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 1980년대 초 내가 처음 연변에 왔을 때 아이들이 자기 엄마를 ‘어머니’하거나 어른들을 보고 깎듯이 존대말을 써는 것을 보고 매우 기특하게 생각했다. 우리 ‘안쪽’에서는 ‘엄마’하거나 어른들 앞에서 제멋대로인데 말이다. 나는 연변애들이 정말 성숙되고 우리 ‘안쪽’애들은 정말 미개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어느 한참 후배의 집에 놀러갔다. 5살 나는 그 후배의 애는 당시송사를 얼음에 박 밀듯이 줄줄 외웠다. 중국 고대문학사를 가르치는 교수들을 뺨칠 정도. 참 대단하게 생각되었다. 그리고 A, B, C, D... I love you! 우리를 기 팍 죽인다. 그래서 우리는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 애의 부모들은 희색이 만면-누구의 아이라고! 그런데 나는 어쩐지 그 아이의 몸에서 슬픈 비극적 색채를 보았다.

우리 부모들은, 어른들은 아이들을 키워 갈, 교육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우리는 실로 아이들이 커 가는 것, 어른이 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즐거움을 느낀다. 그런데 이른바 조기교육으로 아이들을 조숙시키는 데는 분명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또 하나의 拔苗助長.

인생은 분명 유아기, 아동기, 청소년기, 청년, 중년... 단계가 있다. 인생은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갔다가 다시 한 단계, 한 단계 내려오는 것이다. 인생은 그때마다 나름대로 할 일이 있고 재미가 있다. 그때그때 주어진 인생의 즐거움을 만끽하면서 커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인생인 줄로 안다. 예컨대 유아기의 애기는 마음대로 똥을 쌀 수 있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그리고 좀 더 큰 아동기는 천진난만함과 순진함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다. 그것이 치기와 어리무던함이 어려도 좋다. 맑스는 일찍 고대 그리스 신화의 매력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우리에게 영원한 즐거움을 주는 것은 바로 인류 유년기의 천진난만함과 순진함을 가장 잘 나타냈기 때문이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조기교육은 바로 이런 천진난만함과 순진함을 빼앗아간다. 어른스러운 아이를 만든다. 어떤 의미에서 未老先衰의 小老頭이 되게 한다. 우리의 사회는 어떤 의미에서 영재교육을 요구한다. 이른바 천성적으로 조숙한 또리또리한 애들을 대상으로 앞서 나가는 교육을 요구한다. 물론 因材施敎 차원에서 하자가 될 것이 없다. 우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로 이 영재교육을 하느라고 조기교육에 열을 올린 줄로 안다. 그래서 애들 교육에 지극정성인 한국에서 언젠가 태아가 6달 후부터 외계자극에 반응한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되자 임신부들이 너도나도 외국어학원에 다니며 오전에는 영어, 오후에는 중국어...하는 식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외국어를 배우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는 것이다. 임신부를 통해 태아에게 외국어교육을 시키기 위해서란다. 사실 동시다발적으로 외국어를 배울 때 언어혼란이 일어나 오히려 역효과를 초래하게 됨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특히 뇌용량이 아직 완전히 발달하지 못하고 그리 크지 못한 아이들에게 있어서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천성적으로 조숙한 영재들은 가물에 콩 나듯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실 반대로 범상한 아이들, 인생의 일반적인 단계에 따라 수걱수걱 커 가는 아이들이 많다. 그러니 이런 아이들 교육은 무슨 조기교육이니 하며 야단을 피울게 아니고 인생 단계의 순리대로 교육을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서 선진국에서는 소학생들에 한해 학생들을 학교에 꼭 잡아 두고 억지공부 같은 것을 그리 시키지 않는다. 공부 잘 하라 말도 그리 하지 않는다. 공부강박 관념이 생길가봐. 정확히 학생들이 받아물만큼 공부를 시킨다.

그리고 교실도 가족분위기로 꾸며놓고 편안한 마음가짐을 가지게 한다. 그리고 부모들의 아이들에 대한 기본 기대도 거창하기보다도 개구쟁이가 되도 좋으니 건강하게만 커 다오식의 굉장히 생활적이다. 언젠가 한국에서 학원사교육을 정돈한다든가, 현재 우리 중국에서 중소학생 ‘減負’-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별도의 보도를 못하게 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래 우리의 교육이 이제 정도에 들어선 것 같다. 아이가 아이인 정체성을 빼앗지 말자. 아이는 아이답게, 그래 아이다운 아이가 곱지 않은가?

우상렬 : 연변대학교수, 한국배재대학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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