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지난해 8월 초, 한국 흥사단(흥민통)에서 주최하는 제14회 동북아 청소년 친선문화제의 일원으로 추천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서부터 나는 밤잠을 설치기 시작하였다. 언제부터 가보고 싶던 몇몇 유적지를 직접 볼 수 있다는 설레임도 좋았지만,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며 헌신하는 지성인들을 만나 며칠 동안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데서 가슴이 자주 뛰었다.

대련으로 향한 열여덟시간의 기나긴 야간렬차를 타서 고생스러웠지만 이제 곧 생소한 얼굴들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피곤도 금시 물러가는 것 같았다. 도착하여 보니 우리 흑룡강 일행이 제일 늦어서 미안했으나, 다들 어찌나 친절하게 맞이하여 주는지 우리는 인차 친구가 되었다.

의사는 갔어도 정신은 영원하다
 
간단한 점심식사를 마치고 일행 90명은 두 대의 대형버스에 탑승하여 여순으로 떠났다. 역사에서 영원히 지워버릴 수 없는 여순감옥을 돌아보기 위해서였다. 여순감옥은 여순시 외곽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옛건물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우리 외에도 많은 관광객들이 돌아보고 있어 장내는 몹시 북적이었다. 가이드의 해설을 들으면서 감옥을 둘러보노라니 침략자들의 비인간적인 만행에 저도 모르게 격분이 생겼다. 어쩐지 나의 귓가에서는 침략자들에게 비인간적인 학대와 고문을 당하면서 내는 열사들의 신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민족의 영웅인 안중근 의사는 내가 살고있는 흑룡강 할빈역에서 조선침략의 원흉 이또히로부미를 격살하였고, 또 여순감옥에서 순국했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정작 안중근 의사가 갇혀있던 감방과 순국한 자리를 직접 보니 가슴은 무어라 형언할 수 없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침략의 원흉 이또히로부미를 격살한 그 정신은 참으로 고매하여 세세대대로 이어받아야 할 것이며 찬미해야 할 것이다.

 그외에도 신채호선생님과 이회영선생의 사진 앞에서도 마음은 너무도 무거웠다.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친 그들의 정신이야말로 참으로 고상하고 숭고함을 다시 한번 심절하게 느끼게 됐다. 비록 의사들은 갔지만 그들의 정신은 영원히 우리들의 귀감이 되고 있었다.  

 “나 보고 싶어”

 단동은 조선의 신의주와 마주한 도시이다. 푸르른 압록강변을 거닐면서 조선을 지척에서 바라볼 수 있다. 우리 일행은 대형유람선에 올라 압록강을 유람했다. 배가 조선쪽으로 가까이 갔을 때 일행은 함께 목청을 돋우어 “안녕하세요?”, “건강하세요”하고 크게 외쳤다. 그 소리에 강저쪽 언덕에서 일하던 조선의 일군들이 손을 저어 답례를 보내왔다. 홀연 우리 일행중에서 “어마나, 나 보고싶어”하는 외마디 외침소리가 들려 왔었는데, 그 외침소리는 울먹이며 짧게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말 그대로 온몸이 떨리면서 자기도 모르게 눈언저리가 뜨거워졌다.  '동족애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가장 적절한 답을 얻어보는 순간이었다. 비록 한번도 본 적이 없고 말도 건네본 적이 없지만 한마디 인사에 간단히 손저어 답례하였지만, 그속에서 우리는 피가 같은 한민족임을 너무도 똑똑히 실감했다.

 끊어진 압록강 단동철교를 걸으면서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이제 어느 날인가는 저 끊어졌던 다리가 이어져서 서울에서 열차에 앉으면 당일로 신의주를 거쳐 단동으로 와서 다시 세계로 나가는 그날이 올 것이라 믿고 싶었다. 뿐만 아니라 이제 다시는 울먹이면서 그리움에 휩싸여 보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고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달려가서 볼 수 있는 시대가 펼쳐질 것이다.  

역사책이나 사극을 통하여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네 가지 불가론을 빌미로 요동정벌을 포기하고 회군하여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웠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정작 위화도를 바라보니 감회가 더욱 깊었다. 그때 만약 이성계가 요동정벌에 나섰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또 요동정벌에서 승리하였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노라니 역사도 순간에 의하여 좌지우지 되며 그로하여 어떤 영원이라는 것이 결정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동양의 피라미드

고중조선어문 교과서에 풍기재 선생이 쓴 '피라미드가 주는 계시'라는 글이 있어 학생들에게 가르친 적이 었는데, 그 글 중 피라미드는 애급의 피라미드를 말한 것이었다. 그러나 집안시에서 만난 장수왕릉은 비록 애급의 피라미드와는 비길 수 없겠으나, 그 규모와 크기는 정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말 그대로 동양의 피라미드가 되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런 피라미드앞에서 삶과 죽음에 대하여 잠깐 생각해 보았다. 사실 영원한 삶이란 있을 수 없고, 죽음 또한 영원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들은 왜 자신의 무덤에 대하여 그렇듯 신경을 써왔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광활한 요동땅을 메주밟듯 달리던 광개토태왕의 비와 능앞에서는 자연 머리가 숙여졌으며, 요즘 한국 TV에서 방송하는 '광개토태왕'을 머리에 떠올리게 하는 순간이었다. 자랑스러운 역사를 후대들에게 널리 알리는 것은 미룰 수 없는 책임이라는 것을 또 한번 느꼈다.
 
5호릉의 벽화는 몇천 년이 흐른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벽화로 당시의 사회를 알아볼 수 있어 좋았다. 오늘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보존될 수 있게 한 당시의 백성들에게 감사했다.

환도산성을 둘러보면서 천연요새를 이용한 당시 인민들의 지혜와 슬기에 감복하였다. 각양각색의 무덤 떼앞에서는 한 때 천하를 호령하면서 말을 타고 광활한 지역을 누비었을 이름 모를 사람들로하여 숙연해지는 마음을 달랠 길 없었다.

장백산에 울려퍼진 친선의 멜로디

전날까지도 화창하던 날씨였으나 우리가 통화에서 이도백하로 향하는 야간열차에 올랐을 때부터 하늘은 흐릿하여 오기 시작하였다. 이도백하에 내린 이른 아침에는 비가 좀 내렸을뿐만 아니라 날씨 역시 흐릿하여 모두가 장백산 천지를 볼수 있을까 하는 걱정뿐이었다. 우리가 장백산에 들어서니 무정한 하늘이 비를 퍼붓기 시작하여 끝내는 천지를 볼 수 있는 행운을 갖지 못하고 말았다. 허나 일행 모두가 민족의 성산 장백산에 온것만으로도 장백산의 정기를 듬뿍 받아서인지 명랑한 기분이었다.

 장백산 민속촌에서의 하루밤은 참으로 뜻 깊었다. 제14회 동북아 청소년친선문화제 중한 친선예술축제는 밤 늦도록 장백산의 정적을 깨우고 있었다.  통일을 갈망하는 단막극이나 답사기간의 일정을 함축한 장기자랑, 활발하고 명랑한 십대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노래와 춤은 정말 보는 이들의 마음을 울렁이게 하였다. 우리 일행 외의 투숙객들도 모여와 구경했으니, 구태여 더 설명하지 않아도 가히 그 장관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축제의 평심으로 참여한 것도 나의 일생에서는 잊을 수 없는 일이다. 밤늦어 잠자리에 들었으나 좀체로 잠들 수 없었다. 이제 언젠가는 세계화가 되어 우리 모두가 국경의 구애없이 늘 한자라에 모일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었다.  

선인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도문에서 봉오동골짜기로 떠날 때부터 마음은 이상하리만큼 흥분되었다. 홍범도장군이 봉오동골짜기에서 일본놈들을 너무도 멋지게 족치여 지금까지도 전설같이 전해내려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봉오동골짜기는 산세가 험해서 매복하여 족치기는 참으로 좋은 곳이었다. 봉오동골짜기에 서있노라니 나도 모르게 귀전에서 돌격의 함성소리와 총소리가 울려오는 듯 싶었다.   

 용정에서 찾아본 '3.13독립의사릉'을 찾는 순간부터 나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모두가 묵념으로 시작하였으며 오래동안 그 자리에서 떠나지 못하였다.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하여 자신을 바친 의사들의 모습이 너무도 거룩하게 안겨왔다.

우리 교육의 발상지인 서전서숙, 명동학교, 대성중학교를 돌아보면서 어디가나 교육을 중시하고 교육을 우선시한 우리 민족의 미풍양속과 소팔아 자식공부시킨다는 미담을 그대로 느낄 수 있어 좋았다. 명동촌에서 우리 민족의 저항시인 윤동주생가를 찾았는데 시인이 어린시절을 보낸 발자취를 더듬어볼수 있어 참으로 감회가 깊었다.

용정의 일송정에 올라 60리 평강벌과 세전벌, 유유히 흘러가는 해란강을 바라보는 마음은 시원하기에 앞서 무거웠다. 그옛날 선구자들은 여기서 비밀리에 만나 광복을 꿈꾸며 싸워왔으니 말이다. 비록 “선구자의 노래”를 어렴풋하게 기억하여 조금은 부끄러웠으나 일행이 합창으로 부르는 모습은 참으로 보기가 좋았다.

 다시 만날 그날을 기약하며

마지막날 연변대학예술학원에서 있은 조별미션답사는 참으로 의의 있고 뜻 깊었다. 매 조별로 자신들이 다녀온 곳을 소개하고 또 자신들이 느낀 점을 간략하게 설명하였는데 소조를 대표하여 설명하는 학생들 모두가 조리있고 핵심이 명확하여 탄복을 했다. 그 순간 나는 저도 모르게 우리의 교육을 반성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많은 개혁을 해오면서 발전을 거듭해왔지만 아직도 학생들의 능력배양은 말에 그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학생들도 한국 학생들 못지 않게 능력을 가진 학생으로 배양해야겠다고 다짐하는 순간이었다.  

8월12일 이제 우리들이 헤여져야 할 시간이 드디어 다가왔다. 생각 같아서는 시간이 멈추어버렸으면 좋으련만 시간은 이 세상 그 누구에게나 가장 공평한 법이니 우리의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우리는. 서로 손잡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였다. 그러다 어느 누구인가 흐느끼기 시작하였으며 결국은 모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인간이란 만남과 헤어짐속에서 사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건만 헤어져야 하는 순간만큼은 너무도 아쉬웠고 가슴이 아팠다. 인연이란 한번 만나고 일생동안 그리움속에서 살기도 하고 또 한 번도 만나지 않고 영원히 그리움속에서 산다고 하는데, 우리의 만남과 인연은 영원하기만을 바라고 또 바랐다. 나는 굳게 믿는다. 피는 물보다 진한 것이다. 우리 모두가 단군의 후손으로서 우리의 몸에서는 같은 피가 끓고있으니 언젠가는 또 만날 것이며 만나면 또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갈 것이리라. 그리고 우리 모두 동북아 평화와 통일을 위하는데 한몫할 것임은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 글을 마무리 하는 순간에도 7박8일을 함께 하였던 한국의 학생들과 학자분들이 눈앞에 삼삼히 밟혀온다. 민족의 어제를 잊지 말고 후대들에게 알려주어야 할 필요성을 안고 동분서주하면서 또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는 지성인들이 있기에 우리는 하나가 되어 나아갈 것이다. 90여명을 인솔하느라고 항상 학생들과 한마음이 되어 앞뒤로 뛰어다니던 이현정 부장님과 김도현 간사님, 그리고 매사에서 항상 꼼꼼히 챙겨주시던 유종열 대표님, 통일부차관을 지내셨지만 항상 무람없이 대해주시던 이봉조 대표님, 항상 유머와 재치로 이야기를 리드해가는 정용상 교수님, 비상한 기억력으로 민족의 발자취에 정통한 노성태 선생님, 어디가나 정경을 꼼꼼히 렌즈에 담던 이종각 교수님 그외의 모든 분들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이제 어느날인가 또 존경스러운 분들과 한자리에 모여 즐거운 한때를 만들어보길 기원하는 마음이다. 그날까지 부디 지성인들 모두가 건강하게 보내길 진심으로 기원하면서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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