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내 나이 30대 중반, 한국에 온지도 벌써 5년을 넘어섰다. 신랑, 딸애, 시아버님, 시어머님 모두 한국에 거주하고 있다. 혹시 사람들은 우리가족이 돈을 꽤 벌었다 싶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살아보니 돈 모은다는 게 참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으로의 첫 발걸음은 시어머님이 10년 전에 결혼으로 입국하여 귀화하고 신랑과 나를 초청했다. 20년 전 과격한 성격 때문에 시어머님과 이혼하고 홀로 아들을 키우면서 대학공부까지 시킨 시아버님은 60세 고령동포로 한국행을 하였다. 나는 첫돌이 지난 딸애를 친정부모님한테 맡기고 한국행에 나섰다. 지금 돌이켜보면 자식과의 이별, 한국에서 적응하기까지 고생, 외손녀 키운다고 연로하신 부모님들 고생, 항상 부족한 돈까지 어느 하나 마음 아프지 않은 날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이 호강한건 아니다. 서울서 시어머님이 맡은 방 두 칸짜리 전셋집에 딸애와 내가 얹혀살고 신랑은 지방회사에 기숙하므로 한 달에 두 번 정도 얼굴보고 산다. 

  출국하기 전 신랑과 나는 괜찮은 직장도 있었으나 남들처럼 번듯한 아파트와 자가용을 갖추고 싶어서 잠깐만 고생하고 돌아오자는 결심으로 첫돌잔치 갓 마친 딸애를 두고 눈물을 밟으며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예상대로 둘이 같이 일해서 매달 적금하고 뭉칫돈 쥐고 귀국하면 좋으련만 우린 너무 빗나갔다. 

 우선 부부가 붙어 있으려니 신통방통한 일자리를 구하기가 힘들었다. 회사들도 결혼비자와 영주권을 선호하고 H-2비자는 일용직으로 일하기도 어려웠고 일 해봤자 백만 원쯤이었다. 게다가 부부를 같이 쓰는 걸 기피하다보니 우린 회사를 포기하고 식당일을 찾았다. 사무직으로만 일 해왔던 내가 고된 식당일에 버티기가 힘들었고 신랑 역시 남자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언행이 잦아 여러 군데 일자리를 바꿨다. 그러다 간만에 정육점식당에 맘 붙이고 일하는가 싶더니 소뼈를 자르다가 부주의로 손가락이 절단될 뻔했다.

수술하고 몇 개월 쉬다가 다른 식당에 취직했는데 또 다투다가 손목을 다쳐서 아예 푹 쉬어버리게 된 것이다. 중국에 생활비 보내고 한국에서 먹고 쓰고 나니  남는 것 없는데다 나까지 허리디스크가 생겨서 맘고생 돈고생이 막심했다.    전쟁의 시작, 말다툼에서 둘이 별거까지 일 년을 겪었다.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들이 우리에게 닥쳤던 것이다. 지금 신랑은 온정 된 회사에 취직했고 딸애도 벌써 커서 학교 들어가게 되어 한국으로 왔다. 지금은 나도 결혼비자다. 그런데 지금은 결혼비자보다 F-4동포비자가 더 주목 받는 듯싶다. 꿈에도 갖고 싶던 결혼비자가 회사취직에 별 특혜가 없을뿐더러 이젠 딸애 뒷바라지에 써 먹을 수도 없게 된 것이다, 서글픈 웃음만 나온다.

시아버님은 회사서 일하다 뇌졸중으로 쓰러져 지금 중환자실에 계신다. 아버님은 H-2비자에서 F-4동포비자로 바꿨지만 한국국적이 아니어서 장애등급 판정도 못 받고 장기요양보험도 없다. 이제 나이 66세, 언어장애와 반신불수가 되었다. 한국 와 6년을 완도, 김해, 인천, 강원도 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며 김양식장일, 양돈장일, 농사일, 쓰레기 분리수거 등등 말도 못하게 고생하였다. 일하는 곳에서 4대보험 가입을 잘 안 해주어 여직 아파도 병원을 못가고 약국에서 약을 사 드셨단다. 자식은 아들하나, 남들은 중국에 경로원이나 요양시설로 보내는 것이 돈 싸다고 하지만 자식으로서 그건 말도 안 될 일이다. 지금 병원비도 아름차지만 앞으로 요양병원비용은 매달 백만원을 잡아야 한다.

내가 한국 와서 느낀바 많지만 사람인생이 이처럼 짧고 가엽구나를 느끼기는 처음이다. 시어머님과 이혼한 뒤 지인들 소개로 아줌마들을 만나기도 했으나 끝내는 성공 못하고 여태 외톨이로 고독하게 살아오신 아버님이다. 평생 일만 하고 한국에서도 회사 기숙사에 머물면서 아픔과 외로움을 술로 버티며 노년에 중국에 돌아가서 사실 준비를 하셨단다. 아버님의 자그만 체구에는 늘 후회와 외로움, 피로와 아픔이 진하게 배어있다. 병으로 쓰러져서야 평생의 일손을 놓을 수 있고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안쓰럽다. 자식에게 평생을 쏟아 붙는 부모님들이 노년에는 오갈 데 없는 현실이 너무 원망스럽고 또 죄송하다.

시어머님도 한국에 결혼으로 왔으나 남편이 바람둥인데다 술 마시고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인지라 삼년을 살다가 도저히 못 버티고 이혼했다. 다행이 타고난 음식솜씨 때문에 설거지로 일하다가 어깨너머로 터득한 비결을 바탕으로 보조에서 찬모로 인정받고 가는 곳마다 칭찬이 자자하다. 어머님 말씀으로는 한국이 말이 통하고 의료기술이 발달하고 서비스가 잘 돼있어 자신만 부지런하면 잘 살 수 있단다. 그래서 억척스레 모은 돈으로 아들 며느리, 남동생, 조카를 초청해왔고 손녀까지 모아놓고 잘 살기를 다짐하며 하루도 안 쉬고 일하러 나간다. 그래도 국민건강보험 덕분에 매년 건강검진을 꼬박꼬박 받고 허리 다리 아프면 물리치료 받는다. 자기관리에 철저한 분이다. 국민연금도 돼있고 앞으로 본인한테 뭔 일이 생겨도 좋은 시설에 부담 없이 갈 수 있으니 우리보고 걱정을 말란다. 아버지에 대우가 천지차이다.

딸애도 지난 3월 4일부터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아직 귀화허가가 안된 상태라 등록금이며 학비, 교과비, 방과 후 돌봄실 등 해당혜택을  지원받을 수  없다. 설상가상으로 딸애가 유치원에서 뛰놀다가 발목을 접지렀다. 당시에는 괜찮다하더니 수개월이 지난 지금에 와서 골절이 됐다고 뼈고정수술을 받으란다. 자식은 국적을 취득해야 가족관계에 올릴 수 있으므로 신랑 앞으로 건강보험도 적용이 안 된다. 하늘이 무심코나 싶었는데 고맙게도 보험공단에서 우리집 딱한 사정을 헤아려 딸애가 보험혜택을 받을 수 있게 했다. 덕분에 1/3정도의 의료비만 납부했다. 걱정이 태산 같던 우리가족은 또 한 번 울다가 웃었다.

오늘도 난 기브스 한 딸애를 들쳐 업고 학교로 달리고 있다. 사는 게 힘들고 어려워도 사랑하는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니 더 큰 힘이 되어 세상 무서운 게 없다. 앞으로 집도 마련하고 실비보험, 연금보험도 들어야 한다. 재능  많고 예쁜 딸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매일마다 귀화허가통지서를 기다리고 있다. 피아노며 미술, 공부까지 잘하는 딸애다. 어깨가 축 처진 신랑의 출근하는 뒷모습도 짠하다. 사람 사는 게 이런 걸까. 중국에서 직장도 그만두고 온 지금 물러날 길은 없다. 좀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난 지금 한식조리사자격증 시험공부를 하고 있다. 현재 힘들어도 우리에겐 잘 살 날이 온다는 희망이 있다. 오늘도 힘든 맘 달래며 희망찬 내일을 위해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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