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 인물탐구>1930년대 중국영화 성장시대 이끈 ‘영화황제’ 김염

 

 중국영화 100년사에 빛나는 중국 '영화황제' 조선인 김염
[서울=동북아신문]1930년대 중국영화계의 별이자 항일과 진보적인 영화예술을 위해 분투한 조선인 김염(1910년~1983년), 그는 지금까지도 사람들로부터 ‘중국의 영화황제’로 불리고 있다.

투표에서 세 부문 1위로 ‘영화황제’ 등극

당시 상해영화잡지 ‘전성’에서 영화황제를 뽑는 투표를 했는데 김염은 ‘가장 잘생긴 남자배우’, ‘가장 친구로 사귀고 싶은 배우’, ‘가장 인기가 있는 배우’ 부문에서 각각 1위를 차지하면서 ‘영화황제’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1930년대는 그야말로 김염의 말, 김염의 행동, 김염의 모든 것이 전 중국 젊은이들의 유행이 되었다. 편지봉투에 주소 없이 ‘상해 김염과 진이(김염의 부인)’라고만 써도 그에게 편지가 전달될 정도로 김염은 전 중국의 우상이었다.

주은래 총리도 김염을 두고 “당신은 중국의 영화황제인 동시에 우리 중국의 부마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꿈을 향한 집념, 17세 영화계에 입문

1927년 3월초 김염은 영화배우의 꿈을 안고 홀로 상해에 도착한다. 당시 상해는 동아세아를 대표하는 국제도시였고 국제금융과 상업은 물론 영화산업도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17세도 되지 않았고 수중에는 단돈 1원뿐이었다.

영화를 좋아하는 김염은 영화제작사를 찾아가기도 했지만 그 누구도 그를 알아주지 않았다. 그 후 김염은 영화제작사에서 청소, 검표원, 문지기 등 잡일을 했고 저녁이면 긴 의자에서 잠을 잤는데 1년 동안 김염은 그런 생활에 머물러 있었다. 비록 힘든 생활이었였지만 오로지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꾹 참고 견뎠다. 김염은 그사이 수많은 영화들을 보았고 또 영화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늘 자신에게 “내가 만약 영화배우가 된다면 무조건 그들보다 연기를 더 잘하리라”라고 말했다.

그러던 중 김염은 자신을 최고 배우의 반열에 올려놓을 손유 감독을 만나게 된다. 손유 감독은 미국 콜롬비아대학과 뉴욕영화연구소를 다녔던 실력파 감독이다. 그는 배우들에게서는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청년상을 김염에게서 발견하고 ‘풍류검객’이란 첫 영화에 주인공역을 맡겼다. 세 도적의 사랑과 우정을 그린 ‘풍류검객’은 아쉽게도 흥행에 실패하고 내용에 대한 평가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1930년대 중국영화 성장시대를 이끈 배우

하지만 손유 감독은 두 번째 영화 ‘야초한화’(1930)의 주인공으로 다시 김염을 발탁했다. 영화는 부잣집 청년이 봉건사회의 계급질서를 뛰어넘어 거리에서 꽃을 파는 처녀를 사랑한다는 내용이다. 봉건적 신분제도와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순수한 사랑을 형상화해낸 김염은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일약 최고의 배우로 등극하게 된다.

기존의 낡은 내용이 아닌 진보적이고 새로운 내용, 게다가 배우들의 신선한 연기가 조화를 이루며 관객들은 감동하고 열광했다. 그 후 김염은 속속 21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1930년대 중국영화의 성장시대를 거의 혼자 독주하다시피 이끌어갔다.

1930년대 중국영화의 성장시대에 김염이 출연한 모든 영화들이 연화영화제작사의 이름과 함께 나타났고 그리고 가장 출중한 영화감독들과 합작했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시절 김염의 작품들은 시대상을 반영한 진보적인 영화가 대부분이었다. 한 청년이 현실을 인식하고 항일에 나서는 이야기인 손유 감독의 ‘들장미’(1932), 한 여성의 운명을 통해 낡은 생활방식을 비판한 ‘모성지광’(1933), 중국인민들의 항일염원을 도로건설 청년노동자들의 건설투쟁을 통해 보여준 김염-손유의 대표작 ‘대로’(1934), 일제를 비유하는 도적떼를 맞아 마을주민들이 단결된 힘으로 격퇴한다는 내용의 항일영화인 오영강 감독의 ‘장지릉운’(1936) 등이 크게 인기를 끌었다.

  김염과 감독 손유의 대표작 '대로'의 홍보 포스터
한마디로 영화에서의 김염의 형상화한 내용은 1930년대 중국청년들의 이상적인 희망과 갈구였다. 하여 이 영화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는 1930년대 중국청년들의 자유와 진보 그리고 의무를 대변한 것이었다.

김염, 진보적인 항일 영화만 고집

1930년대는 항일이라는 역사적인 사명과 긴박성을 안고 있었다. 하지만 국가 체제는 친일의 경향을 보이면서 항일의 적극성을 억압하고 있었다. 때문에 항일의 경향을 심히 보이는 영화들은 국가체제의 지지를 받을 수 없었고, 그 제작자나 출연자들에게 가해지는 압력도 컸다. 이럴 때 많은 영화배우들이 애정영화나 오락영화에 투신하여 자신의 안위나 명리를 탐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염은 이와 반대로 애정영화나 오락영화와는 철저히 담을 쌓고 항일영화의 출연에 열정적이 되어갔다.

김염은 영화를 함부로 찍지 않음을 감독들에게 표명하기도 했다. “10편의 애정영화나 오락영화에 출연하기보다 한 편의 항일영화에 출연하여 항일을 선동하는 것이 진보적인 영화예술의 양심이고 진보적인 영화배우의 영광이다. 관능적인 영화에 출연하여 ‘영화황제’가 되기보다 항일영화에 출연하여 소졸이 되는 것 만큼 만족스러운 것은 없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때문에 김염은 중국영화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항일전사로 그 빛을 남김없이 발산했다고 할 수 있다.

김염의 능력을 발굴하고 그와 7편의 영화를 함께 찍으며 절친했던 손유 감독은 김염의 그런 뜻을 이해했다. 그래서 손유 감독은 정의롭고 진취적인 청년, 억울한 민중들을 위해 투쟁하는 청년,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저항하는 청년, 신분을 뛰어넘어 고상하고 순수한 사랑을 하는 청년 등 ‘김염다운’ 영화만을 제안했다.

1930년대 불후의 명작중 하나인 ‘대로’의 주제가 ‘선봉개로’와 ‘위대한 길의 노래’등은 당시 젊은이들의 항일유행가가 될 정도였다. 일제의 침략과 국민당의 가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김염의 항일영화들은 중국인민들의 발길을 극장으로 향하게 했다.

 김염과 그의 부인 진이(秦怡)

시대와 갈등 겪은 ‘영화황제’

김염이 고조되는 항일운동에 자신의 마음과 의지를 바치는 사이, 1940년대 중국영화는 성숙기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그는 1940년대 10년 동안 겨우 ‘장공만리’, ‘영춘곡’, ‘훌륭한 사위’, ‘잃어버린 사랑’ 등 4편의 영화에만 출연하는 슬픈 예술생애를 맞이하고 만다. 비록 1940년대가 중국영화의 성숙기라고 표현되지만 항일전쟁으로 인한 피폐 속에 김염의 노력은 더 이상 휘황찬란한 열매로 주렁지지 못했다. 김염 역시 구국의 전쟁에 복무하기 위하여 자신의 영화예술을 한 켠에 세워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가 1940년대에 출연한 4편의 영화는 김염의 성숙된 영화예술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했다.  1950년대는 중국영화의 재건기라고 할 수 있다. 1940년대의 전란을 겪으면서 중국영화는 성숙을 보여주었지만 역사적인 변혁을 맞이하고 새로운 형식을 구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새 중국의 탄생은 중국영화계에 활기를 가져다주었지만 형식이나 내용의 철저한 변화를 자극했다. 이는 ‘예술은 반드시 정치를 위해 복무해야 한다’는 당시 사조와 순수예술을 추구하는 김염의 의식 형태 사이에 모순과 갈등을 초래하였다.

자신과 가까웠던 감독이나 배우를 찾아 주역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었지만 콧대와 자존심 하나로 살아온 ‘영화황제’ 김염은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려 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연기는 최고로 잘하는 배우인데 쇼는 전혀 할 줄 모르는 고집불통이었다. 그는 이 옹고집을 꺾을 수 없어 방황하고 고민하다가 결국은 술에 전 인생을 살았다.

김염은 새 중국 탄생 후에는 ‘대지중광’, ‘위대한 기점’, ‘어머니’, ‘폭풍속의 매’ 등 몇 편 안 되는 영화에만 출연하게 된다.

그는 1983년 12월 27일 73세의 나이로 상해에서 사망한다. 김염의 묘지는 예술적 공헌이 큰 문화인들의 묘지-상해복수원에 있다. 부조리와 비뚠 사회에 맞선 예술적인 열정, 그것이 김염이 ‘영화황제’라고 불리는 진정한 이유일 것이다.

중국영화 100년사가 기억하는 김염

1930년대 상해영화를 이끌었던 진보적 영화예술가, 항일시대 진보주의자로서 김염은 중국영화사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1995년 중국영화 90주년을 기념하여 중국영화계가 선정한 대표적인 영화인들이 있다. 감독으로는 손유, 정군리 등이 뽑혔고 여자배우로는 중국의 완영옥을 비롯해서 호접, 왕인미, 진이 등이 이름에 올랐다. 남자배우로는 조단, 유경, 한난군 등… 그 맨 앞에는 바로 김염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중국영화백년사’에는 “1930년대 중국영화의 성장시대를 대표하는 스크린에 김염이란 태양이 나타나 화려한 빛을 뿌리지 않았더라면 중국영화의 동년시대는 1930년대를 메우고도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김염의 진보적인 형상에 의해 조기 중국영화의 봉건성과 유치성은 더 이상 머리를 쳐들 수 없었다. … 1930년대 중국영화의 성장시대에 중국영화의 성장은 연화영화제작사에서 만들었고 중국영화의 진보와 예술적인 탐구는 손유 등이 만들었으며 중국영화의 연기수준과 성숙된 형상은 김염이 만들었다”라고 적혀 있다.

중국영화계에서는 “김염은 중국영화를 진보적이고도 예술적인 맥락으로 끌어올리는데 거대한 공헌을 했고 중국영화의 높은 연기수준 제고를 위해 귀중한 경험을 쌓아주었다. 또한 김염은 중국영화와 중국관객 사이의 거리를 좁혀주었고 중국영화예술과 서방영화예술의 거리를 좁혀주었다”라고 평하고 있다.

한마디로 김염이 20세기 중국 100년 영화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중국영화에 진보적인 영화예술을 심어준 중국영화의 대부요, 중국관객들에게 진보적인 영화예술을 보여준, 진정 존중을 받는 중국영화의 황제’인 것이다.

김염 프로필

본명 김덕린. 1910년 4월 한국 서울에서 태어나 1912년 독립운동을 하는 아버지 김필순을 따라 두만강을 건너와 중국 통화에 정착을 했다가 후에 치치할로 이주, 1927년 상해로 간다. 이듬해 ‘카먼’ 등의 극에서 조연을 맡으면서 연극인으로 기량을 선보인다.

1929년 손유 감독의 눈에 들어 일약 스타로 떠오르면서 30년대 영화마다 히트를 치는 쾌거를 내며 ‘영화황제’라는 칭호를 얻는다. 항일전쟁시기 일제의 영화출연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고 홍콩, 중경 등지를 떠돌아다니다가 첫 공군영화의 주역으로 출연, 새 중국 탄생후 ‘위대한 기점’ 등 몇 편의 영화에만 출연한다. 김염은 저명한 영화예술인으로 상해시영화협회 이사 겸 부주석, 상해시 배우극단 극단장, 상해영화제작예술위원회 부주임을 역임하는 사이 상해시 제1, 2, 3, 4, 5기 인민대표, 상해시 정협 제1기 상무위원, 제5기 위원으로도 활약했다.

1983년 12월 73세를 일기로 상해에서 사망했다.   <출처 :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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