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백년빙곡氷谷

장혜영




10장 지리산의 정한





향란은 갓난아기를 업은 채 38선을 넘었다.
서울에 도착했지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설고 생소한 땅이었다. 게다가 수중에는 돈 한 푼 없었다. 여인숙이나 하숙집 같은데 투숙할 형편도 못 되었다.
그녀는 첫날밤을 청계천가의 다리 밑에서 바람에 굴러다니는 신문지 몇 장을 펴고 지냈다. 6월에 접어들면서 기온이 급상승세를 타 밤이라지만 다행히도 추위는 면할 수 있었다. 많은 거지 떼가 다리 밑에서 노숙했기에 그렇게 무섭지도 않았다.
이튿날 아침 향란은 아기의 울음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어린 것이 며칠 째 굶주려 젖줄이 말라 버린 어미의 젖꼭지를 빨며 배고프다고 울어대고 있었다.
“아기야, 울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
향란은 청계천에 내려가 얼굴의 먼지를 대충 씻었다. 물속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자신도 몰라보게 수척한데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부스스한 모습은 틀림없는 거지꼴이었다.
냇가에는 돼지우리 같은 판잣집들이 진딧물처럼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저런 곳에서 사람이 어떻게 사나 싶을 정도로 판잣집들은 허름하고 초라했다.
언덕으로 올라가 무작정 어느 집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 계세요? 이북서 내려온 귀향민인데 밥이든 젖이든 좀 주세요.”
유치한 거지행세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그녀의 가슴에 수치감을 불러 일으켰으나 아기를 살려야겠다는 어미 된 모성애가 수치와 굴욕을 감수하도록 했다. 우리 아기는 종철씨와 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사랑의 결실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살려내야 한다.
“아침부터 재수 없이 웬 거지야. 저리 썩 꺼져!”
느닷없이 집 안에서 날아 나오는 구정물벼락을 맞고 향란은 뒤로 벌렁 넘어졌다. 국수오리며 콩나물 같은 음식물찌꺼기들이 머리카락과 얼굴, 저고리 섶에 지저분하게 매달렸다. 놀란 아기가 또다시 바스러지는 소리를 지르며 울어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배가 고프고 탈진한 나머지 금방 울음을 그친다.
향란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러나 어린애가 맥이 진해 울음소리조차 가라앉는 걸 보고는 또다시 이를 악물고 땅바닥에서 기어 일어났다. 골목길을 따라 차례로 판잣집들을 돌며 젖을 동냥했다. 다행히도 어느 집 아줌마가 그녀를 측은히 여겨 아이에게 젖을 물리며 울먹거린다.
“우리 아기도 젖을 배불리 먹지 못하지만 댁이 더 안쓰럽군요. 어미가 뭐라도 먹어야 젖이 나올 텐데.”
여인은 꼬들꼬들 마른 보리밥까지 한 덩이 쥐어준다.
아기는 허기를 면하자 금방 잠이 들었다. 향란은 보리밥덩이를 씹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A대학으로 찾아 떠났다. 돈 한 푼 없는지라 전차도 버스도 탈 수 없어 그 먼 길을 두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갔다.
A대학에는 한종철이라는 재학생이 없었다. 그녀는 대학학생과에서 알려 준 G대학으로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한낮이 되면서부터 폭염이 쏟아지며 옷은 땀에 젖어 물자루가 되었다. 아기는 또 배가 고프다고 울기 시작했다. 길가의 어느 벤치에 앉아 젖을 물렸지만 벌써 3일간이나 굶은 산모에게서 젖이 나올 리 만무했다. 그녀는 아기를 등에 업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들아, 조금만 참어. 이제 아빠만 찾으면 엄마도 너도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거니까. 우리 아들 장하지.”
이렇게 중얼중얼 달래며 고개를 넘고 거리를 지났지만 목적지인 G대학은 어찌나 먼지 종시 나타나지 않았다. 어느덧 그녀마저 지치고 굶주려 자꾸만 현기증이 발작했다. 게다가 폭염까지 정수리에 쏟아져 이따금 정신이 핑 돌며 길가에 폴싹폴싹 주저앉곤 했다. 그러나 그렇게 정처 없이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어서 아기아빠를 찾아야 했다.
반나절이나 걸려서 찾아온 G대학에도 종철은 없었다. 누군가 R대학으로 가보라고 해서 그 곳까지 걸어갔으나 종철은 여전히 찾을 수 없었다.
그날 밤은 서울역대기실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잤다.
행인들에게서 동냥한 빵 몇 조각으로 주린 창자를 달래고 어느 맘씨 착한 아줌마 덕분에 젖동냥을 하여 아기도 배를 불릴 수 있었다.
이튿날도 그녀는 서울시내의 대학들과 전문학교는 다 찾아다녔다. 종철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중에 향란은 기진맥진하여 길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어느 건축현장 공사장이었는데 건설자재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향란은 주변에 방치되어 있는 굵은 콘크리트도관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벌써 며칠째 그녀는 빵 몇 조각과 보리밥 한 덩이를 먹었을 뿐 쫄쫄 굶은 데다 종철 씨를 찾아 서울바닥을 도보로 헤매느라 완전히 탈진해버렸다. 기아와 피로가 일시에 덮쳐들며 향란은 도관 안에 들어가기 바쁘게 반 혼수상태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녀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주위가 이상하게 조용했다. 그녀는 그제야 아기가 생각나 등에 손을 가져갔다. 아기는 있었다. 그러나 죽은 듯이 잠잠하다. 아기를 등에서 내려 보니 그 애는 혀를 빼문 채 실신상태에 빠져 있었다.
“아들아, 눈 떠봐. 눈 뜨고 엄말 보라고!”
대답이 없었다. 그냥 죽은 것처럼 목이 맥없이 흔들거린다.
내가 이렇게 서울바닥에서 헤매다가 애를 죽이고 마는 거 아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기를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맥이 풀렸던 그녀의 다리에 마지막 한 가닥의 기운을 주입했다. 향란은 아기를 업고 무작정 첫 눈에 띄는 병원을 찾아 달려 들어갔다.

향란은 할 수 없이 서울을 떠나 아버지가 늘 말씀하시던 고향 전남 남원군 산곡리 마을로 내려왔다. 종철 씨가 난세여서 복학을 포기하고 낙향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녀의 낙향을 결심하게 했다. 그리고 또 향란이 이제 종철을 찾아가볼 만한 곳은 고향뿐이었다.
말이 고향이지 만주 땅에서 나서 자란 향란이로서는 난생처음 와보는 고장이었다. 100여 세대가 넘는 꽤나 큰 시골동네였다. 지리산기슭에 자리 잡고 섬진강으로 흘러드는 지류를 수원으로 논농사를 지으며 살고들 있었다.
고장만 낯설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생소했다.
숙부님인 최복구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부친의 명함, 경력, 족보내용을 일일이 아뢰었지만 가다오다 굴러든 거지로 치부하고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문전박대한 채 들어오라는 허락조차 하지 않았다.
“압씨, 조카든 앙그든 집에 온 손님인디 암짝케나 밥이나 지어 묵이고 보보제라우. 솔차이 시장혀 보잉께.”
사촌 오라버니 되는 덕수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집 안으로 끌어들였다. 오라버니 덕분에 부엌에 나가 배를 불리고 잠도 잤지만 숙부의 의심은 조금도 가셔지지 않았다.
“고로코라도 쉿으먼 되었응께 고마 내 집서 떠나개게라.”
주인이 축객을 하는데 떠나는 수밖에. 그러나 그녀가 가면 어디로 간단 말인가. 더구나 홀몸도 아니고 아기까지 업고서 말이다. 종철 씨를 찾아 이역만리 국경을 넘고 38선을 건너왔는데 사람도 만나지 못하고 이렇게 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눈앞이 캄캄해졌다.
“오빠, 이 마을에 지주 한상권의 아들 한종수라고 혹시 없나요?”
“머락꼬? 한종수락꼬? 기런 사램이 있제라우. 지끔 지서장을 허고 있는디. 근디 그 사램언 머땜시 묻노?”
“사실 전 그 사람의 동생 한종철 씨를 찾아 왔어요. 얘는 그분의 핏줄이에요.”
“뭐락꼬? 그게 사실인고?”
“예. 실은 지주 아들을 찾아 여기까지 왔다면 숙부님께서 당장 쫓아내실까봐……”
“우야꼬? 진즉 말허덜 않았노? 니 역서 쪼깨 기다리고 있으라 잉.”
오라버니 덕수는 어디론가 급히 골목으로 사라져버렸다.
잠시 뒤 그가 데리고 나타난 사람은 한종수였다. 검은색 경찰관 제복을 입은 그는 예나 다름없이 위엄 있고 당당했다. 일본 놈이 망했는데 투쟁 맞을 대신 아직도 경관제복을 입고 거들먹거리다니. 향란은 그것이 이상하기까지 했다.
“아니 너 덕구 여동숭 향란이 아니냐?”
“네, 작은 나리님.”
“네가 우짜다가 역가장 온기냐?”
한종수는 향란의 느닷없는 출현에 경악했다.
“울 아베 엄닌 몬타 무사하시더냐?”
“예.”
“공산당 천하가 되었닥커던디?”
“제가 떠날 때가지는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랴. 다행이구나. 그라고 느가베와 덕구여석은?”
“무사해요.‘
“근디 등에 업힌 아는 누냐?”
“저…… 그게……”
“글매 서장님의 동숭매 아락카는 디유.”
덕수가 대답하기가 난감하여 머뭇거리는 향란을 대신하여 설명했다.
“뭐락꼬? 내 동숭매 종철의 아락꼬?”
한종수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번뜩했다. 그에게는 금시초문이었으니 놀랄 만도 했을 것이다.
“그 여석이 은지 향란이 너와……”
“실은 종철 씨를 찾아왔어요. 서울에도 없고 해서 낙향했나 싶어서요.”
“낙향얼했었디. 근디 미칠 머물들 않고 빠롯 상경했제라.”
“서울 어디 계신데요?”
“나도 몰라. 부모성지가 싫닥꼬 떠난 여석잉께 알고 쟆도 않구.”
종철의 종적은 끝내 알아내지 못했지만 한종수의 출현은 그녀가 분명 최복만의 친딸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어 숙부님의 의혹을 푸는 데는 결정적 도움이 되었다. 조카가 틀림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최복구도 더 이상 축객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어서 집 안으로 들어오십사 하고 반갑게 맞아들이지도 않았다. 말은 안 해도 식구가 둘씩이나 불어난다는 건 커다란 부담이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녀는 산곡리에서 아들을 데리고 살며 종철 씨가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경찰관복장을 한 한종수의 존재가 어딘가 불안하고 두렵긴 했지만 별로 적의는 없는 것 같아 우선은 한시름 놓았다. 한종수는 웬일인지는 모르나 덕구와의 원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숙부네 생활형편도 궁색하기를 말이 아니었다. 두간짜리 오막살이에서 다섯 식구가 살고 있었음으로 향란이까지 얹혀살기엔 너무나 비좁았다.
“걱정 말랑께. 오라버니헌티 존 수가 있응께.”
덕수가 친히 나서서 산기슭에 버려진 지 오래된 낡은 초가집을 며칠 동안 품을 들여 수리해 주었다. 무너진 지붕 위에 볏짚이엉을 얹고 허물어진 벽체를 다시 쌓아올리고 부엌을 손질하고 솥을 거니 새집이나 다름없었다. 거기다가 숙부네가 갈라준 식기 몇 개에 이불 한 채를 들여놓으니 사람이 얼마든지 살 수 있게 되었다. 오라버니 덕수는 땔나무, 집수리, 장작패기 등 남정네들이 해야 할 힘든 일, 궂은일을 자진하여 도와주었다. 그래서 향란은 오라버니 덕수를 친오빠처럼 믿고 따르게 되었다.
그러던 덕수는 어느 날 여수에 살고 있는 외갓집에 심부름을 갔다가 그냥 그곳에 주저앉아 금방 창설된 제 14연대에 입대하고 말았다.
그해를 무사히 넘기고 이듬해 여름이 되었지만 종철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 대신 전혀 뜻밖에도 한종수의 어머니가 두 딸과 막내아들을 데리고 만주 땅에서 38선을 넘어 월남해왔다. 그때 그들이 향란의 오라버니 덕구가 한종수의 아버지를 죽이고 그 아내까지 죽음에로 내몰았다는 놀라운 비보를 가지고 왔다는 걸 동네소문을 통해 들은 그녀는 한종수가 오라비에 대한 원한을 자신에게 복수할거라 생각하고 하루하루를 불안과 공포 속에 보냈다. 그러나 무슨 영문인지 그 번 역시 아무 일도 없이 무사하게 불행의 고비를 넘겼다. 게다가 아기도 별 탈 없이 잘 자라주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이 있다면 종철의 소식을 모른다는 사실 하나 뿐이었다.
1948년 봄철에 들어서면서 시국이 뒤숭숭해지기 시작했다. 민족분열을 조장한 이승만의 망국적 5.10단독선거를 반대하는 4.3 제주 무장봉기가 발생하더니 10월에는 여수 제 14연대 장병들이 제주 폭동 군에 대한 진압명령을 거부하고 무장폭동을 단행했다. 그러나 경찰과 국군병력을 동원하여 탄압하는 바람에 산으로 들어가 유격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4연대 근무 중이던 덕수도 봉기군에 참가하여 지리산빨치산이 되었다. 그리하여 향란의 숙부와 그녀는 하루아침에 빨치산가족, 공비가족, 빨갱이가족이 되고 말았다. 여수, 순천뿐만 아니라 「공비」가 출몰하는 지역들에서는 경찰과 토벌부대에 의한 빨갱이가족, 빨치산가족, 통비분자에 대한 피비린 색출과 처단이 공공연히 감행되고 있었다. 아직까지 덕수에 대한 정보를 입수 못한 건 아닐 텐데 마을의 운명을 틀어쥔 이장이나 지서장 한종수는 덕수네 가족이나 향란에 대해 아무런 내색도 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향란은 하루하루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냈다. 언제 봉변이 터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다 이 겨울에 접어들면서부터 산중에 먹을 것이 떨어지자 오라버니 덕수가 향란이네 집에 들르는 횟수가 빈번해지어 더구나 불안했다. 그래도 향란은 위험을 무릅쓰고 힘이 닿는 데까지 식량이나 소금 같은 걸 제공했다. 어려운 때 선뜻 나서서 도와준 그의 은혜를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녀 자신도 「공비」들을 동정하고 있었다. 이승만의 5.10 단독선거는 민족을 분열하는 망국선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종철 씨도 그녀와 같은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종수는 이 모든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빨치산가족인 숙부 네와 향란에 대해 이례적인 관용을 베풀고 있어 이상한 느낌마저 들었다. 어쩌면 더 잔인한, 더 치명적인 복수를 위한 명분이나 구실을 만드느라 인내성 있게 기회를 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서리 칠 때도 있었다.
진눈깨비가 푸슬푸슬 날리는 어느 날이었다.
국민 학교운동장에 모이라는 통지를 받고 향란은 마지못해 집을 나섰다. 멀리 지리산 정상인 노고단 위에는 벌써 적설이 하얗게 쌓여 있었다. 운동장으로 불려나온 백여 명의 주민들은 홑옷을 입은 채 우들우들 떨고 있었다. 난세라 세월도 뒤숭숭한데 겨울 추위까지 들이닥쳐 사람들은 우울하고 불안한 표정들이다.
나지막한 목조 단 위에 체구가 우람한 이장 한유학 노인이 개화장을 짚고 서서 추위와 공포에 떨고 있는 이민들의 수척한 모습을 측은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흰 두루마기 끈이 가슴까지 길게 드리운 수염과 더불어 차가운 겨울바람에 펄럭거렸다. 눈썹도 희고 머리카락도 희고 발에 신은 고무신까지 흰 노인의 모습은 흡사 산신령 같았다. 마을 유지요 연장자인, 70고개를 바라보는 한종수의 큰할아버지였다.
“이민 여러분.”
추위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 비통 때문인지 이장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 늙은이가 부덕하여 슬하에 일남일녀를 두었었는데 아들놈 역시 불효하여 아비 먼저 저승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늙은이가 손자마저 앞세우게 되었구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손자 여석 종구가 공비토벌에 나갔다가 주검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목이 메는지 잠시 말을 끊고 진눈깨비가 펄럭거리는, 시커멓게 흐린 하늘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여수반란군 제14연대를 진압하기 위해 토벌에 동원되어 갔던 이장의 손자는 남원에서 창설된 국군 제3연대 소속군인이었다. 그런데 14연대의 기습작전에 걸려든 토벌부대인 제3연대 병력 30명이 사망하고 송호성 반군토벌사령관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한유학의 손자도 봉변을 당했던 것이다.
지서장인 한종수는 검은 경찰제복을 입고 이장인 큰할아버지가 올라선 단 아래에 서서 군중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엔 언제나 부드러운 미소가 어려 있었다. 이민들 속에는 향란과 그녀의 숙부네 식구들과 종수의 어머니와 누이 그리고 고모네 식구들도 보였다. 덕수, 바로 향란의 4촌 오라버니가 입대한 여수 제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고 지금은 지리산에 잠복하여 공비활동을 하고 있다. 남원에서도 3연대가 창설되었는데 덕수는 하필이면 여수로 내려가서 좌파세력이 장악한 14연대에 입대했던 것이다. 어쩌면 6촌 동생 종구가 피살된 그 번 기습작전에 덕수가 가담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 그 가족들과 향란을 보는 마음이 분노로 꿈틀거렸다. 더구나 향란은 아버지를 살해하고 아내를 핍박하여 죽음으로 내몬 원흉인 덕구의 여동생이어서 눈에서 불꽃이 튕겼다. 그러나 그는 그런 내색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부드러운 웃음을 짓느라 애썼다. 사실 그녀가 혈혈단신으로 길가에서 아이까지 분만하면서 동생 종철을 찾아 수천리 길을 찾아온 용기에 탄복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종철이 녀석도 빨갱이물이 들어 부모형제마저 모른다고 가출한 놈이니 그의 안면을 봐 줄 필요도 없었다. 언젠가는 동생과의 관계도 분명하게 계선을 갈라야 할 것이다. 다만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고 기회가 있기 마련이다. 복수를 하더라도 남들 앞에서 당당한 명분을 얻은 다음 행하고 싶었다.
향란은 맨 뒤쪽에 고개를 숙이고 선 채 종철이와 오라버니 덕수를 생각했다.
“대한민국을 위해 죽은 그 애의 피를 헛되이 흐르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국군과 경찰은 반드시 저 잔인무도한 무장공비들을 일망타진 하고야 말 것입니다. 그놈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호하고 충성하며 대한민국을 분쇄하고 북한식의 토지개혁을 주장하는 빨갱이무리들입니다. 우리 국군병사들과 경찰관들과 사회단체장들과 유지인사들을 반동분자, 친일파, 민족반역자라는 억울한 죄명을 씌워 인민재판으로 학살하는 만행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순천경찰서장은 공비들에게 체포되어 마을을 끌려 다니다가 총살당한 뒤 불타죽었습니다. 경찰관들을 산 채로 모래구덩이에 파묻어 죽였는가 하면 살아남은 사람은 죽창으로 찔러 죽이는 만행을……”
이장은 갑자기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한번 중풍이 지나간 왼 볼이 세차게 경련하기 시작했다. 한종수는 무슨 불상사라도 생길까봐 말을 잇지 못하고 떨고 있는 할아버지를 단 위에서 부축하여 내리웠다. 청년단원들을 시켜 학교 안으로 모시도록 했다.
할아버지 대신 한종수가 단 위에 올라섰다. 운동장에는 남루하고 때오른 한복을 걸친 수척한 얼굴들이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향란은 그냥 고개를 떨어뜨린 채 초조하게 옷고름만 감았다 풀었다 했다. 어서 이곳을 떠나고 싶은 모양이다. 하긴 그는 벌써 그녀가 산중의 공비들과 내통하고 있다는 정보를 장악하고 있었다. 진작 그녀를 해할 수도 있었다. 어머니한테서 아버지와 아내가 그녀의 오빠인 덕구의 손에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격분하여 향란을 죽이려고 했었다. 그러나 큰할아버지가 막아 나섰다.
“동생을 봐서라도 참아라. 한씨의 피가 흐르는데 조카애를 봐서라도, 그 애가 네 아범을 죽인 건 아니잖냐. 더구나 그 애의 아비는 느가베를 구해주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느그 엄마와 누이들과 동생을 사경에서 구해 준 은인이 아니더냐. 절대로 무고한 사람을 해쳐서는 안 되느니라.”
그때 큰할아버지가 제지하지 않았더라면 향란은 진작 종수의 손에 귀신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빨치산가족이라는 그 하나의 죄명만으로도 향란은 죽어 마땅한 존재였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때 향란을 없애버리지 않은 게 오히려 잘된 일인 것 같다. 그녀를 미끼로 하여 더 큰 고기를 낚을 수 있고 그러면 그의 승진과 출세 길도 열릴 것이기 때문이다.
종수는 우선 회장의 긴장된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얼굴에 유들유들한 미소를 지었다. 될수록 부드럽고 완곡한 표현을 쓰려고 애썼다.
“이민 여러분, 우린 모두 산곡리에서 나서 자란 한 고향 사람입니다.”
그는 말을 하고는 속으로 웃었다. 산곡리는 그의 고향이라고 하지만 생소하고 낯선 땅이었다. 이곳에 와서 경찰관이 되고 아내 숙희까지 맞아들여 새살림을 차리고 산지가 4년째 된다곤 하지만 나서 자란 곳은 만주 땅이지 산곡리는 아니었다.
“제발 저더러 마을 어르신 여러분께 불민한 짓이나 불경을 저지르는 경찰관이 되지 않도록 협조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지금 대한민국 영토의 118개 군중 113개 군에서 공비무리가 창궐하게 날뛰고 있습니다. 경찰서와 지서를 습격하고 군인과 경찰관을 사살하고 무기를 약탈하고 지방 인사들을 반동분자로 몰아 죽이고…… 공비의 죄행은 한마디로 말할 수 없을 만큼 잔인무도합니다. 이 겨울에 들어서면서 공비들은 이른바 <월동투쟁>이라고 하여 주민들 속에 스며들어 굶주림과 추위를 이겨내려고 발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민 여러분은 경찰에 협조하여 공비들에게 한 알의 쌀이나 한 조박의 천도 제공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께서는 오늘부터 경찰을 도와 야간통행과 외출금지령을 준수해 주셔야겠습니다. 본관은 이민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민 여러분이 금지령을 어기어 경찰의 단속대상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물론 이 속에는 빨치산가족들도 있습니다.”
그의 눈길은 저도 모르게 멀리 뒤쪽에 서 있는 향란에게로 날아갔다. 향란은 그 말에 놀란 듯 흠칫 고개를 쳐들었다. 두 사람의 눈길이 허공에서 부딪치며 번쩍 불꽃을 튕겼다. 향란은 다급히 고개를 떨어트렸다.
종수의 눈길은 이번에는 향란의 숙부네 가족을 깐깐히 훑으며 지나갔다. 얼굴에는 웃음이 그냥 실린 채로였지만 그 눈길에는 특정된 사람들만 느낄 수 있는 매운 살기가 번뜩였다.
“빨치산가족이라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죽을죄에 해당하니 더 이상 산속의 빨갱이들을 도와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누구든 빨치산을 도와주는 사람에 대해서는 경찰에 고발해 주십시오. 후한 상금을 드리겠습니다.”
사실 빨치산은 호남, 지리산, 태백산, 영남, 제주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들을 진압하는데서 최우선과제는 빨치산과 주민들의 연계를 차단함으로써 식량내원을 끊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영동, 영남, 제주지방의 빨치산은 대체로 지방주민들과 혈연관계를 가지고 있어 사실상 관계를 단절시키기가 말처럼 쉽지 않았다.
오늘 군중집회는 빨치산의 『월동투쟁』에 대처한 상부의 『야간통행금지』와 『외출금지』 명령을 하달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장과 한종수의 훈시가 길어져 반나절이나 걸려서야 산회했다.
향란은 회의가 끝나기 바쁘게 집으로 돌아왔다. 아들은 그 때까지 쌔근쌔근 잠들어 있었다.
야간통행금지에다 외출금지령까지 내리다니?!
인젠 오라버니한테 식량을 어떻게 전하지? 오라버닌 또 우리 집에 어떻게 다니고? 숙부네 집은 바로 지서 앞에 위치하여 발각될 위험이 많았음으로 오라버니는 밤이 되면 마을 외곽에 사는 향란이네 집을 다녀가곤 했었다. 그런데 금지령이 내렸으니 나가기도 들어오기도 어렵게 되지 않았는가.
“괜히 산 속에서 고생하지 말고 경찰에 귀순하세요.”
때로는 남루한 옷을 입고 수염과 머리가 텁수룩한 채 뼈만 앙상한 오라버니를 보기가 하도 딱하여 슬며시 권고도 해보았지만 그의 확고한 신념을 꺾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이 땅에 노동자, 농민의 정권인 인민공화국을 세우고 조국통일을 이룩하는 그 날까장 절대로 손에서 총을 놓들 않을 꺼야. 그러자면 친일파, 민족반역자, 악질 경찰관 등을 철저히 소탕해야 한당께.”
어느 사이 전라도사투리는 거의 사라지고 그 자리엔 혁명술어들로 가득 차 있었다. 혁명은 사람을 하루아침에 딴 사람으로 변모시킬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덕수가 주장하는 사회는 종철 씨가 추구하던 이상사회이기도 했다. 아니 한때는 그녀도 종철 씨와 더불어 그런 사회가 오기를 열망했었다. 그런데 그런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위대한 꿈을 품고 만주 땅을 떠난 종철 씨는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다. 세월이 갈수록 그녀의 관심도 사회적인데서 아기를 기르는 평범한 모성애에로 기울고 있었다.
종수가 오늘 그녀에게 보내준 눈길은, 비록 얼굴에는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불길한 느낌을 주는 섬뜩한 것이었다. 강촌마을에는 한종수가 웃으면 꼭 무슨 일이 생긴다는 말까지 돌 정도였다. 겉으로는 교양 있고 예의바르고 사리에 밝은 모습을 보이려고 애쓰지만 실은 한종수는 내면적으로는 지독한 사람이란 걸 그녀는 어린시절부터 함께 지내온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겉으로는 타협하는 척 하면서도 실지로는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전에는 절대로 중도에서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사람이었다.
오라버니가 야간통행금지령이 내린 줄도 모르고 밤이 되어 우리 집에 내려오기라도 하면…… 빨치산과 연고가 있는 집들에 감시망을 배치할 가능성이 충분했다. 날씨는 추워지고 산중에는 열매 한 알 구할 길이 없는데 주민들한테서마저 곡물을 구할 수 없다면 그들은 필경 굶어 죽고 얼어 죽고 말 것이다. 보름 전엔가, 어둠을 이용하여 산을 내려왔을 때 오라버니께 보리쌀 두 되와 감자 몇 덩이를 주었을 뿐이었다. 그걸 가지고 보름동안을 살 수 있을는지? 혹시 부대가 다른 데로 이동했는지도 모른다.
날이 어두워지자 진눈깨비가 눈송이로 바뀌어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옷도 엷은데 얼마나 추울까?
향란은 마음이 안달아 나 더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자고 있는 아이를 등에 업고 일어났다. 쌀독을 뒤져 얼마 안 남은 보리쌀 몇 되와 감자를 보퉁이에 싸 머리에 이고 집을 나섰다. 하늘이 무너지게 쏟아지는 눈발 때문에 밤이라지만 그렇게 어둡지는 않았다. 어느새 적설은 발목까지 잠긴다. 동네는 공동묘지처럼 무거운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오늘 마을 이장인 한유학과 관할지서장인 한종수의 『야간통행금지령』과 『외출금지령』이 하달되었으니 누구도 감히 통비분자라는 죄명을 쓸까 두려워 밖에 얼씬하지 못할 게 분명하다.
그녀는 먼저 울바자 밖에 고개를 내밀고 바깥동정을 살폈다. 감시하는 사람이 없다고 판단한 그녀는 허물어진 울바자를 넘어 뒤란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허둥지둥 눈 내린 논바닥을 가로질러 집 뒤의 야산 쪽을 향해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누가 뒤쫓아 와 억센 손아귀로 뒷덜미를 잡을 것만 같은 공포감에 제 정신이 아니었다.
갑자기 나타난 논둑에 발이 걸려 눈 속에 폴싹 꼬꾸라졌다. 등에 업혀 자다가 놀라서 깨어난 아기가 앙- 하고 자지러진 울음보를 터트렸다. 당황한 김에 그녀는 손으로 아기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기는 숨이 막혀 기침을 콜록거렸다. 두터운 눈발이 병풍처럼 주위를 둘러싸고 시각도 청각도 죄다 차단시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질식하여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아기에게 젖을 물려 울음을 그치기를 기다려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자그마한 비탈을 넘어 어느 골짜기에 이르자 향란은 오라버니와 약속한 비밀연락장소인 너럭바위 밑에 식량을 감춰두고는 부랴부랴 야산을 넘어 집으로 달려왔다. 조급하게 서두르다가 몇 번이나 눈 위에 뒹굴었다. 다행히도 뒤를 밀행하는 자는 보이지 않았다.
집 안에 들어오자 향란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활 몰아쉬며 구들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나 향란은 누군가가 은밀한 곳에 숨어서 자신의 일 거수 일 투족을 낱낱이 감시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한종수였다. 그는 향란의 심중을 미리 예측하고 그녀를 미끼로 대어를 낚을 계책을 차근차근 진행해 나가고 있었다. 향란이 식량보퉁이를 비밀연락장소에 감춰두고 가는 걸 보자 한종수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라먼 그라지. 내 예상이 빗나가들 않았지라.”
그는 바위 밑에서 보퉁이를 꺼내어 동행한 순경에게 넘겨주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곳을 잘 지키고 있어. 늑대가 묵이를 찾아 꼭 나타날 팅께.”
주위에 순경들을 매복시켰다.
그러나 한종수의 기쁨은 너무 이른 것이었다. 기다리는 늑대는 그날 밤에도 이튿날 밤에도 연락지점에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종수의 왼쪽귀가 동상으로 물집이 생기고 상처에서 진물이 질질 흘러내렸을 뿐이다. 어느새 통금정보는 빨치산의 귀에도 흘러들어갔고 그 때문에 빨치산의 행동반경이 줄어들고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이었다. 그들은 종래의 모든 기존연락지점 사용을 포기했다.
그렇지만 한종수는 조금도 조급해하지 않았다. 연락장소에 대한 감시를 지속시키는 한편 향란의 집주위에도 매복을 시켰다.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인간인 이상 언젠가는 꼭 식량 구하러 마을에 나타날 것이라고 굳게 확신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덕수 놈을 생포하여 사촌형님의 핏값을 받아내야 한다. 덕수가 잡히고 그에 따라 공비와 내통한 향란의 죄가 드러난다면 그녀에 대한, 덕구에게서 받아내지 못한 핏 값도 받아 낼 수 있는 구실과 명분을 충분히 장악하게 될 것이다. 할아버지도 그 이상은 혈육을 이유로 복수를 막지 않으실 것이다. 물론 언젠가는 덕구란 놈도 직접 만나서 아버지와 아내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 종수는 그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주장도 『북진통일』이 아닌가.
그러던 어느 날 종수가 지서에서 당직을 서고 있는데 갑자기 이 순경이 숨이 턱에 닿아 헐떡거리며 달려왔다.
“지서장님, 어떤 남자 두 명이 시방 향란이네 집으로 들어갔는디유.”
“머락꼬? 틸림없이 느그 눈으로 보았간디?”
“예.”
“넌 지서를 꼼짝 말고 지키고 있그라이. 내가 나가 볼 팅께.”
한종수는 서둘러 총을 휴대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매운 독이 오른 겨울 추위가 기다렸다는 듯 그의 얼굴에 왈칵 매달려 살갗을 허볐다.
“그랴, 인젠 춥고 배고&#54553;께 한나 둘 마슬로 기어드는구나.”
한종수는 씨물씨물 웃으며 향란의 집을 향해 달려갔다. 도중에서 다른 집에 배치했던 순경들을 집결시켜 함께 대동했다. 그들은 무장공비인 만큼 각별히 조심해야 했다.
향란의 집에는 등불이 켜져 있었다. 부엌간에서 그릇 부딪치는 소리만 가늘게 들려올 뿐 방 안은 괴괴했다. 아마 추위에 얼고 굶주림에 기진맥진하여 향란이가 밥을 짓는 동안 따스한 구들에 누워 잠이 든 모양이다. 얼마나 탈진했으면 경계마저 소홀히 한 채 잠이 들었을까?
덕수 이놈, 넌 오늘밤 독 안에 든 쥐가 되었어!
종수는 얼굴에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이따금씩 향란은 밥을 짓다 말고 출입문을 열고 밖의 동정을 살피곤 했다. 아마 공비들은 향란을 믿고 동이 틀 때까지 한잠 푹 자고 날이 밝기 전에 마을을 빠져나갈 모양이다. 어쨌든 쥐도 새도 모르게 해치워야지. 섣불리 건드렸다간 그들이 선잠이라도 깨면 불가피하게 총격전이 벌어질 것이고 그러게 되면 쌍방에 인명피해가 생길 것이다.
순경들은 추위가 살 속까지 파고들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입김으로 손을 호호 녹였다. 안타까운 시간만 흘러갈 뿐 손 쓸 기회가 없었지만 한종수는 투덜대는 순경들을 독려하며 인내성 있게 기다렸다. 혹여 그 사이 저들이 식사하러 일어나기라도 하면 생포는 어려워질 수도 있음이다.
드디어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모양인지 굴뚝에서 파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잠시 뒤엔 출입문이 삐거덕 열리더니 향란이 조심조심 문 밖으로 나왔다. 구새 목의 장작더미로 다가가더니 문득 걸음을 멈췄다. 갑자기 몸을 돌이켜 삽짝문 쪽으로 걸어 나왔다. 아마 나왔던 김에 동네 쪽의 동정을 살피고 들어갈 모양이다. 바로 이때다. 이 절호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먼저 향란이부터 소리 없이 해치운 다음……
큰 항아리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한종수는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자신이 직접 향란에게 덮쳐들었다. 한 팔로는 그녀의 목을 덥석 껴안아 조이고 다른 손으로는 향란의 입을 틀어막았다.
“겁내들 마. 난 영자오라비 종숭께. 느그 사촌오랍씰 해치들 않을 팅께 내 말만 잘 들어!”
세차게 몸부림치며 비명을 지르던 향란은 6촌 오라버니를 해치지 않겠다는 말에 문득 저항을 멈추었다. 뒤미처 달려온 경찰들이 포승줄로 그녀의 두 팔을 결박하고 입에 수건을 물렸다.
“미안혀. 쬐깨 참으랑께.”
한종수는 태연하게 씽긋 웃기까지 했다.
향란은 수건이 입에 막혀 말은 못한 채 두 볼로 눈물만 흘렸다. 그녀의 얼굴에 관용을 비는 간절한 표정이 역력했다.
한종수는 순경들을 지휘하여 불의에 집 안으로 뛰어들었다. 몇 사람은 총을 겨누어 엄호하고 몇 사람은 벽에 세워 둔 총을 재빨리 거뒀다. 두 사람은 어찌나 피곤했던지 경찰이 기습한 줄도 모른 채 큰 대자로 너부러져 코를 드렁드렁 골고 있었다. 덕수는 귀와 발에 동상을 입었는지 붕대를 감고 있었다. 때오른 군복은 남루하고 찢겨져 있었고 머리카락은 마른 검불처럼 부스스 헝클어져 있었다. 얼굴은 살집이 빠져 뼈만 앙상하고 병색으로 누렇게 떠 있었다. 그들은 경찰들이 깔고 들어앉아 포승줄로 사지를 결박할 때에야 잠에서 깨어났으나 이미 때는 늦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사람은 생포되고 말았다.
“미안허당께. 잠얼 깨워서.”
한종수는 능글능글 농담까지 건넸으나 덕수는 대응사격 한번 못해보고 생포된 것이 너무나 억울하여 이를 부드득부드득 갈았다.
“내가 느그넘부텀 죽여비리들 못헌기 후회되는구나!”
떠들썩한 소리에 어린애가 잠에서 깨어나 울기 시작했다.
한종수는 그제야 향란의 결박을 풀고 입에 물린 수건을 뽑아주었다.
향란은 바스러질 듯 손발을 바동거리며 울고 있는 아들은 외면한 채 결박당한 채 방구석에 무릎을 꿇린 덕수에게로 달려갔다.
“오라버니 저 때문에 죄송해요. 영자오빠 아니, 지서장님, 한 번만 눈감아 줘요. 우리 오라버니를 살려줘요.”
향란은 한종수의 팔소매에 매달리며 간청했다.
“글매, 내사 한 고향 사램이라는 정분을 봐서락도 용서혀 주고 &#51142;으나…… 그건 전적으로 덕수가 허기에 달린거제. 묻는 대로 공비들이 있는 곳을 순순히 토설허면 생명언 건질 시 있을 빈더러 입신공명할 시도 있을 거구, 허허허.”
“허튼소리 치들 마! 찰코 죽으먼 죽었제 동지를 배반하든 않을 거다!”
덕수는 종수의 웃는 얼굴을 향해 퉤하고 침을 뱉었다.
“우약꼬 이라노? 도와주것닥카는 사램허구.”
한종수는 손수건을 꺼내어 얼굴에 튕긴 침방울을 닦으며 여전히 여유 있게 농담을 했다.
“난 느그넘의 그 위선적인 자비캉 너그러운 척 함시로 악독한 지꺼릴 다 허는 그 교활함이 더 눈꼴사납다. 껍닥지엔 웃음얼 보르고 소갈때기엔 칼얼 품언 표리부동헌 놈 같으니! 이 반동새끼야!”
덕수는 입 밖으로 침을 튕기며 마구 독설을 퍼부었다.
“내가 머땜시 반동이제? 난 나라를 위해 일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당당한 경찰관인디. 느그야말로 정부를 반대하는 반동들이지라. 국가럴 전복할락꼬 반란얼 일으킨 무장공빙께 말이제.”
“우리는 조국을 분열하는 5.10단독선거에 의해 조작된 대한민국정부럴 승인하들 않는다. 우린느 오직 노동자, 농민, 병사와 학생들이 주인이 된 공화국을 인정할 뿐이다. 공화국을 반대하는 모든 친일파, 경찰관, 민족반역자들은 반드시 인민의 이름으로 처단될 것이다.”
“하하하…… 이젠 죽을 날만 아케 두고도 빨갱이 악 선동을 하다니. 덕수 너 그 기개만은 인정해 줄 만 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길코 공비의 손에 무너지들 않을 거야!”
“그래도 먼저 죽은 건 내가 앙그라 느그 사촌성 종구가 아니더냐.”
“종구는 죽었지만 나도 있고 또 종민 성도 국군서 공비토벌에 참여하고 있응께 어쩔 테지?”
“오라버니, 제발 경찰이 시키는 대로 복종하세요. 사람은 똥 무지 위에 뒹굴어도 살아야 한다잖아요. 살고 봐야 뭘 하든 할 거 아니에요.”
향란은 결정권을 손에 거머쥔 종수에게 반발해 보았자 점점 더 덕수에게만 불리할 거라 생각하고 덕수의 거신 반발을 제지시켰다.
“개맹키로 살 바엔 찰코 당당허기 죽는 기 낫지라.”
덕수는 한사코 굽어들지 않았다.
“지서장님, 한 고향사람이라는 정분을 봐서라도, 제 면목을 봐서라도 한 번만 용서하여 주세요. 제발!”
향란은 설득방향을 바꿔 종수에게로 다시 돌아서 간청하기 시작했다.
“글매, 기건 느그오랍씨헌티 달렸당께 그라이. 내가 헐 시 있는 일언 제악뱁이나 묵을 시 있도록 주는 것 뿐인디. 지서에 가먼 동상에 존 약도 있응께 볼라 줄 거구.”
향란은 울면서 밥상을 차려 올려왔다.
덕수와 다른 한 대원은 쌀밥을 보자 만사를 잊은 듯 밥상에 마주앉았으나 팔이 결박되어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즈그들의 결박얼 풀어주거라.”
한종수의 명령에 둘러섰던 순경들이 망설였다.
“손에 총얼 들고도 머시 두려운 거냐. 어여 풀어주랑께.”
두 사람은 결박을 풀어주기 바쁘게 밥을 먹어대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두 그릇씩 먹고도 배가 차지 않는 표정이다.
그제야 향란은 울다가 지쳐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아기를 등에 업었다.
“자, 인젠 잠도 자고 배도 불렀응께 떠나야제. 안 됐디만 만일의 경우럴 생각혀서 결박은 해사겠군.”
종수가 눈짓을 하자 뒤에서 지키고 있던 두 순경이 잽싸게 그들을 결박 지워 밖으로 떠밀고 나갔다.
“제발 우리 오라버니 목숨만 살려줘요. 죽이진 말아줘요.”
향란이 맨발바람으로 허겁지겁 뒤따라 나오며 애걸복걸했다.
한종수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느그오랍씨 덕구가 울 아베와 여편네를 죽인 건 향란이 너도 잊든 않았을 거여. 길티만 느가베 최 서방이 울 엄니와 누동숭을 구해주었응께 우얄꼬. 그 은혜럴 모른닥꼬 할 시 있겠어. 긍께 기런 용서는 함번으로 족헌 거여. 여수나 달본 곳에서는 폴쌔 공비가족얼 처단해비린 지가 오래여라. 향란이 느그넨 공비가족이라는 사실 하나 만 각꼬도 처단될 시 있는 사램이지라. 공비들을 집따 재우고 묵이고 양식얼 제공하는 통비분자락카는 죄명까장 생기게 되었응께 쌍긋 봐줄락꼬 혀도 에렙게 되었어. 개인적으로는 이라고 &#51142;들 않다만 공무집행인만큼 암래도 너 역시 나와 항께 경찰서엘 댕겨와야겄다.”
한종수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순경 한 사람이 총부리를 향란의 등 뒤에 들이대며 대문 밖으로 떠밀었다……
이른 아침에 이장인 한유학이 지서로 찾아왔다. 노인의 눈썹과 턱수염에 성에가 하얗게 불려 있었다.
“할아버지, 먼 일로다 이른 아적에 경찰서로 찾아오신 겁니까? 일이 있으먼 부르실 거지요.”
종수는 급히 일어나 큰할아버지를 맞아들여 상좌에 모셨다.
“너한테 청을 하나 들게 있어서 왔다만 할아버지 부탁을 들어 주겠냐?”
“할아버지, 손자를 불효 막심헌 넘으로 소문내들 마시고 분부만 내리이다. 할아버지의 분부시라면 이 손자가 감시 어찌 거역하겠습니까.”
“그래, 그렇다면 좋다. 할아비가 말하마. 너 오늘 새벽에 최 서방 조카딸 향란이를 잡아들였다면서?”
“예. 할아버지께서 어떻게 그 일을……”
“그 앨 풀어 주거라.”
“예? 향란일 풀어주락꼬예? 그 가이난 지리산 무장공비와 내통헌 통비분자이옵구 공비가족입니다. 덕수넘이랑 집따 재우고 밥을 묵이고 식량얼 공급해 주었는디 어찌……”
“너 늙은 할아비의 청두 들어주지 않을 거냐?”
“그런기 앙그라…… 이건 공무인 만큼…… 지는 경찰관인디……”
“경찰관도 사람이니라. 할아비 얼굴을 봐서 한 번만 용서해 주거라. 그 앤 최 서방 댁 조카이기도 하지만 한씨의 피를 이어받은 혈육을 낳은 한씨가문의 며느리요 식구이기도 하니라. 그렇다면 넌 이 할아비도 그 애의 시할아비가 된다는 죄로 공비가족이라는 죄명을 뒤집어 씌울 테냐…… 그럼 어디 할아비까지 잡아넣어라.”
“천만에요. 할아버지, 알겠습니다. 당장 향란일 풀어주겠응께 걱정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이다.”
“안 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야 떠날 거다.”
노인은 아예 두 눈을 스르르 감아버렸다.
한종수는 별다른 수가 없었다. 사실 그가 얻기 힘든 지서장자리에 앉게 된 것도 이 지방에서 유명한 유지인사인 할아버지의 명성덕분이기도 했다. 남원군수도 할아버지의 말씀에는 감히 토를 달지 못했다.
뜻하지 않게 경찰서에서 풀려나온 향란은 그것이 종수 큰할아버지인 한유학 이장의 덕분이란 걸 알고 노인에게 허리 굽혀 인사를 드렸다.
“고마워요 이장님,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고맙다는 인사는 네 아들에게 해라. 그 애가 널 구해주었으니까. 아무튼 우리 한씨의 피붙이나 잘 길러 주렴아. 할아빈 그것으로 만족이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장님, 우리 사촌오라버니도 구해주세요. 제발 부탁드려요.”
“이 늙은이가 힘이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한다. 그 녀석은 공비이니 당연히 처단되어야지.”
한종수는 경찰서문을 나가는 향란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또 한 번 죽음의 문턱을 피해가는 그녀, 참으로 운수가 좋다싶었다. 그러나 너나 너 오라비 덕구가 죽을 날이 그리 오라지는 않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종철이놈의 피붙이 때문에 널 구해주었지만 그 애가 언제까지고 널 지켜주지는 못할 것이다.
이튿날 무장공비인 덕수는 주검이 되어 동네 밖의 개울바닥에 버려진 채 마을주민에게 발견되었다. 개들이 모여들어 살을 뜯어먹어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참혹했다. 그러나 가족들은 죄가 연루되어 피해를 당할까봐 감히 시신을 거두어 묻지도 못한 채 집 안에서 소리 없이 울기만 했다.
이장 한유학이 동네 노인들을 동원하여 시신을 거두어 야산에 묻었다.
향란은 남이 다 잠든 깊은 밤에 몰래 오라버니의 무덤을 찾아 영전에 술을 따르고 제를 지냈다.
무덤에 엎드려 목소리를 죽인 채 속으로 슬피 울었다.


다음 회 예고: 제2부 불타는 반도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