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청룡의 여행기

 
 
[서울=동북아신문]지난 10월 우리 부부는 심양 국제여행사에서 조직한 동남아 여행을 하게 되였다. 연길에서 기차로 떠나 23일 아침 심양역에 내리니 나의 6촌 여동생이 자가용을 가지고 우리마중을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동생이 우리를 싣고 도선비행장(桃仙机场)으로 가는데 밤에 진눈깨비가 내려 가는 길이 매우 질척거리었다. 차가 심양 시내를 벗어나 고속도로에 들어 서려고 하는데 고속도로에 차들이 기다랗게 줄을 지어 선 자리에 있었다. 알고 보니 지난 밤 진눈개비가 내린데다가 기온이 급속히 하강되어 고속도로가 빙판으로 되여 교통이 봉페되였던 것이였다. 할 수 없이 핸들을 돌려 일반도로로 비행장으로 갔다.

비행장에 가보니 우리 관광팀은 모두 20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심양, 안산, 연변, 내몽골 통료 등 곳에서 왔는데 조선족으로는 우리 부부뿐이었다. 우리 관광팀에는 모두 7쌍의 부부가 있었는데 우리와 통료에서 온 부부가 60대이고 기타는 모두 젊은 부부들이었는데 거기에는 신혼여행을 하는 부부도 있었다.

우리를 태운 심수항공기가 9시25분에 이륙하여 심수에 도착하였을 때는 1시25분이었다. 그러니 4시간이나 비행기 안에 갇혀있은 셈이다.

몸을 바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꼬박 4시간 고정자리에 앉아있는다는 것도 헐치 않았다. 비행기가 착륙할 때에 방송원이 지금 심수의 기온이 령상 30도라고 하였다.

집에서는 모두 솜옷을 입고 떠났는데 심수 보안비행장(保安机场)에 내리니 심수의 날씨는 찌는듯 무더웠다. 하여 옷을 갈아 입어야 했는데 숱한 사람들로 붐비고 있는데 어디에서 옷을 갈아 입는단 말인가? 할 수 없이 위생실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러니 여성들은 아침에는 솜바지요, 점심에는 치마로 탈바꿈을 하였다.

보안공항에서 나와 우리를 태운 버스는 심수시내를 가로 찔러 심수 황강(皇崗)세관으로 향하였다. 달리는 버스에서 밖을 내다보니 온 시내가 고층건물로 콩크리트숲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이때 원래 자그마한 진이었던 심수가 지금은 우리나라 개혁개방의 전초지로 된 모습을 보고 다시 한번 등소평의 개혁개방로선이 낙후한 중국을 경제대국으로 천변시켰다는 것을 심심히 느끼게 되였다.

황강세관에 도착하니 3시10분이었다. 향항은 1997년에 이미 조국에 귀속되었다지만 한나라 두가지 제도로 한 특별행정구인 것만큼 세관에서 향항입경수속을 해야 했다. 입경수속을 마치고 나와서 자그마한 강(심수하) 하나를 건너면 면 바로 우리나라 향항특별행정구이다.
향항세관에서 모든 검사를 마치고 나오니 향항 관광버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향항 여행사의 여성 안내원이 우리를 뜨겁게 맞이하여 버스에 오르도록 하였다. 버스에 오르면서 보니 뻐스 문이 왼쪽에 있었다. 하여 내가 “아야! 버스문이 왼쪽에 있다.”고 하니 우리 팀의 인솔자가 이번에 우리가 여행을 하는 지구와 나라의 교통은 모두 차가 왼쪽통행이기에 차문이 모두 왼쪽에 있으므로 앞으로 차를 탈 때에 왼쪽에서 탄다는 것이었다.

심수에서 핸드폰으로 연변에다 통화를 하였는데 향항에 들어서니 핸드폰이 통화권을 벗어났던것이다. 향항에서 핸드폰을 사용하려면 통화카드를 사야 한다는 것이다.

버스가 향항시내로 들어가면서 안내원은 향항의 개황에 대하여 소개를 하였다.

향항은 신계(新界), 향항도(香港島), 구룡반도(九龍半島)와 그 부속섬과 부근의 해역이 포함되며 인구는 약 7천만이고 면적은 1,102평방킬로미터이고 언어는 광동어, 학카스어 (학카스족: 서진말년부터 원조이전까지 전쟁난리를 피해 중원으로부터 남방에 이주하여 정착한 한족) 와 영어를 사용한다.

향항은 자고로 중국의 영토였으며 1842년 아편전쟁 후 영국식민지였던 것이 1997년 7월1일 중국에 귀한 되여 향항에 대한 주권을 회복하여 한나라 두 가지 제도하에서 향항인이 향항을 다스리는 고도의 자치권리를 행사하는 중화인민공화국 향항특별행정구이다.

향항은 아열대해양기후에 속하며, 년 평균기온이 22.8도이고 봄이 따뜻하고 안개 많으며 여름이 덥고 비가 많으며 가을이 시원하고 맑으며 겨울이 건조하고 좀 차며 10~12월이 유람하기 가장 좋은 계절이라고 한다.

향항은 국제 금융중심으로서 금융정책이 고도로 개방되었으며 국제성 은행업무와 황금시장, 외화시장, 주식시장, 보험시장이 극도로 활약하므로 뉴욕, 런던에 이어 세계에서 세번째로 되는 대 금융쎈터이다.

향항은 자유무역항으로 15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지리적으로 아세아태평양지구의 중요한 길목으로서 세계 각국의 화물이 관세 없이 들어오고 나갈 수 있으며 가공, 저장, 싣고 부리우고 다시 포장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세계각국의 최신 산품이 자유로이 향항시간에 들어올 수 있어 세계 명품들이 이곳에 집중되고 시대적 풍조를 따를 수 있으며 가격이 적당하여 “쇼핑천당”으로 불리고 있다.

안내원이 향항의 개황을 소개를 하는 사이에 버스는 신계와 구룡반도를 지나 해저턴넬에 들어섰다. 안내원의 소개에 의하면 구룡반도와 향항도를 이어놓는 해저턴넬은 빅토리아항 밑으로 지나는데 동구, 중구, 서구 세개의 턴넬이 있으며 길이가 2킬로미터 정도 된다고 하였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해저턴넬을 나와서 향항에서 자장 높다는 태평산에 올랐다. 태평산은 해발 554미터로서 향항도의 서북부에 있으며 줄곧 향항의 표징으로 되였으며 향항의 유람명승지의 하나이다.

태평산에 올라서니 향항의 전경을 다 내려다 볼 수 있었는데 하늘을 찌르듯 한 고층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앉아 그야말로 콘크리트 숲같이 보이었다. 향항은 땅이 귀하여 손바닥만한 땅을 사서 구새통처럼 올리 집을 지은 것 같았다. 집과 집 사이는 한 사람이 나들기 힘들 정도였다. 그리고 향항은 산간도시로서 평지가 얼마 없다니 산에다 층집들을 줄줄이 가득 올리 지었는데 자동차길은 층집들 사이에 “之”형으로 되여 있어 버스가 산꼭대기까지 다 올라갈수 있었다.

태평산에 올라서면 가장 눈길이 오래 머무르는 것이 빅토리아항구이다. 책에서만 많이 보아왔던 빅토리아항구를 오늘 자기의 눈으로 직접 보게되니 자못 흥분되었다.

빅토리아항은 아세아주에서 제일 큰 항구이고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항구이며 구룡반도와 향항도 사이의 바다항구이다.

이 항구는 넓고(41.88 km²) 수심(평균 깊이 12.2m)이 깊어 천연적으로 양호한 항구이다. 향항 역시 이로 하여 “동방진주”로 불리고 있으며 “세계3대 천연항”, “세계 3대야경”의 아름다운 별명을 가지고 있다. 빅토리아항의 이름의 유래는 영국의 빅토리아녀왕으로부터 온것이다. 이 항은 일년 사계절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어 일찍 영국사람들의 눈에 동아시아지구에서 양호한 항구의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보였다. 영국은 향항을 이렇게 눈독들이고 청정부로부터 자기들의 수중에 넣은 다음 원동의 해상무역업을 크게 발전시켰다. 빅토리아항은 줄곧 향항의 력사와 문화에 영향을 주었으며 향항의 경제와 관광업의 발전을 주도하여 왔고 향항을 국제화 대도시로 건설하는데서의 관건적인 작용을 하였다. 

태평산에서 본 빅토리아항구

태평산에서 내려와 저녁식사를 하고 저녁에는 유람선을 타고 빅토리아항의 야경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빅토리이항 량안의 야경은 그야말로 가관이였다. 수풀처럼 들어선 고층건물들이 5색영롱한 네온등 불빛으로 륜곽을 이루고 그 고층건물들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서로 어울려 향항도와 구룡반도로 이어진 빅토리아항의 전경을 그대로 그려냈으며 또 그 불빛이 바다물에 반사되여 황홀한 빅토리항의 야경에 관광객들은 너무나도 매료되여 “야! 멋이 있다. 야! 황홀하다.” 하며 감탄의 목소리가 끈임없었다. 빅토리항의 야경은 일본의 하코다테 와 이탈리아 나폴리의 야경과 더불어 세계 3 대 야경으로 불린다고 한다. 

빅토리아항의 야경을 다 구경하니 저녁 8시 반이되여 되여 여행사의 지정된 호텔에 들었는데 호텔은 바로 그 근처의 북각부두 부근에 위치한 가락헌(嘉樂軒)호텔이였다. 호텔은 4성급이어서 안의 설비는 좋았다. 호텔에 들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사진기의 전지를 충전하는 것이었는데 향항의 콘센트는 영국식이여서 내지의 것과 달랐다. 하여 향항세관을 나서니 벌써 콘센트 전환를 파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우리는 여행사에서 미리 준비시켰기에 떠날 때에 벌서 사가지고 왔었다. 향항의 콘센트에 콘센트전환기를 꽂은 다음 내지의 전기플러크를 꼽으면 충전할 수 있었다. (이번 려행에서 타이의 콘센트가 중국것과 같고 기타 지구와 나라의 콘센트는 영국식 콘센트였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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