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연변작가협회 주석 김학천

[서울=동북아신문] 2008년 10월 7일 화요일 개임

김철준부사장과 김철주임의 전송으로 연길공항에서 아침 7시 50분에 출발하는 남방공항의 북경향발 비행기편에 몸을 실었다.

▲ 뽈스까 문인협회 회장과 함께

10시 반 경 북경에 도착, 동성구 동토성자 근처의 중국작가협회까지 도착하니 마침 11시였다. 중국작가협회 대외사업부의 배치로 중국작가협회의 기관과 한 청사에 있는 작가호텔 310호 방에 행장을 풀고 인츰 2층에 있는 중국작가협회의 직공식당에서 점심식사를 치렀다.
오후는 자유로운 휴식시간이였다. 나는 금방 북경올림픽에서 주체 체육장으로 크게 소문이 있었던 뇨초(鸟巢)라는 체육건물로 소풍을 나가서 사진을 몇장 남겨놓았다.

저녁 6시, 중국작가협회당조 김병화서기가 중국작가협회 근처의 한 화려한 술집에서 환송연희를 베풀어 나와 사천성작가협회 부주석이며 <<별>>시간의 주필인 량평시인을 초대하였다. 이번 중국작가협회에서 뽈스까문학가협회 마라이크 주석의 초청으로 나와 량평씨를 파송하여 와르샤와에서 개최되는 국제시가축제에 참석하게 되였다. 나는 이번까지 4차례나 중국작가대표단의 명분으로 외국을 방문하는 행운을 가지게 된다.

연회석상에서 나와 량평시인은 동석한 기타 중국작가협회의 지도자들과도 함께 빈번이 잔을 기울이면서 사천의 명주 “서더”(舍得)를 인당 거진 반병씩 마셨다. 김병화서기와 나는 2001년 그이가 상해시당위 상무위원, 선전부 부장직위에서 중국작가협회당조서기, 상임 부주석직위로 오는 그떄부터 각별이 친근하게 지냈었다. 여기에는 우선 김병화서기가 국가 정부장급 지도자로써 전혀 관료틀거지가 없이 나를 친근하게 대해준데서 였다. 금방 중국작가협회에 부임한 병화서기는 처음으로 소집한 각성의 작가협회책임자회의에서 사업연설을 마치고 휴식시간이 되자 곧바로 주석대에 내려와 나에게 오더니 상우에 놓여있는 명함을 보고 먼저 손을 내밀고 인사를 하는것이였다.

"아, 역시 김씨구만요. 우리는 5백년전에 한 할아버지였을 겁니다. 그러니 한집안이죠. 반갑습니다." 이렇게 친절한 인사에 나는 대번에 그이의 후덥고 진성어린  마음을 짚을수 있었고 나와 그이의 거리가 즉시 밀착되여 있음을 절실히 느끼게 되였다. 김병화서기는 상해사람으로써 남방사람들의 그런 상냥함과 아울러 크고 작은 일없이 사사건건 항상 면밀주도하게 사업을 밀고 나가는 직성의 소유자였다. 그는 사업에서 원칙성이 강하면서 또 동시에 매개인들에게 인정적인 따사로움을 한껏 주는 그런 자상한 사람이다. 일단 병화서기와 함께 있는 자리이면  나는 항상 그이의 인격매력을 흠뻑 느낄수 있었다.

연회석상에서 병화서기는 내가 연변작가협회를 떠나 연변사회과학계련합회를 거쳐 지금은 중국조선족소년보사에서 일을 맡아보는 상황을 일일이 알아보면서 고층의 관원 답지않게 인생의 무상과 세월의 흐름으 감탄하곤 하였다. 병화서기는 나를 보고 중국작가협회의 기관 건물 확장건설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중이니 이제 곧바로 준공되면 주숙과 생활면에서도 작가들에게 더욱 유리한 조건을 제공해 줄수 있다면서 나를 보고 일단 북경에 오면 꼭 중국작가협회에서 주숙하고 체류하라는 부탁을 간곡히 하는것이였다. 우리는 진지한 대화와 정열적인 대작과 더불어 함께 사진도 여러장 찍었다.

2008년 10월 8일 수요일 개임

중국작가협회 부주석이며 저명한 소설가 진건공의 배동하에 우리는 아침식사를 작가협회 2층식당에서 치렀다. 2000년 2월, 나는 진건공이 단장으로 하는 중국작가대표단의 일원으로 하북성작가협회의 류소방시인, 심양군구창작실의 방천서녀류소설가와 함께 한국문협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었다. 그래서 진건공과 나는 형님동생하면서 친근하게 지내는 분이여서 서로가 잘 어울렸다.

11시 무렵, 우리는 중국작가협회 대외사업부 류헌평부장등 유관 인원들의 안내하에 공항으로 이동하여 중국국제항공회사 CA931항공기의 탑승수속을 무난히 마쳤다.

오후 2시 10분, 비행기는 활주로에 쏜쌀같이 내달리더니 마침 리륙하였다. 이번의 려행길은 10시간 반으로 지속적으로 비행한단다. 북경시간 심야인 12시 30분경, 비행기는 종내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하였다. 북경에서 여기까지 총 거리는 7796키로메터이고 평균 10680메터의 고공에서 860키로메터의 시속으로 10시간 반을 비행하였으니 너무나 신비로웠다. 비행기가 프랑크푸르트의 상공에서 배회하면서 착륙하려할 무렵, 떄는 당지 시간의 18시경이였다. 기창밖의 프랑크푸르트는 수림속의 도시였고 도시속의 수림이여서 더 없이 아늑하고 조용하고 푸근하여 선경같이  아름다워 보였다. 수림은 이미 가을날의 색조를 뽐내면서 오색이 찬연하한 동화같은 화폭을 펼쳐가고 있고 도시는 수림속에 도취되여 살포시 잠들어 가고 있는것만 같았다. 의심할바 없이 유럽의 생태환경 의식은 인류의 가장 선진적인 위치에서 전세계의 본보기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프랑크푸르트공항에서 대략 3시간을 휴식하고 북경시간 3시반경 다시 프랑크푸르트에서 와르샤와로 가는 항공편에 탑승하였다. 약 2시간후 우리는 목적지인 뽈스까의 수도 와르샤와에 착륙하였다. 시계를 보니 이미 북경시간 아침 5시 반이였고 와르샤와 시간으로는 22시 40분경이였다. 다시 말하면 중국은 9일 아침이고 화르샤와는 여전이 8일의 밤 10시 40분경이였다. 그러니 북경과 와르샤와는 근 7시간의 시차가 있는셈이다.

공항으로 나오자 뽈스까문학가협회의 비서장과 뽈스까국적인 화인 호패방(胡佩方)녀사가 우리를 영접해 주었다. 호녀사는 호남성사람으로써 일찍이 중국인민해방군에 참군하였다가 1951년도에는 장춘에서 주둔했었고 잇따라 항미원조에도 참가하였다.  1955년, 주은래총리의 비준을 받아 와르샤와에 와서 뽈스까인과 결혼하여 지금까지 줄곧 뽈스까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지금은 이미 70여세였다. 문학을 즐기는 그는 줄곹 뽈스까문으로 문학창작을 하고 있었고 중국과 뽈스까 량국간의 작가조직과 작가들의 상호교류를 위하여 모름지기 많은 노력을 경주하고 있었다.

와르샤와의 가을 날씨는 매일과 같이 청량하여서 평균 낮의 기온이 령상 10도 정도이다. 이런 계절과 이런 기후는 나에게 더 없는 쾌청하고 즐거운 느낌을 주고있다. 우리가 탑승한 승용차는 북경의 왕부정과 번화함이 근사한 “신 세계”라는 거리를 지나가면서 호녀사의 설명을 귀담아 들어본다. 거리에는 뽈스까의 유명한 시인 미츠케위즈(密茨凯维支)의 동상이 우뚝 서있는것이 눈에 띄인다.

와르샤와의 중심지인 왕궁광장근처에 자리잡은 뽈스까문학가협회의 초대소에 도착하여 나는 3층의 299호 방에 짐을 풀었다. 한사람이 방 하나를 쓰는데 유럽식으로 꾸며진 널직한 방은 한결 깨끗하고 편안해 보였다.

호녀사는 잊지 않고 우리들에게 요즘의 스케줄에 대해서 이 나라에서의 주의사항과 함께 일일이 소상하게 알려준다. 그리고는 또 방에 전화와서 루락된 점도 보충해서 귀뜀해 준다.
  
2008년 10월 9일  목요일  개임

잠에서 깨여나 눈을 번쩍 뜨니 날이 밝아 오는것 같았다. 창문 카텐을 제치고 창밖을 내다 보니 왕궁광장에는 아침 산책을 하는 사람들이 한가롭게 오가고 있다. 멀리 광장 넘어 길 넘어 보이는 강, 바로 유명한 강이다.
상쾌한 마음으로 어제 저녁 뽈스까문학가협회 비사장이 했던 말을 곱씹어본다.
"당신들이 오셨기에 요즘의 날씨는 날마다 개인 날씨입니다."

나는 카메라를 잡아들고 창문을 활짝 열어 제쳤다. 먼저 이색적이면서 웅위로운 왕궁건물을 렌즈에 담았다. 넓은 광장의 상공에는 비둘기떼들이 자유롭게 날아예다가 무리를 지어 내려 앉는다. 먼 동녘에서 아침해가 서서히 솟아오른다.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련속 이런 정경을 렌즈에 담고 샤터를 누른다.

샤워를 한후 복도에 놓여진 아침식사를 방에 들고 드러와서 한다. 아침식사는 양식으로써 너무나 간단해보였다. 빵 몇쪼박에다 빠다 몇개, 우유 한잔에다 커피 한잔, 그리고는 남새 잎파리가 몇개, 모두 이것뿐이였다.

아침식사후 량평시인이 나의 방에 와서 새로 출판된 시집한권을 나에게 증정했다. 나도 내가 가져온 몇권의 시집중에서 제7기 전국소수민족문학상을 받았던  한문시집 "세기의 령마루를 넘어 홀로가다" 한권을 싸인하여 량평시인께 드렸다.

나와 량평은 통일적인 행사가 아직 시작되지 않은 틈을 타서 초대소 앞에 있는 왕궁광장으로 나와서 한가롭게 산책했다. 날씨가 유난이 좋았다. 하늘에서 날아예던 비둘기때들은 어느새 광장에 내려 앉아 행인들이 주는 빵부스레기들을 쪼아먹고 있고 건녀편에는 소학생들이 선생님과 함께 줄지어 려행 준비를 하고 있는듯하였다. 왕궁은 붉은 색으로 자뭇 장엄하고 웅위로워 보였고 한시간에 한번씩 울리는 거대한 탑우의 시계에서 울려오는 종소리는 현대인들에게 고로한 력사의 메아리로 무엇을 이꺠워 주려고 하는듯하였다.

오전 11시, 호패방녀사는 약속대로 통역을 담당한 류천천(刘倩茜) 아가씨를 데리고 우리를 찾아왔다. 류천천 역시 호남출신이였다. 그는 9년전 북경외국어대학교 뽈스까어 전업을 졸업하고 자비로 뽈스까에 류학와서 연구생공부를 마치고 아르샤와에서 한 베트남의 남자와 결혼했다. 류천천의 안내로 우리는 먼저 뽈스까의 위대한 음악가 쇼뻉의 심장이 안장되 있는 성십자교회당을 참관했고 이어서 와르샤와시 제37중학교의 고중 3학년 반급에서 근 30명의 남녀학생들께 중국문화와 중국문학을 강의했다. 간단하게 중국의 문화와 중국문학을 소개한후 주요하게는 그들이 관심있는 질문에 해답해 주는것이였다. 나는 구체적으로 시와 력사, 시와 민족, 시와 나라간의 관계를 응축해서 론했다. 이어 학생들은 사전에 영어로 번역된 우리의 시들을 랑송하기 시작하였다. 나의 시는 생태의식을 주제로한 "산림풍경", "교외에서 한번의 외로운 산책"등 2수였고 량평씨도 2수의 서정시였다. 뽈스까의 고중생들은 어린이들의 귀여움과 성인들의 성숙됨이 어울려 원래 내가 상상했던것보다 훨씬 감성직인 면이 더 많은것같았다.

뽈스까의 위대한 음악가 쑈뺀의 조각상 옆에서
정심식사는 우리가 거처해 있는 뽈스까문학가협회초대소 1층의 음식점에서 양식으로 치렀다.

오후 3시,  이번 <<와르샤와의 가을>>이라는 주제로 명명된 국제 시가축제에 참석한 30여개 나라의 80여명의 세계각국 시인들은 근처에 있는 뽈스까의 위대한 애국주의 혁명시인이며 저명한 사회활동가인 미쯔께위즈(1789-1855)의 거대한 동상에 앞에서 개막식을 올렸다. 생전의 미쯔께위즈는 대부분 시간을 외국에서 망명생활로 보냈으며 종생토록 조국의 독립과 인민의 자유를 위하여 분투하였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유명한 서정시 "청춘송가"이다. 1907년, 로신은 미쯔께위즈의 작품을 중국독자들에게 소개해 주었고 "지금까지 뽈스까의 인심에 지대한 감동을  주는 막강한 영향력을 소유한 작품"이라고 높게 평가했었다.

주최측을 대표하여 뽈스까문학가협회주석 마레이크시인은 개막사를 드렸고 잇따라 모든 시인들은 줄을 지어 선후로 붉은 장미곷을 미츠케위즈의 동상앞에 드리는것으로 시인의 문학정신과 인격에 경모의 마음을 표달했다. 후에 알게된 일이지만 이 행사에 참석한 나라중에 아세아지역에서 참가한 나라는 중국뿐이였고 모두가 구라파를 중심으로 하는 독일, 로씨야, 세르비아, 스웨덴, 벨로루시, 스펜, 터키, 스웨덴, 덴마크, 오스트리아, 프랑스, 영국 등 나라에서 온 시인들이였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우리는 다행히 류천천의 통역으로 여러나라의 시인들과 함께 대충 교류할수 있었다. 

행사는 매우 랑만적이였고 자유로웠고 안일하였다. 우리는 뽈스까문협 문앞의 거리옆 양산밑에서 한가롭게 커피를 마시면서 서로 관심이 가는대로 간단한 소통을 했고 리해와 아울러 믿음과 존경을 표달하였다. 인츰 우리는 또 자리에서 일어나 왕궁광장 옆골목 광장 옛성테에 자리잡은 “문학의 집”에서 시 랑송회에 참석했다. 사전의 준비에 의하여 우리의 시편들은 영어와 뽈스까어로 이미 번역되여 뽈스까의 배우들이 나와서 랑송해 주었다. 그리고 나와 량평은 또 특별히 중국어 본문으로 랑송해 달라는 사회자의 부탁으로 각기 자작시를 무대에 올라서 읊어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사후 당시 이 행사에 직접 참가했던 중국뽈스까주재 대사관의 문화령사 정해가(丁海嘉)씨가 국내 문화보와 중국문화부의 싸이트에 보도한것럼 “김학천시인과 령평시인의 시편들은 영어와 뽈스까어의 랑송을 통해 세계각국  시인들의 충분한 긍정과 아울러 열정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나의 시 두편은 생태를 주제로 다루어서 서방나라 시인들의 더욱 많은 관심과 열정을 불러 일으킨것 같았다.

  오후 5시직전, 나는 아내에게 생일을 축하하는 전화 한통을 걸었다. 이맘때면 연길은 9일 밤 12시가 금방 오는 시간이였다. 아내의 생일은 9일이니이  9일안으로 축하하면 연기되지 않고 당날에 축하해 주는것으로 된다. 아내가 잠끼어린 목소리로 "이제 몇분만 지나면 10일인데 시간을 잘 맞취주어서 고마워요".

2008년 10월 10일  금요일  개임

아침에 깨여나서 창문의 카텐을 제치고 창문을 활짝 열어 놓으니 간밤에 내렷던 비에 꺠끗히 세척된 공기가 습윤한 느낌으로 얼굴을 애무해 주고있다.

아침식사는 의례 양식이고 간단했다. 나는 그래도 이럭저럭 견지할만 한데 량평은 벌써부터 음식이 맞지 않아 못견디겠단다. 중국료리집, 아니면 라면이라도 사서 끓여 먹어야 되겠단다. 량평은 사천사람으로써 즐겨먹는 “짜차이”(榨菜)생각이 나서 안절부절해 한다. 마치 우리 조선족이 어디를 가나 된장국에 김치를 못 떠나는것처럼 량평도 고향음식에 절어있다. 그런데 알아보니 화인들의 상점은 먼 교구에 있어 다녀오기가 대단히 불편해 당분간은 그대로 참우수 밖에 별 뾰족한 방법은 없었다.

이제야 알았지만 뽈스까는 오전 10시에야 출근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정심은 오후 1시부터 3시쯤, 저녁은 7시에서 8시경이다. 그러니 아침식사는 8시쯤에 하는것이 꽤나 이른축이였다. 모든 절주는 중국보다 대개 2시간 내지 3시간은 늦은것으로 되고있다. 그래서인지 구라파사람들의 한가롭고 심지어 게으른것같은 생활태도와 방식이 어쩌면 시간에 쫗기지 않고 편안해서 좋아도 보인다. 무슨 일에나 바빠하지 않고 태연자약하고 지어 여유작작한것 같다.

오전 10시경, 류천천은 우리를 안내하여 왕궁 즉 국가박물관을 참관했다. 중앙구라파에 위치한 뽈스까는 서부로 독일과 이웃하고 남부로는 체스꼬와 슬로벤스꼬와 인접했고 동으로는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와 련접되였고 동북부로는 리트바와 로씨야와 접근됐으며 북으로는 발뜨해에 림해 있었다. 뽈스까는 이렇게 중요한 지리위치로 인하여 력사상에서 선후 3차례나 독일, 로씨야와 오스트리아에 침략당해 만신창이 되였었다. 왕궁건물은 제2차 세계대전때 독일군에 의하여 재더미로 되였고 전쟁후 다시 원모양대로 복건됐다. 뽈스까는 력사적으로 번번이 짜리로씨야 등 강국의 침략을 받는 나라로써 재난이 심중한 나라이고 고난이 막심한 민족이였다. 그렇지만 이런 나라와 민족이 종래로 굴복하지 않았으며 항쟁의 불길과 민족정신의 횃불을 줄곧 높이 추켜들아 왔다. 그래서일까? 뽈스까의 국가(国歌) 마저도 "뽈스까는 멸망하지 않았다"라는 제목이다. 이렇게 다재다난했던 민족이 오히려 마리퀴리부인, 쇼뻰, 哥白尼등 세계에서 이름높은 명인들을 속출하였고 사상 노벨상 수상자만도 무려 4명이나 배출했다. 지금의 뽈스까는 3850만 인구로써 31만 2천여 평방키로메터의 국토를 소유하고 국제무대에서의 지위가 나날이 향상하여 欧盟과 유엔 및 경제합작과 발전조직과 世贸조직의 중요한 성원국으로 부상되였다.    

일정에 정해진대로 우리는 왕궁을 참관한후 곧바로 와르샤와시 30중을 방문하고 고중 3학년 반급에서 어제와 마찬가지로 나와 량평은 각기 반시간씩 강의를 하였다. 학생들의 질문에 대해 일일이 해답을 하고나서 시랑송과 함께 사진도 찍었다.

벌써 오후 3시, 즉 점심식사 시간이였다. 요즘 우리의 식사 상황을 알게된 류천천은 행사에서 규정된 문협1층의 식당으로 가지 않고 사람좋게 웃으면서 우리들을 한 중화료리집으로 안내하였다. 일단 중화료리집으로 들어가니 나보다 량평이 더 흥분되여 있었다. 그는 닥치는대로 사천료리를 짚는데 어떤것은 메뉴에 없었다. 돼지발쪽, 고추에 고기볶음, 부추와 계란볶음 등이였다. 그외에 의외롭게 조선족배추김치가 있는것이 나의 눈에 번쩍 띄였다. 웬일인가 하고 물어보니 많지 않는 한국인들이 와르샤와에서 료리집을 운영하고 있어 가끔씩 배추김치를 들여 올수 있다는것이다. 우리는 중국료리떄문에 요즘 처음으로 맛있는 한끼를 배불리 먹었다. 특별이 나는 배추김치때문에 더욱이 포식할수 있었다.

중화료리집의 주인은 32세인 젊은 녀성이였다. 고향은 절강이고 10여년전에 뽈스까로 와서 일하게 되였고 한 고향인 남편을 만나서 지금은 식당만 하여도 3개를 운영하고 애도 셋을 나서 키우고 있단다. 아무리 바빠도 해마다 한두번씩은 중국을 다녀온다는 그녀는 웃는 얼굴에 온통 행복함이 담뿍 씌여져 있었다. 일군으로는 당지의 뽈스까 녀자애들을 쓰고 있어 그는 진정 뽈스까에서 보기 드문 중국인 보스였다. 와르샤와에 지금 화인이 도합 3000명 정도이고 중화료리집은 10개 정도, 그중에서 3개를 운영하고 있는 그녀는 대견스러워만 보였다.

점심식사후 우리는 와르샤와시 중심에 위치한 쇼뻰공원에 가기로 되였다. 쇼뻰공원은 도심에 큰 면적을 점하고 있었다. 도처에 아름드리 고목들이 빼곡히 서있었고 드문드문 단풍이 든 락엽이 깔린 잔디밭이 동화속의 그림처럼 예쁘게 펼쳐져 있었다. 말그대로  뽈스까는 록화와 생태환경 건설에서 세계의 가장 훌륭한 나라중의 하나여서 진정 공원국가라는 칭호에 손색이 없었다. 쇼뻰은 1810년에 와르샤와시교에서 출생하여 1849년에 페병으로 빠리에서 39세의 짧은 인생을 마쳤다. 쇼뻰은 7살에 뽈스까무곡을 창작하였고 8살부터는 무대에서 공연을 했으며 스무살 전에 벌써 유명해 졌다.

그는 짧은 인생에 수많은 음악작품을 창작했는데 대부분은 피아노곡으로써 <<영웅>>, <<1분 원무곡>>, <<군대>>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쇼뻰은 19세기 구라파 랑만주의 음악의 대표자로써 “피아노시인”라는 미명도 있다. 평론가들은 <<쇼뻰의 음악작품은 “꽃밭에 숨은 대포”여서 전세계에 “뽈스까는 멸망될수 없다” 라고 장엄하게 선언하고 있다>>고 평하고 있다. 공원 중심위치에 쇼뻰의 거대한 머리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다. 검은 대리석으로 조각된 쇼뻰의 얼굴은 심각한 표정이였다. 왼손으로 받쳐진 뺨,  륜곽이 뚜렷한 이목구비, 미풍에 날리는 머리카락 등으로 구성된 정체적 형상은 천재적인 선률의 새로운 탄생과 아울러 자유로운 비상(飞翔)을 상징하고 있는듯 하였다. 쇼뻰은 장기간 프랑스에서 거주하면서 창작을 하여왔다. 림종시 그는 친인들께 자기의 몸은 빠리에 안장하되 심장만은 항아리에 담아 조국인 뽈스까로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였다. 유언에 따라 쇼뻰의 심장은 뽈스까로 운송되여 와르샤와의 유명한 성십자교회당에 안장하였다. 한 위대한 예술가의 절절한 조국정과 불타는 애국심은 나라와 민족을 막론하고 전세계 모든 후세 사람들을 감동 시키고 있다. 우리는 함께 사전에 준비했던 생화를 조각상전에 조용히 올려 놓았다.

저녁 7시, 행사에 참석한 세계각국의 시인들은 함께 2대의 큰 뻐스를 갈라 타고 와르샤와시에서 50키로 상거한 산장으로 이동하였다. 원시림같이 나무와 숲이 꽉 우거진 곳에 허술하게 보이는 2층집이 있었다. 청신한 공기와 싱그러운 화초 냄새가 그윽한 여기가 바로 뽈스까의 유명한 연예인 쎄이묘의 집이였다. 집안에는 이미 빵과 우유와 빠다와 커피와 갈비와 과일과 와인으로 저녁식사가 준비되여 있었다. 우리 일행은 쎼이묘의 열정적인 환영사와 더불어 곧바로 와인도 마시고 식사도 하면서 시랑송도 하고 노래도하고 춤도 추고 하는 만회가 진행되였다. 모두가 구라파 인종인데 유일하게 (량평은 감기로 결석했음) 나의 아세아인종 모양새가 이색적이였는지 쎄이묘는 첫 절목으로 나에게 중문 자작시 랑송을 요청했다. 나는 중문으로 <<산림풍경>>을 랑송했다. 절목이 진행되는 과정에 가끔씩 쎄이묘의 절묘한 코미디 표현은 장내의 한결같은 웃음소리와 박수갈채를 자아냈다. 로씨야의 젊은 녀류시인 애려나는 어디에선지 예쁜 장미 한묶음을 가져와서 나에게 안겨주고 엄지 손가락을 내밀며 <<하라쇼>>란다. 낮에 간단한 교류가 있었기에 나는 애려나가 나의 졸시 <<산림풍경>>의 생태적인 분위기에 관심과 동감을 가지고 있다는것을 알고 있다. 그는 나에게 로씨야에 훌륭한 중국 친구가 있다고 한다. 김해동이라는 이 친구는 할빈사람으로써 로씨야를 자주 다녀가면서 상해에서도 사업을 벌려가고 있다 한다. 애려나는 혹시 내가 로씨야로 가던지 아니면 그가 중국에 오면 꼭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한다. 행사가 끝나서 와르샤와로 돌아오니 이미 3시도 훨씬 넘은 새벽이였다.

2008년 10월 11일  토요일  개임

아침 7시에 꺠여나니 날이 벌써 희붐이 밝아 온다. 겨우 3시간 가량 잠을 잔셈이다. 이가 통증이 난다. 아마 련속 려행과 행사에 지쳤고 음식이 또한 너무나 메말라서였을것이고 시차의 시달림도 없지않아 많았던것이 주되는 원인인것 같다.

카텐을 제치고 창밖을 내다보니 왕궁광장 넘어 멀리 뽈스까사람들이 어머니강이라고 일컽는 워이쓰와강이 보인다. 이 강은 뽈스까 내지 전반 중구라파와 발뜨해 지역의 첫번째로 꼽히는 큰강이고 길이는 무려 1068키로메터인데 87%의 류역이 뽈스까 경내에 있다. 워이쓰와강우의 안개속으로 아침해가 서서히 솟아 오른다. 중앙구라파의 하루는 이렇게 또 시작이 된다.

▲ 뽈스까 모 대학교에서 대학생들과 함께

오전 10시경, 시인들은 뻐스에 몸을 싣고 와르샤와에서 대략 60키로 정도 상거한 쇼뺸의 생가로 간다. 쇼뺀의 생가도 꽤나 큰 정원에 자리잡고 있어 역시 나무와 락엽과 잔디로 조용하고 아늑하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듬뿍 품고 있었다. 가을날의 단풍이 나무에 달린 잎새와 땅에 떨어진 락엽들을 오색 찬연하게 물들여 한 계절의 미묘한 절정을 이루어가고 있다. 정원속 깊은 곳에 흰 단층집 한채가 있는데 바로 쇼뻰의 생가다. 생가 안에는 쇼뻰이 어렸을때 사용했던 피아노와 생활용품들이 두루 진렫되여 있었다. 쇼뻰의 아버지는 프랑스인이고 어머니는 뽈스까인이였다. 어릴때부터 뛰여난 음악천부를 보여준 쇼뻰은 일찍이 성공하였고 39세의 짧은 인생에 수많은 음악작품들을 창작했다. 그의 작품중에서 <<명운>>이라는 피아노곡이 특별이 인상적이였다. 쇼뻰의 생가안에는 쇼뻰의 피아노곡 5수가 록음광반으로 제작되여 반복 방송되고 있었다. 나와 량평은 애려나와 그리고 류천천과 함께 쇼뻰의 조각상앞에서 사진을 두루 찍었다.

우리는 와르샤와로 돌아와 문협의 1층 식당에서 전형적인 서양료리로 점식을 치렀다. 점식식사와중 마침 옆에서 식사하는 뽈스까의 두 녀류시인과 인사를 하게 되였는데 그들은 우리가 중국에서 왔다는 점을 매우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주동적으로 음료를 가져다준다 휴지를 건넨다 하면서 열정을 보여주었다. 나는 금방 배워둔 뽈스까어로 <<찐꾸예!>>(감사합니다!)라고 감사를 드렸더니 그들은 무척 기뻐했다. "저는 김가입니다. 중국어로 김은 '찐'이라고 발음하고 '꾸예'는 또 중국어로 사위라는 발음이기도 합니다. 뽈스까의 처녀들이 매우 예쁘니 제가 '찐 꾸예'가 될게요"라는 나의 이런 롱담에 모두함께 폭소를 터뜨렸다.

점식식사가 끝나니 이미 오후 4시였다. 마침 자유활동 시간이여서 나는 나름대로 왕궁근처에 있는 와르샤와의 유명한 왕궁 옛성터에서 카메라로 구라파의 이색적인 인문경관을 부지런이 렌즈에 잡아 넣었다. 고풍스러운 중세기 구라파의 건축은 뽈스까의 파란만장했던 력사의 풍운을 한몸에 지니고 황혼무렵의 옛성터에 우뚝 서있고 역시 고풍스러운 깊은 골목길은 구불구불 알지 못할 사연들을 드팀없이 세월의 깊은곳에 고히 소장하고 있는듯 하였다. 돌로 깔려져 있는 골목길, 자그마한 광장 중심에 세워진 사람의 몸에 물고기의 꼬리로 형상화된 조각상, 광장에 설치된 의자에 앉아서 커피잔을 들고 한가롭게 휴식의 한때를 즐기는 관광객들, 사람들의 발밑에서 먹거리를 찾고 있는 비둘기떼, 도처에서 볼수있는 점포(店铺) 등 풍경들이 한데 겹쳐 몽타주처럼 나의 뇌리를 충실해 주고 있었다.
어제 밤 너무 적게 잔 탓으로 초저녁부터 피곤이 몰려왔다. 오늘저녁은 일찍이 잠들었다.

2008년 10월 12일  일요일  개임

어제밤은 일찍이 잠자리에 들었지만 어쩐지 이런생각 저런생각에 잠겨 오히려 잠을 설치고 새벽 2시쯤에야 겨우 잠에 들었다. 한시간에 한번씩 울리는 밤중 왕궁의 종소리는 너무나도 우아하고 너무나도 감성적이여서 무한한 상상을 불러 일으킨다. 어차피 잠을 이룰수 없으니 나는 일기책을 들고 루락된 부분을 보충해 넣고 또 시도 몇수 적어 넣었다.

아침 7시에 깨여나 창밖을 내다보니 아직 해가 뜨지 않았다. 나는 세수를 하고 복도에 준비된 아침식사를 방에 들여다 놓고 먹었다. 역시 빵, 빠다, 쥬스, 우유, 커피, 그리고 양배추 몇잎에다 구워진 소고기 몇 점이였다. 오늘은 특별이 고추장, 된장국, 김치, 쌀밥 생각이 난다. 만약 이곳에서 장기간 이런식으로 식생활을 해야한다면 나는 견뎌낼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왕궁광장 넘어, 멀리 위이쓰와강을 넘어 이제야 아침해가 서서히 늑장을 부리며 솟아오르고 있었다. 우거진 나무숲사이로, 엷은 안개속에서 솟아 오르는 아침해는 특정된 장소와 특정된 시간으로 특정된 리유가 안받침되여 늘 나의 마음을 유혹하고 있다. 나는 즉시 카메라로 예쁜 일출을 또한번 나의 렌즈에 잡아 넣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외출할때마다 그곳의 일출을 촬영하는 습관을 키우게 되였다. 혹시 언제인가 각곳의 일출을 주제로해서 시리즈로 편집하여 시까지 붙여서 시영집(诗影集) 같은것을 묶어 출판할수 있지않는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일이라는건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고 착수하기에 달렸으니 이것도 와전히 가능한 것이였다.

오늘의 일정은 매우 간단하였다. 오전 10시 30분, 뽈스까문협초대소 2층의 회견실에서 간소한 석별회에 참석하고 13시 30분경은 <<북경판점>>에서 중국대사관의 문화령사 정해가씨가 대사를 대표하여 우리 일행을 초대하며 나머지 시간은 자유롭게 관광과 쇼핑을 할수 있는 시간으로 스케줄이 짜여졌다.

10시 30분, 나와 량평씨는 2층 회견실에 도착하였다. 먼저 떠난 시인들도 많아 석별회에 참석한 시인들은 대략 30여명뿐이였다. 회의실 탁상에는 커피와 과일과 과자가 놓여 있었다. 회의 내용은 뽈스까문협의 마레이크주석의 송별사 하나뿐이여서 너무나 간단해 보였지만 반면에 상당히 실효적이였고 편안하고 여유롭고 즐거웠다. 우리는 여러나라의 시인들과 일일이 악수로 고별했다. 애려나시인은 특별히 나와 량평씨에게로 다가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몇일 안되는 시인들의 행사였지만 일단 이렇게 헤여진다니 서로가 아쉬움을 느끼지 않을수가 없었다. 우리는 악수외에도 또 일일이 열렬한 포옹으로 시인들간의 석별의 정을 표달했다. 우리는 서로 시집과 명함을 교환하면서 혹시 향후 어느나라 어느곳에서 또 다시 만날수 있기를 기약없이 약속하였다.

 13시 30분, 우리는 호패방녀사의 안내로 15분가량 걸어서 <<북경판점>>에 도착하였다. 정해가령사와 랭극(冷克)라고 부르는 젊은 비서가 이미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잇따라 뽈스까문협주석 마레이크시인도 정령사의 초청으로 식당에 도착하여 우리와 자리를 함께하였다. <<북경판점>>은 중국인이 경영하는 중화료리식당인데 와르샤와에서 상당히 유명한 중국인 식당이였다. 우리는 또 오래간만에 입에 맞는 중국음식을 먹게 되여 좋았다. 특별히 량평시인은 흥분되여 좌석에서 중국의 도수높은 고정공(古井贡) 흰술을 많이 마셨다. 고정공은 량평시인의  고향인 사천성의 명주로써 량평시인이 가히 흥분될수 있는 리유가 너무나 충분하였다. 머나먼 만리길을 떠나 타향도 아닌 타국에서 고향의 료리와 명주를 량껏 맛볼수 있는 경우, 누군들 흥분하지 않으랴! 나도 오랜만에 먹고 마실수 있는 중국의 료리와 술이여서 평소보다 훨씬 많이 먹고 많이 마셨다. 좌중에서 호패방녀사는  술을 좋아하는 마레이크시인을 건강때문에 적게 마시라고 자상하게 권유하는 장면을 보고 그들의 지극한 우정에 대해 감동을 받게되였다. 정령사는 몇해전 자기가 카자크스탄에서 중국대사관 문화령사로 재직면서 중국의 저명한 음악가 冼星海의 해외생활의 경력을 추적하고 발굴해서 글을 썼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정령사가 나에게 준 그때의 글을 읽어보니 내용이 좋았고 확실히 잘쓴 글이였다. 정령사는 업여로 글을 가끔씩 쓰고 있는데 필력이 괜찮아 보였다. 그래서일까? 정령사는 우리가 중국작가대표단이고 시인이라는 점을 굉장히 중요시하고 높게 봐주는듯 하였다. 정령사는 뽈스까금질기념화페를 한질씩 각기 나와 량평께 선물로 증송했다.

왕궁근처의 문협초대소로 돌아온 나는 발걸음을 곧바로 근처에 있는 왕궁옛성터의 골목길로 옮겼다. 뽈스까는 세계에서 호박(琥珀)을 출산하는 주요나라로써 풍부한 호박자원이 땅속에 매장되였는바 몇백년의 발굴력사가 있으며 아직도 몇천억 딸라가치의 매장량이 있다한다. 그래서 뽈스까는 호박으로 또한 유명하다. 무릇 뽈스까로 오는 외국손님과 관광객들은 모두 호박을 구매하여 기념으로 남기는 경우가 많다. 나도 류천천의 안내로 점포에서 마음에 드는 호박 몇개를 골라서 쌌다. 두 학교에서 준 강의비 600즐로티(뽈스까화페)를 한꺼번에 거진다 소비해 버린셈이다.

2008년 10월  13일  월요일  개임

아침에 깨여나니 정신이 한결 거뿐했다. 어제 중국료리를 대접받고 중국의 명주까지 마셔서인지 모르겠지만 아침의 식사는 역시 양식이지만 그런대로 먹을만은 하였다.

창밖의 거리에는 아직 행인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여기에 와서 보고야 알았지만 구라파인들의 생활절주는 우리보다 많이 느지고 안일한 생활을 추구하였다. 오전 10시에 출근하고 모든 절차와 절주가 뒤로 미루어졌다. 일요일은 반드시 휴식인데 상점, 은행, 식당 등 모든게 다 휴식이여서 일요일에는 아무일도 못하고 쉬여야만 한다. 구라파의 많은 나라는 대낮에도 등불을 켜고 승용차들이 거리에서 달린다. 대낮에도 불을켜고 운전하게끔 규정이 돼 있다는것이다.

나는 카메라를 둘러메고 워이스와강변으로 나왔다. 시원한 강바람은 나의 옷깃을 스치고 있다. 와르샤와를 뚫고 흘러가는 이강은 거창하게만 보였다. 나는 워이스와강을 배경으로 나의 모습을 렌즈에 담아넣었다.
오늘의 일정은 류천천의 안내로 거리에 나가서 쇼핑하고 저녁에는 호패방녀사의 집에서 저녁식사를 초대받기도 되여있었다.

나와 량평은 류천천의 안내로 먼저 여름에만 쓰이던 옛왕궁으로 가서 참관하였다. 역시 큰 정원이였다. 가을날의 단풍에 아름답게 물든 나무와 락엽들은 어디에 가나 그렇게 아름답지 않을수가 없었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정원에서 락엽을 밟으며 우리는 한가롭게 담소하면서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거리로 나온 우리는 상점에서 쇼핑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독일제 고리등 바지 한견지를 쌌고 량평은 두툼한 계도내복 한견지를 쌌다. 사천성의 도회지인 성도의 겨울도 꽤나 추워서 계도내복 같은것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량평의 소견이다. 우리는 나머지 얼마 남지 않은 즐로티로 호패방녀사에게 아이스크림을 한봉지 쌌고 나머지 잔돈 30여 즐로티는 류천천에게 주었다. 래일 아침이면 우리는 귀국길에 오르기에 즐로티는 이제 별로 쓸데 없게 된셈이다.

오후 6시경, 우리는 호패방녀사의 집에 도착했다. 호녀사의 집은 5층 아파트의 2층에 중국평으로 약 60평쯤되여 보이는 면적의 집을 잡고 있었다. 호패방녀사는 1951년 장춘 공군학교의 예과를 졸업하고 항미원조에 참가한후 1955년에 주은래총리의 비준을 받아 멀리 뽈스까에 시집왔던것이다. 결혼후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었고 일찍 뽈스까인 남편과 리혼을 하고 오래동안 혼자 살고 있는 형편이란다. 70여세인 호녀사는 작은 체구에 그래도 건강한 몸매이다. 개성이 꽤나 강해 보이는 호녀사는 언어중에 줄곧 사회의 비리와 부정에 호된 비판을 하고있었다. 그의 솔직한 심성과 직통배기 성격은 처음부터 우리간의 서먹함을 깨끗이 소해하여 버렸다. 호녀사는 담배를 곧잘 태웠다. 고독에서 였을까? 그는 늘 예리한 안목으로 사회현상을 뚫어 보고 역시 예리한 언어로써 사회이 질환을 파헤친다. 그는 뽈스까문으로 주류문단의 작가들과 많은 래왕과 교류가 있고 앞에서 언급했던겇처럼 뽈스까문협의 마레이크주석과도 친근한 벗이였다. 작은 면적의 집안에 복도까지 책을 무져 놓아 공간은 더욱 졻아 보였다. 혼자서 사는 집이라서 그런지 별로 꾸며지지 않았고 너무나 술술해 보였다. 호녀사는 내가 동북사람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특별히 쉰배추에다 감분국수(酸菜炖粉条)를 끓여 놓기도 했다. 이런 곳에서 쉰배추는 어떻게 저렸는지 나는 궁금했다. 호녀사는 나의 의아한 기미를 알아채고 중국친구네 집에서 얻어온것이라고 자세히 나에게 설명해준다. 그리고 호녀사는 또 량평시인이 사천사람이라는 점도 잊지 않고 사천료리 한 접시를 해놓았다. 일여덟개 료리가 자그마한 접시에 각기 보기좋게 담겨져 우리의 구미를 무척 끌었다.

뽈스까에서 중국료리로 식사한다는게 너무나 사치한것도 같아서였다. 호녀사는 오래동안 소장했던 좋은 뽈스까 위드까를 내놓았다. 우리는 한잔 한잔 담소와 함께 한병을  쉽게 굽냈다. 뽈스까의 워드까는 세계에서 꽤나 유명하다. 뽈스까 본토에서 뽈스까의 워드까를 마신다는게 어쩌면 신기하기도 하여 나는 평소보다 둬잔을 더 마셨다. 호녀사는 사전에 준비했던 선물을 우리들에게 증정했다. 호박으로 만들진 예쁜 해마였다. 우리는 호녀사의 자상한 마음을 다시한번 음미해 볼수 있었다. 호녀사는 다년간 뽈스까의 주류문단과 함께 중국에서 오는 작가들을 위해 앞뒤로 분주히 뛰여 다니면서 여러모로 편리를 도모하여 주어 중국의 많은 작가들을 사귀였다. 작년 그는 마레이크주석과 함께 중국을 방문하여 청해호시회에도 참석했고 중국작가협회에서도 열렬한 환영과 푸짐한 접대를 받았다한다. 말그대로 호녀사는 명실공히 중뽈문학교류의 충실한 사자였다.

저녁 9시가 넘어 우리는 호패방녀사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초대소로 돌아온 나는 술기운에 잠이 오지 않았다. 래일이면 여기를 떠난다는 생각에 나는 혼자서 다시 한번 근처의 옛성터 광장으로 산책했다. 로천 커피숍에 앉아 천천히 커피를 마시면서 주변의 오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평화롭고 여유롭고 한가롭고 아늑한 분위기가 구라파의 한 옛성터에서 맴돌고 있었다. 이색적인 오늘 밤 이시각은 나의 기억속에 영원히 소중히 간직하리라 다짐하면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2008년 10월 14일-15일  화요일  구름이 많음

아침 6시, 왕궁의 종소리와 함께 기침하고 샤워하고 짐을 꾸리고 아침식사를 처렀다. 다시 한번 창밖을 내다 본다. 왕궁광장을 건너, 멀리 워이스와강을 건너 서광은 그름층을 뚫고 밝아오고 가로등들은 아직도 켜져 있어 한결 우아하고 조용하다.

7시 20분, 날은 아직도 완전히 밝아지지 않았지만 류천천은 약속대로 우리를 안내하려 일찍이 나와 있었다. 승용차는 쏜쌀같이 와르샤와 국제공항으로 내달린다. 40분가량 후 우리는 공항에 도착하였다. 사실 공항은 와르샤와 외곽에서 멀지 않은  교구에 자리잡고 있었다.
공항은 별로 크지가 않았지만 상당히 깨끗하고 서비스가 또한 상당히 주도하였다. 우리는 류천천과 열렬한 포옹으로 작별인사를 대체하였다. 멀리 조국을 떠나 뽈스까에 정착한 류천천, 베트남 남편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류천천, 동포들을 만나서 그렇게 반갑고 즐거워하던 류천천, 한해에 한두번씩은 중국으로 다녀간다지만 이시각 그녀는 어쩐지 각별이 외로워 보였다.
오전 10시 35분, 비행기는 활주로에서  리륙하여 북경으로 향발한다. 나는 창밖의 건물과 하늘을 바라보면서 맘속으로 조용히 이렇게 불러본다
"잘 있거라 뽈스까여, 다시 만나자 뽈스까여!"

1시간 35분후, 우리가 탑승한 비행기는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착륙하였다. 이번에는 올때마냥 공항에서 나갔다가 또 들어오는 번거로운 페단이 없어 좋았다. 뽈스까로 갈때 프랑크푸르트공항에서 약 2시간 정도 와르샤와로 가는 려객기를 환승하는 시간을 기다렸는데 량평이 짐을 나에게 맡기고 근처에 산책갔다가 독일경찰에 심사받아 언어장애로 무작정 내가 있는곳으로 뛰여오고 경찰 역시 죽자사자 뒤에서 량평씨를 쫗아오던 에피소드를 생각하면 다시한번 웃음이 절로 터쳐 나온다. 후에 량평께 무엇때문에 그렇게 죽자사자 뛰였 왔는가고 물었더니 그가 하는 말이 일리가 있었지만 더욱 나를 웃겼다 "일단 심사를 받기 시작하면 나의 려권은 짐에다 넣어 둬서 신분을 증명항수 없고 그래서 그들은 나를 체포할것입니다. 거기에다 언어소통도 불가능하지 혹시 와르샤와로 가는 비행기를 환승하지 못할수도 있는것 같아서 냅다 뛴겝니다. 김선생께로 오면 짐속에서 려권을 꺼내들고 자기를 증명할수 있잖아요." 대략 2시간이 넘어서 우리는 중국국제항공의 려객기에 몸을 실었다.

오후 2시 50분, 비행기가 서서히 하늘로 떠올랐다. 올때마냥 중국으로 돌아갈때도 역시 기내에서 두끼를 먹었다. 북경시간으로 15일 아침 6시에 우리는 드디어 북경국제공항에 착륙하였다.

북경공항에서 나와 량평씨는 굳은 악수를 나누면서 몇일간의 형제처럼 지낸 정분을 더욱 돈독히 할것으로 다짐하고 작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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