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 한국문인협회 해외문학심포지엄

[작가 김학천 / 전 연변작가협회‧ 전 연변사회과학계연합회 주석. 전 조선족소년보사 사장. 현 연변문화예술발전촉진회 회장. 한문‧중문시집 등 다수 출간. 국가1급 작가. 국가급 문학상 수차 수상.]

1. 한국문협 성춘복 이사장과의 인연

1998년 여름, 한국의 저명한 소설가 김승옥 선생이 당시 연변작가협회 주석으로 있던 나에게 이런 건의를 해왔다. 아직 한국에 다녀온 적 없는 중국조선족작가들이 꽤나 많으니 그들에게 한국견습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게 어떤가,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승옥 선생의 알선으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는 중국조선족작가들을 해마다 5명씩 무료로 초청하여 7일간 한국을 일주하면서 견습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는 초청수속과 소요되는 비용을 책임졌고, 협상에 따라 한국문인협회와 한국민족작가회의가 윤번으로 한해에 한 번씩 중국조선족작가대표단을 접대키로 합의를 보았다.

중국조선족작가 한국방문단은 제1회로 1998년 9월경에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조룡남 시인을 단장으로 하는 5명 작가가 한국을 방문하였고, 제2회로는 1999년 9월경에 내가 단장이 되어 중국조선족작가대표단(5명)을 인솔해서 한국을 방문하였다. 이런 계기로 나와 한국문인협회 성춘복 이사장간의 만남은 자연스레 이루어지게 됐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성춘복 선생도 우리 부모님과 같은 경북 출신인데, 외가는 우리 부친의 고향인 경북 상주군 외서면 백전리와 매우 가까운 곳이었다.

중국조선족문단에 대한 그의 남다른 관심과, 연장자다운 자상하고 소탈한 성격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한국시단의 유명한 시인이라는 데를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2. 미국 방문에 유일한 중국 조선족작가로 초청 받아

 2000년 4월경, 성춘복 이사장의 주선으로 나는 7월말 경에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개최되는 제10회 해외문학심포지엄 “한민족 문학인 세계대회”(한국문인협회 주최)에 참석하게 됐다. 중국동포문인 대표는 내가 유일하게 선정됐다.

왕복 항공권과, 미국기간의 식주 행 등 비용은 한국문협에서 대주었다. 내가 선정된 이유는, 한자와 한글로 동시 창작을 하고, 또 두 가지 문자를 서로 번역하여 창작한다는 점. 물론, 중국조선족문단을 대표하고 리더하는 연변작가협회 주석이라는 명분이 주된 것이다. 그래서 선배문인들과 나보다 문학성과가 더욱 큰 작가들에게 어는 정도 미안한 점도 없지 않았지만, 그런대로 나는 초청에 흔쾌히 응하여 가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미국방문 비자는 꽤나 까다로웠다. 증명사진부터 모든 서류들이 사사건건 신경이 쓰이지 않는 곳이 없었다. 소문에 따르면 미국방문비자는 심양주재 미국 영사관에서 접수하는데, 신청자 10명에 겨우 2명, 혹은 3명 정도 밖에 허가를 받지 못한단다. 그래서 많은 신청자들은 연이어 두 번, 세 번 비자를 넣었으나 결국 퇴자를 받았었다. 그래도 나는 운이 좋아 단번에 비자를 받게 됐다.

사후에 알게 됐지만, 나와 함께 초청 받은 러시아의 허진 시인은 애를 많이 썼으나, 끝내 비자를 받지 못하고 미국방문을 포기했었다.

 

3. 한국을 경유해 태평양을 날아 미국으로

 2000년 7월25일 저녁 8시, 나는 중국 북방항공 6630번 한국행 여객기에 몸을 실었다. 나는 한국으로 가서 한국 문인들과 합류하여 함께 미국으로 가야했다.

그런데 연길에서 직접 서울로 가는 항공선은 아직 개통되지 않아, 먼저 연길에서 심양으로 향발, 심양에서 하루 밤을 자고 이튿날, 즉 26일 오전 9시20분에 다시 심양도선공항에서 한국으로 가는 여객기에 탑승했다.

한국 문협의 박종철 사무국장이 공항으로 나와서 반갑게 맞아 주었다.

한국문협 근처인 아리랑호텔에 행장을 풀어놓고, 박종철 국장과 이광섭, 신현문 등 한국문협의 관계자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했다. 저녁은 김창직 시인과 청년문화출판사 김국진발행인과 함께 했다. 한국청년문화사에 곧 출판될 나의 시집 ‘봇나무숲 情結’에 관해 많이 담론을 했다.

27일 오전, 김승옥 선생이 방으로 찾아 와서 중한문인들 간의 교류와 소통에 관해 조언을 주었다.

이날 오후 2시, 나는 김포공항에서 한국문인 20여명과 합류했다. 동행자들 속에는 유명한 원로 시인 조병화 선생, 한국문협의 부이사장 신세훈시인, 정소성 소설가, 허영자 시인, 최승범 평론가 등 몇 분은 원래 알고 있는 분들이어서 더욱 반가웠다. 이들은 로스엔젤레스에서 개최되는 제10회 해외동포문학심포지엄 참석자들 중의 제3진 성원들이다. 1진, 2진, 4진의 성원들은 먼저 출발을 해서 관광유람하다가 규정된 시간에 행사장에서 재회하기로 약속을 했었다.

오후 6시 정각, 일행은 미국항공공사의 보잉 747여객기에 탑승했다. 꼬박 12시간을 연속 비행하여 태평양 피안에 자리 잡고 있는 미국 서부해안 도시 센프랜시스코를 경유해서 로스엔젤레스에 도착했다. 널직한 기내에는 여객들이 꽉 찼다. 나의 옆 좌석에는 강원도 강릉시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홍희숙 교사와 경북상주시 고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조재학 교사가 앉았다. 같은 40대 후반의 연령인 홍희숙시인은 성격이 활달하고 열정적이고, 조재학 시인은 조용하고 섬세하여 경북출신과는 전혀 다른,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래서인지 조재학 선생이 이번 출행의 총무를 맡아 보면서 명단등록, 비용수금, 필수품발급, 시간배정 등을 하며 열심히 봉사했다. 경북상주는 나의 부친의 고향이어서 그런지, 조재학 시인이 한 고향사람으로 느껴져 반가웠다.

듣자니, 로스엔젤레스에 도착하면 27일 오후 6시경이 된단다. 다시 말하면, 서울시간으로 27일 오후 6시에 이륙하여 비행한 여객기가 목적지에 닫으면 다시 27일 정오 12시 30분경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미국과의 시차는 약 16시간 정도, 그러니 또 다시 27일의 16시간쯤을 더 겪게 된다. 정말 기묘하고 신기한 현상이었다. 여객기는 예정된 시간에 로스엔젤레스에 도착하였다.

 

4. 인상적인 로스엔젤레스의 한인사회와 문학행사

 로스엔젤레스에 도착해서 넓은 유리 창문으로 내다보니 공항의 하늘에는 쉴 새 없이 비행기가 오르고 내렸다. 일행 중 누군가가 로스옌젤레스공항은 평균 2분에 비행기 한대가 뜨고 내린다고 알려주었다.

재미한인시인협회 김문희 회장 등 관계자들이 공항에 마중 나왔다. 우리는 5성급인 레이더션호텔(RADISSON WILSHIRE PLAZA HOTEL)에 짐을 풀었다. 나는 단국대학국문과교수 정소성 소설가와 함께 816번 객방을 같이 썼다.

저녁 7시10분, 호텔2층 홀에서 성대한 환영식이 열렸다. 현수막에는 “한민족문학인 세계대회-제10회 해외문학 심포지엄”이라는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8명씩 앉는 원형 탁상 30개에 참석자들이 빼곡히 앉아있었는데, 아주 큰 규모의 행사였다.

한국에서 온 문인들 외에도, 재미한인시인협회 김문희 회장, 미주한인작가협회 백지영 회장 등 많은 분들이 참석하였고, 기타 나라에서 온 한인 문인들도 꽤 있는 것 같았다. 백지영 회장은 내가 연변에서 접대한 적이 있어 특별이 반가워했다.

사회자가 참석자들을 일일이 소개하였는데, 나를 소개할 때는 특별히, “중국 대륙에서 왔다.”, “연변작가협회 주석이다.”라는 점을 강조해서 장내의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한국본토 외에, 기타 나라에서 온 문인들이 적은 원인도 있었겠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소통이 적었던 중국대륙에서 머나먼 미국까지 와서 이 행사에 참석한다는 게, 참석자들에게 분명 경이로운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60대 중반쯤 되는 한 예쁜 할머니가 다가와서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분은 일찍 중국을 다녀갔고 또 연변작가협회를 방문했으며, 그후 “중공으로 다녀 왔습니다”라는 제하의 기행문집을 출판하여 한인문단에 센세이숀을 일으킨 재미한인작가 이계향선생이었다. 그는 연변의 김학철 소설가, 이근전 소설가 등 몇몇 원로작가들의 안부를 묻고 연변방문 인상을 감개무량해서 얘기했었다.

식사 후 나는 정소성교수와 함께 백지영회장의 초대로 고려타운에서 중국노래와 한국노래를 번갈아 부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튿날 아침, 호텔에서 조식을 마친 후 내가 소속된 3팀은 큰 버스에 합승하여 허리우드와 농부산품시장을 관광했다. 점식식사는 한인이 운영하는 “신라뷔페”라는 한식점에서 치렀다. 식사 후 나는 관례대로 2달러의 팁을 탁상에 놓고 나왔다. 한국에서 400불 쯤 되는 1원, 2원짜리 달러를 미리 준비해서 팁으로 쓰기에는 아주 편리했다.

오후 2시부터 우리는 정장차림으로 호텔 2층 홀에서 개최되는 심포지엄 개막식에 참석했다. 정소성 교수가 주제 발표를 하고, 내가 “중국조선족문학과 연변작가협회”라는 제하로 강연을 했다. 당지 대학생들이 사이사이 장고춤을 추고 가야금 연주를 해서 분위기가 즐거웠다.

이계향선생은 나의 손을 꼭 잡으면서 김응준 시인 등 연변문인들께 안부를 전해 달라고 했다. 한 때는 비행기 조종사로 있었다는 김호길 선생, 연변으로 다녀간 적 있는 백지영 회장 등 많은 분들이 중국과 연변에 대한 뜨거운 관심과 열정을 보여 주었다.

7월 29일에는 해변축제가 열렸다. 주최 측의 세심한 준비 하에 소설, 시, 수필 등 장르별로 모든 참석자들이 조별로 나뉘어 해변가 파란 잔디밭에서, 장르별로 소집된 세미나, 사물놀이 등 민속적인 예술 공연, 시 랑송, 문학 강연 등 4가지 행사를 가졌다.

오찬은 잔디밭에서 몇 군데 노천 화롯불에 쇠갈비를 굽는 불고기인데 뷔페식으로 각자 수요에 따라 제 마끔 큰 접시에다 담아서 먹었다. 장르별로, 끼리끼리 일여덟씩 잔디밭에 모여앉아 와인을 마시고 담소를 하며, 미국의 유명한 쇠갈비구이를 먹었던 기억이 새롭다. 옆에는 가족끼리 와서 한가로이 파란 잔디위에서 휴식의 한때를 즐기는 백인들이 보였다.

로스엔젤레스는 태평양의 서부에 위치한 도시로, 이맘때의 해변가는 도심에 비해 시원하다기 보다는 좀 추울 정도로 싸늘했다. 태평양의 서부해안에서 아득히 멀고먼 태평양 동부 해안 쪽을 바라보며 나는 중국과 연변의 지리를 머리에 떠올리면서 잠간 향수에 잠기기도 했다. 중국 대련 여순의 해변가에서, 한국 부산의 태종대 해변가에서, 베트남의 하룡만 해변가에서, 중국 광서의 북해시 은빛백사장에서 나는 아득한 태평양 피안을 바라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지만, 그날처럼 태평양 서해안에서 태평양 동해안을 바라보기는 난생 처음, 당시 그때가 너무 신비롭고 소중하고 더없이 특별해 보였다.

로스엔젤레스는 사막위에 건설된 1000여만 인구가 살고 있는 현대화 대도시이다. 겨울에도 일단 비만 내리면 풀들이 대뜸 파랗게 자라난단다. 겨울이라야 고작 영상 5도 정도의 온도니까 그럴 만도 했다. 도시 중심에는 몸매가 날씬하고 키꼴이 휜칠한 철나무 가로수들이 줄지어 서 있어 더없이 황홀한 매력을 뽐냈다. 도심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고층빌딩들이 즐비하게 들어섰고, 주위에는 1층 혹은 2층의 건물들이 끼어 있다. 너무 황홀한 도시였다.

 

5. 미국 전역 한인사회를 횡단

 7월 30일 오전 11시40분, 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워싱턴으로 날아갔다. 옹근 4시간 반을 거쳐 오후 4시 10분경에 목적에 도착, 현지 시간으로는 이미 저녁 7시 쯤 됐었다. 워싱톤과 북경간의 시차는 12시간, 여기 저녁 7시가 바로 북경의 아침 7시인 셈이다. 이렇게 큰 차이의 시공간이 너무나 신기하게 느껴졌다.

로스엔젤레스보다 훨씬 무더운 워싱턴은 미국의 동부 도시이고, 전 미국의 수도이며, 행정중심이다. 그런데 전체 인구는 63만 명, 주변의 인구까지 합쳐야 500만이란다. 이렇게 큰 나라의 수도인데 인구가 100만도 안 된다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워싱턴에는 한인들이 무려 7만 명이나 살고 있단다. 인구비례를 보면 꽤 많은 셈, 그런데 흑인들의 비례가 전체 인구의 75%~80%를 점했다.

저녁식사는 한인이 운영하는 “서울식당”에서 했다. 주숙은 워싱턴시의 서부에 위치한 WESTPARK호텔에서 했다. 나는 정소성교수가 함께 310번 객방에 들었다.

7월31일 아침 8시, 나는 집에 국제전화를 했다. 아내의 익숙한 목소리가 쨍쨍하게 들려왔다. 연길은 저녁 8시, 약 2분 동안의 통화요금이 6달러였다. 아침식사는 양식, 미국에 와서 본격적인 양식을 먹어본 셈이다.

3진으로 나눈 우리 일행은 모두 19명, 중형버스 한 대가 맞춤했다. 우리는 선후로 남북전쟁시대를 알려주는 알림톤국립묘지, 링컨기념관을 답사했다. 한전기념지의 잔디밭에는 10여명의 미군이 한국전쟁 때 경각성을 잔뜩 높이며 총을 들고 한걸음 한걸음 간신히 행군하고 있는 장면을 조각해 놓았었다. 나의 부친도 한국전쟁 때 중국인민지원군이 되어 참전했었는데, 눈앞의 미군들과 불공대천의 원쑤로 생사결판 처절한 싸움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역사의 아이러니에 만감이 교차됐다.

오후에는 백악관과 국회의사당을 답사했고, 잇따라 제퍼슨기념관, 스미소니언박물관을 관광했다. 저녁식사도 역시 한식점에서 불고기와 해물 성찬을 맛보았다. 미국에 온 이래 처음 달게 잠을 잘 수 있었다. 시차에 시달리다가 마침 잠을 잘 자서 그런지, 8월1일 아침 5시 반에 눈을 번쩍 뜨니 정신이 한결 상쾌했다. 비로소 시차후유증이 말끔히 사라진 것이다. 그런데 정소성 교수는 오히려 잠이 오지 않아 통밤을 뜬눈으로 새웠다고 한다.

아침 식사 후, 우리는 이틀 밤이나 묵었던 워싱턴 WESTPARK호텔을 떠나 나이아가라폭포로 출발했다. 도중에 루레이 동굴을 답사하고, 주변의 미국인들의 민거에서 잠깐 머물기도 했다. 대형관광버스는 매리랜드주와 펜실바나아주의 광활한 대지에서 몇 시간씩 질주하다가 뉴욕 북부를 지나 나이아가라 대폭포가 있는 버팔로시로 향했다.

길옆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눈에 보이는 곳은 온통 파란 잔디밭이고, 곱게 피어나는 꽃들이고, 지저귀는 뭇 새들이다. 선경같이 깨끗한 밀밭이었다.

간혹 보이는 마을에는 아담하고 예쁘게 지어진, 동화에서만 볼 수 있던 양옥들이 다채로운 매력을 뽐내고 있다. 곧게 뻗은 공로는 언제나 정갈하고 질서가 정연하여 한 번도 차가 밀릴 때가 없었다. 워싱턴에서 버팔로까지 420마일(英里), 우리는 줄곧 아름다운 풍경을 흠상하면서 귀맛 좋은 미국향촌가요 “Take me home 나를 고향으로 데려다 주오”를 경청했다. 휴게소에서 우리는 “눈물의 강”이라고 불리는 써스키하나강을 보면서, 그 이름에 내포된 사연을 알아보았다. 미국 전역의 하류는 모두 한 점의 오염도 없어, 보기부터 깨끗하게 생각됐다. 미국 수돗물을 안심하고 식용할 수 있는 것도 원인이 있었다.

점식은 중국인이 경영하는 음식점에서 했는데, 복건성에서 왔다는 23세의 예(倪)씨라는 젊은이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곳에서 예씨는 한 달에 약 2천 달러를 받고 일한다. 수입이 별로 많은 것 아니었다. 이나저나, 이렇게 먼 미국에서 중국인을 만나 함께 한어로 대화할 수 있다는 게 너무 반가웠었다.

나이아가라폭포가에 도착해 보니 저녁 9시 40분경이다. 폭포가 쏟아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등불로 장식된 강 양안의 야경이 너무 황홀했다. 강 건너 편이 바로 캐나다이다. 야경은 캐나다 측이 더 볼만하다는 가이드의 말에 우리 일행은 땜으로 이어진 통로를 거쳐 캐나다 측으로 가서 잠깐 관광하고 오자고 청을 넣었다. 여권을 보여 주니 캐나다 측의 변방경찰과 검찰관들은 순순히 우리 일행을 통과시켰다. 내 차례가 돼 여권을 내밀었더니 캐나다 검찰관이 한참 내 여권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가로세로 머리를 흔들며 “노, 노”했다. 가이드가 교섭을 해도 막무가내이다. 아쉬웠으나 캐나다와 중국 간의 무비자협정이 체결되지 않았으니 해볼 도리가 없었다.

8월 2일 날씨는 굉장히 맑았다. 나이아가라폭포 가에서 바라보니 위에서 쏟아지는 강물은 유량이 엄청 많았고, 또 너무나도 맑았었다. 폭포수가 떨어지는 곳으로부터 보얀 물보라가 치솟아 오르고, 가운데에 칠색무지개가 예쁘게 걸려 있었다. 말 그대로 자연의 기적이고 장관이었다. 책에서나 영화에서 보았던 정경이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우리 일행은 폭포수 아래에 내려가 유람선을 탑승해서 곧추 폭포수가 떨어지고 있는 지점으로 가보았다. 다행히 우리는 모두 비옷을 걸쳐 입어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어떤 관광객들은 비옷을 입지 않아 당장에 물병아리 신세가 됐다. 갑판에 붐비는 관광객들 중 중국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틀림없이 중국대륙 아니면, 대만에서 관광 온 유람객임이었다. 중국은 인구가 많고 경제도 발전하고 있으니 중국인 관광객들도 부쩍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기에 미국 전역의 공항과 공공장소를 보면 중문 안내문을 쉬이 찾아 볼 수가 있다.

점심식사 후, 우리는 다시 버스에 탑승하여 뉴욕으로 출발했다. 한국인이 운전하는 버스가 한참 달리다가 고장이 나서 어느 휴게소 앞에 멈춘 것이다. 옹근 4시간이나 거쳐서야 미국인이 운전하는 버스가 와서 우리를 싣고 계속 뉴욕으로 달려갔다. 원래는 저녁 9시에 도착한다던 것이 이튿날 새벽 2시에야 겨우 목적지에 이를 수 있었다.

뉴욕 RADISSON호텔 303번 객방에서 나와 정소성 교수는 몇 시간 겨우 눈을 부치고 일어나서 샤워를 하고 식사를 한 다음, 또 버스에 탑승해서 뉴욕 시내를 관광했다.

버스가 제5거리를 통과했다. 가이드는 절대 차문을 열지 말고 차에서 내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 거리는 엽기자들의 천당이고 모험가들의 무대라며. 팬티 하나에 2000달러를 받는다고 하니 너무나 어처구니없었다. 제52거리는 보통 쇼핑인들의 천당이다. 우리는 워싱톤광장, 102층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멘하탄의 거리, 자유녀신상 등을 선후로 답사했다.

102층으로 건축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은 제5거리에 우뚝 일떠서 있다. 엘리베이트는 우리를 80층까지 태워주었는데, 다시 6층을 걸어 올라가니 뉴욕 전경이 한눈에 안겨왔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길게 장사진을 이룬 관광객들이 차례로 빌딩에 오르고 있었지만, 질서정연했다. 우리는 유람선에 몸을 싣고 자유여신상을 에둘러 한 바퀴 돌았다. 자유녀신상은 미국독립 100주년 기념에 즈음하여 프랑스에서 선물한 것이란다.

버스는 계속 앞으로 달렸다. 중국타운은 꽤나 긴 상업화 거리이며, 제32거리에 위치한 고려타운도 꽤나 긴 상업거리다. 중국타운과 고려타운 모두가 멘하탄에 자리 잡고 있어 여간 번화하지 않다. 멘하탄은 세계의 금융 중심으로 알려져 있는데, 주권교역소 문 앞에는 큰 황소의 조각상이 세워졌다. 소뿔이 하늘로 치켜 올라 증권시세가 매일 올라가기를 기원하 듯, 이윤과 효익을 상징했다. 점심은 고려타운의 “강서회관”이라는 한식점에서 먹었다. 중국타운에는 주강백화점, 동남아상점, 대형은행, 동방은행, 무창안경회사, 대화사 등 상업기구들이 줄줄이 늘어섰다. 중국인 대부분이 음식점을 운영하는데 단합이 잘되고 거개가 성공을 했다고 한다. 한국인들도 대부분 성공적인 세척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미국전역 세척업의 50%가 한국인들이 운영한다는 집계도 있다.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미국에 중국인이 200만이고 한국인은 100만이 넘는다고 한다. 뉴욕의 한인은 50만이고, 로스엔젤레스는 한인은 60만이다. 뉴욕광장을 쎈추러파크(중심광장)라고 했다. 뉴욕같이 초대도시의 도심에 이런 녹지가 있다는 게 흔치 않았다. 풍경이 아름답고 소형 야생동물도 늘 눈에 띄었다. 그러나 여기는 또 마약, 매음 교역장소이기도 했다.

리계향선생은 로스엔젤레스에서 헤어진 후, 먼저 뉴욕에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식사는 리계향 선생이 전문 중국에서 온 나를 위해 열심히 초대한 것 같았다. 뉴욕 한국타운의 중국인이 운영하는 “金鹰酒店”(금응주점)에서 성춘복 선생, 김병권 선생, 심상옥 선생 등 4명도 초대를 했다. 미국 측에는 리계향선생 외에, 재미한인작가 하운선생, 최정자 선생 등이 참가했다. 리계향 선생의 아들과 며느리도 동참해서 가족적인 연회 분위기가 좋았다. 저녁식사는 해물 요리이었는데, 나는 그렇게 큰 왕세우 튀김을 난생 처음 보았다. 음식점 주인은 매영권이라고 부르는 중국인인데 고향은 광동성이고 32년 전 홍콩으로부터 미국으로 건너와서 줄곧 음식점을 운영하여 꽤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한다. 리계향 선생과 성춘복 선생은 나와 매영권씨가 중국어로 윤활하게 소통하는 것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중국 작가출판사에서 갓 출판한 중문시집 “세기의 영마루를 홀로가다(世纪之交的独行)”에 싸인 해서 그에게 증송했다. 그는 내가 중국대륙에서 왔다며 특별히 대만에서 출품한 고량주 한 병을 내놓았다. 미국으로 와서 줄곧 와인만을 마시던 나는 처음으로 중국 고량주를 두어 잔 굽 냈다.

식사 후 하운선생이 자가용으로 나와 성춘복 선생 일행을 호텔까지 바래주었다.

호텔가는 길에 나는 또 한 번 뉴욕의 황홀한 야경에 깊이 빠져 들어갔다. 투라이 보루대교를 넘어서면서 화보에서만 보았던, 그 경치가 바로 눈앞에 스쳐 지나가는 찰나들이 더없이 소중하게 생각됐다.

아, 미국이여, 뉴욕이여, 불야성이여, 다시 만나자!

이제 내일이면 새벽 3시에 공항으로 출발하여 로스엔제레스를 경유해서, 센프렌시스코를 지나 또 서울로 날아가서, 마침내 중국 연길로 돌아가는 귀로에 오르게 될 것이다.

2013.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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