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지난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조선족 7만여 명이 '아메리칸드림'을 품고 미국에 진출했는데 다수는 불법입국 했다. 그들은 한인들이 모여 사는 뉴욕, 로스안젤레스의 네일숍, 지압가게, 식당 등에서 일한다. 그들의 가족은 중국 동북이나 연해, 내륙의 대도시 그리고 한국과 일본에 흩어져 산다. 그들은 지구적 차원의 이산집단이다.

미국연방정부 국토안보부 소속 국경수비대는 권총 또는 소총으로 무장했다. 녹색 또는 검은색의 방탄조끼를 입고 미국, 메히꼬 국경일대를 이 잡듯 뒤진다. 밀입국자는 그들의 총탄을 유의해야 한다. 메히꼬의회 보고서를 보면 1994년—2007년 사이에 적어도 4500명의 메히꼬인이 밀입국도중 숨졌다.

한국여권을 들고 미국에 도착한 뒤에야 김연희(가명, 50살)씨는 자신의 행운을 절감했다. 살벌한 미국국경수비대와 맞닥뜨리지 않은 것은 여러 행운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어느 조선족은 1년 넘도록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다. 위조여권으로 '허술한 국가'를 여러 차례 거치느라 아프리카대륙의 가나까지 다녀왔다. 국경지대 사막을 걷다 낙오된 조선족도 있다. 근처를 지나던 다른 조선족밀입국 일행이 있어 구사일생했다. 조선족여성들은 브로커에게 수천만 원을 주고 위조여권으로 천신만고 끝에 미국에 들어와 대부분 네일숍에서 일한다.

험난한 “메히꼬 루트”에 조선족이 등장한 것은 1990년대 말이다. 그 길을 따라 미국에 밀입국하는 조선족 수는 2000년대 중반 정점을 이뤘다. 이는 한국정부의 불법체류자 단속 시기와 맞물린다. 1992년 한, 중 수교 이후 '산업연수생'자격으로 한국에 들어오는 조선족이 급증했다. 2년 기한을 넘겨 장기체류하는 조선족도 늘어났다. 1990년대 말부터 한국정부는 불법체류자 단속의 강도를 높였다. 수백만 원의 브로커 비용을 치르고 한국행 비자를 받은 조선족에게 강제추방은 개인의 파산을 넘어 가족의 절멸을 뜻했다. 조선족은 대안을 찾았다.

그 대안이 모든 조선족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행을 위해 브로커에게 건네는 비용은 한때 4만 달러까지 치솟았다. 중국 동북지역에서 농사짓던 조선족에게 그것은 상상너머의 돈이었다. 중국에서 곧바로 미국행을 택할 경우, 그 비용은 대부분 빚으로 충당됐다. 불법체류 단속을 피하려는 조선족들은 몇 년 동안 억척같이 일해 모은 돈을 미국행에 걸었다. 한국행이 투자라면 미국행은 도박이었다.

모진 마음먹고 2003년 미국에 건너온 김씨도 한국에서 돈을 벌었다. 김씨는 중국 길림성 연변에서 생활하다 남편이 몸져눕자 돈 벌러 한국에 왔다. 1998년부터 5년 동안 식당에서 일했다. 고향에 두고 온 아들은 김씨가 한국에서 번 돈에 중국에서 빌린 돈을 합쳐 미국행을 주선할 브로커를 만났다.

지난 7년여 동안 김씨는 미국 뉴욕의 한인 또는 조선족 식당에서 일했다. 월 3000달러를 번다. 한국의 식당에서 일했던 1990년대 말에는 월 90만원을 받았다. 함께 일했던 조선족친구들과 가끔 연락하는데 "요즘은 월 160만원까지 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도 미국에 비할 바는 아니다. 소득의 3분의 2는 중국의 가족에게 보낸다. 한국, 미국 생활을 더해 12년 이상 떨어져 지낸 가족이다. 속을 새까맣게 태우며 생리별을 감내하여 키운 아들은 이제 20대 중반이다. 별탈없이 자랐으니 김씨의 도박은 성공한 셈이다.

그 가능성을 보고 7만여 명의 조선족이 미국에 머물고 있다. “미국의 가리봉동”은 뉴욕 플러싱이다. 조선족 5만여 명이 미국 동부의 뉴욕, 뉴저지 등에 밀집해있다. 그중에서도 코리아타운, 차이나타운이 공존하는 플러싱에 조선족은 터를 잡았다. 그들은 주로 네일숍에서 일한다. 조선족남성도 손톱 다듬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망명신청을 하려면 돈이 너무 많이 들어 7만여 명중 대부분이 불법체류를 불사한 채 자식들 뒷바라지를 한다.

미국조선족은 미국 한인경제권에 종속돼있다. 네일숍은 재미한인들이 개척한 업종이다. 뉴욕한인네일협회에 따르면 뉴욕주에만 3500여개의 네일숍이 있다. 종사자는 3만여 명이다. 여기서 일하려는 한인청년은 드물다. 뉴욕 일대에 거주하는 5만여명의 조선족은 한인 네일숍 사장이 가장 선호하는 노동자다. 말이 통할 뿐만 아니라 섬세한 손재주까지 갖췄다. 아침이 되면 플러싱 골목마다 네일숍들이 운영하는 작은 셔틀버스가 다닌다. 조선족노동자들은 버스를 타고 뉴욕 맨해튼까지 나가 일한다.

제니퍼(가명, 54살)의 오른손은 10년째 매니큐어솔을 잡고있다. 미국 뉴욕의 네일가게엔 그를 찾는 손님이 많다. 미국인, 한국인, 중국인을 맞으며 영어, 한국어, 중국어를 바꿔 쓴다. 영어에 서툴지만 큰 지장은 없다. “무슨 색을 칠할까요? 마사지를 원하나요?” 의문 몇 개면 충분하다. 그의 미국이름은 한인사장이 붙여줬다. 한국과 중국에서 통하는 한자이름이 있지만 이제 제니퍼는 제니퍼로 불리는 게 더 편하다.

중국 길림성 연변 출신인 제니퍼는 2001년 미국에 왔다. 지난 10년 동안 미국에서 불법체류를 하며 두 딸을 키웠다. 큰딸은 캐나다에서 유학해 중국인과 결혼했다. 둘째는 일본유학을 마치고 중국 북경의 어느 대학에 들어갔다. “제가 여기서 밑바닥생활을 했으니까 가능한 일이였죠. 이젠 더 고생하기 싫은데….”하고 손님 손톱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제니퍼가 말했다.

한국 서울 가리봉동처럼 미국 뉴욕 플러싱에도 '성공한 조선족'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 돈을 모은 조선족이 직접 가게를 운영하는 것이다. 플러싱에만 해도 조선족식당이 10여 곳 있다. 한인상권이 허물어지고 있는 틈을 파고든 이들이다.

재미한인들은 뉴욕에서 어렵게 상권을 형성했지만 그들의 자녀는 높은 학력을 바탕으로 전문직에 진출하고 있다. 한인상권의 “세대 전승”이 단절된 것이다. 미국조선족에겐 기회이자 위기이다.

조선족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김일(49살)씨는 “한인가게가 줄면서 코리아타운이 변방으로 밀려나고 대신 차이나타운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조선족식당의 손님조차 3분의 1이 중국인이다. 한국어, 중국어를 동시에 구사하는 조선족으로선 급증하는 중국인이 싫지 않다.

뉴욕에서 숙박업을 하는 김정인(가명, 41살)씨는 최근 한국에서 “가족모임”을 열었다. 중국 길림성 연길에 사는 어머니, 한국에 시집간 누나를 만났다. 혈육은 몇 년 만에 얼굴을 맞댔으나 많은 대화를 나누진 못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김씨는 자신이 없다. 미국에서 만난 조선족들은 “돈을 더 벌어 고향에 큰집을 짓고 뿔뿔이 흩어진 식구들이 다시 모여 함께 사는 꿈"을 종종 말했다. (연변일보)

[저작권자(c) 평화와 희망을 만들어가는 동북아신문(www.dbanews.com), 무단복제-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