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 강의 동쪽은 파(巴)요, 서쪽은 촉(蜀)이라, 파산촉수(巴山蜀水)를 품고 있는 사천은 예로부터 토지가 비옥하고 산물이 풍부하여 사람이 제일 살기 좋은 곳으로 하늘이 내려줬다는 뜻으로 줄곧 “天府之國”, “蜀中江南”의 미칭을 지니고 있다.

사천은 옛날에 ‘巴蜀’이라 불렸는데 ‘파’와 ‘촉’은 모두 고대 사천지방에 살던 부족 이름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천이란 이름은 宋代 때부터 불리기 시작했는데 顧炎武(1613-1682)의 <日知錄>에는 송대에 이 지방은 ‘川陝四路’라 불렀는데 줄여서 사천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천성의 省都인 成都는 2000년의 역사를 가진 문화의 古城으로 삼국시대는 촉한의 도읍지였고 오대 십국 때에는 前蜀 後蜀이 수부였지만 그들이 망한 후에 정복자들이 도읍지의 흔적을 없애버렸다 한다. 成都의 이름의 유래는 <太平環宇記>기재에 따르면 서주의 도읍건설의 역사를 차용하여 지은 것이라 한다.

주왕이 도읍의 이주 역사를 ‘1년이면 거주민이 모이고 2년이면 읍을 형성하며(成邑) 3년이면 도가 형성된다(成都)’라는 말에서 成都라는 지명이 유래했으며 또한 蜀語 “成都” 두 글자는 讀音이 蜀都라고 한다. “成”자는 “끝남” “종결”을 뜻하는 것이니 성도는 “촉나라가 끝난 도읍”이고 “최후의 도읍”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서한 시대에는 비단 직조가 발달해서 錦官이 설치되어 이 산업을 관리했으므로 ‘錦官城’혹은 ‘錦城’이라고도 불렀다. 또한 五代十國 무렵에는 후촉의 孟昶황제가 부용꽃을 좋아했는데 성내에 부용꽃을 많이 심었다고 해서 ‘芙蓉城’ 혹은 ‘蓉城’이란 별칭도 갖고 있다.

성도는 풍요로운 땅으로 인해 전란으로 인해 중원이 살기 힘들어지자 많은 사람들이 성도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파촉의 풍요로운 토지로 인해 진시황도 직할령으로 삼아 진나라가 강해질 수 있었고 더불어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천은 오랜 옛날부터 티베트를 경유해서 인도와 교역해서 부를 가져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성도는 서남부의 중요한 요충지로 삼국시기에는 촉나라의 수도였다. 삼국시대 촉나라는 북방의 위나라, 남방의 오나라와 더불어 천하 3대 세력 거점의 하나였다. 이는 제갈량이 유비에게 제안을 한 그 유명한 '천하삼분지계'이다. 또한 성도는 오대십국시기에도 도읍지여서 그후에 재건한 문화유적지와 문화유산들이 많다성도에는 三國聖地로 불리는 무후사가 있는데 이는 중국 최대의 삼국유적 박물관이며 이미 1780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무후사는 주로 惠陵, 漢昭烈廟, 武侯祠, 三義廟 등 문물과 고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무후사는 송나라 당나라 때부터 소문이 자자한 명소였으며 지금의 주요건물은 청나라 강희제11년(1672)에 중건 확장하였다. 祠內에는 유비, 제갈량 등 촉한 영웅상 50구를 공봉하고 있다. 武候祠에서 武候는 제갈량이 살아있을 때 봉해진 ‘武鄕後’를 따온 것으로서 지어진 이름이다.

사실 무후사는 공명이 군주로 모신 유비의 묘였다 한다. 유비가 죽기 2년전(222년)에 제위에 올랐다가 죽은 뒤 소열제라는 시호가 붙여졌다. 지금도 문 앞에는 ‘漢昭烈帝’라고 적혀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곳을 무후사라 부른다. 승상이었던 제갈량의 인기가 유비보다도 더욱 높았기 때문이라 한다. 諸葛亮(181년 7월 23일~234년 8월 28일)은 자는 공명이고 별호는 와룡·복룡이며 산동 沂南사람이다.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모신(謨臣)이며 현명한 승상의 모범이다. 제갈량은 형주의 초야에서 지내던 중 27세 때 유비의 삼고초려로 세상에 나와 재략과 웅재로써 유비를 도와 촉한을 건국하는 제업을 이루었다. 적벽에서 손권과의 연합을 이끌어내 당대 최강의 제후인 조조의 남하를 저지하였고 형양을 차지한 후 익천를 도모해 유비를 제위에 오르게 하였고 제갈량은 승상의 직에 오른다. 유비의 사후 출사표를 후주 유선에게 올린 후 중원을 도모하였으나 사마의와의 대결 도중 오장원(五丈原)에서 나이 54세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해는 유언대로 섬서성 면현 定軍山에 묻혀있다. 227년 제갈량은 유비에게 부탁받은 후사를 실현하려고 위나라를 정벌하려고 군사를 일으켰다. 출전하기에 앞서 올린 상주문은 원문 350자로 후세 사람들이 이 글을 보고 울지 않으면 충신이 아니라고 평하는 명문으로 꼽히고 있다. 이는 제갈량이 살아 돌아오지 않을 것을 각오하고, 황제에 대한 여러 가지 훈계를 적어넣은 명문이다. 무후사에는 중국 남송 초기의 무장(武將)이자 학자이며 서예가 악비의 글씨로 된 <前出師表>가 걸려 있다.

임금에 대한 한결같은 충성심을 나타낸 일부분을 적어본다.

臣本布衣, 躬耕南陽, 苟全性命於難世, 不求聞達於諸侯, 先帝不以臣卑鄙, 猥自枉屈, 三顧臣於草廬之中, 諮臣以當世之事, 由是感激, 許先帝以驅馳.... 爾來二十有一年矣. 先帝知臣勤愼. 故臨崩, 寄臣以大事也..... 今南方已定, 兵甲已足, 當獎率三軍, 北定中原, 度竭駑鈍, 攘除姦凶, 興復漢室, 還於舊都, 此臣所以報先帝而忠陛下之職分也. 至於斟酌損益, 進盡忠言, 則攸之․禕․允之任也.

'신은 본래 아무 벼슬을 못한 평민으로 남양에서 밭 갈고 있었습니다. 선제(유비)께서는 신의 보잘것없음을 꺼리지 않으시고, 귀한 몸을 굽혀 신의 오두막집을 세 번이나 찾으시고(삼고초려)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을 물으셨습니다. 이에 감격한 신은 선제를 위해 개나 말처럼 열심히 달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스물 한해, 선제께서는 신이 성실함을 알아주시고, 돌아가실 때 신에게 나라의 큰일을 맡기셨습니다...... 다행히 남방(남만)은 이미 평정했고, 무기와 군사와 말도 넉넉합니다. 마땅히 북으로 중원을 정벌해야 합니다. 모자란 재주나마 힘을 다해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를 쳐 없애고 한 황실을 부흥시키겠습니다. 신은 받은 은혜에 감격하여 먼길을 떠남에 표를 올리려 하니, 눈물이 앞을 가려 더 말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두보도 무후사를 시로 노래했다丞相祠堂何處尋 승상의 사당이 어느 쪽에 있느냐고 묻자錦宮城外柏森森 금관성 바깥의 떡갈나무 숲이라 하네 映皆碧草自春色 계단에 어리는 푸른 풀잎은 스스로 봄빛을 띠는데隔葉黃鶴空好音 잎을 떨뜨리는 황학, 공허한 호음三顧頻繁天下計 삼고 빈번한 천하의 계략兩朝開濟老臣心 양조를 열어 빚을 갚는 늙은 신하의 마음 出師未捷身先死 출사하여 아직 이기지 않았는데 몸은 먼저 죽으니 長使英雄淚滿襟 영원히 영웅으로 하여금 눈물을 옷깃에 가득 채운다두보가 이 시를 지었으니 이미 천년도 넘었다.

시를 보면 제갈량의 사당이 금관성의 바깥 떡갈나무 숲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볼 수 있는 무후사는 청의 강희 연간에 재건된 것으로 두보가 보았던 것보다 규모가 훨씬 작아졌다. 제갈량전 안에는 공명과 그의 자손들의 상이 있고 그 앞에는 구리로 된 북이 세 개 놓여있는데 이 구리북은 남방 소수민족의 악기임과 동시에 권력과 재력의 상징이라 한다.

제갈량이 군대를 이끌 때 이 북으로 낮에는 밥을 짓고 밤에는 북을 두드려 경보를 알렸다고 해서 ‘제갈고’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다. 제갈량전 서쪽으로 작은 다리를 지나면 대나무가 많고 조용한 장소가 나온다. 이곳에 유비의 묘가 있는데 ‘혜릉’이라 한다. 유비는 223년에 호북성 경계지와 가까운 백제성에서 죽었고 유해는 성도로 보내져 20m높이의 흙에 덮여 매장되었다. 무후사안에는 역사적인 비석이 40기남짓 있는데 이는 역사나 서예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현판과 족자도 주목할 만한데 ‘武候祠’라는 글자도 ‘志見出師表 好爲梁父吟'이라 적은 족자도 중국의 저명한 작가이자 학자이며 정치가였던 곽말약의 글이다. 모두 합쳐서 30여개 된다고 한다.

그 외 건축양식도 전형적인 ‘四合院’식으로 이 양식의 대표적인 예로 손꼽히며 청대에 제작한 장군과 문무관들의 상들은 풍속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참고자료가 된다. 武候祠는 군주와 승상이 함께 있는 사당으로서 중국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영향력이 가장 큰 삼국문화유적지이다. 삼국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 가볼만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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