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실크로드의 중심이며 동서방을 잇는 역사의 보물고이고 금자탑인 돈황의 막고굴을 찾아서

총길이 6,400km에 달하는 실크로드는 중국 중원(中原) 지방에서 시작하여 허시후이랑(河西回廊)을 가로질러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북변을 따라 파미르 고원, 중앙 아시아 초원, 이란 고원을 지나 지중해 동안과 북안에 이른다.

 또한 4대 문명 발생시기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는 BC 3500~3000년경, 인더스 강 유역에서는 BC 2500년경, 중국에서는 BC 1500년경에 황하문명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모두 실크로드의 주변 지역에서 발생한 것이다.

역사 속의 실크로드는 BC 135년 한(漢) 무제(武帝) 당시의 장건을 서역으로 파견함으로 동서양의 정치, 경제, 문화교류의 길, 특별히 종교적으로도, 불교와 네스토리안, 유교 등이 교류되는 통로이었고 페르시아의 마니교, 조로아스터교의 통로가 되었다.

 실크로드가 처음 열린 것은 전한(前漢 : BC 206~AD 25) 때이다. 한 무제(武帝)는 대월지(大月氏)·오손(鳥孫)과 같은 나라와 연합하여 중국 북방 변경지대를 위협하고 있던 흉노를 제압하고 서아시아로 통하는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2차례에 걸쳐 장건(張騫)을 중앙 아시아로 파견했다. 장건의 원정을 계기로 당시 서역(西域)이라고 칭해지던 중앙 아시아 및 서방 각지와 사절을 교환하게 되었고, 여러 문물이 왕래하게 되었다.

이러한 실크로드의 의미와 가치는 더나가 세계 3대종교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아세아 전파의 통로로 되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 사진:  중국 서부 크리츠찬들이 믿는 기독교, 지역 토색종교의 색채가 가미되어 십자가에 여러색갈의 댕기가 날린다.

 1. 중국 땅으로 들어왔을 기독교(경교)의 1천년 쇠태기.

기독교의 한지파인  네스토리우스의 제자들은 동로마 제국에 인접한 강국인 페르시아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상거래를 배워 사막 실크로드를 달려 중국으로 들어갔다

  AD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정치적 음모로 이단정죄를 받고 추방당한 네스토리우스로부터 비롯된 경교는 당시 알렉산드리아 감독인 키릴루스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인 네스토리우스를 견제하기 위해 정치싸움을 걸어왔고 결국 실패하고 키릴의 승리로 끝났다.

방심했던 네스토리우스는 이단자가 되어(이후 복권) 이집트와 리비아 사막을 떠돌며 회복의 날을 기다리다 AD 451년에 세상을 떠났다.  

네스토리우스가 추방될 당시 그를 따르던 무리가 당시 로마 기독교 인구의 1/5이였다고 하니 적은 수가 아니었다. 네스토리우스의 제자들은  사막 실크로드를 달려 중국으로 들어갔다. 경교, ‘빛나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AD 635년 당태종의 환대를 받으며 중국에 입성한 네스토리안들은 무섭게 교세를 확장시켜 나갔다. 당시 수천 개의 사원과 기도처가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가 막막하다.

 돈황에서 유명한 또 한 곳 ‘막고굴’은 중국 4대의 불교 석굴로 유명하다. 명사산 기슭에 길이 1.6km에 달하는 크고 작은 735개의 석굴로 이뤄졌다. 각기 굴 안에는 불상과 벽화들이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사실 불교 석굴이라 하지만 문명과 문화 교류의 관문이었던 이곳은 여러 종교가 거쳐 가면서 처음 자리 잡은 곳이기도 하고,  이 중에 한 곳 193호 석굴에서 경교의 역사가 발견됐다. 다만 박물관에서 막고굴(16~17호)에서 발견된 경교와 관련된 문서를 사진으로 볼 수 있었다.

경교는 실크로드를거쳐 당시 수도였던 장안(현 서안)에 이르러 그 세를 확장해갔다. (서안박물관의 경교 기념비) 그러나 실크로드를 통해 입성한  경교는 결국 중국땅에서  1천년을 벋치다가 점차 쇠퇴되여 사라져버리고 말었다.

현재 신장에는 1만여명의 기독교인이 있다지만 대부분이 위그르족 무슬림의 강력한 영향을 벋어나 신장 북부지역에 위치해있다. 그리고 대부분이 한족 기독교인들이다. 

사진:  오랜 불교 성인 교하교성은 엣 흔적 그대로 간직한  도시로 전략적 요충지이기 하였다.

 2.  인도의 불경이 실크로드동굴에서 번역되어/  중국, 몽고, 조선, 일본 등에 전파된 역사적 통로

 기원전 1세기전부터 인도-중국간 불교사상 및 문화전파에는 ‘실크로드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인도 및 간다라 지역의 발전된 불교모습이 여타의 여과 과정 없이 직접 전래된 곳이 바로 실크로드인 것이다.기원전 3세기 무렵, 서북인도와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기원전 2세기 무렵이 되면 총령이서의 각 서역의 국가들이 불교를 신봉한 기록들을 볼 수가 있다.  

 

   대월지의 한 고승이 중국으로 불교전파를 위해 길을 나서면 반드시 쿠차를 거쳐 천산남북로에는 소승불교가 전파되었다한다.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에는 많은 구법승들이 경전을 구하러 실크로드를 따라 인도로 들어갔고, 각국에서 불교를 지원하는 풍조에 힘입어 많은 인도 승려들이 경전을 가지고 중국에 들어왔다. 당대에는 불교가 이미 상당한 세력을 형성했고, 현장(玄奘)의 역경사업이 이루어진 후에는 중국 고유의 유교·도교와 함께 당대의 3대 사상 중 하나가 되었다. 중국 불교가 발전하게 된 데에는 인도와 중국을 연결시켜준 실크로드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이런 소륵의 불교는 8세기까지 지속되면서 천산남북로로 전파되었다.

이 시기 석굴사원의 눈부신 발전도 볼 수가 있는데, 주요 사원지의 위치는 주로 강이 형성되어 있다. 나라 안에서 가장 살기 좋은 장소를 불교사원에 내어준 것이다. 그리고 이런 석굴사원 내에는 본생도를 중심으로 해, 달, 바람, 불과 관련된 여러 신의 모습이 천장화로 그려져 있다.  당시 많은 귀족들과 상인들이 이에 투자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천장화와 더불어 정토경전의 설법내용을 그린 벽화가 나타나고 있어 사막 지역에서의 척박함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뇌를 벽화를 통해 승화시키고 있다.

 이처럼 실크로드 상의 각 국가들에는 불교가 번역되어 이른 시기에 전파되어 발전되는데 그 과정이나 전파루트에 따라 각기 다른 불교사상이 전파되기도 한다. 그리고 실크로드를 통하고 번역된 불교는 중국.한국으로 영향을 미치면서 더욱 많은 발전을 이룩하게 된다. 실크로드 각국의 불교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이를 동전(東轉)시키고자 했던 노력이 지속되다가 8세기 이후부터는 이슬람세력의 침입으로 인해 불교의 맥은 거의 끊어지게 된다.  

사진: 우루무치의 도시 중심에 자리잡은  이슬람 대 사원, 이슬람종교의 양식에 민족색채를 띤 사원건물은 물론 내부구조도 아름답게 장식되어있다. 

 3. 기원10세기를 전후하여 이슬람이 실크로드로 동진하면서

         신강지역은 이슬람 종교화

8세기 중반 실크로드의 경영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중국 당나라와 이슬람 제국 간의 전쟁.

 탈라스강은 중국 한(漢)대부터 동서 교역의 거점으로, 경제ㆍ군사 면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러나 751년의 탈라스 전투에서 당은 실크로드의 경영권을 이슬람 세계에 빼앗기게 된다.

당시 소그디아나 지방에는 의 공격을 받아 서돌궐이 멸망한 후  당나라는 이 지역의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고구려계 장수인 고선지를 안서절도사로 임명하여 석국의 정벌했다.  하지만 당의 지배에 불만을 품은 소그디아나 세력은 이슬람 제국인 아바스 왕조의 호라산 총독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 결과 당나라 군대와 아바스 왕조의 군대는 751년 탈라스강 유역에서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당나라 군대는 이 싸움에서 아바스 군대에 크게 패하여 소그디아나에서 물러나야 했ㅗ하여 다. 또한 싸움 과정에서 당나라의 군사가 포로로 많이 잡혀갔는데, 포로 가운데에는 제지 기술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즉, 탈라스 전투를 통해 당나라는 동서 교역의 거점인 실크로드의 경영권을 잃었고, 제지법을 이슬람 세계에 전하게 되었다

10세기를 시작으로하여 신강에 전파된 이슬람은 많은 영향을 미쳐왔다. 신강지역에서 위그르족외도 13개족 주요 민족과 40여개 소수민족에 이슬람을 전파하여 주체 종교로 자리 매김하고 주도권을 잡고있다.

이러한 실크로드의 이슬람으로하여 중국은 이미 세계 이슬람종교의 9번재 대국으로 되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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