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중국, 태평생명보험 흑룡강성 가목사중심지회사(太平人寿黑龙江佳木斯中心支公司 )의 정미화업무경리는 입사한지 5년밖에 안 되지만, 그가 이끄는 대원은 초기의 7명으로부터 200여명으로 불어났다. 그는 또 직접 고급경리(보험료수익이 백만 원 초과) 3명을 육성시키고 6명을 간접 육성시켰다.  

▲ 정미화 업무경리
또 표준보험료수익은 2007년의 187만원으로부터 2011년의 1천만 원을 돌파하여 뛰어난 업적으로 연속 5년간 백금급우수대리인(白金级优秀代理人), 백만직업경리인(百万职业经理人), 국제품질관리대상(国际品质管理大奖) 등 칭호를 수여 받았으며, 그의 사적은 국가급 보험업무잡지에까지 자세히 실렸다.

그렇다면 짧디짧은 5년 기간에 정미화씨는 어찌하여 이렇듯 놀라운 업적을 올리게 되었을까?

1964년 7월13일 정미화씨는 가목사시의 한 조선족가정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건축회사의 기사이고 어머니는 시제5백화상점의 회계였다. 어릴 때부터 학습 성적이 우수한 정미화는 중학시절에 연속 3년 “3호학생”으로 평선 되었고 고중3학년 때는 학년 공청단 지부서기까지 담임하였다. 1982년에 고중을 졸업한 그는, 이듬해 7월에 중등전문학교입학시험에 참가하여 전성에서 총 점수 1등으로 가목사시기술공업학교 건축경제반에 입학하였다. 1985년 7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가목사시 방산국(房地局) 판공실에 배치 받았다. 1993년부터는 국산하의 부동산개발총회사의 공청단지부서기, 부녀사업위원회주임 등 책임을 떠밀고 나가면서 보람찬 청춘을 보냈다.

그러나 개혁의 심입에 따라 2006년에 이르러서는 그가 소속된 회사가 해산되면서 그도 실업하게 되었다. 처음에 정미화의 눈앞은 캄캄하였다. “국가공무원”, “국영단위의 간부”, 이렇듯 우월한 직업이 삽시에 사라진다는 것이 너무나 이해가 안 되었다. 그래도 그는 낙심하지 않았다. 그가 취업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꿈만 같은 기회가 나타났다. 풍부한 경력과 뛰어난 재질로 높이 산 태평양보험회사에서 그를 채용한 것이다.

“금이라면 아무 데서도 반짝인다”는 말이 있다. 새 회사에 입사한 정미화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한편, 재빨리 보험업무지식을 장악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독특한 사업방법을 내놓았다.

보험업계에는 “사람만 있으면 업적이 생긴다”는 속담이 있다,그러나 정미화는 “사람만 있어도 안 된다, 관건은 인재가 있어야 대오가 발전 장대해질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 보험인재를 어떻게 선별할 것인가?

정미화는 세 개 방면에서 보험인재 발굴에 모를 박았다. 첫째는 사교능력과 협조능력이 강한 당정기관의 행정 간부; 둘째는 경제업무에 능란한 재무관리일꾼; 셋째는 중소기업주와 자주경영자이다. 정미화는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은 인생의 성공자로서 관리 경험이 있고 인맥자원도 풍부하여 보험 사업에 참가하면 우선 자기의 대오를 크게 발전시키려 힘쓰기에 전반 대오건설에 동력으로 된다”라고 말하였다. 바로 “나보다 더 우수한 사람을 받아 들인다”는 인재 이념 하에 5년 동안 그가 직접 받아들인 대원은 9명밖에 안 되지만, 그중 7명이 핵심골간으로 3명이 고급경리로 승진되었다. 이것이 바로 정미화의 대오가 신속한 발전을 가져 오고 뛰어난 업적을 올리게 된 비결이었다.

▲ 동사자들과 함께
인재쟁취는 성공의 담보

인재쟁취는 성공의 담보

 

“인재를 발견했다”고 하여 그 인재들이 모두 자원 적으로 보험 사업에 참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로 하여금 보험업에 참가하도록 하려면 많은 노력을 들여야 한다”라고 정미화는 말한다.

때문에 그의 부하들이 새로 받아들인 대원의 명단을 들고 오면 그중의 행정관리, 재무관리, 자주경영자들을 골라내어 이 사람들은 앞으로 우리외 장기간 같이 사업할 사람들이니 각별한 주의를 돌려 될 수록 그들을 쟁취하여 같이 사업하도록 힘써야 한다고 일깨워 준다. 특히 사회인재들은 저마다 주견이 있어 그들을 설복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웠다.

한 번은 정미화가 한 대학교 교사를 소개받았는데 1년간의 끈질긴 노력을 거쳐서야 그를 입사시킬 수 있었다. 이 기간 그는 정기적으로 그와 만나 대담하는 동시에 매번마다 자신의 8천여원 임금 영수증(工资条)을 보이면서, 보험사업의 최대 특점이라면 개인의 소득이 자신의 능력, 노력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후에 이 교사는 보험회사에 참가하여 3년 후부터는 핵심골간으로 발탁이 되었으며, 고급경리로 승진하여 우수한 직원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새로운 대원을 존중해주고 또한 보험사업에 참가하기 전후의 임금대비로 대방을 설득하는 것은 사회인재를 흡인하고 쟁취하는 장미화의 독특한 비결이 아닐 수 없다.

인재육성은 성공의 지름길

사회인재를 보험업계의 출중한 인재로 전변시키고 육성시킨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새로 입사한 대원들에 대해 정미화는 직접 면담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빠른 기간에 회사의 규칙, 조례 등 을 장악하게하고 그들을 도와 높은 목표를 제정하고 짧은 시간에 승급할 수 있도록 지도하였다.

여러 차례나 태평생명보험총회사의 우수강사(总公司优秀讲师), 전국금패강사(全国金牌讲师)로 선정이 된 정미화의 보험업무지식 강의는 남달리 우수했다. 그는 단순한 지식강연에 머물지 않고 풍부한 실천경험과 결부하여 출근으로부터 작업의 일지(工作日志), 고객당안(客户档案)의 제작에 이르기 까지 규범화한 작업습관을 양성하도록 가르쳐 주었으며 “5항 관건기능”, “고객과의 담화기교”등 실무지식과 독특한 경험을 강의하였기에 그의 강의를 듣는 사람들은 저마다 “참말로 강의를 잘하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하여 대부분 신입대원들이 재빨리 업무에 적응했으며 일부는 그날로 정식대원의 표준에 도달해 작업에 착수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정미화는 인재전략을 실시하여 영업부 3부를 직접 발전시키고 6개부를 간접적으로 발전시켜 전반대오는 200여명으로 불어났지만, 그가 직접 관리하는 영업부는 20명 좌우밖에 안 되었다. “매번 새로운 영업부가 ‘세간나면’어떻게 인력을 보충하는가?”라는 기자의 물음에 장미화는 “기실 저는 전성에서 제일 작은 영업부를 경영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바로 직원이 적기에 대원들의 전반소질을 제고하는 면에서 질량을 확보할 수 있고 빨리 성장하여 자립할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기자가 요해한데 따르면 새 영업부가 독립되어 나간 후 약 반년이면 정미화의 영업부가 다시 확대되고 약 1년이면 또 새 영업부가 독립한다. 이런 순환으로 장미화의 영업부는 시종 인원이 적지만 그의 전반대오는 부단히 확대되었다. 원래 그의 영업부는 “보험인재양성쎈터”로 되어 부단히 보험관리인재를 육성해냈던 것이다.

이렇듯 독특한 사업방법을 고안해내여 뛰어난 업적을 올렸기에 장미화는 상하급의 존경을 받게 되였으며 그의 사업도 지속적인 발전을 가져 올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향후의 타산에 대해 정미화는 “앞으로 저의 목표는 업무총감독(业务总监)로 승급하는 것이다”라고 신심 가득해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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