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층빌딩이 즐비하게 들어선 심수 시 라호 구 번화 구역 보풍빌딩 15층의 널직한 사무실, 손님을 맞는 부드러운 말씨, 가벼운 몸가짐 등으로 보아선 정규회사의 세련된 직원으로 느껴지는 허영섭 씨, 첫 인상에 연간 1000여만 원 수출 실적을 올리고 있는 무역업체의 당당한 주인이라곤 보아낼 수 없었다.


일찍 길림사범학원에서 교편을 잡던 허영섭씨가 30대 초반 장사 길에 오르게 되기는 연해지역 개혁의 바람이 내지에까지 파급되고 있던 1989년, 많은 젊은이들이 도전의 기회를 찾아가는 경제 특별 구의 세례를 자기도 받아 보고 픈 욕망이 부풀어 학교의 적을 연변의 모 단위에 옮겨놓은 다음 결혼한 지 몇 달 안 되는 아내를 얼려 장모한테서 2000원을 꿔 가지고 남행열차에 올랐다.


심수에 와보니 듣던 바와는 사정이 달랐다. 떠나기 전 여기 저기 아는 사람을 통해 연락전화도 더러 가져왔지만 대부분 이런 저런 핑계로 만나기를 거절하는가 하면 간혹 만나도 10여 분간 이야기를 나누기 바쁘게 자리를 뜨는 상화이었다.


800원 어치 한 달간 세집을 잡은 데다 문밖을 나서면 돈이 매일 푹푹 줄어드니 기한 내 일거리를 찾지 못하면 집에 돌아가야 하는 형편이었다.


매일이다 시피 세관, 부두를 엇갈아 다니며 눈이 빠지도록 자기가 도와 나설 한국 손님을 기다렸으나 “걸려드는” 사람은 없었다. 20여 일이 지난 어느 하루 그는 심수 시내 한 수준급 호텔에 들어가 서성거리는데 맞은 켠 카운터에서 떠드는 소리가 났다. 다가가 보니 연세가 있어 보이는 한국 손님이 언어 소통이 안 되어 손짓 몸짓을 해 가는데 복무원은 여전히 알아 듣지 못해 하였다. 이 고비에 그가 나서 통역을 해드리고 노인을 방에 까지 모셔다 드렸다.


난생 처음 들어가 보는 호텔, 하지만 이 것이 그의 일생의 전환점으로 될 줄을 당시엔 몰랐다. 한국 노인은 떠날 때 그한테 홍콩 돈 2000원을 맡기며 도장 감 옥돌을 사놓으라고 부탁했다.


그는 시내 수십 개 도장방을 찾아다닌 끝에 값이 싸고 질 좋은 옥돌을 사서 한주일 후 다시 온 노인에게 드렸다.


이렇게 노인의 부탁 대로 옥돌을 여러 번 사드리며 신용을 얻게 되자 마침내 믿음직한 바이어를 소개받아 장사를 시작, 반년 남짓한 기간 홍콩 돈 40만 원을 벌고는 자체로 회사를 차려 본격적으로 무역을 시작하였다. 소규모거래로 부터 신용을 얻어 바이어가 점점 많아 졌다.


한 해는 한국 기아자동차의 오다를 받아 절강성 시골에 들어가 1000여 명 일군을 거느리고 수공목제품인 좌석용 알방석을 가공해 22개 콘터이너를 수출하기도 했다.


그 후 여러 가지 농산물 무역을 시작, 동북 3성 외 감숙 성 등 서북지역을 누비며 고사리를 수매, 성수기에 때로는 심산 속에서 연속 40-50시간씩 작업, 5년 간 해마다 50-60톤씩 수출해 중국 내 개인 회사로는 대한국 고사리 수출 제 1위를 확보하며 호황을 이어나갔다.


그 후 경쟁자가 너무 많아 그만 두고 다른 사람과 합자하여 항주에 의류공장을 꾸렸다.

여전히 신용을 첫 자리에 놓고 품질에 빈틈없는 제품을 일본, 미국, 유럽시장에 수출하며 재미를 보다 시장에 변화가 생겨 의류 업을 그만두고 공예품 공장을 차려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였다.


거부기, 새우, 게, 독수리, 커피 잔에 고급골회 함 그리고 서양예술가조각상 등을 포함해 수십 가지 공예품을 가공해서는 한국, 일본, 이테리아 등 나라 시장에 내보냈다.


무슨 일을 하나 끈질기게 파고드는 성미인 그는 중국 주옥(珠玉)류 협회와 북경지질학원 교수님들의 소개와 추천으로 중국 역사상 국보로 불리 우는, 황제가 가장 애지중지 했고 사람 몸에 가장 좋다는 장수 옥을 발견하고 심천에 옥 공장 설립하였는 데 일을 시작하고 나니 장수 옥 외 제품들도 수요가 많아 하남 성에 옥 공장 하나 더 만들었다.


샘플로 가공한 정교한 천연무늬장수옥컵을 한국 바이어한테 세트 당 5500원에 넘겼는데 일본공예품상점에서 3000 불에 판매되고 주문도 끊임없이 늘고 있다 한다.


그는 이미 옥 제품을 유럽에 20여 콘테이너 수출 하였고 한국 일본 인도네시아 대만 등지에 많은 물량을 수출 하였다.


그는 한국과의 무역과 더불어 북한과의 무역도 애써 추진하였다.

1990년도 말에 무역대표단 단장의 신분으로 북한에 처음 가서 평양, 라진, 무산, 황해도, 남포, 등 지방을 고찰하고 남포와 평양 사이에 있는 화강석 기지에 홍콩 투자를 유치하는 계약을 체결 하였으며 김일성 주석의 선물도 수여 받았다.


그 후부터 그는 북한 지방으로 자주 다니면서 무역활동을 활발히 벌렸다.


평양의 예술사들과 수예 작품 창작 합작을 시작한 것은 그의 사업의 일대 희사였다.

그는 평양의 이름이 있는 공훈예술가들을 초청하여 예술적이면서도 상품  가치, 수장 가치가 

높은 수예 작품 250여 점을 만들어 이미 유럽에 100여 점을 판매하였다. 유화보다 정교롭고 화려한 수예 작품은 서양인들의 경탄을 자아냈다.


금년에는  평양의  소프트 회사와 합작하여 평양의 인재들을 심천으로 초청하여 장기간 체류하게 하면서 시장에 알맞은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있다. 일단 북한에서 개방을 시작하면 곧바로 북한 땅에 들어가 기업을 설립할 계획이다.  


심수에 간지 10년이 넘도록 설 명절을 거의 모르고 중국 전역을 돌며 일에만 몰두했다는 허영섭 사장, 지금 그는 200여명의 일꾼들을 거느리고 밤낮 뛰고 있는 “사업미치광이” 라고도 할 수 있다.


매일의 일과가 그처럼 다망한 가운데도 저녁이면 자리에 누워 중국무협소설을 한 시간 씩 읽으며 의리와 신의를 목숨으로 지키는 작중인물로 자신을 반추해 본다는 그, 몇 해간 무역에서 바이어한테 자기 돈 600여만 위안이나 사기 당했지만 선량한 마음으로 무형의 자산을 축적한테서 장사거리는 늘어만 간다고 하니 중국 개혁개방의 창구 도시에서 튼튼한 토대를 다져가는 조선족 지식인실업가의 성공모델임에 손색이 없다.


- 흑룡강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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