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대학교 토목공학과 서경흠

[서울=동북아신문]나는 중국 강소성 염성사람이다. 염성은 아주 작은 도시라 중국 사람들도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곳 염성에 한국의 기아자동차와 많은 계열사들이 진출해 있다. 4년 전 그 시골에 대학을 갓 졸업한 귀엽고 착한 한 여자가 중국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겠다고 중국어도 모르면서 찾아왔다. 그 여자는 염성이라는 시골에서 점점 유명해졌다. 중국어를 잘 하는 한국인! 라디오 게스트로, 염성 홍보 비디오 나레이션으로, 합창단 지휘자로 그녀는 곧 염성의 스타 한국어 선생님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녀석이 그 여자를 만나게 해 줄 테니 빨리 나오라고했다. 이게 왠 횡재인가! 그렇게 그 여자와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나는 당시 남경 호주유학반이었는데 돌아가자마자 한국 유학반으로 옮겼고, 그 여자가 곧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얘기를 듣고는 수소문 끝에 학교를 알아내 유학 신청서를 냈다. 그렇게 그녀는 내 한국어 선생님이 되었고 나의 한국 유학생활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매일 볼 수 있다는 설렘과 기대로 너무 행복했었다. 그녀에게 잘보이기 위해 생전 안하던 공부를 시작했다. 외모에도 신경을 많이 썼고 그녀와 함께할 수 있는 모임에는 다 참여했다. 그리고 위험하다는 핑계로 매번 그녀의 집까지 택시로 배웅을 했다. 공부도 열심히 해서 매 시험에서 1등을 했다. 나는 무척 애를 쓰며 매달렸지만 그녀는 나를 절대 받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나 때문에 학교에서 많이 곤란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나는 나이도 너무 어리고 우리는 사제지간이기 때문에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학생이라는 내 신분이 너무 싫었고 멀리 떨어져 있는 학교에 대학교 입학신청을 했다. 첫 학기가 시작되던 날 용기를 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젠 나 때문에 힘들게 하지 않을게요. 지금부터는 내 선생님도 아니니까 나를 남자로 한 번만 봐 주세요. 당신한테 최고의 남자가 되도록 열심히 노력할 테니까 제발 나 좀 남자로 한번만 봐 주세요.”

그녀는 역시나 대답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어렸을 때의 상처 때문에 수술을 하게 되었고 그녀의 어머니께서 병간호를 해 주시기로 하셨지만 몸이 너무 안 좋으신 관계로 병간호를 해 줄 사람이 없었다. 나는 그 사실을 안 순간 이때가 기회다 싶었다. 얼른 여행가방에 짐을 싸서 그녀의 병원에 간병인으로 들어갔다. 나는 내 몸보다도 작은 간이침대에서 한 달 동안 잠을 청했고 거동이 불편한 그녀를 매일 휠체어에 태워 치료를 받으러 다녔다. 팔을 쓸 수 없는 그녀를 위해 매일 세수도 시켜주고 머리도 감겨주고 밥도 먹여줬다. 나는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짬을 내 집에 가서 청소며 빨래며 그녀가 좋아할 만한 일이면 뭐든 찾아서 했다. 그러기를 한 달 그녀의 마음이 차차 열렸고 병원에는 우리가 잉꼬부부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녀는 부정하지 않았고 은근 좋아하는 눈치였다. 그녀가 퇴원하는 날 그렇게 나는 자연스레 그녀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게 되었고 두둑한 점수를 얻었다. 정말 어려웠지만 한 번의 고생으로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은 셈이다. 

 지금 그녀의 어머니는 나를 ‘우리 막내아들’이라 부르신다. 내가 한국의 예의를 잘 몰라 실수를 많이 하는 터라 붙은 이름이다. 중국은 입식문화라 난 한국의 좌식생활에 익숙하지 않다. 그녀의 가족들과 같이 저녁을 먹었는데 나는 너무 피곤해서 빨리 먹고 밥상 옆에 누워 TV를 봤다. 다들 식사를 하고 계셔서 나만 자리를 뜨는 것은 좀 그렇다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버님의 눈빛이 매서워지셨고 어머니는 그 순간 ‘아이고, 우리 막내아들! 어여 일어나! 밥 다 먹을 때까지는 아무리 피곤해도 앉아있어야지!’하시며 눈치를 주셨다.

또 한번은 그녀의 오빠가 나에게 술을 청했다. 한국의 술문화를 잘 모르는 나는 아니나 다를까 또 실수를 했다. 맞은편에는 형님과 형수님이 앉으셨고 내 옆에는 여자 친구와 어머님이 앉아계셨는데 예전에 얼핏 들은 술 문화 중에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일 경우 고개를 돌려 마셔야 한다는 것이 생각이 났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려 술을 마셨는데 형님께서 또 표정이 안 좋으시다. ‘이봐! 엄마 쪽으로 술을 마시면 어떻게 하나?’ 그러니까 또 어머니께서 ‘아이고, 우리 막내아들 괜찮아! 형님한테 예쁘게 보이려고 한건데 괜찮아!’하시는 것이다. 여기 까지는 모두가 나의 실수를 애교로 받아줬다. 하지만 정말 큰 실수는 여자 친구와 대화중에 벌어졌다. 여자 친구가 나에게 농담을 했고 나는 평소에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사용하던 말로 ‘지랄하네!’라고 했다. 단순히 ‘까분다’의 의미인줄 알고 사용했던 나는 아버님이 숟가락을 놓고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시는 것을 보고 오늘은 웃으며 넘어갈 일이 아니구나 싶었다. 어머니께서도 표정이 많이 굳으셨다. 그리고 ‘아이고, 우리 막내아들. 오늘은 엄마가 뭐라고 얘기해야 좋을지 모르겠다.’하시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여자 친구도 밥을 먹다말고 부모님을 따라 나가버렸다. ‘허걱! 내가 무슨 말을 했길래. 왜 그러시지? 한국어는 왜 이렇게 어려운거야?’ 생각했다. 나중에 그 의미를 알고는 정말 얼굴이 빨개져서 한동안 부모님께 안부전화도 못 드렸다.

며칠 후 정중히 사과를 드리고 나서야 다시 가족들과 즐거운 저녁식사를 할 수 있었다. 난 한국의 ‘예의’라는 놈이 정말 어려웠다. 학교에 가면 교수님 선배님에 대한 예의들, 술자리에선 술자리에서 지켜야 하는 예의들, 여자 친구의 가족 모임에 가면 또 가족들과의 생활에서 지켜야 하는 예의들. 나 같은 외국인들을 위해 한국 문화에 대한 책을 내고 싶을 정도였다. 

 지금 한국에서의 생활 4년째, 이제야 한국 문화에 적응을 하고 여자 친구의 부모님 얼굴을 울그락 불그락 하지 않게 만드는 한국식 청년이 되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면서 내 모습들이 정말 많이 바뀌었고 이제 우리 부모님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그녀와 노력하는 중이다. 그녀는 나보다 6살이 많다. 그래서 우리 부모님은 그녀를 부담스러워하시고 그렇기에 나와 그녀는 더 노력한다. 나는 그녀에게 멋진 남자가 되기 위해 그녀는 나에게 또 우리 가족에게 멋지고 당당한 여자가 되기 위해 노력중이다.

 지금 나는 서울에서 꽤 유명한 대학에 재학 중이며 장학생으로 학교를 다니고 있다. 대학원 형들과 열심히 공부하고 시간이 나면 혼자 도서관에서 공부하며 시간을 보낸다. 한국과 중국의 가족들을 모두 행복하게 살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 나에게 남은 시간이 너무나도 짧다. 나를 어렵게 받아주고 지금까지 잘 믿고 따라와 준 그녀를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하게 해 줘야 하기에 나는 오늘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고 그녀 또한 열심히 노력중이다.

 그녀가 사는 나라 한국, 내가 그녀와 멋진 새 인생을 꾸려갈 나라 한국, 그녀와 나의 희망의 땅,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어준 한국이라는 나라. 난 이런 한국이 정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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