하고 이승만에게 북침을 지시했습니다. 미 제국주의는 아세아를 군사기지화하고 조선반도를 장악하려고 하는 만큼 우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습니다.…… 이승만이 북진통일을 주장하고 괴뢰 국방부장 신성모는 ‘명령만 내리면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수 있다’는 호전적인 망발을 떠벌이고 있습니다.…… 공화국은 이승만 괴뢰의 학정 밑에서 도탄에 빠져 신음하는 남조선 인민들을 반드시 해방할 것입니다……”
최덕구는 벌떡 일어났다. 가슴 속에서 피가 끓어 번졌다.
드디어 왔구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날이 왔구나!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최덕구는 한달음에 부대로 돌아왔다. 대대장 이상 간부들만 청취한 방송연설내용을 미뤄보아 군사비밀인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 흥분과 기쁨을 혼자서만 알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1소대장과 문화부중대장을 가만히 천막 밖으로 불러냈다.
“동무들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 주겠네.”
“무슨 소식인데……”
며칠째 계속되는 따분한 참호구축작업에 지쳐버린 1소대장 유병철은 심드렁하게 되물으며 그의 호주머니부터 슬금슬금 뒤진다. 연대본부나 사단본부에 가면 꼭꼭 궐련 한두 갑을 얻어다가 유병철과 나눠 피웠기 때문이다.
유병철은 최덕구의 호주머니가 빈 것을 알고는 손을 쑥 빼내며 투덜거렸다.
“오늘은 왜 허탕입니까?”
“담배 따윌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어. 이건 말이야 군사비밀인데……”
최덕구 중대장은 두 사람의 어깨를 손으로 눌러 자기한테로 모여왔다.
“절대로 병사들한테 누설해서는 안 된다고.”
재삼 다짐을 받았다.
“아니 무슨 비밀인데 중대장 동지답지 않게 시시콜콜하게 구시는 겁니까? 어서 속 시원히 말해보세요.”
성미가 솔 껍질 같이 거친 유병철은 벌써 인내성을 상실하고 짜증을 벌컥 냈다.
“자식, 성미하구는 늑대 같이! 히히히……”
다른 때 같으면 금방 얼굴을 붉혔을 최덕구 중대장이 오늘따라 태평스레 너털웃음을 짓는 모습을 보고 장 문화부중대장과 1소대장은 의아한 눈길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오늘 말이야. 내가 사단본부에 일이 있어 갔다가 아주 사람을 격동시키는 희소식을 받아가지고 왔단 말일세. 어디 우리 교도원 동지께서 한번 알아 맞혀 보시 게나?”
전에 없이 능글능글 여유를 부리며 농담까지 했다.
“글쎄요. 우리 중대장 동지가 기뻐할 일이라면 전투밖에 없을 거구. 또 요즘 돌아가는 형세를 보아하니 남반부를 해방하는 공격을 개시…… 아니, 중대장 동무, 그게 사실입니까. 정말 공격이 개시된다는 겁니까?”
자신의 예측에 스스로 놀란 장 문화부중대장이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잘 알아맞혔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남반부를 해방시키는 공격이 개시된다는 겁니다.”
“예? 전쟁이 터진다고요!”
불만으로 입이 삐주룩이 나와 있던 1소대장 유병철도 놀란 표정을 짓고 중대장의 희열이 번진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래그래 그렇다니까. 그러니까 두 동무만 알고 있으라우. 군사비밀이니까. 분명 오늘내일 중에 공격이 개시될 터이니까 말일세. 허허허.”
최덕구는 두 사람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그 자리를 떠나 중대부로 들어갔다.
“에크, 그럼 난 빨리 집에다 편질 써야겠네. 전쟁이 터지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데……”
1소대장의 혼잣말에 최덕구는 얼굴의 웃음을 거두고 흠칫 멈춰 섰다. 순간 곱단의 얼굴이 기억의 숲을 헤치고 의식의 화면에 나타났던 것이다.
정말 그렇다. 전쟁이다. 전쟁에서 죽는 쪽이 꼭 한종수일 거라는 담보도 없잖은가. 운수가 껌벅하면 그 죽음이 최덕구 자신에게 돌아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왜 나는 한종수를 잡아 처단한다는 생각만 했지 그의 총에 내가 맞아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못했을까. 아니야. 난 절대로 죽지 않아. 그럴 만한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공화국의 군대는 인민을 위한 군대이다. 그런 만큼 그가 하는 전쟁도 정의의 전쟁이다. 정의의 전쟁은 반드시 승리한다. 그리고 아군은 소련제 현대무기로 무장하고 소련식 군사훈련을 거친 최정예부대이다. 지주, 자본가를 위한, 미 제국주의의 총알받이 노릇을 하는 괴뢰군이 어찌 인민군과 싸워 이길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반드시 패할 것이며 인민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래 난 죽지 않아! 죽어 마땅한 놈은 한종수야!
그는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중대부 천막 안으로 들어온 그는 잠시 우두커니 문어귀에 못 박혀 있었다.
그래도 사람의 앞날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 곱단에게 편지 한 장이라도 쓰는 게 좋을 것 같다. 워낙 일자무식이었지만 그는 몇 년간의 부대생활에서 한글은 물론이고 한자까지 섞어 편지를 쓸 수 있을 만큼 유식해졌다. 남편이 얼마나 유식해졌는지를 곱단에게 자랑도 할 겸.
최덕구 중대장은 자리에 앉아 혁낭에서 노트를 꺼내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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