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소설/ 최국철

                                                                             1


해마다 추석이 지나고 그뒤 얼마동안은 단풍을 타게 하는 해빛이 푸짐하게 쏟아진다. 이 가을빛은 계절을 타는 사내의 빈 가슴을 담기엔 너무도 잔인할만큼 화사했다.

가을해빛은 중년남자에게 우습도록 진진한 일탈을 부추긴다. 마흔이 넘으면서 나는 심각하리만큼 가을을 타는데 국경절 전후로 방황이 절정에 달하면서 공중에 떠있다는 막막한 체공감에 삭신이 왕소금에 절은 김치같이 늘어진다. 그래서 서성거리다  무작정 보따리 싸고 집을 떠나는게 이 몇년동안 고질로 되여버렸다.

기실 일탈이란 도피이고 겸손하지 못한 자아기만이라는것을 알면서도 어쩔수 없다.

이 가을엔 어디로 가서 가을을 피할가.

아침나절의 고민은 잠간이였다. 나는 산지기로 있는 큰아버지를 떠올렸고 그 즉시로 행장을 꾸렸다. 행장이라야 별게 없다. 노트북과 디지털 카메라, 그리고 책 몇개뿐이다. 떠나면서 나는 남대천에 사는 민우형(4촌형)에게 전화를 했다. 또 산으로 오나? 할일 되게 없다. 전화에서 민우형은 시골사람 특유의 직설적인 표달로 질색해했지만 나는 민우형 특유의 그 빈정거림을 묵살한채 지금 떠나간다 라는 외마디를 남기고는 남대천으로 화살처럼 내달렸다.


나에게 이런 우화 같은 일탈을 부추기는 어떤 충분한 구실이 있다. 그것인즉 숲지기로 깊은 산골에 계시는 큰아버지를 찾아본다는것이다. 자식이 부모보러 다닌다는식의 자아위안이다. 자잘하게 따져보면 기실 나자신을 위하는 일인데도 굳이 큰아버지를 내세우는것은 남대천의 세태를 의식한 얍삭한 자아최면때문이다. 이런 최면에 미련을 가진지가 몇년 되였으니 해마다 이맘때면 큰아버지를 보러 간다는 말이 된다.


촌야를 스쳐지나는 10월 해빛은 너무도 소조하다 못해 권태를 불러오기까지 했다.

큰아버지가 계시는 량지산은 남대천 마을에서도 20여리 더 가야 하는 깊은 산골이다. 집에서 나를 기다리던 민우형이 차 조수석으로 기여들어왔다. 이 길로 그냥 올라갈가? 민우형은 내 말뜻을 잠시 못알아들은듯 나를 빤히 지켜보다가 참, 이 정신 보게나. 사과배 좀 준비했는데… 하고는 다시 차에서 내렸다.

조금후에 민우형은 사과배 두상자를 준비했다. 짐칸에 실으면서 내가 산 소고기, 돼지고기, 칼치 따위들을 살펴보더니 아들인 자기보다 효성이 극심하다고 혀를 찼다. 형하고 함께 큰아버지 손에서 자랐는데 효도는 해야지 않겠소. 내가 시물거리니 민우형은 효도 좋지… 좋구말구. 자주 다니고 많이 사오너라. 너스레를 떨면서 다시 조수석으로 밀고 들어왔다.  담배냄새가 확 풍겼다. 나보다 두살 년상인 민우형은 시골사람이 그러하듯 겉늙어보여서 얼핏보면 10여살차이가 난다.

-자주 다니우?

-어딜?

-산으로 말이요.

-뭐 드레있니(정해놓은 시간). 둬달에 한번 갈 때두 있구 한달에 두번 갈 때두 있구.

-사이는 그냥 좋구?

-쩌, 알면서 묻긴?… 말두 마라. 보다보다 그런 찰떡궁합 첨이다. 니 형수두 얼굴 붉히드라.

허허.

-허허, 아무래두 살바엔 그래야지. 그것두 산에서 단둘이 사는 살림에 콩팥칠팥 찡내면 별 볼일 없구.

-그래두 이건 너무… 엄마 살아 생전에도 저랬을가 생각하면 어쩐지 슬퍼지기두 하구 늙은이들 이제 몇년 더 살가 다시 생각하면 리해두 되구.

부모를 재혼시킨 자식의 위안이기도 하고 먼저 떠나간 어머니에 대한 련민이기도 하다.

-하긴… 늙으면 원래 잔정이 많아지고, 후처에 감투 벗어진다는 말 괜한 말이겠소… 아무튼 호박 만났네.

-아무리 그래두 그렇지. 안로인의 한마디 말에 40년동안의 줄담배를 끊어버리다니. 여하튼 소문이야 나게 돼있지. 훗훗…

민우형은 담배를 피워물면서 거리낌없이 웃어댔다.

-허허, 큰어머니가 담배냄새가 난다고 질색했던 모양이군.

-이럴줄 알았더라면 더 일찍 장가보내야 했는데. 부모를 재혼시키는것이 효도라던 니 말이 이제야 수긍된다. 킥…

4촌형제는 달리는 차안에 외인이 없다는 현실에서 형제끼리 할수 있는 말을 질질 흘리면서, 거기에 토까지 달면서 찧고빻았다.

큰아버지의 늘그막 혼인이 4촌형제가 차안에서 버릇없이 수다떨 정도로 굉장하고 재미있는줄은 미처 생각 못했다. 그러면서 황혼의 경륜에도 젊음이 미칠수 없고 따를수 없는 황홀한 사랑세계가 있다는 그 개연성에는 은근히 놀라고있었다.  


옛날 같으면 량지산으로 통한 길이 소달구지나 겨우 다닐 정도였지만 지금은 왕청으로 통하는 번듯한 국방도로로 변하여 승용차가 다니기에 무리가 전혀 없었다. 산야는 바야흐로 울긋불긋한 단풍이 타면서 여름내 맹위를 부리던 더위를 퍼렇게 열린 하늘우로 안개같이 몰아가고있었다. 산야의 풍경은 나에겐 공복감의 기갈같이 파고들었다. 해빛은 소조하고 나긋했지만 그 해빛이 가득한 공간은 맑고 찬 가을공기가 배회하면서 승용차의 유리문을 열지 못하게 단단히 단속하고있었다.

큰아버지가 계시는 량지산에 가자면 15키로(남대천 사람들은 여기를 15공리라고 부른다) 리정표가 선 곳에서 왼편의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야 한다. 그렇게 올라가느라면 산성이 있고 산성에서 제일 큰 관문인 동문터가 자리하고있다. 산성이라면 량지산을 떠올리게 되고 량지산이라면 산성의 대명사로 안다.  

산성을 현재 관광지개발코스로 찍고있다고 한다. 그러나 력사문화적 가치와 민족생활적 가치는 풍부해도 험준한 산세로 하여 아직까지 개발과 포장이 안된 원시상태라 주위에서 난코스로 정평나있다.

골짜기 입구부터 길은 양밸처럼 탈리면서 까다롭게 펼쳐졌다.

-이번에두 산성을 둘러보러 올라가야 하니?

민우형은 산성동문터를 지나치면서 시큰둥한 기색을 지었다. 민우형의 눈에는 산성이란 한낱 만년이끼가 돋은 무너진 성벽정도로서 별 볼일 없는 곳이다. 그래서 산성답사 같은 일에는 힘이 뻗쳐서 하는 어린애들의 치희 같은 지지한 놀음정도로 알고있다. 그런 민우형에게 산성구경 같은걸 기대하는건 아무래도 무리다. 지금까지 민우형은 한번도 틈을 내서 산성구경을 하지 않았다. 성동문터 바로 안에는 옛날 마을터가 있는데 지금은 무성한 활엽수들이 자라고있었다. 파방을 친 옛집터가 숲에 깡그리 덮여버렸다. 옛터를 지나면서 차를 세울가 하다가 민우형이 질색할가봐 그냥 지나쳤다.

산성을 품에 안은 량지산은 빨간 빛으로 강렬하게 타고있었다. 그 빨간 단풍의 산성을 텅빈 가슴에 담으려면 시리도록 벅찰것 같다. 목이 마르다. 빨간 단풍의 산성과 나의 갈증은 자연현상과 생리현상으로서 전혀 련관이 없건만 이 빨간 단풍의 성을 바라보는 나는 작년 이맘때 느꼈던 그 갈증이 또 살아난다. 아무래도 이상한 병증인데.

-형은 이 성터에 오면 몸이 굳어지거나 목이 마르지 않소?

나는 저도 모르게 아주 멍청한 말을 지껄였다.

-뭐? 목이 마르다니? 킥킥… 별꼴 다 보군. 목이 마르면 물을 퍼마실게지. 흔한게 물인데.

민우형은 길옆 벽계수를 내려다보고는 피씩 웃으면서 나를 알콜환자 보듯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참, 내가 지금 무슨 말 하나… 아니 그런 말이 아니구. 내 말은… 그만두자. 괜한 말이지.

-무심하우 형은. 이 산성태생이라는데 왜 시뿌둥하우?

목이 마르다는 말을 단순한 생리현상으로 아는 형에게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서 끙끙 갑자르다가 난 단념하고말았다. 그래, 나도 잘 모르는데… 현문우답이 아니라 우문현답이다.

-너 같은 글쟁이들이야 뿌리요, 문화요 와자자하게 이상한 소리만 웨치지만 할일이 많은 우리들이야 무슨 여가가 있어서 법석 피우나… 오갈 때마다 맨날 보는 곳이고 겨울 벌목시엔 매일 같이 보는 돌벽인데. 뭐 가봐도 그저 이끼가 있고 썩어가는 돌이 있고 그밑에 뱀만 욱실거리지.

그랬다. 민우형뿐이 아니였다. 남대천에 민우형 같은 산성태생이 여럿이지만 모두가 민우형처럼 자기 출생지에 대해서는 감정을 아끼고 푸대접했다. 아니, 이제는 무심해졌다는게 비슷할것이다. 푸른 이끼가 끼고 비릿하게 풍화되여가는 돌뿐이고 성밑에 뱀들이 욱실거린다고…

어쩌면 맞는 말이다. 자연현상을 보는 눈에서는 우리는 이끼, 돌, 뱀이라는 공통한 분모와 통약을 가지고있다.

-일년에 어쩌다 한두차례 놀러오면서 아는 소린. 우린 일년에 수백차례씩 드나들어두 너 같이 요란은 안떨어.

-허허, 할말이 없소.

민우형의 까박에 대답이 궁핍해졌다.

하긴, 나는 고작해야 사진이나 찍고 기행문이나 쓰는 정도다. 따져보면 민우형의 말이 틀리는데가 없다. 그저 산성이라는 유적지로서의 의미지와 출생지라는 값에서 내가 부산을 떨고 호들갑을 더 피울뿐 그이상도 그이하도 아닌것 같다.

그러면서도 나는 어느덧 래일 성터를 다시 둘러보겠다는 생각을 했고 이번 걸음에는 큰아버지와 동행하리라고 욕심을 부렸다.


2
지산 방원 5백헥타르 림야는 민우형이 50년을 기한으로 임차하고 경영하는지라 입산도 민우형의 허락이 없으면 안되리만큼 개인소유 부동산으로 변해있었다. 이름이 량지산이라지만 대체 어느 산과 어느 골짜기를 계선으로 불리는지 민우형도 얼떠름해했다. 대체로 여기에 있는 뭇산봉우리와 산골짜기를 일컬어서 량지산으로 부르고있는것이다. 오후의 깊은 산골의 가을해는 산봉우리들에게만 선별적으로 소조한 빛을 선사하고 음지에는 빛 한점 선사하지 않았다.

이 산에서 큰아버지는 산지기로 있다. 새로 낸 양밸같은 길도 민우형이 불도젤을 동원하여 만여원을 팔아서 닦은 길이다. 샛길 따라 얼마쯤 들어가니 길섶에 활엽수들이 붉고 노란 잎사귀들을 이들거리면서 수런거렸고 그밑에서 붉은 색 토종닭들이 널려서 먹이를 찾고있었다.

대체 닭이 얼마나 되길래 이리 굉장해?  나의 말에 민우형이 창밖을 내다보면서 천마리가 넘는다드라 하고 무표정하게 내뱉았다. 뭐? 천마리?… 후후 저절로 웃음이 터진다. 게사니도 보인다.

천마리란 수자보다 그 천마리를 굳이 사양하는 큰아버지의 부지런함이 마음에 닿아온다.

그랬다. 큰아버지는 모든 일에 부지런했는데 그것은 운명적인 농사군의 버거운 시골인생이다.
  

차가 굽이를 돌자 수관을 장엄하게 떠인 소나무가 나타나고 그 나무사이로 파랗게 열린 가을하늘 한쪼각이 열리면서 다시 재산목록 1호인 풍력발전기의 날개가 어린애들의 크레용 그림처럼 나타났다. 그리고 조금후에 그아래에 서있는 집 한채가 불쑥 솟아오르듯 시야에 안겨왔다. 큰아버지가 계시는 산골집은 평탄한 곳이지만 둘러보면 산자락 돈들막밑에 자리잡고있었다. 난 큰아버지의 이 산골집을 별장이라 부른다. 기실 별장이라 하면 손색이 가는데가 많고 인테리어나 미관, 그리고 실용적인면에서도 별장에 비하면 너무도 손색이 가지만 그렇다고 옛날의 산전막 같은 스산한 집도 아니다. 벽돌에 색철판 기와까지 얹은 집이다. 그저 굳이 표현하자면 아담한 벽돌집 정도다. 그런데도 나는 그냥 별장으로 고집한다.

차소리를 들었는지 안로인 한분이 젊은이들처럼 잽싸게 마중나왔다. 이분은 큰어머니란 호칭을 써야 하는 안로인이다. 큰어머니 등뒤로 커다란 황둥개가 귀를 사납게 세우고 뒤따라 나섰는데 나를 보자 사납게 짖어대기 시작했다. 민우형이 무서운 상통을 짓고 위협해서야 슬그머니 물러났다.

-날래 오우. 조카는 해마다 명념이구먼… 그  먼길에.

-예. 별탈은 없으시고요?

-공기 좋은 산골에서 탈이 나면 되우… 후후, 날래 들어가우. 큰아버지두 인차 내려올게우. 누군가 자꾸 가만히 메도티(메돼지) 옹노 놓아서 그걸 걷우러 갔응게…

큰어머니는 마치 자신들이 옹노를 놓은듯 괜한 로파심으로 누가 자기말 들었나 주위를 슬쩍 일별했다. 이 호젓한 산골에서 누가 길섶에 도적놈 같이 숨어서 늙은이 말을 엿들으랴만 동물보호법이 출시되고 동물권을 신장하는 요지음 풍조에서 사냥, 옹노, 사냥총 같은 말은 온라인에서 검색으로 차단된 언어만큼이나 금기사항으로 경직되고 산골에서는 사용이 정지된 언어로 되여버렸다.

-빈손으로 와도 반가운데 올적마다 무슨 짐을 이리 마련했노. 호호, 횡재했다이.
큰어머니는 우리가 준비해간 물건들의 내용물을 알고 사양하는체했지만 섬약한 두 어깨우에는 봄날같은 아지랑이 물결쳤다. 눈치 빠르게 민우형을 도와 물건들을 집안으로 옮겨갔다.

그동안 나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텔레비죤 수신안테나까지 장치할만큼 집안은 철새들의 보금자리처럼 엉성한 구석이 없이 알뜰하게만 꾸려져있었다.

짐을 옮긴 큰어머니는 시간이 이른데도 저녁차비에 서둘렀다.  

민후형이 나의 길잡이로 나섰다. 집에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산비탈을 의지하여 백여평 더 되는 길다란 벽돌집이 있는데 계사라고 한다. 집보다 훨씬 높게 설계한 계사지붕우로 렬차의 환기창모양의 구멍들이 줄느런히 늘어섰다. 출입문밖에는 새하얀 석회석이 깔려있었다. 출입자들에게 소독하게 하느라 그랬지만 따지고보면 임의의 출입을 무언으로 제지시키는 계산이다.

-무슨 쓸데가 있다고.

민우형은 먼저 대충 문지르는체했다.

-그래두 닭사양은 까다로워서 지킬건 지켜야지. 그러잖아두 요새 인터넷에선 세계조류인플루자엔으로 시끌벅적인데.

-그게 뭔데?

-말하자면 조류독감이라구, 일단 전염되면 페사률이 100%이고 아주 무섭다던데.

-닭병이야 맨날 있는 일인데. 그래서 닭사양이 시끄럽지.

-그게 아니요. 그 병은 닭오리 같은 가금류에도 전염시키고 변종되면 사람에게도 전염시킨다는데. 아직까지 세계적으로 왁찐이 안되는 병이라우.

세계위생전문가들은 조류인플루자엔이 변종되여 인간에게 확산될 경우 사망확률이 천문수자라는 최악의 예언씨나리오를 만들어내고있다. 민우형은 이런 뉴스를 알리가 만무하다. 하지만 계사앞에서 민우형에게 재수없게 질질 흘리며 아는체하기 싫었다.

-뭐 이런 깊은 산골에까지 스며들가.

민우형은 인터넷을 모르고 신문을 모르는 산골의 산장보스다. 하기에 기러기 같은 철새들이 조류독감을 전파시키는줄은 모르고 사람이 들락거려서 전파되는줄로만 안다. 농민식의 통쾌와 무지는 때론 좋은 점은 있나본다. 하지만 조상님들이 대대로 내려오면서 지킨 그 무지와 안일함은 이제 좋은것보다 나쁜것이 더 많다.

독한 닭똥냄새가 풍기는줄로 알고 가까이 가길 저어했지만 정작 안에서는 닭 특유한 노린내와 야싸한 소독수냄새까지 풍겨나와 기웃거리기엔 무리가 없었다. 지저분할줄 알았는데 계사안은 깨끗하게 거두어져있었다. 두 늙은이가 무슨 힘으로 이렇게 깨끗하게 거두었는지 의심할 지경으로 알뜰하기만 했다. 하지만 현대화한 립체사양장과는 대비가 안되게 장비가 평면적이였고 설계가 전통적이였다.

이 계사는 작년부터 운영되였는데 이 계사로 민우형과 큰아버지는 약간한 트러블이 있었다. 민우형은 두 늙은이가 무슨 힘으로 닭치기를 하겠냐 굳이 만류하는 립장이였지만 큰아버지는 오래전부터 설계한 일이라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밀고 나갔다. 큰아버지의 고집은 끝내주게 집요했다.

아들이 심드렁하자 큰아버지는 조카인 나에게 투자금을 요구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러 내가 다시 민우형을 찾아 설복하고 나도 지원금을 마련하는 등 웬간히 들볶으면서 끝내 이 계사가 지어졌는데 지금은 민우형이 더 관심을 보인다고 했다. 양계업이 잘 안되고 병에 약한것을 두루 보면서 양계가 위험수위가 높다고 그냥 부정하던 립장에서 아버지가 토종닭을 무탈하게 천마리까지 키우자 퍽 신기한 모양이다. 나도 내색은 안냈지만 대체로 민우형 같은 립장이였다. 내가 설복한것은 나로서도 믿기 어려운, 늙은이들이 이제 몇해 살겠냐, 생전에 하고픈 일에 그냥 토를 달지 말고 무조건적으로 밀어주라는 통념에 가까운 소리를 했을뿐이다. 민우형도 림장운영에서 산지기의 지위를 잘 아는지라 아버지에게 타협했다.

-큰아버지 힘으로는 힘들겠는데.

-누가 아니라니. 그런데두 닭을 안팔아.

-토닭알이 지금 값이 얼만데 닭을 팔겠소.

-그러면야 좋지. 근데 그게 아닌가봐. 니 큰아버진 닭을 기르는 재미 하난가본다. 값을 아무리 높게 쳐주어두 안팔아. 지금 팔아두 본전 빼고도 일만오천은 버는데.

-그럼 이상하네.

-늙은이생각 누가 아니?  이전에 개를 길러두 팔거나 잡아먹는걸 봤니?

맞다. 큰아버지는 그랬다. 그러고보면 이 집 황둥개두 퍼그나 여기에 오래 있은것 같다. 내가 다니면서 그냥 보았으니.

-좌우간 못말려. 짐승생각이 끔찍두 하지무.


내가 계사를 둘러보고 샘물터에 내려가자 앞산으로 통한 자드락길에 가을해빛이 한가롭게 내려앉았고 그속에 큰아버지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다. 어디로 보나 가냘프기만 한 늙은이 같다. 웰빙시대를 자랑하는 현대에서는 뚱보가 외면되고 말라꽹이를 선호하지만 마른 사람에게도 고충은 있는것이다. 큰아버지의 마른 체구는 인위적이 아닌 세월이 지나가면서 떨구어놓은 랑패한 년륜의 흔적이였다.

-왔냐?

-예, 큰아버지.

저만치에서부터 큰아버지가 알은체했다. 큰아버지의 오른손에는 재빛나는 토끼 한마리가 건들거리고있었고 다른 손에는 철사뭉치가 들려있었다. 남이 가만히 놓은 옹노를 해체한 모양이다.  

-산구경 왔더냐?

경륜이 있는 로인들은 길게 말을 하지 않지만 한두마디에 모든 내용물을 담을줄 안다. 왔냐는 반갑다는 인사고 산구경왔냐는 나의 산행취미를 잘 알기에 하는 소리다. 민우형은 나의 산골행을 치희로 알고 괜한 멋이나 폼 잡는다고 성시사람들을 모조리 싸잡아서 흥흥 비웃지만 큰아버지만은 민우형 같은 거부반응을 모른다. 알고모르고를 떠나서 토속철학을 진정으로 깨달아 이 세상사에 대한 너그러움이 많은 늙은이의 관용이다. 타인에 대한 참회를 모르는 관용이란 가장 큰 성숙이다. 기실 가장 간단하면서도 하기 쉬운 관용을 모른다면 이상스럽지만 이런 관용을 깨치자면 경륜이나 지혜가 뒤받침되여야 비로소 얻어지나본다.

  
-호호. 귀한 손들이 오는 날을 아는가베.

집안에서 저녁차비를 하던 큰어머니가 쫑드르르 달려나와서 큰아버지 손에서 토끼를 받아들었다.

-그러게 말이우. 아깝게 옹노에 걸려들었더구먼.

큰아버지는 민망해하는 표정도 없이 큰어머니에게 기껍게 맞장구치면서 토끼를 넘겨주었다. 인생이 침묵밖에 없는줄로 알았던 큰아버지가 늙으막에 만난 로친에게는 너무도 살갑다. 민우형이 나에게 애들처럼 가만히 웃어보였다. 그림이 재미있지? 민우형의 표정은 이런 말을 하고있었다. 버릇없이 아버지를 놀리다니. 나는 무언으로 이런 말을 하면서 민우형에게 주먹을 흔들어보였다.


     3


큰아버지의 결혼은 한편의 코믹드라마 같은것이였고 결혼후의 생활 역시 코미디 그 자체였다. 아니 코미디라면 좀 심한 말이 되고 엄격히 설명하면 너무도 도탑다 해야 비슷하다. 너무도 도타운 나머지 즐거운 후유증 투성이다. 다행이도 큰아버지네 로인부부 생활이 산지기의 집에서, 산의 어둠과 숲속의 황혼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져서망정이지 그것이 마을에 퍼지면 오지마을 입이 다사한 아낙네들의 빨래터나 화투판의 히히하하로 조크될 소지가 다분했다. 그만큼 큰아버지의 로년생활은 우리들의 생활통념으로는 리해가 불가한 그림투성이들이였다.

민우형은 마당에서 장작을 패다말고 토끼를 손질하고있었다.

굴뚝에서 연기가 시름없이 피여오르고있었다. 머리를 길게 풀어헤치고 흩어지는 산골의 연기는 바야흐로 단풍이 들어서 타는 뒤산을 배경으로 하여 더욱 시름없었다. 소나무숲속 어디에선가 산새들이 우짖고있었고 거밋한 음영이 내려앉은 뒤산 비탈속에서 산까치들이 울어대고있었다. 민우형이 보면 시시한 그림들이라 외면하고 던져버리는 이런 풍경을 보러 나는 산골에 오는것이고 이런 풍경에 무작정 감동한다.

밤마다 듣는 소쩍새의 울음소리와 앞산 참나무 우둠지에서 콱-콱- 불길하게 우는 까마귀 울음소리도 게으름없이 들어준다. 이 모든것은 생명의 소리고 자연의 소리다. 산골에는 목가적인 풍경, 시적 풍경, 산문적인 풍경들이 산적해서 나 같은 감상주의자들의 취미를 일시에 만족시키기엔 너무도 족하다. 나는 디지털 카메라에 이것저것 담기 시작하였다. 렌즈에 잡힌 화면은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되려 인위적인 풍경 같다.

민우형은 자주 올라오는지라 장작을 패주고 토끼 손질을 다 끝낸후에도 이것저것 거두어주고는 래일 저녁편에 오기로 약속하고 저녁도 먹지 않고 나의 차를 몰고 마을로 내려갔다. 사람두 고집은… 큰어머니는 차꽁무니를 섭섭하게 바라보면서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시계를 보니 아직 저녁때가 이른지라 나는 산성터를 조금이라도 둘러볼 생각으로 앞산으로 향했다. 기다리게 하지 말고 얼른 내려오게, 하는 큰어머니의 당부가 등뒤에서 들렸다.


앞산 자드락길은 내가 해마다 거니는 길이라 생소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린시절에 뛰여놀았던 길이다. 자연은 일탈을 꿈구는자들의 도피처이지만 기실 자연은 탐닉이나 열광적인 음풍농월의 대상은 아니다. 자연은 자연일뿐이다. 자드락길은 아름드리나무가 들어서는 시점에서 희미해졌다.

조금 더 올라오니 민둥산이다. 산성안의 민둥산, 밤나무, 피나무, 참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섰던 이곳은 이제 민둥산으로 벌거벗고 낫자루만한 나무가 이제 겨우 자라고있었다. 해마다 겨울이면 민우형은 도끼와 톱을 든 마을사람들을 휘동하여 여기로 올라와서 벌목하는데 이 민둥산은 민우형과 마을사람들손에 발가벗겨진것이다. 저도 모르게 가벼운 탄식이 나갔다. 천년의 고요와 풍성을 자랑하던 산천이 인간에 의해서 무자비하게 수탈당할수 있다는 현실을 도저히 인정하기 힘들었다. 더구나 성터가 자리한 곳에서.

무너진 산성을 따라 뻗은 비탈길은 큰아버지가 다니면서 낸 비탈길이다. 천년의 바람과 비, 눈속에서 무너져내린 산성의 커다란 돌에 이끼와 버섯이 피여나있었다. 리념이라고, 리념이 현장이라고 확신하던 나의 생각은 무너져내린 산성터를 볼 때면 순간순간 체념이 솟구치기도 했다. 이 체념으로 산성과 그 숲에서 이상하게도 약간은 비습한, 물고기 비린내 같은 냄새를 맡기도 했다. 어디에서 냄새가 날가? 그래서 목이 마르는지…

알쏭달쏭한 환각 같은 도취도 잠간, 베여진 나무그루터기와 무너진 산성에 렌즈를 맞추고 셔터를 누르는판에 갑자기 등뒤에서 꿀꿀하는 투박한 동물의 경악한 소리와 둔중한 파찰음이 동시에  들려왔다.  

메돼지, 메돼지떼가 나타난것이다. 거의 본능적인 감각이였다.  

메돼지떼는 얼핏 헤여보아도 10여마리였는데 악연히 놀라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나의 눈앞을 유유히 지나치고있었다. 큰 암놈이 작은 새끼돼지떼를 거느리고있었다. 천년고요를 자랑하던 산성터에 나타난, 파괴력이 무진장한 생명체가 어쩐지 신기하기도 했다.

국경절전에 농민들의 신고를 받고 메돼지에 의한 농작물피해를 조사한적이 있다. 거기에서 한 농민이 국가에서 산림을 란벌하니 심산에 있던 메돼지떼들이 서식지가 줄어서 농작물을 습격한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당시 되지도 않는 얼토당토한 농민식 불만으로 알고 흘려들었는데 눈앞의 정경을 보고 잠간 그럼직하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큰아버지가 이 산에 붙인 이름은 《도투봉》이다. 도투란 시골말로 돼지를 이르는 말인데 해석하면 메돼지봉이라는 말이 된다. 그러면 앞산에 메돼지가 많다는 말이다. 천년전에 인간중심으로 설계되였던 산성은 이제 메돼지가 주인이 되나 생각하니 서글프기도 했다.

덧붙이는 해석이지만 현재 연변지구에서 흔히 보는 메돼지는 대륙메돼지로서 성장하면 수컷은 250- 350키로그람까지 육박한다. 메돼지는 사납고 날카로운 송곳이(입밖으로 12센치까지 자란다)를 가지고있는데 저돌적인 공격력으로 담이 있는 포수도 사냥을 꺼린다. 메돼지의 서식지는 원래 깊은 산, 특히 활엽수가 우거진 곳이다. 전업명칭으로는 초식동물로 분류하지만 토끼, 들쥐, 곤충까지 닥치는대로 잡아먹어 잡식성으로 분류할수 있다. 교미시기는 대개 겨울인 12- 1월사이고 임신기간은 4개월이여서 따스한 봄철인 4- 5월에 7-12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짐승가운데서 쥐와 토끼 다음으로 메돼지의 번식력을 꼽을수 있는데 이는 이들의 생활습성과 진화과정에서 적응한 계절생리의 승화로 볼수 있다.

다시말해 빠른 생식력은 생식주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고 영양상태의 우렬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현대 메돼지는 일년에 두차례의 번식이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재배한 농작물에서 무진장하게 영양을 섭취하기때문이다. 암컷 한마리가 일년에 15-20마리의 배태가 가능하다. 섬뜩할만한 기하급수가 아닐수 없다. 인간의 번식력과는 전혀 비하지도 못한다.

게다가 메돼지의 천적인 동북호랑이와 메돼지 새끼를 념념히 노리던 무리승냥이가 사라진 현재, 이들의 번식은 물리적인 가속도를 보인다. 더욱이 지구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로 군림하던 인류가 법까지 출시하면서 빙그레 관용을 베푸니 호시절이라고 무서운 군체를 형성하고있다.

하지만 문제는 메돼지들이 돌연적인 서식환경의 이변으로 취의습성이 패습으로 변하여 농작물에 폭력적이고도 무절제한 피해를 주는것이다. 자연계에서의 생태환경망에 구멍이 났다는 설명이 된다. 흥과 쇠는 자연현상이지만 일방을 생존전제로 하고 견제도 하는데 여기에 어느 코가 헐망하거나 풀렸다면 생태계는 엉망이 된다. 그럼 인간은?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마찬가지다.

산으로 올라올 때 큰아버지는 메돼지가 많네라- 했는데 정말이다. 씩-씩 거친 숨을 몰아쉬는 소리와 와삭거리는 소리가 혼잡하게 들렸다. 오싹 무서움이 들었다. 무리돼지들이라 겁날 필요 없다. 큰아버지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꿀-꿀- 어미돼지가 선두에서 소리치자 뒤처졌던 새끼들이 부리나케 뒤쫓아가고있었다. 뒤늦게야 생각하고 나는 사진기를 꺼내서 보기드문 정경을 찍어댔다. 아주 원시적인 자료로 쓸수 있는것이다.

틀림없는 공존이다. 이전의 메돼지는 사람을 보면 저돌적으로 덮치거나 튀지만 현대의 메돼지는 덮치지도, 튀지도 않고 유유하다. 련속적으로 셔터를 눌러댔다.  

어디나 메돼지들이 뚜져놓은 흔적들뿐이다. 생명이란 이렇듯 위대한것이다. 메돼지는 철저한 모계사회다. 수컷은 태여나서 2년만 지나면 무리에서 완전히 쫓겨서 외홀로 생활해야 한다. 사냥군들이 외돼지가 무섭다는건 외돼지는 호르몬이 무진장한 수돼지이며 수컷은 저돌적인 공격성을 강행하기때문이란 뜻이다.


산에서 홀로 웬간한 짐승 만나도 괜히 싫어난다. 메돼지가 안보이지만 산으로 올라올 때의 흥이 사라졌다. 어느덧 해도 산넘어로 숨어버렸다. 나는 인차 돌아서서 내려왔다.


-구구구.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는 사처에 널려서 먹이를 찾는 닭을 불러들이고있었다. 훈련을 잘 거친 닭들이라 구구소리가 떨어지기 바쁘게 저마다 무섭게 날개를 퍼득거리면서 달려왔다. 천마리의 닭들이 모여드는 정경은 가관이다. 그리고는 계사로 달려들어갔다. 계사안에는 알뜰한 강냉이혼합사료 먹이가 있다. 닭들이 계사안으로 다 빨려들어간후에도 큰아버지는 혹시 게을러 늦장부리는 닭들이 있을가 하여 한참이나 구구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계사의 출입문에 자물쇠를 철저하게 잠구었다.

-왜? 메돼지를 봤니?

-예? 예.

큰아버지가 알고있는 일이 신기하다.

-보리저녁때쯤엔 그놈들이 그쪽을 거쳐서 남대천쪽으로 내려가느니라.

-메돼지떼가 무리로 너무 성한가봅니다.

-우리 족속들두 짐승처럼 저렇게 성해야 하는데…

큰아버지는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예에?

무슨 소리?

큰아버지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 일시 알아듣지 못했다. 큰아버지의 아래말을 기다렸지만 큰아버지는 다시 아래말을 잇지 않았다.


집안에서는 구수한 고기 익는 냄새가 솔솔 풍겨나왔다.

큰아버지도 술에 약하고 나도 술은 피하는지라 저녁은 인차 끝났다. 산골의 가을밤은 온다는 기별도 없이 문뜩 어두워진다. 큰어머니가 전등을 켰다. 풍력을 리용한 발전기는 변압기까지 안장했는지라 상태가 좋았다.

-작년에 조카가 힘써준덕에 등잔신세 면했다네.

큰어머니가 또 낡은 화제를 끄집어냈다. 날 보면 늘 하는 소리다. 기실 이 발전기는 큰어머니의 친아들 김기자와 민우형이 큰 몫을 막아서 산것이다. 내가 한일이라면 먼저 아이디를 낸것이고 입으로 벌어먹은셈이다.

-큰어머니, 양초를 가져왔는데 오늘 저녁은 전등 끄고 양초를 씁시다.

-호호. 또 옛말 듣자구? 나두 그게 좋겠수.

내가 전혀 엉뚱한 제의를 했는데도 두 늙은이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순순히 따라주었다. 민우형이라면 질색했으련만… 심산의 밤에 환한 등불이 어쩐지 격에 맞지 않는것 같았다. 어려서 나는 이 산성터에서 겨울의 깊은 밤에 화로에 베개만한 감자 파묻고 등잔불밑에서 베개로 턱을 고이고 발장난치면서 큰아버지에게서 동화 같은 옛이야기를 들었다.

하기에 산골의 밤이라면 먼저 석유등잔불이 생각나고 등잔불이 있어야 옛말도 구수했다.  거기에 소쩍새의 울음소리와 밤새들의 울음소리가 가미되면 이건 특혜다.

큰아버지는 이 산성터 마을이 문화대혁명 발발직전에 해체되고 마을사람들이 남대천으로 내려갔다고 했으니 아마 60년대 중기가 될것이다. 민우형은 그때 소학교에 다녔을것이여서 성터생활을 기억하련만 모조리 기억 안난다고 했다. 하지만 난 기억의 편린들이 쪼각처럼 남아있다. 한여름날 모기를 쫓는 쑥타래가 빨간 불똥을 튕기면서 섬돌밑을 감돌 때면 마을사람들은 하나둘 모여들어 이야기판을 벌렸고 앞산 소나무숲에서 부엉이가 우는 한겨울이면 부엌에서 장작이 탁탁 소리를 내고 눈길을 헤치고 모여든 동네어른들이 이야기판을 벌리군 했는데 당시 산성안에 자리잡았던 산성마을은 아직 전기혜택을 받지 못한 그런 오지였다. 거기에서 나는 성안의 세상을 알아가기 시작했고 성터밖의 세상을 배우기 시작했다. 전기도 없는 깊은 산골의 그 세상과 그 세상이 나에게 남겨준 찬란한 빛은 하냥 그리운 동년이였고 돌아가고 환원하고 싶은 세상이기도 했다. 그 세계에는 밝은 전등과 문명이 욱복하지 못하더라도 소년은 벌레가 탈피하는 우화과정을 거쳤다.

-조선전쟁에 참가할 시기 큰아버지는 년세가 얼마였습두?

내 나이 18세였다. 큰아버지는 틀림없이 이렇게 운을 뗄것이다. 나는 큰아버지의 이야기를 유도할 때마다 꼭같은 질문을 한다. 조선전쟁참가시기에 년세가 얼마나 됐냐고.

이런 유도는 내가 할 몫이다. 아니나다를가 큰아버지는 내 나이 그때 18세였다고 대답하면서 누울 차비를 했다. 나는 눈치있게 인차 베개를 가져다가 큰아버지 옆구리에 고여드렸다. 큰아버지는 이야기를 할 때면 언제나 비스듬히 누워서 하길 즐겼다.

큰아버지- 최춘보라는 촌스러운 명함을 가지신분이다. 함자를 외글자나 약간 튀게 짓는 지금은 춘보라면 촌스럽다 하겠지만 큰아버지세대면 억보라는 이름도 있었으니 촌스러운 함자도 아니다.

-아니, 열여덟이라면 지금 고중생인데 전쟁에 참가하다니.

큰어머니가 뜻밖으로 흥미를 가졌다.

-큰어머님은 아직까지 큰아버지 그런 얘길 못들었습니까?

-뭐 나하고는 전쟁 참가했다는 소린 했지만두 상세한 얘긴 안했다네.

-그때 열여덟이라면 자란이지(어른). 장가까지 다 가는 세월인데 어리다니.

큰아버지의 입대를 알자면 먼저 큰아버지의 전쟁참가배경을 알아야 한다. 당시 산성터에는 20여호가 살았는데 그저 성터마을이라고 두리뭉실하게 불리웠다. 성터에서 제일 가까운 마을이 남대천이였는데 성터마을을 남대천행정관할구역에 편입시켜 남대천사람들은 성터마을을 작은 남대천으로 부르기도 했다.

큰아버지의 입대는 참으로 류례가 없는 입대이기도 했다. 당시 생존해계셨던 조부님은 토지개혁을 맞으면서 부농으로 획분되였다. 성터안 어디쯤인가 조부님이 땀으로 일군 몇무지의 화전밭이 있었으며 그저 굶어죽지 않을 정도의 소출이 났다는데 어이없게도 부농으로 판정난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부농의 처지에 대해 어떤 처경이였는지 상상하지 못하지만 부농자식에게 외눈박이 개딸년도 시집오기 꺼렸다면 비슷한 설명이 된다. 중국 광대한 지역에서 벌어진 이 토지개혁 배경에서 지주, 부농으로 획분된 수많은 시골농민들은 그후로 세대를 내려오면서 련대적인 죄를 물려가며 가장 비천한 밑구석에 구겨박혔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부지런해서, 치부책이 좋아서 잘 살았다는 리유 하나로 개팔자로 전락한것이다. 큰아버지와 아버지도 조부님의 부지런함으로 부농모자 덤터기를 쓰고 밑바닥에서 헐떡거리는 신세가 됐다.

50년대를 맞은 첫해에 조선전쟁이 발발했다. 이듬해 겨울 남대천마을에서 고급합작사주임이 올라왔다. 그리고 전쟁에 나가라고 성터마을 젊은이들을 선동했다. 국민당군대와의 전쟁중에서 마을 젊은이들이 여럿이 죽었다는 사망통지서를 받은 성터마을에서는 누구도 지원하지 않았다. 사지판에 왜 나갉 그런데다 내막을 아는 마을 로인들은 조선이라면 같은 종족들이 사는 고장인데 거기로 왜 가서 피를 나눈 같은 종족에게 총대를 겨누냐 하면서 질색했다.

이튿날 다시 마을에 올라온 합작사주임은 큰아버지를 불러냈다. 거기에서 어처구니없는 협상이 벌어졌다. 그리고 큰아버지는 지원군의 누비옷을 입고 조선으로 나갔다. 큰아버지는 세계를 진감한 상감령전투에 참가했고 운명적으로 생존했지만 그대신 오른쪽 귀를 잃고 고막까지 터진데다 화상으로 뒤잔등이 뱀껍질처럼 터덜터덜한 무늬를 가진 페인몸으로 마을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합작사주임과 대판으로 싸웠고 석달간 영창신세를 지고 겨우 풀려 나왔다. 그리고 침묵했는데 그 침묵이 너무도 긴 턴넬을 지나왔다. 너무나도 어두컴컴한 턴넬을.

입대지원자가 없어 제비놀이라는 가장 원시적인 방법까지 동원된 당시 그 합작사주임은 큰아버지에게 전쟁에 참가하면 그 대가로 부농모자를 벗겨준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남대천고급합작사주임에게 그럴 권리가 있냐 의심되지만 상부에서 내려보낸 입대자 명액을 완성하려고 발악하는 주임에게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방법만이 남았던것이다. 병신이 되여 마을로 돌아온 큰아버지에게는 아직도 벗겨주지 않은 부농모자가 얼마나 원통했을가. 그 모자는 조부님이 사망하고도 20년이 지난후에야 큰아버지 머리에서 록각같이 떨어져나갔다. 제일 투박한 투구보다 무거운 그런 모자… 중국 특유한 모자였다. 모자를 벗겨준다는 정부의 정식통지를 받고도 큰아버지는 침묵했다. 아버지는 너무 일찍 요절하다보니 큰아버지와 같은 고통을 덜 받으셨는지는 몰라도 만약 생전이였다면 아버지는 어쩔가. 큰아버지의 말씀에 의하면 아버지는 큰아버지와 달리 성정이 바지랑대처럼 꿋꿋이 살았다 했다.

산성터에서 남대천으로 내려올쯤에 아버지가 횡액으로 돌아가셨다니 내가 큰아버지집으로 올 때는 소학입학직전이다. 그때로부터 나는 큰아버지집에서 민우형과 함께 뒹굴면서 자랐다. 그러니 큰아버지라도 아버지와 다름없었다.

-저런. 약속했으면 그 약속 지켜야지.

큰어머니가 자기일처럼 분개하며 합작사주임을 저주했다. 큰어머니가 말한 그 합작사주임을 나도 알고있다. 해방전에 게으른덕으로 알뜰한 가난뱅이신세였던 그는 광복후에 고농으로 성분을 하사받고 발랑 까진 입덕으로 벌어먹던 사람이였는데 천성이 원래 게을러서인지 합작사주임도 오래 못하고 서발막대 휘둘러도 걸리는것 없는 구차한 생활을 그냥 하다가 젊어서 사지를 후둘후둘 떨더니 사망했다.

-잘 모르지만 듣기론 내가 살던 마을에서도 령감님과 비슷한 일들이 있다 했수.

큰어머니가 조용히 말했다. 사람 사는데가 다 비슷하지. 큰아버지가 구들이 꺼지는듯한  한숨을 내쉬였다. 앞산 성터 어디에선가 소쩍새가 울어대기 시작했다.

양초는 산골집의 어둠을 사르면서 천정우로 유령같은 그림자를 잠간씩 만들면서 조용히 피여오르고있었다.


6.25 조선전쟁에 지원군으로 억지로 참가하고 전쟁이 끝나 중국으로 들어온 큰아버지의 혼인은 부모들의 일방적인 선약으로 이루어진 혼인이였다. 듣자니 큰어머니는 귀가 꽉 막힌 장애인이였는데 그것도 병신이 된 부농자식에겐 과분할 정도라 했다.

큰아버지가 큰어머니를 잃고 홀아비로 날쯤은 민우형이 중학을 다닐 무렵이니 지금으로부터 30여년전이다. 당시에도 홀아비와 과부가 맞서서 새 가정을 이루는 일이 흔했지만 지금처럼 활발하지는 못했다. 우선은 세속적으로 3년제를 지낸후여야 하고 자식들의 반대가 만만찮았기에 상처하거나 상부하면 홀몸으로 살아야 한다는 팔자를 운명적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큰아버지는 40대에 홀아비가 되였고 혼자 민우형과 나를 길렀다.

큰아버지는 결혼후 민우형우로 자식 셋을 죽이고 민우형을 겨우 외독자로 살렸다. 그리고 조카로 내가 유일했다.  어느 집이나 자식들이 우글거리는 당시의 형편에서 큰아버지의 바램은 자식농사였다. 하지만 큰어머니는 큰아버지의 바램을 무시한채 먼저 세상을 떠났다. 생산대시절 큰아버지는 성터안에 있는 원경지지기로 있었다. 그러니 큰아버지의 일생은 이 성터안에서 보낸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1980년대초 생산대가 박살나고 도거리가 실시되면서 다시 마을로 내려왔지만 민우형이 림야를 임대하자 얼싸 좋다 하고 다시 이 성터로 들어왔다.

큰아버지의 혼사는 내가 성사시켰다.

당시 나는 자그마한 신문사에 취직해서 문학부 보도기사를 다루는 기자로 있었는데 어찌하다가 나와 한부에서 일하는 김기자의 모친이 홀몸인것을 알았다. 슬그머니 알아보니 나이차도 별반 없고 이리저리 견주어보아도 시골령감과 성시안로인이라는 차이점만 제외하면 별반 무리가 없을것 같았다. 하지만 다시 알아보니 김기자도 역시 농촌출신이였다. 그러면 그의 모친도 농촌출신이라는 말이 된다. 아무리 견주어봐도 이만한 자리는 흔치 않았다. 게다가 김기자의 말에 의하면 모친이 성시생활에 적응이 안돼 불안해하면서 시골을 그린다고 한다. 이보다 더 합당한 자리가 어디에 있을고… 얼싸 좋다 하고 어느날 술을 마시는 기회에 넌지시 말을 걸었다. 김기자도 반대하는 기색이 없이 흔연히 가세했다.

이런 일에는 뭉기적거릴 필요가 없다. 다음날부터 서두르기 시작했다.

나는 큰아버지를 찾아서 남대천으로 내려갔다. 민우형은 질색했지만 내가 부득부득 우기면서 큰아버지에게 말을 걸었다.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조카보기가 민망해서 겉으로라도 펄쩍 뛰면서 싫다고 외면할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였다. 큰아버지는 아무런 말씀이 없다가 술 한잔 마시자 그래도 사람은 먹물을 먹고 글발 알아야 한다네. 이제라도 이런 생각을 해주니 어디 한번 보세. 큰아버지는 날을 추켜세우면서 민우형을 흘겼다. 이놈아, 넌 아직까지 이런 헴도 못차렸냐. 침묵만 알던 아버지에게서 무언의 꾸중을 들은 민우형이 놀라던 모습은 지금도 상기하면 실실 웃음이 나온다.

그 자리에서 나는 큰아버지를 끌고 상경했고 그날 저녁으로 두 로인을 대면시키는 절차에까지 돌입했다. 그날 처음 보는 김기자의 모친은 큰어머니로 욕심이 날만큼 눈정기가 살아있는 안로인이였는데 오히려 큰아버지가 짝질것 같았다. 안로인을 보는 순간 나는 이 로인이 나의 큰어머니 후보로 될것 같은 좋은 예감이 들었다. 두 로인님을 김기자네 집에 두고 내려와서 커피를 반잔도 마시지 못했는데 우리더러 올라오라는 호출이 떨어졌다.

짧은 만남에 무슨 말이 오가고 어떤 합의를 이루었는지 궁금해서 한달음에 달려갔다. 큰아버지는 그저 시물시물 웃어댔다. 큰아버지의 이런 기색은 처음 보았다. 그리고는 한마디만 했다. 반대가 없다면 난 래일 이 로친을 데리고 내려가겠다고. 나와 김기자는 마주보면서 한참동안 그저 말없이 악연히 놀라기만 했다. 래일 데리고 간다니?  안로인도 이미 대답했는지 처녀들처럼 머리를 수그리고 앉아서 대답을 피했다. 난 그때에야 처음으로 로인들도 년륜과는 관계없이 로인이기에 먼저 남자이고 녀자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도 그럴 생각이세요?  김기자가 어머니의 의중을 알 모양으로 물어보았지만 그 모친은 그냥 대답을 회피했다. 어머니의 무응답을 대답으로 깨친 김기자는 쇼크를 받았는지 한동안 말이 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자식된 도리로서 모친을 극진하게 모셨을 김기자에게는 모친이 령감을 만나자마자 당장 따라 떠나겠다는 현실에 잠시 락망했는지도 모른다.

운명적인 만남이라고밖에는 다른 토를 더 달지 못할 사연이다.

그럼 누님이랑 매형이랑 알려야겠네요. 김기자가 다시 이런 말을 할쯤엔 그 모친이 큰아버지에게 술상을 받쳐올리는 시점이였고 그날 밤으로 시내에 있는 그 누님과 매형이 눈에 잠기를 가득 매단채 무슨 일 생겼냐해서 득달같이 들이닥쳤고 이들도 모두 찬성하는 립장이라 까다로운 질문도 없이 무난히 매듭을 지었다.

큰아버지 말대로 안로인은 큰아버지를 따라 내려왔다. 그저 틀린것이라면 하루가 아니라 하루 더 보태서 이틀이 걸린것뿐이다. 이튿날 민우형도 소식받고 올라왔다. 이 하루동안 우리 두 집에 딸린 식구들은 두 로인을 데리고 공원을 돌았고 백화점에 가서 산에 올라가 쓸 물건들을 닥치는대로 샀다.

그뒤 나와 민우형, 그리고 김기자, 김기자네 누님과 매형이 마주 앉아서 인사를 나누었고 거기에서 가장 현실적인 타협방안을 합의했는데 만약 어느 일방이 먼저 사망했을 경우 소속일방에서 전적으로 책임지고 장례절차를 치르기로 했다.

큰아버지 그때 년세가 65세였고 안로인은 두살 어렸다.

거기에서부터 큰아버지의 알뜰한 새 생활이 시작된것이다. 그로부터 로인들의 잠시 만남으로 착각한 우리들을 통절하게, 당혹하게, 민망하게 만든 두 로인의 사랑공연이 줄줄 터져나왔고 그때마다 우리들은 어쩔바를 몰라했다.

성터의 막에서 따로 살림을 차리고난후 가장 먼저 불거진것은 혼인증 취득문제였다. 큰아버지는 아무리 늙은이들의 값이 없는 혼인이라도 혼인증만은 있어야 된다고 고집부렸다. 큰아버지에게 이런면도 있었나. 아무리 만류해도 큰아버지를 이길것 같지 않았다.  이런 고집정도로 나간다면 불쑥 첫날 큰상이라도 받겠다고 하면 어쩔가싶어서 끝내 사진 찍고 혼인등기소로 가는 코스를 밟았다. 혼인등기가 해결될 무렵 나는 큰아버지가 이제 어디로 튈가 희미한 근심을 해보았다. 청춘시절 병신 안해를 맞았던 그 상처가 보상심리로 작동했는지 누구도 모른다.

아니나다를가 그뒤로 인차 다음문제가 불거져나왔다.

이거 젖먹이를 하나 얻자했더니 안되네.

어느날 술을 마신 큰아버지가 이런 소리를 했다.

무엇이? 젖먹이?

나와 민우형은 악연히 놀라는 상통이 되여 일시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먹통이 되여버렸다. 입에 담기도 좀 거시기한 문제였다.

나는 큰아버지가 치매에 걸리지 않았나 걱정이 앞섰다. 큰아버지는 이런 소리를 질질 할분이 아니다. 셈세기를 옳바르게 하는 로인이면 절대로 이런 말씀은 삼가할것이다. 더구나 이붓아들인 김기자가 함께 앉은 자리에서… 나는 김기자가 모르는체 하하 웃는 모습과 큰아버지의 지각없는 말에 랑패상을 보이면서 몸둘바를 모르던 민우형과 형수의 낯색을 훔쳐보면서 치매라고 단정했다. 그리고는 큰아버지의 유머라고 얼버무렸다.

다행이도 큰아버지는 치매가 아니였고 그후로는 다시 그런 엉뚱한 소리를 자제하고 큰아버지의 원래의 침묵의 세계로 환원했다. 지금도 나는 큰아버지의 그 욕심을 유머라고 치부하려고 하지만 어쩐지 미심쩍은데가 많아서 쾌쾌한 심정은 아니다. 그러면서 큰아버지의 그 욕심을 최대한으로 관용하려고 노력한다. 자식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컸으면 저런 소리를 하랴 하고.

성터의 밤은 점점 깊어갔다. 달빛은 수천개의 나무잎사귀에 일시에 나긋하게 내려앉아 도글도글 부서지고있었다.  


이튿날 큰아버지는 큰어머니와 함께 닭에게 모이를 준후 나를 데리고 앞산으로 올랐다.  

-우에서 여기를 구경장소로(관광지) 정한다던데 그게 되니?

-글쎄요. 한다고 계획이 있지만 그게 어느때나 되는지 모르죠.

유적지 관광사업을 추진하는데 대해 지금 시시비비가 많고 정부측과 사학계의 견해가 상충된다. 정부측의 추진은 경제진흥을 계산하여 추진하는것이고 사학계의 견해는 유적지보존차원이다.

-여름에도 웃량반들이 들락거리던데 그게 된다면 여긴 또다시 들컹거리게 되겠구나.

-큰아버진 그게 싫으십니까? 형은 반기던데.

민우형은 처음엔 자기가 임차한 림야에 관광지를 개발하는데 반대했지만 정부측에서 보상문제까지 꺼내자 거액의 보상비에 끌려서 당장에서 지지립장으로 돌아섰고 지금은 언제나 추진하나 학수고대한다.

글쎄말이다. 큰아버지는 뒤에서 힘들게 따라오면서 무표정하게 얼버무렸다. 나는 무표정하고 침묵하는 큰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저 침묵이 어떤 용기에서 늦둥이 욕심을 냈는지 엉뚱한 상상을 해보았다.

산등성이를 따라 올라가면 무너진 성벽보다 보전이 좋은 성벽이 나타난다. 나는 부지런하게 사진기 셔터를 눌러댔다. 그러면서 가만히 큰아버지의 구부정한 몸체와 성벽을 순간순간 포착했다. 그때마다 디지털 카메라 화면에는 비애인지 슬픔인지 알수 없는 촌옹의 불쌍한 모습과 만년이끼가 낀 성벽이 겹치면서 성터의 새로운 화면이 제작되여나왔다.

가을의 냄새가 진진하게 매달린 산성,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산성의 축조 년대와 비밀을 깨치지 못하고있다. 한때는 명대유적이라고 했지만 산성의 형제(形製)건축조형으로 미루어보면 발해시기거나 그보다 휠씬 오랜 세월을 뻗어올라간 고구려시기일수도 있었다. 울창한 숲과 세월의 비바람에 씻기고 바래져 산성의 륜곽이 희미하고 성벽이 무너져내렸지만 천년이끼가 쌓인 산성의 잔해속에서 세월이 숨쉬는 소리와 생명연장의 소리가 들려왔다.

와- 어디선가 불길처럼 내닫는 우리 조상님들의 잔인한 섬광이 번뜩이는것 같고 환호 작약하는 함성이 푸르게 배여나오는것 같았다. 그리고 산성이 불러낸 귀기의 허깨비들이 활엽수와 침엽수 사이에서 배회하며 먼 후대의 두 생명체를 주시해보는것 같았다. 오싹하기보다 장엄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 성벽을 다 돌자면 네댓시간 허비해야 할걸. 큰아버지는 성벽보다 나무사이에 눈길을 주며 옹노가 있나 더 살폈다. 큰아버지는 여기서 옹노나 거두십시오. 저는 앞산 코숭이로 가서 봉화대를 보고올테니. 내가 말하자 큰아버지는 그럼 그래라, 내려갈 때 기척을 알려라, 하고는 나무숲속으로 들어가셨다.

잠간 앉아 다리쉼을 하고난후 다시 성벽을 따라 허위허위 올라갔다. 이 산성은 불규칙적인 삼각형 형태로 축조되였는데 병영자리가 지금도 있고 성벽길이가 무려 3천메터나 된다. 성벽안에는 홈채기가 있는데 병영자리다. 이 병영자리를 련계하는 참호자리도 그 륜곽이 알린다. 그리고 동문을 비롯해서 북문, 서문이 있고 남쪽에는 봉화대로 알려진 정자봉이 우뚝 솟아있었다. 성벽을 따라 부지런히 걸었다. 두시간이 지나 봉화대밑으로 올쯤엔 점심때가 거의 다가오고있었다.

봉화대, 어렸을때 올라가보았던 기억이 있다. 볼 때마다 웅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년이끼가 살아있는 돌올한 봉화대에는 서사적성채가 묻어있었고 그것이 오래동안 침묵으로 생명을 연장했다는 자체가 기적같다. 기암괴석으로 뭉쳐 솟아오른 이 봉화대는 사면이 다 깎아지른 절벽이여서 어찌 올라가느냐 덜컥 의심이 들지만 일제패망직전에 일본군 한개 대대가 여기로 진주하고 기다란 사닥다리 몇개를 이어서 올라갔다면 산성에서 봉화대가 차지하는 위치를 짐작할수 있을것이다. 우리 선조님들도 이런 방법으로 봉화대에 올라가서 연기를 뭉게뭉게 피워올리면서 봉화를 올렸으리라.

이 봉화대밑은 커다란 돌이 지천으로 깔렸는데 여기는 뱀들의 천국이다. 하지만 지금은 가을이여서 그런지 한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가 성터에서 최고봉이라 나무숲사이로 보이는 큰아버지 집과 계사가 게딱지처럼 납작하게 엎드려 가을해빛에 호득호득 떨고있는것 같았다. 여기에서 내가 태여난 옛터를 굽어보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40년전에 언녕 철거되여 흔적이 식멸된 성터마을, 파방전까지 대학생마을로 소문이 났다. 50-60년대를 거치면서 20여명의 대학생들이 배출되였는데 평균 한집에서 한명의 대학생이 나온것으로 계산된다. 산골치고는 드문 일이였다. 사람들은 우리가 올라선 이 봉화대가 보호신이라고 여겼으며 사람들은 해마다 늦감자를 캐는 가을이면 이 봉화대밑에 와서 동제를 지내군 했다. 지금 동제라면 사람들은 무슨 제인지 가맣게 모르지만 60년대까지 웬간한 시골마을에서는 모두가 동제를 지냈다. 소박맞은 동제는 이미 아득한 옛날로 가버렸다.


봉화대아래에서 웅크리고 늦장을 부리다가 퇴장하여 샘터자리를 찾아 내려왔다. 샘터자리는 골짜기 막치기에 있는데 한여름에도 샘물이 어찌나 차거운지 기름개구리들이 뛰여들면 당장에서 기절한다. 큰아버지는 샘물터가 그냥 있다 했다. 산등성이를 내려 샘터가 있다고 짐작되는 피나무숲속에서 두리번거리는데 욱- 하는 어지러운 소리와 함께 육중한 짐승들이 락엽을 짓밟으며 달아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육감으로 메돼지라는것을 알았다.

어제도 만났고 오늘도 만나는 메돼지다. 그러고보면 이 성터안에는 이제 번식력이 강한 메돼지도 어엿한 주인이 되였다. 어느때부터 메돼지들이 이렇게 번식했을가.

메돼지들이 달아났다고 짐작한후 그 자리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샘터자리가 나타나고 그 샘터아래 물이 질펀히 고인 부식토를 메돼지들이 질서없이 마구 짓이겨놓으면서 진흙목욕한 자리가 나타났다. 말그대로 메돼지들은 제 세상 만난것이다.

샘터에서 물을 마시는데 우로부터 인기척이 나면서 큰아버지가 나타났다. 다 돌아보았니, 큰아버지의 눈은 이렇게 묻고있었다. 큰아버지도 목이 마른지 샘물을 마셨다. 이제 관광지가 개발되면 이 샘물의 가치는 돈으로 계산할수 없을 정도로 치솟을것이다. 지리적으로 살펴보면 이 샘터는 산중턱에 있는데 산중턱에서 샘물이 솟구치는 일이 자못 괴이했다. 시간이 나면 이제 이 샘터를 잘 손질해놓아야겠구나, 큰아버지는 혼자소리를 하면서 앞장서서 산을 내렸다. 어느덧 점심때가 지나고있었다. 샘터를 사진렌즈에 박은후 나도 인차 큰아버지뒤를 따라섰다.  

불시에 시야가 좁게 열린 성터의 하늘우에서 끼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산은 수직의 공간을 차단시키지만 립체의 공간만은 차단시키지 못하나보다. 저녁무렵도 아닌데 남으로 날아가는 기러기의 출현은 너무도 이색적인 풍경이다. 처연하게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고있자니 엉뚱한 상상이 떠올랐다. 저 기러기들은 어디에서 발진하여 어디로 날아가는걸가, 저 기러기들이 혹시 독감바이러스를 가지고있지 않을가. 아니면 왜 이리 일찍 남으로 날아가나.

침묵과 령혼이 살아있는 산성으로 조류독감바이러스를 지녔을지도 모를 기러기떼들이 비행한다고 가정하니 산성우로 펼쳐진 파란 가을하늘도 어쩐지 서글퍼보였다.  


성터에서 내려 집으로 오니 뜻밖으로 김기자가 안해까지 대동하여 와있었다. 그를 보면서 나는 그제야 오늘이 국경절이라는 사실을 상기해냈다.

김기자와 그의 안해는 큰아버지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올렸다. 큰아버지는 식구가 불시에 늘어나자 진정 기뻐하는 기색이 되였다. 심산속에서 적적하게 보내던 두 늙은이에게는 자식들이 보러 오는 날이 설날이다.

-김기자도 이제 슬슬 산에 정을 붙이는셈인가?

-허허. 이제 저도 형님 따라서 여기로 자주 와야겠습니다.

직장에서는 최선생이였는데 여기서는 형님이 되였다. 엄격히 따지면 내가 형이 옳았다. 하지만 년령으로 따지면 세대차가 없다. 그는 관행대로 그냥 존칭을 써온다.

-국경절에 형님이 여기로 올걸 알고 아침에 련락해보니 형수님이 이미 올라갔다고 해서 얼마나 서운하던지. 이제부터는 여기로 다닐 때면 미리 련락주십시오. 저도 형님 차 신세지게요.

-거참 좋은 생각이요. 혼자몸으로 다니면 적적할 때가 많은데 동생친구 생겨서 나도 좋소.

-여기로 올라오면서 형님이 왜 산골로 즐겨다니는지 더러 알겠더군요. 산골공기가 어찌나 상큼한지. 아침에 시내를 빠져나올쯤엔 연무가 어찌나 많이 꼈는지 가슴이 막 침침하던데 여기로 오니 살것 같습니다.

김기자는 나의 산골행을 청신한 공기쪽으로 해석했다. 아무래도 좋았다. 해석이 필요없고 또 나로서도 해석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실 나도 막연했다.

여기에 성터가 있다고 들었는데 구경하고싶습니다. 돼지구경은 아마 물건너 갔을것이고 성터는 꼭 봐야지요. 량지산으로 들어와서 성터를 구경 못하면 량지산으로 왔다는 소릴 말라하던데요. 김기자의 말에 나는 오후에 내려갈 때 성 동문터자리를 소개해주겠다고 대답했다.

둘이 담소하는 사이에 큰어머니와 김기자의 안해가 점심상을 마련했다. 집안으로 들어서려는데  밖에서 차소리가 들려왔다. 민우형이 온것이다. 내다보니 형수님도 따라왔다.

-국경절이 무슨 명절이라구.

큰어머니가 커다란 물건꾸러미를 들고 들어오는 며느리를 반겼다. 령감의 아들내외를 은근히 기다린 큰어머니다. 자기 자식들이 올라온 마당에 령감 자식들이 가세하면 큰어머니도 체면이 선다.

집안은 삽시에 설레기 시작하였다.

허허. 이제야 사람 사는 맛이 난다네. 김기자가 따라주는 술을 한잔 마시면서 큰아버지는 입가에 어쩌다가 흡족한 웃음기를 피워올렸다. 큰아버지는 술을 마시면 제법 흐벅진 웃음을 만면에 피워올리면서 기뻐하는데 젖먹이 막둥이 욕심도 이렇게 술을 마시면서 한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번에는 그런 소리가 없다.

민우형도 질세라 큰어머니에게 포도주를 따라 올렸다. 큰어머니도 시원하게 마셨다.

민우형은 어쩌다가 김기자를 만났다고 모처럼 시골사람 특유한 친절을 부리면서 화기를 돋구었고 그 화기에 녹아서 나와 김기자는 민우형을 따라 흥그러운 술판을 만들었다.


술판은 저녁무렵에야 끝났다.

산을 내리려고 서두니 큰어머니와 큰아버지는 음주운전이라고 근심하면서 만류하는 바람에 우리들은 다시 눌러앉아 하루밤을 더 묵었다.

이튿날 아침을 치른후 우리는 작별인사를 했다. 정석이 넷인 차안에 다섯이 타니 좀 비좁았지만 그런대로 끼여앉았다. 발동을 걸고 기어를 넣는데 큰아버지가 손짓으로 우리를 불렀다.

그리고는 문뜩 니 나이 올해 얼마더라? 하고 묻는다. 예에? 제 나이요? 마흔이 넘었는데요. 나는 큰아버지가 무슨 말을 할지 몰라서 대충 얼버무렸다. 그러면 애 하나 더 낳아라. 옛날엔 쉰둥이도 있었는데 아직은 이르다. 상호(아들이름) 걔가 이제 형제두 없이 어찌 혼자 산다냐.

예에?  떠나는 차를 불러세우고 큰아버지는 리해할수 없는 분부를 하고있다. 허허. 내가 웃자 큰아버지는 더 정색해서 웃지 말고 명심해서 듣거라, 형제가 있음 좋은점이 더 많네라, 너들만 헐하자고 자식 더 안낳으면 그게 죄되는 일이네라, 하면서 노여운 기색을 지었다. 그리고 김기자에게도 같은 당부를 했다. 김기자도 나와 같은 얼빤한 표정이 된채 눈만 슴벅거린다. 아버진 또 그 말씀이군. 민우형이 가만히 두덜거렸다. 술을 마시면 꼭 저 말씀 한다네.

애 하나 더 낳거라. 국가에서도 둘은 허락하는데 왜 안낳아- 심산속에서 아들내외와 조카, 그리고 이붓아들 내외를 바래면서 하는 당부치고는 너무도 동떨어진 당부다.

예, 잘 알겠습니다. 김기자는 그래도 깍듯하게 대답했다.

자식에 한을 가진분일세. 동생들은 리해하게나. 민우형은 한숨을 톺으면서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그제야 나는 큰아버지의 늦둥이욕심을 리해할것 같았다.

산을 내리는 차뒤에는 성터의 하늘을 배경으로 무심한 가을풀처럼 깡깡 말라버리는 두 생명체가 애처롭게 바래고 섰다.

산성 동문터에 내려오자 나는 어제의 약속대로 잠간 차를 세우고 김기자에게 동문터자리를 소개했다. 김기자는 호기심을 가지면서 무척 흥미를 보였다.
그래도 그 시절에는 이 산성터에 보초병도 있고 녀자도 있고 아이들도 있었을텐데… 차가 떠나자 김기자가 가벼운 소리를 했다. 싸움도 있었고…

맞아, 그래. 싸움도 있었고 보초병도 있었을테지.

나는 차 후시경으로 산성의 동문터에서 반사하는 아주 강하고 맹렬한 완상과 무거움을 보았다.

빗보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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