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불타는 반도

장혜영

4장 뜨거운 여름

1

밤새 부슬부슬 내리던 빗줄기가 새벽부터는 더욱 굵어지기 시작하더니 3시쯤 되자 조금 수그러들며 가랑비로 변했다. 인민군 655군부대 두 개 연대와 206기계화보병연대가 매복한 개성 정면의 송악산 일대는 새벽어둠 속에 묻힌 채 괴괴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나무숲을 때리는 빗줄기소리만 간단없이 들릴 뿐이었다. 만여 명의 군인들과 백여 문에 달하는 야전포를 소유한 군단 포병연대는 기계화 부대의 중화기들과 함께 쥐도 새도 모르게 38선 연선의 계곡과 능선에 매복하여 있었다.
6분 전 4시였다. 능선 아래 숲이 우거진 계곡에서는 뽀얀 물안개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빗물은 엷은 군복을 적시고 속살로 스며들어 줄줄 흘러내렸다. 이제는 여름인데도 비가 내리는 새벽날씨는 이가 덜덜 맞쪼이도록 추웠다. 참호 속은 빗물이 괴어올라 정강이까지 잠겨 바짓가랑이가 후줄근하게 젖었고 발을 움직일 때마다 물소리가 철렁거렸다. 졸음이 몰려들었다. 천근 무게를 가진 듯 자꾸만 아래로 내리 덮이는 눈꺼풀을 가까스로 치켜 올렸다.
덕구네 중대원들은 너나없이 팔짱을 낀 채 추위에 우들우들 떨고 있었다. 군모와 군복 상의 앞가슴에 풀 가지를 꽂아 위장을 한 그들은 어둠 속에서 사람이 아니라 무슨 풀 덩굴이 꿈틀꿈틀 움직이는 것만 같아 보였다. 추위와 피곤을 잊어보려고 어떤 전사들은 머리를 맞대고 뭐라고 수군거리고는 키들키들 웃어대기도 했다.
“그 에미나이래 젖통암부라 꼭 박떼이만큼 했시오. 기레니께니 이거이 낏낏하게 일어나스리 참을 시가 있어야디요.”
“한 소나구가 넘어 나까시오?”
“기러티요. 그 밑의 사타구니 것도 풀이래 무성헌디 거기다 말뚝 같은 이넘을 쑤욱- 밀어넣어슬라무네. 키익키익……”
“죽는다구 아부재길 텼가슴메?”
여기저기서 키들키들 웃어댔다. 이렇게 상황이 긴박한 순간일수록 병사들은 걸쭉한 육담을 늘어놓기가 일수였다. 그것은 어쩌면 죽음의 공포에서 도피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인지도 모른다. 덕구도 전에는 그랬었다.
“거기서 뭣들 하는 거야? 잡담들 그만 두라우. 여기래 동무들의 안방인 줄 알아. 빌어먹을!”
덕구 중대장은 나직하나 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그러자 병사들은 흠칫 놀라며 각기 흩어져 자기 위치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공격시간이 박두할수록 덕구 중대장은 흥분했다. 이제 몇 분만 지나면 38선을 넘어 남조선을 해방할 것이다. 그러면 죽음을 피해 도망친 한종수를 만나 복수할 수 있을 것이며 월남한 여동생 향란이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는 일분일초가 조급해졌다. 졸음도 말끔히 가셨고 추위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어깨에 걸친 따발총(자동총)을 품속에 으스러지게 그러안았다. 비를 맞은 쇠붙이는 차가웠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 총신은 적을 향해 불을 토하며 벌겋게 달아오를 것이다.
어쩌면 한종수란 놈도 국군에 입대하여 이 38선 너머의 어느 최전방부대에 배속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나 그놈을 전쟁터에서 만났으면 좋으련만…… 고향으로 내려갔을 지도 모른다. 그곳에 가서 또 지주행세나 순사행세를 하면서 불쌍한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으며 온갖 잔인한 짓을 다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드디어 시커멓게 흐린 밤하늘로 세 발의 푸른 신호탄이 화광을 빛내며 포물선을 그었다. 그러자 갑자기 대기하고 있던 군단포와 사단포가 일제히 포문을 열며 천지를 진동하는 포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삽시에 38선 이남 땅은 화광이 충천하며 불바다로 돌변했다.
“야, 장관인데! 하늘땅이 통째로 뒤흔들리네.”
언제 옆에 다가왔는지 중대 세포위원장이 그의 어깨를 툭 치며 경탄을 연발했다.
정말 그랬다. 수천, 수만 개의 불줄기가 비 내리는 밤하늘에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남쪽 땅으로 날아가는 모습은 공포나 두려움보다는 황홀한 불꽃축제를 연상케 했다. 포탄이 폭발하며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화광 역시 장관이다. 다만 그것이 사람을 죽이는 무서운 살상무기라는 인상을 주는 건 들썩거리는 송악산과 진동에 육신까지 푸르르 떨리게 하는, 천지를 진감하는 육중한 땅울림과 귀청을 먹먹하게 하는 굉음 그리고 하늘로 치솟는 불기둥과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화염이었다. 그러한 대규모의 밀집포격, 융단포격의 위력 앞에서는 군대가 아니라 개미 한 마리도 살아남을 것 같지가 않았다. 저기 어디 물이 가득 차오른 참호 속에 쭈그리고 있던 한종수도 이 갑작스런 불벼락을 맞고 진작 콩가루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편으론 기쁘고 한편으론 아쉬웠다. 내 손으로 직접 처단해야 하는데.
집단군의 맹포격은 38선 전역에 걸쳐 무려 30분간이나 계속되었다.
4시 30분.
드디어 하늘 공중에 총공격을 알리는 두 번째 신호탄이 올라갔다. 최덕구 중대장은 고대하던 순간이 왔다는 흥분으로 저도 모르게 목청껏 외쳤다.
“동무들, 돌격 앞으로!”
참호를 뛰쳐나가다가 비에 젖은 흙을 딛고 뒤로 벌렁 넘어졌다. 너무 미끄러웠다. 다시 기어 일어나 비탈을 내리달리기 시작했다. 계곡과 비탈도 나타났고 밭과 논과 한길들도 나타났다. 어디에나 빗물이 고여 물 천지어서 덕구의 군복은 삽시에 흙탕물투성이가 되어버렸다. 얼굴에서 빗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손으로 눈을 가리고 빗물을 연신 훔쳐내야 했다. 첨벙첨벙 빗물을 밟으며 남쪽으로만 달렸다. 주위는 어둠뿐이고 빗줄기와 첨벙거리는 물소리뿐이었다.
어디선가 탱크 몇 대가 불쑥 나타났고 덕구와 중대원들은 그 탱크 뒤를 따라 달렸다. 어둠 속 어딘가에서 따쿵, 따쿵 하는 산발적이고 무질서하고 눈먼 대응사격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는 듯 했으나 탱크의 포사격과 중대원들의 따발총사격에 금시 입을 다물고 잠잠해졌다.
전쟁이라는 것이 그저 어둠 속을 달리는 간단없는 동작일까? 왜 적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가? 왜 대응사격 몇 발 뿐 저항이 없는가? 종수란 놈은 어디 숨어 있을까?
개성에 거의 이르는 지점의 어느 산기슭에서 국방군 시체 몇 구를 발견했는데 논두렁과 숲 사이에 너부러져 있었다. 철모는 어디론가 벗겨져 달아났고 이마에 관통상을 입은 채 얼굴을 두렁 아래의 논바닥 물에 처박고 있었다. 아직도 피가 흘러내리며 빗물에 씻겨 논바닥에 고인 물을 벌겋게 물들이고 있었다.
최덕구 중대장은 발길로 군인의 어깨를 툭 찼다. 그리고는 쪼그리고 앉아 시신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중대장 동무. 죽은 사람의 얼굴을 왜 그렇게 뚫어지게 들여다보시오?”
장 문화부중대장이 다가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덕구 중대장은 그제야 흠칫 놀라며 일어섰다. 혹시 한종수가 아닐까 싶어 들여다보았으나 전혀 낯선 얼굴이었다. 죽은 군인의 이마상처에는 거머리 몇 마리가 달라붙어 있어 보기조차 징그러웠다.
도로변이나 길가, 논두렁이나 산기슭 여기저기에 국군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다. 최덕구 중대장은 일일이 얼굴을 확인한 다음 무기와 탄약을 회수했다. 그렇게 쉽게, 전쟁의 첫날에 한종수를 만나리라고 생각한 건 어리석은 짓을 수도 있다고 스스로도 생각했지만 집념을 포기할 수 없었다. 어쩌면 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그를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는 중부전선이나 동부전선에 있을 수도 있다. 또 아예 국군에 입대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덕구 중대장은 전쟁이 끝나는 그날까지 한종수를 확인하는 행동을 포기하지 못할 거라는 걸 스스로 알고 있었다.
중대가 개성까지 이르는 동안 적의 어떠한 저항도 없었다. 전투 같은 건 더구나 없었다. 총 몇 발을 발사했던 것이 전투원으로서 행했던 군사행동의 전부였다. 그냥 부슬부슬 내리는 빗줄기 속에서 첨벙거리며 개성까지 걸어 내려왔을 뿐이었다.
개성시내에 돌입하면서 길가의 폐허 안에 숨어 있던 국군 몇 명을 생포했다. 모두들 계급장을 뜯어버렸거나 군복을 벗어던지고 민복차림을 하고 도망치던 패잔병들이었다. 비에 젖어 후줄근하고 초라한 그들에게서는 전혀 군인의 몰골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우리 인민군이 너희들 따위 오합지졸과 싸우다니. 더럽다!”
덕구 중대장은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한 포로의 엉덩이를 군화발로 내지르며 투덜거렸다. 찾아 헤매는 한종수는 없고 너절한 패잔병만 만나게 되어 공연히 화가 치밀었던 것이다.
최덕구 중대는 사단을 따라 인천, 영등포, 안산을 해방하고 서해안을 따라 충남 서부지구와 호남평야를 무인지경으로 휩쓸었다. 이리와 군산, 전주, 광주를 거쳐 목포를 해방하고 순천에서 합류하여 다시 하동, 진주로 진격했다. 여기까지 부대는 큰 손실 없이 일사천리로 진격해 내려왔다. 그동안 포로들을 잡을 때마다 덕구는 그들의 얼굴을 일일이 확인했지만 찾고 있는 종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진주에서부터는 미군과의 접전이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덕구는 7월 25일, 쏟아지는 무더위 아래 땀을 뻘뻘 흘리며 하동방향으로 진군하는 부대를 따라 강행군했다. 이제 부산까지는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하동, 진주, 마산, 창원, 김해 다음이 부산이다. 승리는 바야흐로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다. 패전을 모르고 오로지 승전만을 해온 전사들의 사기 또한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천하무적이라고 자랑하던 미군도 대전전투에서 미 제24단이 패전하여 그 콧대가 꺾어지면서 더 이상 인민군의 진격을 가로막는 위협이나 두려움으로 되지는 못했다. 다만 고향인, 비록 한 번도 가보진 못했지만 아버지한테서 귀가 터지도록 들었고 또 군사지도에서 수백 번이나 확인한 전라도 남원군을 자기 손으로 해방시키지 못한 아쉬움은 있었다. 그쪽은 좌익부대인 인민군 4사단 진격 노선에 속했고 6사단에 배속된 덕구네 중대는 서쪽 해안으로 우회했다. 그러나 남원을 방어하던 한국군 패잔병 부대가 진지를 포기하고 철수하여 평화롭게 해방되었다는 첩보를 접하고는 기쁨을 금할 수 없었다. 그곳에는 한종수, 한종철, 한종학 3형제와 그들 친척들이 있을 것이며 여동생 향란이와 덕구네 친척인 숙부네 식구들도 있을 것이다. 전쟁이 터지자 도망을 갔으면 몰라도 그대로 주저앉아 있다면 언젠가는 만나게 될 것이다. 지금쯤은 그곳에도 인민정권이 들어서고 공화국의 정책이 실시될 것이니 더 이상 향란이나 숙부네 식구들에게 한종수네의 박해가 돌아갈 염려는 없었다.
이놈아, 조금만 더 기다려라. 내가 가서 친히 내 손으로 네놈을 처단할 터이니. 만일 그 곳에 없고 다른 데에 있다고 하더라도 남반부가 전부 해방된 다음엔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을 터이니 네놈의 운명은 인젠 꼼짝없이 내 손에 맡겨지게 되었어.
처음엔 지주 한상권을 은파강에 떠밀어 넣어 익사시키고는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그날 밤으로 마을을 떠나 줄행랑을 놓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뒤로 중국과 북조선에서 진행된 지주와 반동분자들을 처단하는 혁명운동을 체험하면서 그 죄책감은 점차 가셔졌다. 한상권을 죽인 건 그 무슨 살인이나 범죄가 아니라 당연한 처단이며 혁명적 행동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한종수가 덕구 형님이 공산당을 도와주었다고 고문을 하여 죽인 친일경찰의 반동행위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덕구나 한종수는 공산당까지 살해한 친일주구임으로 당연히 인민의 준엄한 심판을 받아야 한다.
날씨가 어찌나 무더운지 온몸이 땀에 젖어 물자루가 되고 목에서 겻불내가 났다. 1만여 명의 6사단 정예 병력과 소련제 탱크, 자주포, 야전포를 보유한 강대한 기갑부대가 순천, 하동간의 도로를 따라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행군 길에는 군용트럭들과 마차들이 굴러가는 웅글진 소리와 먼지가 꽉 찼지만 덕구의 얼굴에는 웃음이 넘실거렸다.
진주성 공격전에서 최덕구의 중대는 선두공격임무를 자진하여 맡았다.
최덕구는 연대의 선두에서 야음과 폭우를 이용하여 미군방어진지를 행해 과감한 정면공격을 개시했다. 앞에는 탱크 몇 대가 진흙탕 물을 튕기며 내달렸고 중대는 그 뒤를 따라 교외의 불바다, 물바다가 된 논벌과 논두렁을 가로질러 앞으로 돌진했다. 성 안에서 수백, 수천 개의 불줄기가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돌격하는 부대 쪽으로 날아왔다. 이따금 눈먼 총알이 귓전을 스치는 날카로운 금속음이 따갑게 들려왔다.
덕구도 따발총을 들고 적진지 쪽을 향해 맹사격을 퍼부었다. 벌겋게 달아 오른 총신이 가슴에서 푸들푸들 뛰놀며 쏟아지는 빗물에 찌르륵, 찌르륵 김을 무럭무럭 뿜어 올렸다. 사선과 포물선을 그으며 반공중을 날아다니는, 그처럼 수많은 적탄 속에서도 덕구는 신기하게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달릴 수 있었다. 물이 들어찬 논바닥에서 무슨 재주넘기를 하듯 비틀거리다가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는 전사도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들을 돌볼 경황이 없었다. 쏟아지는 총탄과 빗발을 무릅쓰고 기를 쓰고 앞으로만 돌격해갔다.
전우들이 하나 둘 전사하는 모습을 목격하면서도 덕구는 이상하리만치 죽음의 공포 같은 건 느끼지 못했다. 전쟁터에서는 사람이 탄알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탄알이 사람을 피해야 죽음을 면할 수 있다. 그저 육신은 자동화된 기계처럼 움직였을 뿐이다. 요란한 총성도 두려움보다는 우렛소리나 빗소리와 조금도 다름없는 평범한 소음으로 들릴 뿐이었다. 다리의 움직임 외에는 육신의 거의 모든 기능들이 마비상태에 빠져 있었다.
폭우 때문에 불가능해진 미군의 그 가증스러운 공중폭격도 없었고 게다가 포탄이 동이 난 모양 포격마저 중단되어 공격은 거침없이 진행되었다. 하늘이 도와주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었다. 정말이지 미군이 제공권과 제해권을 틀어쥐었으니 망정이지 인민군이 공군과 해군을 가졌어도 미군은 인민군 앞에 군대가 아니라 하나의 오합지졸의 무리에 불과했을 거라고 덕구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갑자기 적진이 혼란해지며 대응화력이 미약해졌다. 철퇴하거나 도망을 치는 모양이다.
“돌격하라! 적들이 도주한다!”
덕구는 목이 터지라고 외치며 따발총을 더욱 맹렬히 휘둘러댔다. 가슴까지 덜덜덜 떨렸다. 그러나 외침소리는 총성과 폭우와 천둥소리에 먹혀들며 들리지 않았다. 귀가 먹먹했다.
드디어 적진을 돌파했다. 물이 들어찬 참호 안과 그 주변에는 미군이 아닌 국군의 시체가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미군부대는 한국군을 최전방에 배치하고는 자기들은 미리 철퇴해 버렸던 것이다. 부대는 퇴각하는 미군을 바싹 추격했다.
드디어 인민군의 전차들과 자주포가 시내에 돌입했다. 인민군이 진주를 완전히 장악한 것은 이튿날 아침인 7월 31일 9시였다.
최덕구 중대장은 문화부중대장과 함께 전장을 점검했다. 플래시를 켜들고 아군과 적군의 시체들을 하나하나 확인해 나갔다. 남원과 하동은 너무 가까워 그 속에 한종수가 끼어 있을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지리산 만 넘으면 남원에 이른다. 그러나 아직은 갈 수 없는 곳이다.
한종수의 시체를 발견하지 못하자 그는 포로병들을 찾아갔다. 이곳을 방어하던 한국군 부대는 민부대인데 남원을 방어하던 부대라고 했다. 남원방어를 포기한 후 함양에서 방위임무를 수행하다가 진주로 지원 온 부대였다. 덕구는 웬일인지 한종수가 이 민부대에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있다면 멀리는 도망가지 못했을 것이다. 마산쯤에 철퇴하여 그곳 방위임무를 수행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파죽지세로 남진하던 인민군의 공격은 7월말, 8월초에 이르러 유엔군의 낙동강방어선에 와서 저지되었다. 인민군 1, 2, 5, 8, 12, 13, 15사단은 국군 1, 3, 6, 8, 수도사단과 북서쪽으로 대치하고 인민군 10, 3, 7, 4, 6사단은 미 8군의 1기병사단, 24, 25사단과 서남쪽으로 대치한 상태에서 쌍방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6사단은 진주를 점령한 다음 계속하여 진동리, 마산 방향으로 침투를 시도했지만 미 제25사단의 방선에 막혀 공격이 좌절되고 말았다. 당시 인민군 6사단은 사단보병 7500명과 보강된 105전차사단의 83기계화연대(전차 25대)와 야포36문의 열세한 병력으로 미 25사단의 35, 24연대와 5연대 전투단, 1임시해병여단, 1해병전차대대, 89중전차대대, 87전차중대 그리고 한국군 민부대, 해병대, 경찰중대로 구성된 도합 2만여 명과 탱크 100여대, 야포 100문의 우세한 병력과 승부를 겨뤄야 했다. 게다가 미군은 항공기의 공중지원까지 받고 있었다. 게다가 인민군은 방어가 아닌 공격을 해야 하는 불리한 입장이었다.
최덕구가 연대장의 출동명령을 받고 대대를 집합시켰을 때는 아침 무렵이었다. 미 5연대 2대대가 점령한 여우고지를 오전 중에 점령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던 것이다.
“아침안개가 자옥할 때 고지를 공격하면 더위도 피할 수 있고 공중폭격과 고지 위 적들의 시선도 피할 수 있기에 가장 좋은 시기야.”
연대장은 손가락으로 5만분의 1 군사지도 위에 표시된 여우고지를 짚으며 말했다.
“대원들은 벌써 이틀째 아무 것도 먹지 못하여 기진맥진해 있습니다. 탄알도 일인 당 겨우 10여 발 정도밖에 남지 않았고요.”
최덕구는 좀해서 우는 소리를 하지 않는 성미였지만 부대상황이 말이 아닌지라 연대장에게 하소연했다. 낙동강방어선전투 이래 부대의 사망자는 급격히 증가했다. 특히 병사들과 소대장, 중대장과 같은 말단장교들의 사망률이 높아졌다. 덕분에 최덕구도 중대장에서 일약 대대장으로 승진했지만 부대의 전투력과 사기는 날이 갈수록 떨어졌다. 대대정원 천여 명 중 살아있는 대원은 겨우 180명뿐이다. 게다가 그 중 3분의 1은 남한에서 징집한 의용군 출신들로서 호미 대신 총을 쥔 농부들이라 총 쏠 줄도 제대로 모르는, 숫자만 채운 신병들이었다. 어떤 사람은 아직 군복조차 없어 죽은 국군이나 미군의 군복을 벗겨 입고 있었다.
제공권을 틀어쥔 미군이 폭격기를 동원하여 후방공급을 차단시켜 탄약보급이 중단된 지 오래어 북에서 휴대하고 내려온 자동총은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전사들은 전쟁터에서 미군이 버린 MI소총을 주어들고 그들의 탄띠를 풀어 새롭게 자신을 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노획하여 써야했던 만큼 탄약내원이 늘 딸렸다.
미군군화를 벗겨 신고 미군 군복을 벗겨 입고 미군의 총을 메고 미군이 공중투하한 통조림과 과자를 먹으며 싸워야 했다. 북에서의 군량보급은 끊어진 지가 오래되었고 당지조달로 해결하던 군량미마저 최근 들어서는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하루 한 끼조차 굶주린 창자를 달래기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소도 먹어야 똥을 눈다고 사람도 먹어야 싸우던지 할 게 아닙니까. 제기랄! 이러다가 싸우기도 전에 굶어죽던지 일 나겠습니다.”
“이건 명령이오. 당장 집행하시오!”
연대장이 험악한 표정으로 버럭 고함을 지르자 최덕구 대대장은 하는 수 없이 연대본부를 나와 버렸다.
덕구는 대대부로 돌아와 여기저기 기진맥진하여 너부러진 병사들을 독촉하여 가지고 공격전으로 돌입시켰다. 고참병들은 명령에 순순히 복종했지만 신병들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끝없이 불평불만을 토로하며 투덜거렸다.
“야, 이 새끼들아! 배가 고프면 고지 위의 양코배기들을 몰아내고 그놈들에게서 빼앗아먹어. 나도 네놈들과 똑같이 이틀간이나 굶었어!”
저도 모르게 화가 울컥 치밀며 욕설이 터져나갔다. 이럴 땐 장 교도원이 있어야 했다. 장 교도원은 진동리전투에서 문화부대대장으로 승진하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동무들 기운을 냅시다. 조금만 더 고통을 참으면 마산과 부산을 해방하고 조국은 통일될 것입니다. 그때면 동무들은 조국을 위해 헌신한 영웅이 될 것이며 조국은 동무들을 배불리 먹일 것입니다. 우리 인민군대는 반드시 남반부에 조작된 반인민적이고 파쇼적인 이승만 괴뢰정권을 전복하고 우리 조국 남반부를 그 지배로부터 해방하고 인민공화국의 기치 밑에 조국의 통일을 달성할 것입니다. 그날은 멀지 않아 도래할 것이니 동무들 기운을 냅시다.”
문화부대대장의 청산유수와 같은 선동은 언제나 대원들의 불평불만을 잠재웠으며 스스로 총을 잡고 일어나 전쟁터로 나가도록 유도했었다. 그럴 때마다 덕구는 문화부대대장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으며 못내 마음속으로 탄복했고 그를 존경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마저 그의 곁을 떠나가 버렸다. 어제 벌어진 전투에서 그는 전사했다.
사단에 36문밖에 없는 포문이 열리며 여우고지를 포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포탄공급마저 여의치 않아 포사격은 잠시 형식만 취하고는 금시 중단되었다.
최덕구 대대장은 대원 백여 명을 이끌고 능선에 달라붙었다. 산병선을 이룬 채 계단식으로 공격진과 루트를 엇바꾸며 여우고지를 톺아 오르기 시작했다. 숲이 울창하던 고지는 폭격과 포격으로 민둥산이 되어버려 몸을 숨길만한 은폐물도 별로 없었다. 나무들은 포격과 폭격으로 시커멓게 불타버렸거나 부러지거나 뿌리가 뽑혀버렸고 도처에 폭탄구덩이들이 파여 있었다. 바위들은 산산조각이 나 능선을 덮고 있었다. 요즘은 삼복더위에 폭격과 포격, 총탄의 화염까지 겹쳐 뜨거운 싸움터에서 일사병에 걸려 쓰러지는 병사들이 수두룩했다. 굶주림과 갈증까지 겹쳐 일사병환자가 급속히 늘어났다.
최덕구 대대장은 이리저리 폭탄구덩이들에 몸을 은폐해 위치를 이동하며 능선을 오르면서도 두 눈은 땅바닥만 두리번거렸다. 고지 위에 포위된 고립된 부대에 공급선이 끊어지자 미군은 공중투하로 군수품과 물 그리고 음식물을 제공했는데 그런 것들이 종종 적의 진지가 아닌 주변 비탈이나 지어는 인민군의 주둔 지역에 떨어질 때가 있었던 것이다.
적들의 일제사격이 개시되었다. 적탄이 우박처럼 쏟아져 머리를 쳐들 수가 없었다.
대대는 6부 능선쯤에서 적의 화력 앞에 공격을 저지당한 채 산개하여 은폐해 있었다. 그날도 이렇게 돌격을 강행하다가 적의 맹화력에 공격을 저지당했었다. 시간은 흐르고 찜통더위는 계속되고 굶주린 병사들은 기아와 더위에 거품을 물고 늘어지고…… 답답해난 문화부대대장이 벌떡 일어나더니 적탄 속을 뚫고 고지를 향해 무작정 돌격해 올라갔다.
“노동당원들은 나를 따르라! 조국을 위해, 공화국을 위해 목숨 바칠 때가 왔다! 미제국주의자들을 3천리강토에서 몰아내고……”
문화부대대장은 채 말을 끝내지 못하고 앞으로 푹 꼬꾸라졌다.
“장 동무!”
최덕구는 앞으로 달려 나가 땅 위에 쓰러진 그를 가슴에 붙안고 옆에 있는 폭탄구덩이로 굴러들어갔다. 그의 군복 상의가 어느새 피에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군복 섶을 헤치고 셔츠를 가르고 보니 왼편 가슴에는 총탄이 관통한 팥알만한 구멍이 나있고 그 구멍으로 시뻘건 피가 샘물처럼 콸콸 솟구치고 있었다. 최덕구는 자신의 셔츠를 찢어 상처를 틀어막았다. 그러나 피는 걷잡을 수 없이 셔츠를 적시며 틈을 뚫고 철철 흘러내렸다.
“대대장 동무. 내가 총에 맞은 겁니까? 부상당한 거냐고요? 이젠 죽는 겁니까?”
“괜찮을 거요. 곧 야전병원으로 후송할 테니……”
“내가 죽는 거지요. 난 죽고 싶지 않습니다. 집에서 아내가 기다리는데…… 난 겨우 스물세 살입니다. 아직 살아야 돼요. 대대장 동무. 제발 날 죽게 내버려두지 말아요. 남반부를 해방시키지도 못했는데…… 아내가 기다리는데. 부모님들께서 기다리시는데…… 난 죽고 싶지 않아요. 죽고 싶지 않아요. 죽고 싶지 않다고요!”
피가 어찌나 많이 흘러내렸는지 소낙비가 퍼부은 것처럼 땅바닥에 핏물이 질퍽거렸다. 문화부대대장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고 덕구의 손을 잡은 그의 손아귀에서도 점점 기운이 빠져나갔다……
덕구는 귀가 멍해나며 주위의 총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뱃속에서 꾸르륵거리는 소리는 분명하게 들렸다. 그는 다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무슨 먹을 만한 풀뿌리라도 없나 살폈다. 뿌리의 즙액을 빨아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이라도 면하고 싶었다. 마침내 웅덩이 구석 쪽에 뱀 한 마리가 토막 난 채 죽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화염에 타서 반쯤 구워져 있었다. 어떤 부위는 이미 썩었지만 불에 탄 부분은 살이 구워져서 썩지 않았다. 덕구는 뱀 토막을 집어서 이로 깨물어 뜯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나 고개를 쳐들고 웅덩이 밖을 내다보니 총소리가 멎어 있었다. 그는 웅덩이 위로 기어 올라갔다.
“동무들 앞으로 돌격하라!”
고참병들이 먼저 하나 둘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자 또다시 고지 위에서 저항사격이 시작되었다. 화력이 어찌나 맹렬한지 순식간에 대여섯 명의 전사들이 풀썩풀썩 꺼꾸러졌다. 그는 본능적으로 부서진 바위 뒤에 몸을 은신했다. 썩은 호박을 밟았을 때처럼 물컹하고 무언가에 군홧발이 깊숙이 빠져 들어갔다. 내려다보니 흙먼지에 뒤덮인 시체였다. 흙더미 밑엔 시신이 묻혀 있었고 시신은 썩어서 이미 가슴이 궁굴어 있었다. 발을 빼니 미군 군화에 구더기가 득실거리고 이어 고약한 악취가 확 풍겼다. 코를 찡그리며 외면하던 덕구는 바로 그 시체 옆의 흙 속에 묻혀 있던 통조림을 발견했다. 미군이 비행기로 투하한 것이 틀림없었다. 통조림은 방금 전 그가 발로 밟아 움푹 꺼진 시신의 가슴팍 안의 구더기 속에 떨어져 들어가 있었다. 그는 주저 없이 썩은 시체의 가슴팍 안에 손을 들이밀었다. 썩어 물컹거리는 속에서 통조림을 찾아 손으로 집어냈다. 흙에다 비벼서 통조림에 달라붙은 구더기를 떨어트린 다음 뾰족한 돌에다 짓찧기 시작했다. 드디어 자그마한 구멍 하나가 뚫렸다. 그는 그 구멍에 입을 대고 정신없이 빨아먹었다. 입으로 먹기가 불편하여 나무꼬챙이를 꺾어 후벼 내어 먹었다. 단숨에 통조림 하나를 게걸스레 먹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현기증도 말끔히 사라졌다.
적들의 사격이 뜸해진 틈을 타 그는 또다시 돌격명령을 내렸다. 8부 능선도 넘어 섰으니 이제 50여m만 더 돌격하면 적의 참호에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그만큼 적의 사정권이 지척으로 가까워졌다. 수류탄 투척권내여서 적의 일제사격이 쏟아지자 앞장서 달리던 몇몇 전사가 밑동 잘린 나무처럼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그러지 않아도 죽을까봐 도망칠 틈만 노리던 신병들이 공포에 질려 우야하고 능선 아래로 집단도주하기 시작했다.
“야, 이 쌍간나 새끼들아! 어딜 도망쳐! 도망치는 새끼는 당장 총살할 테니 어서 고지로 돌격해!”
최덕구 대대장이 공포탄을 발사하며 무너지는 부대를 제지해보려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도리어 신병들의 공포가 고참병들에게까지 감염되어 너도나도 도망치기에만 급급했다. 누구도 대대장의 말을 듣지 않았다.
“멈추지 못해! 쌍간나 새끼들!”
목이 터지라고 독전을 하는데 문득 목덜미가 쇠몽둥이에 강타를 당한 느낌이 들며 목구멍이 꽉 멨다. 뼈 갈리는 진통과 함께 입 안에 삽시에 피가 가득 들어차며 비린내가 확 풍겼다. 어쩔 사이도 없이 이번엔 그의 왼팔이 또 한 차례 쇠몽둥이에 강타당한 것처럼 심한 타격이 느껴졌다. 그는 맥없이 허공중에 쳐들었던 팔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팔소매가 금시 벌겋게 핏물에 젖었다.
“내가 부상당한 건가? 왜 이러지?”
그는 맥을 버리고 땅바닥에 쿵하고 넘어졌다. 신변에서 먼지가 풀썩 일어나는 것까지 그는 느꼈다.
“대대장 동지. 대대장 동지.”
누군가 그의 상체를 흔들며 애타게 부른다.
“내가 부상당한 거야?”
“예.”
2중대장이었다. 중대장은 그를 등에 업고 비탈을 달려 내려갔다.
수많은 부상병들이 연대본부 뒤 골짜기에 집결되어 있었다. 그냥 붕대만 대충 처매고는 치료도 받지 못한 채 거기서 야전병원에 후송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상병 후송에는 당지 주민들이 동원되었는데 워낙 전투가 치열한데다 부상병 숫자까지 많아 미처 후송을 할 수가 없었다. 그대로 골짜기에 방치되었다가 야전병원에 후송되지도 못한 채 죽은 중상자들도 많았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덕구는 연대장의 명령 덕분에 파격적으로 순서를 어기고 최우선 후송되었다.
“난 후방으로 가지 않겠습니다. 싸우는데 말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왼팔이 상하면 오른팔이 있잖습니까. 아직 염통까지는 십리나 남았는데 그냥 부대에 남아서 싸우게 해주시오.”
목에 중상을 입은 그는 말을 할 수 없어 종이에다 글을 써서 자신의 뜻을 밝혔다.
“말을 해야 지휘하고 밥을 먹어야 싸울게 아닌가! 고집 부리지 말고 야전병원에 가라고. 상처가 완쾌된 다음 원대복귀하면 될 거 아냐.”
“통일을 눈앞에 두고 싸움터를 떠나다니요. 억울합니다.”
사실 덕구는 한종수를 생각했다. 한종수가 북쪽 방어선의 국군 어느 사단에 배속돼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쪽에서 밀리면 국군은 틀림없이 부산 쪽으로 밀려 내려올 것이다. 그 놈이 바다로 해서 일본이나 미국으로 도망치지 않는 한 내 손에 잡히겠지. 이제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는 판에 야전병원에로의 후송이라니?
그러나 부대에 남아있어 보았자 전투에 참가할 수도 없는 형편이라 하는 수 없이 후방으로 떠나는 달구지에 몸을 실었다. 그때에야 덕구는 같은 날 항공기의 지원을 받은 미 35연대의 공격을 받고 인민군 형제부대가 두 대의 전차를 파손당하고 350명이 살상되었다는 패전소식을 들었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인민군이 패전을 하다니? 뭔가 잘못 되어가고 있는 게 아니야. 날이 갈수록 전세가 인민군에게 불리하게 돌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제발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그래야 종수 놈을 잡아 형님의 원수를 갚을 거잖아. 사단야전병원은 G읍에 있었지만 그는 고향인 남원으로 옮겨줄 것을 미리 연대장에게 허락을 받아냈다. 연대장은 특별히 경상자들을 그와 동행시켜 수레에 태워 남원까지 후송하도록 명령했다.
말로만 듣던 고향이었다. 마침 산곡리 국민학교에도 인민군 부상병들을 치료하는 야전병원을 차려놓고 있었기에 최덕구 대대장은 그곳에 넘겨졌다. 여섯 개의 교실에 통나무를 베어 가설한 임시 병상들을 들여놓고 부상병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의사도 간호사도 몇 안 되었고 약품도 소독수나 진통제 외에는 별로 없었다.
“간나 새끼들! 사람을 산 채로 죽일 작정이냐? 약 좀 다오! 나 죽는다!”
아픔을 참지 못해 억울한 의사와 간호사들을 고래고래 질타하는 환자들도 있었다. 도처에서 신음소리,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수술을 해도 마취제주사가 없어 돼지 잡듯 고함 소리가 골짜기를 진동했다. 팔다리가 부러진 사람, 눈이 먼 사람, 고환이 날아간 사람…… 별의별 부상자가 다 있었다. 그들에 비하면 덕구는 경환자였다. 목을 부상당하여 말을 못하고 음식물은 섭취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걸어 다닐 수는 있었고 팔을 부상당했지만 오른 팔이 성해 간단한 운동도 가능했기 때문이다.
우선 붕대를 풀고 상처를 소독해야 했다. 폭격을 피해 밤에만 이동하다보니 남원의 고향마을 산곡리까지 오는데 3일이나 걸렸다. 그동안 상처는 대대위생병이 싸움터에서 붕대를 감아 준대로 한 번도 풀어보지 않았다. 이따금 상처가 가렵기도 하고 통증도 발작하여 붕대를 풀어 던지려고도 했지만 상처가 칼로 저미는 것처럼 통증이 발작해 단념하곤 했다.
흰 위생복을 걸치고 얼굴에 마스크를 착용한 간호사가 나타나더니 그의 목에서 붕대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피고름이 말라붙었으나 처음에는 그런대로 참을 만 했다. 그러나 살갗에 달라붙은 붕대를 분리제거하기 시작하자 최덕구는 참다못해 병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말은 못하고 권총을 뽑아들고 간호사의 이마에 들이대며 무섭게 노려보았다.
“이년아, 지금 날 죽이려는 거야 뭐야!”
그의 험상궂은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자 간호사의 두 눈이 금시 공포에 질려 휘둥그레졌다. 주위 사람들이 다급히 제지했다.
“대대장 동지. 참으세요. 소독하지 않고 그냥 두면 목이 다 썩어 들어가니까요. 이것 보세요. 벌써 상처부위가 썩어서 구더기가 버글거리잖아요.”
간호사가 거울을 들어보였다. 최덕구는 피고름이 엉겨 붙은 상처에서 살진 구더기가 꿈지럭꿈지럭 기어 다니는 걸 보고서야 손에 든 권총을 내렸다. 그리고는 맥없이 병상에 도로 누웠다.
그런데 왁작 떠드는 소리에 몰려든 사람 중에서 느닷없이 젊은 여자 하나가 불쑥 앞으로 나서더니 오빠. 하고 덕구를 부른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던 덕구는 또다시 병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말은 못하고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쥔 채 얼굴을 뚫어지라 들여다보았다.
“그래요. 오빠 동생 향란이예요. 어쩌다가 부상을 당하셨죠?”
덕구는 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뭔가를 찾았다. 간호사가 눈치를 채고 연필과 노트를 내밀었다. 덕구는 그 종이 위에 비뚤비뚤한 글씨로 휘갈겼다.
“넌 언제 여길 왔냐?”
“그때 조선으로 나와서 그냥 그 길로 고향으로 내려왔지요. 오늘은 인민군 부상병들을 위문하느라 여맹에서 감자떡을 해가지고 오는 길이었어요. 아이참, 여기서 오빠를 만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너 지금 뭘 하고 있니?”
“저요. 산곡리마을 여맹위원장이예요. 노동당에도 입당했어요. 참, 이분은요.”
향란은 사람들 속에 서있는 키가 훌쩍 크고 여윈 중년 남자의 팔소매를 잡아 침상머리로 다가세웠다.
“숙부님의 맏아들 덕재 오빠예요. 지금 이 인민위원장이예요.”
“동숭매, 요로코롬 만낭께 반가운 겨.”
덕재의 어깨에는 자동총이 거꾸로 걸쳐 있었다. 머리엔 모표 없는 군모를 썼고 저고리도 인민군 복장이었다.
“형님, 수고 많으셨소.”
덕구도 알은 체 하며 오른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
“그리고 이 간호사는 누군지 모르겠어요? 종수 누이동생이에요. 서울서 간호대학을 다니다가 피난 왔는데 여기 간호사가 부족하더라니 내가 권고해 인민군 부상병을 위해 봉사하도록 한 거예요.”
뭐라고? 이 여자가 바로 한종수의 여동생이라고!
최덕구 대대장은 분노의 눈길로 간호사를 쏘아보았다.
“난 이 여자한테 치료받지 않을 거야.”
종잇장 위에 글을 쓰는 그의 손이 푸들푸들 떨리더니 끝내는 연필심이 툭하고 부러지고 말았다.
“오빠, 너무 고집 부리지 말아요. 여기서 영화 말고는 경험 있는 간호사도 없어요.”
향란은 연필을 다시 깎아 오빠에게 넘겨주었다.
“한종수라는 놈은 어떻게 됐냐?”
종이에 적힌 글을 보던 향란의 얼굴에 갑자기 놀란 표정이 어렸다가 금시 사라졌다.
“인민군이 내려오자 사라졌어요.”
“그놈은 여기서 뭘 했는데?”
“경찰이요. 그러나 그의 큰할아버지인 이장과 그 맏딸, 사위들은 인민위원회에 감금해 놓았어요. 종수의 막내 동생 종학은 아직 어리고 큰할머니는 장기 환자여서 제외하고……”
“동숭. 한종수 동숭매인 한종철이도 내가 잡아들였지라.”
“그놈은 이곳으로 언제 내려왔는데?”
“종철 오빠는 이전부터 사회주의 신봉자였고 악한 짓을 한 적이 없는 양심적인 지식인이었다는 사실을 오빠도 잘 알잖아요. 그래서 내가 그이만은 잡아가두지 말자는데 큰오빠가 한사코 우기고 잡아가둔 거예요. 서울에서는 고등학교에서 교원질을 했대요. 오빠가 좀 그일 풀어줘요.”
“안 돼. 형님, 참 잘하셨습니다. 그놈이 참으로 사회주의 신봉자고 악한 짓을 하지 않은 양심적인 지식분자라면 이승만 괴뢰정권 밑에서 선동분자 역할을 담당한 교원노릇을 했을 리 만무하고 월남할 리가 있겠느냐? 게다가 전쟁이 터지니 인민군을 피해 피난을 내려오고. 지은 죄가 없다면 도망칠 이유가 뭔데. 그놈은 뭐라고 해도 지주 놈의 자식이고 무산계급의 적이야. 당연히 감금하고 징벌을 받아야 돼.”
“오빠 이 동생의 얼굴을 봐서라도 제발 한 번만 용서해줘요.”
“그만해! 원칙 앞에서는 양보란 없어. 인민의 적은 그 누구도 용서해서는 안 된다는 걸 노동당원이고 여맹위원장인 네가 더 잘 알고 있을게 아니냐.”
덕구는 홧김에 다 쓴 종이를 와락 찢어 던지고 다른 종이에 글을 썼다.
“그 말은 그만하고 어서 나가서 다른 간호사를 데려와!”
간호사를 교체했지만 그녀는 의학이나 간호지식이 전혀 없는 시골처녀였다. 환자가 성격이 호랑이 같은 데다 직위까지 높은 지라 그녀는 질겁하여 손을 후들후들 떨기만 했다. 그녀의 서투른 동작이 진통을 몇 배나 가중시켰다.
덕구는 벌떡 일어나 간호사의 귀뺨을 호되게 후려쳤다.
“네년도 다 간호사냐? 돼지불알 까는 수의도 너보다는 나을 거다. 죽여 버리기 전에 내 눈앞에서 썩 꺼져!”
목소리가 나가지는 않았지만 그 눈빛에서는 불꽃이 팍팍 튕겼다.
하는 수 없이 영화를 다시 불러왔다.
“너 아버지 일 때문에 나한테 한을 품고 복수할 생각일랑 아예 하지 마. 그러면 당장 내 총에 맞아 죽을 줄 알아. 잘 알아서 해봐.”
담담한 표정으로 종이장의 글을 들여다보더니 영화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종수 놈이 도망쳤단 말이지. 그랬을 테지. 여기 와서도 경찰을 했을 법한 놈이야. 왜놈의 앞잡이질을 하다못해 남반부 땅에 와서는 이승만의 추종자, 양키 놈의 종질을 한거지. 이놈 어쨌든 멀리는 못 갔을 거야. 그런데 아까 종수라는 말에 향란의 얼굴이 왜 놀란 표정이 되었을까? 혹시 향란이 종수의 행방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튼 며칠 내로 구속했다는 종수 놈의 가족들을 만나봐야지.
영화는 소독수로 피고름이 말라붙은 붕대를 적시면서 누기가 스며들어가는 대로 핀셋으로 조심스럽게 조금씩 풀어냈다. 그런데도 최덕구는 그녀가 손에 틀어쥔 예리한 핀셋으로 그의 목구멍이나 심장을 푹 내리찍을 것만 같은 공포감이 들어 흠칫흠칫 전신을 떨곤 했다. 내가 제 아빌 은파강에 떠밀어 넣어 죽여 버린 사실은 알고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니 자식으로 생겨서 아버지를 죽인 원수 놈이 미울 건 불을 보듯 당연하다. 그러나 그녀의 아비 한상권은 덕구가 아니래도 인민의 손에 처단되었을 운명을 가진 작자였다. 다시 말하면 그놈은 죽어도 당연한 악질 지주였다. 그러나 내 형은 죽어야 할 아무런 죄도 이유도 없이 억울하게 그녀 오빠의 손에 맞아죽었다.
덕구는 붕대를 다 풀어줄 때까지 두 눈을 부릅뜨고 그녀의 일거일동을 낱낱이 주시했다. 그러면서 세상은 얼마나 우스운가 하는 생각을 건졌다. 원수의 손에서 치료를 받고 원수를 구해주는 이 익살 궂은 운명의 희롱! 그녀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돋았다.
붕대를 다 제거하자 그녀는 안도의 숨을 몰아쉬며 마스크를 벗고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 순간 덕구는 향란이보다도 두 살이나 아래인 21살의 꽃다운 나이인 영화의 얼굴이 활짝 피어난 꽃송이처럼 어여쁨을 발견했다. 그 얼굴이 뜻밖에도 한종수의 동생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어울리지 않을 만큼 선량하고 천진난만하고 순결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거기다가 이런 시골에서는 보기 드문 지성미까지 진했다.
“인젠 됐어요. 그러나 상처를 소독할 때 통증이 있을 거예요. 참으셔야 해요.”
목소리도 마스크에 막혔던 때와는 달리 부드럽고 은근했다.
제기랄 년!
덕구는 공연히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왜 욕설이 나가는지 스스로도 몰랐다. 천사 같은 그 미모는 원수라고 저주하고 증오하기에는 너무나 아름답다는 사실에 불쾌해졌다.
그래도 상처를 소독할 때는 그런 대로 참을 만 했다. 빨간 물약을 상처에 바르고는 다시 붕대를 감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영화가 손가락 굵기의 스트로를 가져다가 그의 식도 안에 밀어 넣을 때는 끝내 아픔을 참지 못하고 발길로 그녀의 복부를 힘껏 내질렀다. 그녀는 악! 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마룻바닥에 나뒹굴었다. 숨이 막혀 배를 끌어안고 한참이나 뒹굴었다. 그러나 잠시 뒤 다시 일어나더니 병상 곁으로 다가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여긴 영양제도 없고 포도당주사도 없어요. 그렇다고 상처가 다 완치될 때까지 식사를 안 할 수는 없잖아요. 식사를 해야 상처도 빨리 완쾌될 거구요. 다른 방법이 없어 죄송하지만.”
그러나 덕구는 그녀의 가슴을 사정없이 밖으로 떠밀어냈다.
결국 아까 그 서투른 간호사를 데려왔다. 영화를 부르지 않기 위해서는 아픔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굵은 스트로를 식도에 주입하고 간호사는 스트로 안에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 넣었다. 그러나 국물이 어찌나 따가운지 목구멍이 덴 덕구는 참다못해 스트로를 뽑아 그것으로 간호사의 얼굴을 후려쳤다. 그녀는 울면서 나가더니 조금 뒤 남자 군의를 데리고 들어왔다.
“대대장 동무. 참아야 합니다. 아프다고 참지 못하면 굶어죽습니다.”
스트로를 다시 식도에 삽입시켰다. 이번에는 식힌 국물을 스트로에 밀어 넣었지만 쌀알이 막혀서 잘 넘어가지 않았다. 그러자 의사는 젓가락을 스트로 안에 집어넣고 휘저어대기 시작했다. 목구멍에 밥알이 잔뜩 막힌 덕구는 사레가 들리며 갑자기 기침이 발작했다. 기침을 할 때마다 밥알이 스트로 밖으로 튕겨 나왔고 상처가 찢기는 듯 아팠다. 덕구는 스트로고 죽 그릇이고 죄다 창 밖에 집어던졌다. 그리고는 의사며 간호사며 밖으로 내쫓아버렸다.
하지만 굶는 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그는 목의 상처 때문에 벌써 나흘째나 꼬박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굶고 있었다. 버티다 못해 끝내는 혼수상태에 빠져들고 말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몰랐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밤이었다. 희미한 등잔불 아래 영화가 병상에 머리를 떨어트린 채 잠들어 있었다. 등불 아래 잠든 그녀의 얼굴은 정말이지 천사 같았다. 고요한 평화와 연꽃 같은 온화함이 그녀의 주위에서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를 살려낸 것이 영화였다는 사실을, 영화가 음식물을 자기 입으로 씹어서 먹여주었다는 사실을, 밤낮으로 그의 옆을 지키며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여동생 향란이의 입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덕구는 그녀가 왜 나를 살려냈을까 그것부터 의문이었다. 죽으라고 내버려두어도 모를 텐데. 아무튼 생명의 은인이니 고마웠다. 죽을 입에 넣고 호물호물 씹어서는 스트로에 떠 넣어주는 음식을 한 모금씩 받아 넘기면서 덕구는 그녀의 달콤한 입 안의 체취를 느낄 수 있었다.
“전번엔 미안했어.”
종이에 이런 글을 써서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그랬더니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방그레 웃는다.
“의사의 본분이 뭔 데요. 환자의 병을 치료하여 생명을 구하는 일이 아닌가요. 대대장동무는 저에겐, 저를 믿고 찾아온 한분의 환자에요.”
그 말이 너무 생소했다. 잘 이해도 되지 않았다. 계급성이나 당성이나 혁명적동지애를 떠난 그런 추상적인 사랑, 까닭 없는 사랑이 세상에 있을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는 분명 그런 것들에 때 묻지 않은, 그녀의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 샘솟고 있는 깨끗한 인간애를 느낄 수 있었다.
그날부터 영화에 대한 덕구의 태도는 돌변했다. 그녀가 시키는 일이라면 말없이 곰상곰상 들었고 눈을 부라리거나 화를 내지도 않았다. 죽이려면 인사불성이 되었던 이번 기회에 백 번이라도 죽일 수 있었지만 그녀는 도리어 그를 정성으로 간호하여 살려내지 않았는가. 전쟁시기 야전병원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는 건 비일비재의 현상이었고 부상병이 죽는다고 이상해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의료사고가 아닐까 의심할 사람조차 없었다. 대여섯 명의 의료일군들이 70여 명의 부상병들을 돌봐야 했기에 어느 구석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누구도 정확히 상황파악을 할 수가 없었다. 이제부터 상처의 치료는 그녀를 믿고 맡기기로 했다.
음식을 먹기 시작하자 상처는 하루가 다르게 호전되었다. 영화는 매일 세 끼를 입으로 음식물을 씹어서 그에게 먹여주었고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발라주었다. 팔의 상처도 치유가 빨랐다.
그러던 어느 날, 최덕구 대대장은 산곡리 인민위원장인 덕재 사촌형과 여맹위원장인 여동생 향란의 안내를 받으며 마을로 내려갔다. 그는 계급은 중위였지만 직위는 대대장이어서 부상병들 중에서도 제일 높은 장교였다. 그는 스스로를 야전병원의 지휘관으로 자처했으며 사람들도 그의 명령에 말없이 복종했다.
산기슭에 나지막한 오두막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었다. 백여 명의 부락민들은 이장네 집 앞에 모여서 인민군 장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새 배웠는지 『김일성 장군의 노래』와 『유격대 행진곡』을 부르며 그를 환영했다.
인민위원장 덕재가 덕구를 대신해 그의 연설문을 낭독했다.
“주민 여러분, 이승만 괴뢰정부의 독재 밑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여러분은 이미 해방되었습니다. 반동정부의 도탄과 학정에서 해방되어 공화국의 품에 안겼습니다. 3천리강토는 오라지 않아 통일이 될 것입니다.……”
덕구를 수행한 소대장은 김일성종합대학 학생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에게 연설문을 쓰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덕구가 듣기에도 명연설문임에 손색이 없다. 다만 덕재의 전라도방언 억양 때문에 조금 이상하게 들렸을 뿐이었다.
“공화국의 공민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자제이면서 형제인 인민군대 장병들은 강도 미제와 이승만 괴뢰군과 피를 흘리며 영용하게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자식들과 형제들이 지금 전선에서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부상당해도 병원으로 후송해 줄 사람들이 부족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모두 전선을 위해 돈 있는 사람은 돈을, 힘 있는 사람은 힘을 내야겠습니다. 인민의 정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용약 의용군에 입대하십시오. 인민군의 무기와 탄약을 공급할 수 있도록 교량과 도로를 수축하는 부역에 참가하여 주십시오. 부상병을 후송하고 양식을 지원하고 전선원호사업에 적극 동참해 주십시오. 악질 지주, 반동경찰, 괴뢰관료들을 색출하여 처단하십시오. 인민의 적에 대한 독재가 없이는 인민의 자유와 민주주의는 보장되지 않으며 인민정권을 유지하고 강화할 수도 없습니다. 친일분자, 친미분자, 반동분자 등 민족 반역자를 때려 부수자! 모든 것은 전선을 위하여!”
덕재와 향란이 주먹을 부르쥐고 앞장서서 혁명구호를 외치자 군중도 덩달아 구호를 외쳤다.
덕구는 사실 군중집회에서 연설 같은걸 하는데도 별로 관심이 없었다. 어서 종철이네 식구와 마을 반동분자들을 감금했다는 뒷산 절간으로 가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집회가 끝나기 바쁘게 곧바로 마을을 떠났다.
폭격에 허물어진 절간 벽체에는 검은 페인트로
“이장 「한상진」은 이승만의 주구! 똥개!”
“악질경찰, 일제주구 한종수를 잡아 처단하라!”
는 구호들이 비뚤비뚤한 글씨로 씌어 있었다.
총을 메고 대문을 지키던 민청원 두 사람이 중위 계급장을 단 덕구와 이장을 보자 군례를 붙였다. 그들의 복장은 한복 바지저고리였다. 뜰 안에도 민청원들이 총을 메고 경계를 서고 있었다. 복장들은 각양각색이었다. 감금된 자들은 여러 방에 나뉘어 수감되어 있었다.
덕구 대대장은 곧장 종철이가 감금된 방으로 찾아갔다. 종철은 뜻밖에 나타난 덕구를 보자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갑자기 중위 계급장을 단 인민군 장교복을 입고 나타났으니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수염이 텁수룩하고 머리카락이 헝클어진 그는 도깨비 같기도 하고 귀신같기도 했다.
“형님, 이렇게 여기서 만나다니요?”
종철이가 먼저 알은 체 했다. 덕구는 종철의 얼굴을 바라보는 동생 향란의 얼굴에 그늘이 짐을 눈결에 보아냈다.
“누가 네 형인데. 잔말 말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덕구는 준비해간 종이에 글을 써보였다. 종철은 종이를 보고 또 목에 붕대를 감고 팔을 어깨에 멘 덕구를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더러 뭘 말하라는 겁니까?”
“한종수는 어디 갔어?”
“모릅니다.”
“닥쳐! 죽고 싶지 않으면 바른 대로 불어.”
“정말 모릅니다. 내가 대전에서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형님은 마을에서 자취를 감춘 뒤였습니다. 난 산곡리 마을에 들어서던 날로 민청원들에게 잡혀 이곳에 갇혔습니다. 형님네 집에도 들어가 보지 못했습니다. 할아버지와 어머니도 수감 중이라고 하지만 아직 얼굴도 뵙지 못했고요.”
덕구는 옆에 선 덕재와 향란을 번갈아 보았다.
“맞아요. 종철 씬 마을에 들어서던 날로 잡힌 거예요. 아무 죄도 없는데……”
덕구는 동생의 변명을 듣지 않고 다시 종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무엇 때문에 인민군대를 피해 서울에서 피난을 내려왔는가?”
“글쎄요. 나 자신도 아직까지 어리둥절할 뿐입니다. 지금도 그 해답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허튼소리 하지 마! 지은 죄가 없다면 왜 남쪽으로 도망쳐. 서울서 이승만 괴뢰의 반동사상을 애들에게 주입시키는 반동교사노릇을 했다는 걸 다 알고 있어.”
“그건 먹고 살기 위한 생계수단이었을 뿐입니다.”
“그따위 변명은 나한텐 통하지 않아!”
화가 난 덕구는 휙 돌아서서 밖으로 나왔다.
“형님, 아니 대대장 동지. 도대체 날 어떻게 할 겁니까?”
종철이가 큰소리로 물었으나 덕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사찰 안을 한 바퀴 돌며 감금된 다른 사람들도 쭉 둘러보았다. 그러나 누구와도 말은 건네지 않았다.
“이 안에 갇힌 반동분자들을 잘 감시하시오. 한 놈도 도망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종수 놈을 꼭 잡아들여야 합니다. 남반부를 다 뒤져서라도.”
덕구는 종이에 글을 써서 인민위원장인 사촌형 덕재에게 건네주었다.
“종철 씨 만은……”
향란이 한 번 더 간청을 했지만 덕구는 벌써 절간 대문을 나서고 있었다.
“왔던 걸음에 네 집에 한 번 들러보고 가자. 어떻게 사나?”
향란은 덕구가 건네주는 글을 보고 갑자기 얼굴색이 변하며 당황해했다.
“오막살이 과부 집에 뭘 볼게 있다고. 나중에 봐요.”
그러나 덕구는 벌써 인민위원장을 앞세우고 그녀의 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향란이 뒤따라오며 거듭 구실을 달며 덕구의 발길에 제동을 걸려 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향란이네 집은 밤나무 숲과 동백 숲이 우거진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초가삼간은 초라하면서도 아담한 분위기를 거느리고 있었다.
더 이상 제지할 수 없음을 알자 향란은 앞장서서 오빠를 집으로 안내했다.
“사촌오빠가 수리해준 집이예요. 49년도에 여수 폭동 군에 참가했다가 뒤에는 지리산에서 유격전을 했는데 종수가 지서장으로 있을 때 그의 궤계에 걸려들어 잡혀죽었어요.”
향란은 울먹거리며 과거사를 말하다가 집 앞에 이르자 웬일인지 하던 말을 딱 그쳐버린다.
방 안에 들어서니 웬 아기가 혼자 구들에 누워 자고 있다.
“얘는 누구니?”
덕구가 의아한 눈길을 향란에게 보냈다.
“종철 씨의…… 그러니까 오빠더러 조카를 봐서라도 그일 구해달라는 거잖아요. 오빠.”
“뭐야? 얘가 종철이의 아들이라고! 너 끝내……”
덕구는 동생의 얼굴을 한식경이나 노려보다가 불이 번쩍 나게 향란의 따귀를 후려쳤다. 그리고는 씽하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오빠. 제발 이 동생의 부탁을 한 번만 들어줘.”
“안 돼. 그놈하구 당장 헤어져!”
종이가 찢기도록 몇 글자 휙휙 갈려서 그녀의 얼굴에 내던지고는 성큼성큼 대문 밖으로 사라졌다.
빌어먹을 년! 그게 얼마나 더러운 핀데 우리 가문의 깨끗한 피와 섞어 버린 거야. 망할 년 같으니!
덕구는 속으로 요설을 퍼부었다. 안 돼. 안 되지. 그놈들의 피로 우리 가문의 피를 더럽힐 수는 없어!
아무리 생각해도 한종수를 놓친 것이 분했다. 그런데 아까 향란이 오빠가 집 구경을 하자는데 왜 막아섰을까? 설마 집에다 남들에게 보여주지 못할 뭔가를 감춰둔 건 아니겠지. 더구나 큰오빠를 죽인 원수인 한종수를 숨겨둘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쩐지 향란의 언동이 이상했다. 집 앞에 이르자 하던 말을 갑자기 그친 것도 그랬다. 그때 동생이 하던 말은 다름 아닌 한종수에 대한 말이었다. 종수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무튼 향란이네 집에 뭔가 밖에 드러낼 수 없는 비밀이 숨겨져 있음이 틀림없는 것만 같았다.
앞으로 좀 더 주의해 살펴야지. 이런 생각을 하며 그는 야전병원으로 돌아왔다.
“어디 가셨다가 인제야 돌아오세요?”
영화는 저녁식사 준비를 해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덕구가 나타나자 언제나와 같이 티 없이 맑은 웃음을 얼굴에 담았다. 도저히 지주의 딸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그녀는 자상하고 다정다감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다. 그녀가 지주 딸만 아니라면…… 공연히 가슴이 설레기까지 했다. 저녁때가 되자 야전병원으로 빨리 돌아오고 싶었던 것도 어쩌면 영화를 보고 싶어서였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내가 지금 영화한테 반하기라도 한거야?
덕구는 그녀를 향해 벌쭉 웃었다. 그리고는 금방 지주 딸에게 추파를 던진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을 후회했다.
내가 이러면 향란이와 다를 게 뭔가. 이러면 안 돼. 냉정해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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