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춘 박초란

박초란 기자 

[서울=동북아신문]곡식들이 이삭을 패고 과일들이 단물이 오르는 계절, 행운스럽게도 조선 라선특별시에서 열린 제2회 국제상품전시회(8월 20일~23일)에 통역으로 참가하게 되였다.

8월 18일 아침 8시반에 권하통상구로 향한 택시에 몸을 실은 우리 넷(회사의 총경리와 딸, 업무경리와 나)이 권하통상구에 도착한것은 9시쯤. 기다란 차행렬때문에 택시를 통상구대문어구까지 대일수가 없었다. 업무보러 가는 차와 관광차들도 적지 않았지만 그보다 제2회 라선국제상품전시회에 전시할 크고작은 차량들이 장사진이다. 일행보다 한시간가량 늦게 출발한 우리가 앞선 차량들을 따라잡아야 우리가 지닌 라면, 광천수 등을 그 차량들에 옮겨 실을수 있다. 일행가운데서 유일한 훈춘사람인 내가 차에서 내려 통상구대문앞까지 다가가 보니 안면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 보였다. 내가 우리 사정을 말하니 연변차백자동차무역회사의 고영귀경리가 택시를 근처까지 대여 짐을 받아싣자고 말하였다. 고경리덕분에 택시가 차량들의 틈새를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비집고 나가 짐을 전시차량에 실을수 있었다. 그제서야 조금 안도의 숨이 나왔다.

이제 통관수속만 하면 그만이다. 고경리는 우리더러 통관수속을 먼저 마치고 권하통상구저쪽에서 차를 기다리라 했다. 이때로부터 우리의 지루한 기다림이 시작되였다. 전시차량들의 통관수속이 까다롭고 복잡하기때문이다. 밖에서 한시간 가량 기다리니 끝내 검사를 마친 차에 오를수 있게 되였다.

권하ㅡ원정리다리는 잠간새에 건넜다. 물 맑고 산이 많아 삼천리 금수강산이라 불리는 조선땅을 4년만에 다시 밟는다. 백여년전에 살길을 찾아 강을 건너 중국땅에서 와 밭을 일구고 움막집을 짓고 삶의 터전을 마련해주고 언녕 고인이 된 선조들, 이민 3세로 된 내가 선조들이 살던 땅을 찾아왔다고 생각하니 말못할 감정이 부풀어올랐다. 가슴이 짠해나고 뜨겁고도 미묘한 감정이 온 몸을 감쌌다.

어리둥절한 가운데 비지땀을 뻘뻘 흘리며 여러가지 통관수속을 마치고 밖에 나와 차량을 기다렸다. 지루한 기다림였다. 열시반에 원정리 세관을 넘어왔지만 전시에 내놓을 차량들의 통관검사는 중국쪽보다 더욱 복잡하고 까다로웠다. 조선시간으로 1시가 되니 원정세관대문앞까지 다가온 차량들이 다리어구에 갇혀버렸다. 점심퇴근시간이라 대문을 닫아버리니 오도가도 못하고 다리우에서 세관일군들의 출근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3시에야 출근한다니 그때까지 꼼짝 못하고 기다릴수밖에 없었다.

1시가 넘고 2시가 가까워오자 배가 촐촐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간식과 음료수를 차량에 싣다보니 통관검사를 마치기전엔 빼내올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을 미처 예측하지 못한 우리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아침도 먹네마네 하다보니 배에선 연신 밥 달라는 신호가 울렸다. 맹수근총경리가 가방을 들추더니 주먹만한 사과 한알을 꺼냈다. 너무 반가웠다. 넷이서 사과한알을 쪼개 먹었다. 그나마 입질한셈이다.

고영귀경리는 다리우에서 기다리는 차량에 구운떡과 소만두를 실었다면서 근무중인 군인과 사정해보겠다고 건너간다. 한족인 그가 우리 말을 할줄 알리가 없다. 그는 자신의 배를 가리키면서 허리를 구부정하고 눈을 희번덕거리며 쓰러지는 시늉을 해보였다. 배고파 쓰러지기 직전이니 차에 실은 먹거리를 가져오게끔 봐달라는 뜻이였다. 뒤에서 지켜보는 우리는 우스워 배꼽이 빠질 지경이였다. 하지만 그 군인은 안된다고 손사래만 칠뿐이다. (에고고 젊은 군인 차갑긴?)하는 원망이 저도 모르게 입에서 튕겨나왔다. 마침 훈춘에서 대조선 무역을 십여년간 해온 고병구씨가 우리 말로 해석을 해줬다. 끝내 군인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가져와도 된다고 하는듯하다. 고영귀씨는 기다렸다는듯이 달려가 가져온다.

우리는 광천수를 반찬으로 소만두 하나에 구운떡 하나씩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통관검사를 마친 사람은 세관대청에 들어가지 못하기에 원정리세관 뒤울안에서 우리는 장장 네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쪽걸상 하나 없고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는 좁은 장소에 숱한 사람이 기다림에 지쳤다.

원정리-라진도로구간. 낮에도 헤드라이트를 켠 차량들이 보인다.

오후 5시가 넘어서야 차량들의 통관수속이 끝났다. 차가 씽씽 달리기 시작했다. 4년전만 해도 흙길이여서 먼지때문에 뻐스창문을 열수 없었지만 지금은 신선같다. 중국측에서 지난해 4월부터 조선 원정리에서 라진항까지의 53.5 km 구간을 세멘트포장도로로 건설했던것이다. 차창밖으로 푸르른 산과 들이 휙휙 스쳐지나간다. 키작은 나무들이 대부분이였지만 가끔 쭉쭉 뻗은 소나무들도 보였다. 나무명칭은 알수 없지만 장백산미인송을 방불케 칠칠하게 자란 소나무이다. 밭곡식은 자람새가 좋은 편이 아니였다 옥수수대가 철에 비해 가늘고 키도 작았다. 가끔 염소떼들도 눈에 띄였다. 문뜩 4년전 관광뻐스에 앉아 라진으로 가다가 본 염소가 머리에 떠올라 저도 몰래 쿡 웃었다. 옆에 앉은 맹수근총경리가 왜 웃냐고 물어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때 뻐스에서 길가에 매놓은 젖이 탱탱 불은 염소 한마리를 보았는데 염소젖에 까만 젖싸개가 착용되여 있었다. 뻐스에 앉은 20여명 관광객들이 그 광경을 보고 와그르르 폭소를 터뜨리고 염소가 왜 젖싸개를 착용했을가 의논했었다. 누군가는 다른 사람이 젖을 짜갈가봐서라 하고 또 누군가는 염소의 젖을 보호하느라 그랬다고 했다. 하여간 염소젖에 딱 맞게 젖싸개를 만든 솜씨는 대단했다..

한시간쯤 더 달려 선봉시내에 들어섰다. 이상하게도 크고작은 차량들이 대낮에 헤드라이트를 환히 켜고 달리는것이였다. 중국에서는 보기 힘든 현상이였다. 우리가 이상해하자 누군가 교통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선진국가들에서는 대낮에 헤드라이트를 켜는데 그것을 따라배워 조선에서도 켠다는것이였다.

선봉시내 한복판에 자리잡은 라선국제상품전시장에 들어섰다. 발빠른 업체들에서 벌써 각종 크고작은 차량들을 들여다 넓다란 전시장마당에 즐비하게 세워놓았다. 일요일에는 통관이 안되는지라 일찍 손써서 들여온것임이 틀림없다.

자동차수출경영권이 있는 연변차백자동차회사를 통해 연길 모자동차판매회사, 소림뻐스 등 회사와 공장들의 차 23대도 번듯하게 전시장 한쪽을 차지하고있었다. 이번 전시회엔 각종 차량 백여대가 전시된다고 한다. 조선에서 이 많은 차량들이 다 팔릴수 있을가 하는것이 은근히 걱정되였다. 자동차전시참가자들의 열성도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총경리고 직원이고 구분이 없이 비길을 달려오느라 어지러워진 차를 걸레로 반짝반짝 빛이 나게 닦는다.

저녁 7시반이 되여서야 우리는 전시에 내놓을 소림뻐스를 통근뻐스삼아 타고 전시회주최측에서 통일적으로 정해준 비파도 려관으로 갔다. 단층집으로 된 려관방에 들어가니 잘 정리된 침대 세개씩 놓여있었다. 하얀 침대보에 털담요까지 있는 꽤 괜찮은 조건이였지만 방안에서 곰팡이 냄새가 물씬 풍겨와 코를 찔렀다. 창문쪽을 보니 작은 뙤창이 열려있었지만 바다를 지척에 둔데다가 요즘따라 매일 비가 내리니 습기가 많아서인것 같다. 저녁 먹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밖에 설치된 맥주장에서 노래소리가 빵빵 들려오고 맥주마시는 손님들의 거나하게 취기가 오른 말소리에 잠을 청할수가 없었다. 워낙 잠자리를 바꾸면 2,3일 적응기가 있어야 정상적으로 취침할수 있는 나로서는 고역이였다.

뒤척거리면서 옅은 잠을 자다가 아침 6시에 깨났다. 옆침대의 맹수근총경리와 그의 딸은 사지를 빼가도 모를 지경으로 달게 잔다. 살금살금 옷 주어입고 밖에 나가니 간밤에 내린 큰비에 목욕을 한듯 나무 이파리가 더 새파랗고 싱싱하다. 청신한 공기에 가슴이 다 뻥 뚤리는것 같다. 마침 고영귀경리도 밖에서 스트레칭을 하고있었다. 둘이서 바다가쪽으로 갔다. 비파처럼 생겼다해서 비파도로 이름지어진 비파도는 그야말로 아름다웠다. 열콩알만한 골뱅이까지 들여다 보이는 맑은 바다물과 비파도의 록색이 잘 어우러져 명화가가 그려놓은 수채화같다. 비파로 연주한 아름다운 멜로디가 파도소리에 실려 은은히 들려오는듯하다. 시원한 바다바람에 비릿한 냄새가 코를 자극하고 바다밑바닥에서 미역줄기가 흐늘흐늘 춤을 춘다. 바다 한가운데에 비파모양의 섬이 생긴것이 정말 신기하기만 했다. 두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니 비파도가 내눈에서 멀리로 하더니 하나의 비파로 둔갑하여 동실동실 떠다닌다…

멀리서 바라본 비파도

다리를 만들어 륙지와 이어진 비파도산길은 차량이 다닐수 있을만큼 길이 닦아져 있고 여러가지 활엽수와 식물이 무성하게 자라 있다. 산길을 걷는데 차량한대가 마주 내려온다. 간밤에 비가 내린지라 길엔 적잖은 물이 고여있다. 급히 옆으로 피하고 있는데 차량이 턱 멈추었다. 보아하니 우리가 먼저 지나간 다음에 가려는 심산이였다. 반가운김에 운전기사한테 손을 저어 고마움을 표하였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이렇게 례의바르고 개명한 민족이라 고경리한테 자랑하였다. 고경리도 연신 머리를 끄덕이면서 비록 발전을 못한 나라지만 조선민족은 정말 우수한 민족이라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제2회라선국제상품전시회》개막식

8월 20일 10시, 《제2회라선국제상품전시회》개막식이 성황리에 시작되였다. 청진주재로씨야령사관의 령사와 로씨야에서 온 참가자대표, 자국내 대표 및 중국 참가자대표들이 개막식에 참석했다. 각 업체에서 온 참가자들이 전시장을 꽉 메웠다. 간단하고도 조리있는 개막식은 약 반시간 가량 진행되였다.

개막식이 끝나자 전시장 밖에서 번호표를 받아쥐고 대기하고 있던 조선주민들이 조수마냥 전시장에 모여들었다. 특히 식품, 보건품, 생활용품과 의류를 전시한 실내전시장은 싸움터를 방불케 하였다. 서로가 생활용품이며 의류들을 다투어 샀다. 불티가 난다는 말을 바로 이럴 때 써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지났다. 닥치는대로 사가고 쥐는대로 사가는데 얼마 안가서 갖고간 제품들이 바닥이 날 지경이였다. 전시회참가자들은 갖고 온 제품들을 판매하느라 비지땀을 뻘뻘 흘리고있었다.

실외전시장 일각. 이틀만에 전시되였던 차량들이 거덜났다.

실외전시장은 실내와 판판 달랐다. 전시회 첫날은 숱한 사람들이 여기 저기 밀려가고 밀려오면서 구경만 하는것 같았다. 가격과 규격을 물으면서 시장조사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였다. 하지만 이튿날부터는 딴판이였다. 조선의 각 회사와 농장 그리고 기업들에서 커다란 가방에 인민페를 가득 넣고와서는 트럭을 척척 사서 몰아가는것이였다. 길림다이야회사의 1~2천원씩 하는 자동차다이야보다 몇만원 지어 20만원가까이 하는 자동차가 더 잘팔리는것 같았다. 중공업이 뒤떨어진 조선은 농용차와 화물차, 공정차판매시장잠재력이 큰것이였다. 그러니 차를 팔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나의 걱정은 괜한것이였다. 특히 두줄좌석짜리 농용트력이 더 잘 팔리였다. 이틀만에 전시회에 갖고 온 차량들은 거덜이 났다. 다 팔지 못하면 뒤처리가 걱정이였던 자동차판매회사들은 그제야 안달이 났다. 더 많이 전시하지 못한것이 후회되였던것이다. 연변차백자동차회사의 조학룡경리와 연길의 소지국경리는 서둘러 차를 가지러 간답시고 귀국하였다…

실내 전시장 조선부스.

전시회 마지막 날인 23일, 집에 갖고 갈 해산물이라도 좀 살가해서 라선시로 갔다. 역시 4년만에 들려보는 라선시는 놀라울 정도로 발전하였고 번화해졌다. 도처에서 찾아볼수 있는 호텔이며 식당, 상가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였다. 새롭게 땅을 차고 일어난 고층건물도 많았고 거리에서 활보하는 주민들의 옷차림새도 다양하고 아름다웠다. 가끔 산뜻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녀성들도 보였다. 4년전에 왔을 때보다 너무나 대조적이였다. 거리도 활기차 보였다.

시장안에 들어가니 더 가관이였다. 새우살, 게살, 말린 건어물이며 각종 생선, 소금에 간을 한 해물도 풍부했다. 가격도 훈춘의 반 가격이였다. 뒤켠으로 들어가보니 정말 쥐뿔외엔 다 있는것 같았다. 실담배, 권연, 각종 일용품이 눈이 모자랄 정도로 진렬되여 있었다. 수산물시장에서 장보는 사람은 거의다 중국사람이고 일용품시장에는 조선주민들이 많은것 같았다.

좋아하는 송어, 이면수 등 수산물 몇가지를 사가지고 귀국의 길에 올랐다. 정말 감개가 무량했다.

특히 라선특별시는 훈춘처럼 조선, 로씨야, 중국과 린접한 금삼각지대인지라 라선경제특구의 미래가 밝아서 돌아오는 길에서도 가슴이 활랑거렸다. 라선경제특구는 중국과 로씨야의 투자가 본격화되면서 땅값이 2년사이에 세배가량 올랐다고 한다. 특히 조선에서 외국인 투자 유치를 위해 2011년 12월에 《라선경제무역지대법》을 제정함에 따라 지금은 외국인 투자자들이 땅이나 건물을 담보로 내놓으면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수 있기에 투자자들의 구미를 부쩍 당기고있다. 라진항을 중국에서 50년간 임대계약을 한 상황이고 또 이제 머지 않아 라선시에 훈춘의 전기와 통신이 들어가게 되고 인터넷도 가능하게 된단다. 그리고 중국사람은 라선시의 가옥구매도 가능할것이라고 전망하고있다.

나날이 발전하고 또 비약하게 될 라선경제특별시의 휘황찬란한 미래를 그려보노라니 귀국의 길도 그렇게 신날수가 없었다.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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