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인협회 이요섭 수필가 수필 특강

[서울=동북아신문]재한동포교사친목회와 재한동포문인협회는 오는 15일 오후 3시 서울 남구로 진달래냉면에서 포럼과 송년회를 개최한다.

이날 포럼에서는 재한중국동포 부분적인 교사들이 관련 분야에서 성공한 케이스-경험담을 들려주고, 재한동포문인협회에서는 동포문학 발간 관련 논의를 하며, 한국의 저명한 작가 이요섭 수필가의 수필 창작 특강을 받게 된다. 

▲ 이요섭 수필가

이요섭 수필가 프로필 :

국제 펜 크럽 한국본부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수필문학회 이사

좋은문학 편집위원

국보문학 고문 (전)

김포 문인협회 회원

별문학회 고문

경기도 심의 심사위원

김포문학상 본상 수상 2002년

국보문학 대상수상 2006년

서정문학 수필부문 최종심사 위원장

서정문학 고문

 

저서: 바람은 쉬지 않는다.

호수에서 부르는 노래( 공저 외 다수)

 

이요섭 수필 2편

1. 혼자 떠나는 여행

휴가철이면, 나는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한적한 곳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혼자 여행을 다니면 고독한 나그네처럼 외롭고 청승맞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여행은 자연 속에서 얻어지는 감흥을 방해받지 않아서 좋다. 함께 있는 사람이 없어도 자연은 친구가 되어 준다.

인생은 여행이라고 한다. 인생의 여행길은 되돌아 올 수 없는길이다. 내가 어머니 품속을 떠나 지금까지 흘러온 인생길이 한없는 동경(憧憬)과 아쉬움에 잠긴다. 세파를 헤쳐 나가기 위하여 걸음마를 배우듯, 나는 지금 혼자 떠나는 연습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동안 나는 경관이 좋다는 산과 바다를 찾아 다녔다. 그런 산과 바다는 그야말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고 있었다. 그 뿐이 아니다. 차에서 내리면서부터 즐거워야 할 여행은 짜증스럽기만 하다. 찰거머리 같은 호객꾼, 바가지요금, 음식 쓰레기의 악취, 버려져 있는 쓰레기, 야경 속에서 무질서하게 난무하고 있는 모습들이 이마를 찌푸리게 했다.

인적이 드문 조용한 곳을 찾으려고 지도를 펼쳤다. 마침내 서해안 일대를 돌아보기로 하고 목포 여객선 터미녈에서 '가사도리'로 가는 연락선에 승선하였다. 잠시 후에 연락선은 고동을 울리며 달려간다. 흰 구름이 흘러가고 있는 모습을 갑판 위에 않아 바라보면서 지나온 내 인생을 더듬어 보았다. 지금 내 인생은 어디쯤 흘러가고 있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니, 지나온 날들이 허무하기만 하다.

구릿빛 얼굴에 밀짚모자를 쓰고 내 옆에 않아 있던 사람이 저기 보이는 섬이 사자 섬이라며 말을 건넨다. 나는 그 섬을 바라보았다. 사자가 물위에 않아 있는 것 같았다. 섬이 보일 때마다 그 사람은

"저기 보이는 섬은 손가락을 펴고 있는 것 같다고 해서 손가락 섬이고요, 저기 보이는 섬은 상투를 하고 있는 모습 같아서 상투 섬이고 합니다." 라고 하며 이곳이 서해안 해상 국립공원이라고 한다.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인간과 자연이 노래하는 서정 시(詩)이다. 자연은 인간과 달리 아름답고 추함이 없다. 자연 앞에 나서면, 힘겨운 삶의 애착이나 고달픔, 서러움조차 부질없이 느껴진다. 나는 배낭에서 하모니카를 꺼내어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찬송가를 연주해 보았다.

어느 사이 '가사도리'에 닿았다. 이 섬은 지도에는 표기되어 있지 않은 절해(絶海)의 고도이다. 나는 굴 껍데기가 닥지닥지 달라붙어 있는 바위를 짚고 내렸다. 나무들이 우겨져 있는 사이로 한 사람이나 지나갈 수 있을 좁은 길이 있었다. 이런 섬에도 사람이 살고 있을까? 하고 생각하며, 우거진 잡초를 헤치고 오솔길을 따라 인가(人家)를 찾아보았다. 그런데, 흰 연기가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 발걸음을 멈추고 그 연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니 형언할 수 없는 그리움이 밀려들었다.

인기척을 내며 그 집으로 들어서자 점심 준비를 하느라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우던 아주머니는 나를 보는 순간, 반가움과 경계의 눈빛이 교차했다. 그러나 여행을 왔다는 내 말에 마루에 앉으라고 하면서 시원한 물을 한 대접 권한다. 잠시 후에, 주인인 듯한 남자와 열댓 살 정도의 여자아이가 망태기와 그물을 어깨에 둘러매고 집으로 들어섰다. 예상대로 주인남자와 딸아이는 아주머니의 설명을 듣자 사람이 그리워서인지 나를 반겨주었다.

점심 식사 후에 우리는 바다로 나갔다. 바닷가에 조약돌과 은빛 모래가 아름답다. 돌을 주워 보았다. 조약돌에 새겨진 무늬는 신이 아니고는 그릴 수 없는 예술품이었다. 나는 예쁜 조약돌 몇 개를 주워 배낭에 넣었다. 그리고는 보트를 타고 앞에 보이는 작은 섬으로 갔다. 나는 팩 소주 하나를 주인 남자에게 건넸다. 그는 노를 딸아이에게 건네주고 뱃면에 손을 넣어 미역, 톳, 등을 손안에 한 웅큼 따내어 놓는다. 소주 한 잔을 마시고 안주 삼아 미역, 톳을 먹었다.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풍요로움은 형언할 수 없었다.

혈도(血島)라고 하는 섬에 도착했다. 섬 전체는 핏빛을 띠고 있었다. 그래서 혈도(血島)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유배지였던 이 곳으로 귀양왔던 사람이 고향으로 가고싶은 한(恨)이 섬을 핏빛으로 물들였을까. 혈도의 중앙에는 두어 명이 들어갈 정도의 굴이 뚫려 있다. 아마 억만년의 세월 속에 모진 풍랑이 만들어 놓은 것 같다.

나는 부녀(父女)를 집으로 돌려보내고 텐트를 쳐 놓고 바위에 앉았다. 해풍에 시달려 꾸불꾸불한 소나무가 바위를 뚫고 등나무처럼 햇빛을 막아주고 있었다. 바위 사이에서 자라고 있는 소나무를 보니 삶이 힘겨울 때 좌절했던 지난날들이 부끄러웠다. 송림사이로 물결이 출렁거린다. 생활 속에서 부식되어 있는 마음의 찌꺼기들을 말끔히 씻어주는 느낌이다. 나는 이 아름다운 자연 앞에서 나이, 욕심, 괴로움, 번뇌 등을 모두 벗어 버렸다.

노을이 섬을 핏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까치 노을이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버리고, 대지는 회색으로 물들면 별빛이 미소를 보낸다. 다른 곳에서 보는 것 보다 더 밝은 별들이었다. 별들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외로움이 파도를 타고 밀려온다. 하늘에 떠 있는 달을 쳐다보지 않아도 달은 물 위에 어려 있다. 물 위에 떠 있는 달을 보며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을 그려놓으면, 파도가 지워버리곤 한다. 떠나는 연습을 하려면 그리웠던 얼굴을 하나 둘 지워야 하나보다.

다음날 아침, 주인 남자가 나를 데리러 왔다. 그가 오지 않았다면 나는 어찌 되었을까. 영원히 혼자가 되어 태고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이곳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생각하니, 문명의 세계에 길들여진 나로서는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아 그가 더욱 고맙게 느껴졌다.

나는 떠나기 전에 워크맨을 소녀에게 선물하고 통통배에 올랐다. 아주머니와 딸아이는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들은 언제까지 인생을 고도에서 그 소박함과 순수함을 간직할 수 있을까.

나는 아저씨에게 사람들이 많이 찾아올 수 있도록 혈도를 자랑해야겠다고 했더니

"그런 말을 하려거든 당신도 오지 마시오. 도시 사람들이 다녀가면 쓰레기 밖에 남는게 없소."하며 퉁명스럽게 내 뱉는다. 그런데도 그 말에 안도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왜일까. 혈도가 지닌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오래도록 간직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인지 모른다.

생활이 인생의 사업이라면, 여행은 인생의 즐거움이다. 생활이 인생의 산문이라면, 여행은 인생의 詩다. 라고 말한 사색의 노트가 생각난다.

짜여진 생활 속에서 혼자 떠나는 여행은, 인생의 여정에 휴식과 위안을 주어 삶의 여유를 느끼게 한다.

 

2. 하모니카

하모니카는 내 생에 喜,怒,哀,樂과 함께 동행한 愛機이다. 부피가 크지 않아서 소지하고 다니기에 간편해서 좋고, 애수적인 음색이 좋다. 회오리 바람같은 삶 속에서 외롭거나 힘겨울 때, 고뇌와 번민으로 밤을 지새울 때가 더러 있다.그 때 하모니카의 선율은 미묘한 영혼의 소리로 실려 잡다한 생각들을 떠나보낸다.

하모니카 소리는 부모님의 애간장을 태우던 나를 위하여 흐느끼며 기도하던 어머님의 소리 같고, 옛 추억의 향기와 아련한 사랑의 기억을 더듬게 하기도 한다. 하모니카는 금전적으로도 부담스럽지 않고 편안하게 다룰 수 있는 매력적인 악기이다. 하모니카는 어린 아이에서부터 노년층 까지 쉽게 배우고 공감할 수 있다. 요즘은 다른 악기에 밀려 하모니카 소리를 듣기가 흔한 일은 아니지만, 하모니카를 불고 있으면 추억을 퍼올려 주기도 한다.

하모니카의 유래는 기원전 3000년에 중국에서 쉥(sheng)이라고 부르는 관현악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악기는 대나무로 만들어 졌는데, 공명에 의해 소리가 난다고 한다. 18세기에 '마르고 폴로'가 이 악기를 유럽에 소개하여 그 악기의 영향으로 풍금, 아코디온, 섹스폰, 하모니카가 만들어 졌다는 자료가 있다.

우리나라에는 1940년 일본의 '야마하' 하모니카 합주단이 평양 YMCA에서 연주회를 가지면서 친숙한 악기로 자리잡기 시작했다고 한다. 연주용 하모니카의 종류는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 위 아래의 구멍이 두 개씩 있는 복음(트레폴로 하모니카)가 있다. (우리가 흔히 부는 하모니카) 이 하모니카는 그냥 불어도 떨리는 음이 자연스럽게 나오는데, 왠지 청아하고 구슬프게 들린다.

크로매틱(반음계) 하모니카는 오른 쪽의 작은 버튼으로 반음과 온음을 낼 수 있다. 주로 유럽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다. 다이아토닉 하모니카는 구멍이 10개이고, 크기가 작으면서도 3옥타브를 커버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런 악기들을 10개를 소유하고 있지만, 그 중에 복음 하모니카로 연주를 하면 마음이 편안해 진다.

내가 하모니카를 불기 시작할 때는 초등학교 5학년 시절이었다. 밤마다 앞 산에서 들려오는 하모니카 소리는 나를 몽유병 환자처럼 끌어내고 있었다. 하모니카 소리를 따라 산으로 올라갔었다. 고등학생 정도의 형이 하모니카를 불고 있었다. 멋있었다. 그 형에게 한 번 불어보자고 했다. 그 형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내일 저녁에 심부름을 해 주면 하모니카를 주겠다고 했다.

다음 날 저녁에 하모니카 소리를 듣고 형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 형은 편지 한 통을 나에게 건네주며, 빨간 대문집 누나에게 건네주고 오라고 했다. 편지를 그 누이에게 건네주고 하모니카를 받았다. 행여 달라고 할까봐 하모니카를 거머쥐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뛰어갔었다. 그 후 하모니카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그 형의 모습도 볼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니 사랑의 세레나데를 연주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 형은 사랑을 이루었을까? 연서를 전달하고 받은 이 빠진 하모니카를 밤낮으로 불었다. 집에서는 시끄럽다고 꾸중을 해도 학교에 다녀오면 공부는 뒷전이고 하모니카를 불곤 했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호남신문사에서 주최하는 어린이 백일장에서 동시로 장원을 했었다. 어머니는 기뻐하시면서 하모니카를 선물로 사 주셨다. 뛸 듯이 기뻤다. 그 때부터 하모니카는 중년이 되어 있는 나와 함께 동행하고 있다.

사우디에서 생활할 때의 일이다. 몰아치는 砂風, 용광로처럼 뜨거운 열기는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향수병鄕愁病은 치유할 수 없었다. 하늘을 수 놓은 수 많은 별 속에서 자식들 아내의 별을 찾아 헤메이고, 그리운 모습을 둥근 달에 그려보곤 했었다. 그래도 못 견디게 그리우면, 하모니카를 연주하곤 했었다. 하모니카 소리는 바람에 떨며 내 마음 싣고 바다 건너 국경을 넘어 가족들의 가슴에 전해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으리라.

'사랑하는 나에 고향을 한 번 떠나 온 후에...' '해는 저서 어두운데/ 찾아 오는 사람 없고/ 밝은 달을 쳐다보니/외롭기 한이 없다/...'등을 연주하고 있으면 어느 사이 내 주위에는 동료들이 모여 흐느끼고 있었다. 외로움은 그리움의 씨앗일까.

K문우의 초청을 받고 충북 영동에 갔었다. 한국문학도서관에서 만난 문우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별빛 쏟아지는 뒷뜰에 모닥불을 지펴 놓고 감자를 구워먹으며 하모니카 소리에 맞추어 합창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모니카 소리를 듣고 있는 초등학생 철우와 철민이의 모습은 소년시절 내 모습과 흡사했다. 나는 하모니카를 하나 더 가지고 갔었다. 그 하모니카를 선물로 주었더니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헤어지던 날 산골 소년들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며칠 후, 하모니카 두 개를 구입하여 소포로 보내주었다. 기뻐할 아이들의 모습이 눈망울에 그려지며 집으로 가는 내 발걸음은 내 유년시절로 가고 있었다. 작은 선물이지만, 영동의 개울물처럼 맑은 소년들에게 꿈으로 이어지는 선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여름에 여행을 다니다 보면, 생각지 않게 하모니카는 즐거움을 선물하기도 한다. 여객선에는 관광객들이 갑판 위에 많이 있었다. 나는 하모니카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더니, 하모니카 소리에 따라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나는 모자를 벗어들고 돌아다니며 하모니카를 연주했다. 금새 모자 안에는 지폐가 가득했다. 매점에서 술, 과일, 과자, 음료수...등을 사서 갑판에 내어놓고 나누어 먹으며 하나가 되어 있었다.

가을에 하모니카는 나와 함께 바쁜 일정을 보낸다. 출판 기념회, 시 낭송회, 백일장...등에서 하모니카도 한 몫을 한다. 가을이면 밤이 지새도록 울고 있는 귀뚜라미 소리를 듣고, 흘러간 세월을 아쉬워하며 울고 있는 사람도 있으리라. 내 하모니카 소리로 인하여 누구에겐가 생활의 작은 행복과 위안이 될 수 있다면, 실력은 미숙하지만, 그들을 위해 나는 하모니카를 연주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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