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 글

[동포문학 창간호가 지난 6월7일에 출간되어 6월16일에 출간기념식을 가졌다. 본지는 창간호 수상작과 기타 작품들을 지속적으로 게재할 예정이다. 그 첫 순서로 수필부문 대상 수상자 정연 선생의 작품을 싣는다. 아직 수필로서 부족한 점이 많지만, 수필 고유의 틀을 깨고 '집'이란 매개물로 자식들에게 일생을 바쳐오신 '아버지'의 사랑과 위대함을 세태  장편소설의 한 부분처럼 세밀하고 리얼하고, 감동적으로 그려냈기에 박수를 받을 만한 작품이다.  편집자] 

[서울=동북아신문]집을 팔아야겠다. 팔고 전에 살던 마을로 돌아가고 싶구나.

오랜만에 서울에 오신 아버지는 한 달 넘게 딸들 집에서 머무셨다. 설을 지내고 귀국일이 임박하자 우리들을 한자리에 불러놓고 느닷없이 살고 있는 아파트를 팔겠다는 말씀을 꺼내셨다. 우리 오남매가 10년 전에 돈을 모아 아버지께 선물한 아파트였기에 아버지는 자식들의 동의를 구하고 싶은 것 같다. 우리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줄곧 혼자 사신 아버지에게 서른댓 평 아파트가 너무 큰 것일까. 그래도 자식들이 놀러오면 스무 명도 넘는 식구들을 다 재울 수 있는 큰 집이 필요하다던 아버지가 지금은 왜 생각이 바뀌셨을까.

너희들이 오지 않으니 더 이상 큰 집에서 살 이유가 없질 않느냐. 서울에 딸들이 넷씩이나 있지만 한 도시에서도 다 같이 얼굴을 보기가 쉽지 않다. 5년 전 아버지의 칠순잔치 때 오남매가 중국에 있는 아버지의 집에서 모인 것이 마지막이었다. 아버지의 서운함 가득한 말씀도 이해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모두에게 각자 살림살이가 있고 아이들과 직장 때문에 좀처럼 시간이 나질 않았다. 비행기를 타면 한 시간, 다시 버스타고 세 시간 걸리면 도착하는 아버지의 집, 그곳은 늘 그리움의 대상이었지만 일가족을 이끌고 움직이기엔 큰 결심이 필요했다. 결국은 우리들의 설득 끝에 아버지가 서울에 오시게 된 것이다.

아파트를 지금 팔면 시세차익이 좀 날거다. 전에 살던 마을의 작은 집을 사는데 돈이 몇 푼 들지 않으니 아파트를 팔아서 남는 돈은 각자 보탠 만큼 등분해서 나눠줄 것이다. 그것으로 집 평수 늘리는 데 보태도록 해라. 아버지는 서울에 와서 큰 딸부터 넷째 딸까지 사는 집을 차례차례 일주일씩 머물며 유심히 살펴보시고 유치원과 학교까지 얼마나 먼지, 살기가 얼마나 편하지, 시세가 어떤지 자세히도 물으셨다. 서울의 시세를 알아서 뭐하시나 생각했었는데 아버지는 진작부터 자식들의 집 살림에 보탬이 되는 일을 구상하고 계셨던 것 같다. 아버지의 계산대로라면 작은 돈이 아니었다. 살 때는 그저 아버지가 평생 사실 집이라 생각하고 주저 없이 육백만원씩 돈을 보탰으나 십 년만에 우리는 아버지의 부동산재테크로 한사 람당 두배 이상 수익을 배당받는 느낌이었다. 순간 가슴이 뜨거워졌다. 자식들이 무리를 해서 사준 집이라고 심적 부담이 크셨던 걸까. 살아있을 때 자식들에게 보탬이 되고 싶으셨던 걸까. 그 돈이 꼭 필요한 건 아니었지만 우리는 아버지가 결정을 내렸다고 했을 때도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자식들이 사준 아파트는 효도로 생각하고 잘 살았지만 날이 갈수록 옛날 살던 시골집이 그립다는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들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아파트에 입주하고 난 뒤 어머니는 도시생활에 적응을 잘 하지 못하셨다. 가스밸브를 잠그는 일을 늘 잊어 큰 화재를 부를 번 하기도 했고 비밀번호를 잊어 종종 119를 불러서 집문을 열기도 했다. 담장을 터놓고 대문도 활짝 열어놓은 채 이웃과 내왕하는 시골에 육십년을 사셨으니 문만 안 잠그면 도둑이 들까 노심초사해야만 하는 도시생활은 부모님께 얼마나 살벌했을까. 그러나 우리들은 농사일을 하는 엄마가 마음에 걸렸고 마을사람들의 눈에 잘 나가고 효도하는 자식들이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기도 했다. 익숙해지면 시내가 얼마나 편한지 느끼실 거야. 우리는 내심 그렇게 기대했다. 아파트가 넓을수록 자식들이 떠난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져 배가되는 허전함과 외로움에 대해 우리는 깊이 헤아리지도 못했다. 실제로 어머니는 아파트에서의 행복을 일년도 누리지 못하고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셨고 아버지만 넓은 집에 홀로 남겨졌다. 그리고 나는 십년동안 두세 번밖에 그 집에 가질 못했다.

아버지가 그리워하는 시골집을 나는 잘 안다. 지금은 젊은이들이 거의 없고 노인들만 남아서 지키고 있는 낡은 동네지만 옛 친구들이 있고 채소밭을 가꿀 수 있어서 아버지는 편하고 좋다고 하셨다. 그 집은 또한 우리 오남매가 함께 자랐던 추억의 공간이기도 했다. 서울 살이 십수 년이 지났어도 종종 꿈에서도 보는 그 집. 뒷문을 열면 가없이 펼쳐진 논판과 평원의 거센 바람이 정신을 확 트이게 하는 집, 나는 태어나서 대학가기까지 17년의 삶을 거기서 보냈다. 집에는 늘 아버지의 냄새나는 양말이 옷장 밑에서 굴러다니고 쓰다만 원고지들이 책장 속에 대충 꽂혀있었다. 이웃들이 노크 없이 들어와도 늘 반길 수 있는, 잠그지 않은 대문과 담소를 나누는데 그늘이 되어주는, 대문밖에 휘늘어진 버드나무 한 그루가 있는 기와집. 붕어조림냄새가 진동하는 부엌에서 뚝딱뚝딱 고기를 썰고 있던 어머니는 하나 둘 학교에서 돌아와서는 책가방을 아무렇게나 팽개치고 누룽지 한주먹을 들고 나가버리려는 우리들의 입에 썰다만 돼지고기 한 점을 잽싸게 넣어준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늘여놓으며 매운 연기에 눈을 가슴츠레 뜨고 어머니를 도와 볏짚 불을 때고 있던 아버지는 숙제는 다했냐고 언제나처럼 우리들을 다그친다. 놀기만 하지 말고 공부를 최우선으로 하라는 아버지의 잔소리는 학교에서 집에까지 그칠 줄 모르고 늘 그렇게 이어지지만 아이들이 추울세라 밤마다 부엌아궁이에 장작게비를 들여놓고 새벽마다 먼지를 뒤집어쓰며 삼태기에 재를 끓어낸다. 여름엔 모기밥이 되어주고 겨울엔 안방의 천장구석까지 흰 서리가 꽃피는 허름한 집 안에서 부모 형제들과 함께 얼마나 큰 행복을 누렸는지 그때는 잘 몰랐다. 우리는 늘 재래식 변소와 흙먼지가 없는 시내아파트를 동경했으니까. 해가 가고 달이 바뀌고 그 집에서 자란 아이들이 하나 둘 떠나갔다. 대학 간다 떠났고 취직한다 떠났으며 결혼해서 떠났다. 아버지의 집은 일 년에 단 한 두 차례 한꺼번에 몰려든 자식들로 잔칫집처럼 떠들썩했고 그때마다 집밖으로 아버지의 흥겨운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면 집밖으로, 각각의 세상으로 어지럽게 뻗어나간 발자국들을 바라보며 아버지는 다시 적막한 공간에 홀로 남고, 그리움이 다시 담쟁이넝쿨처럼 피어오르는 아버지의 집!…

그러던 어느 해 겨울, 아버지와 함께 같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오빠도 아버지의 잔소리가 지겹고 아버지와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며 가출하듯 집을 나가버렸다. 부모의 사랑이 자식들에겐 자유를 구속하는 올가미이기도 했나 보다. 제 아무리 세상을 휘젓고 다닌들 결국 돌아올 곳은 정해져 있다고 평온한 표정으로 계셨지만 아버지는 속이 까맣게 타 들어 갔으리라. 짜디짠 눈물을 목 안에 깊숙이 삼켜둔 채 거지의 몸으로라도 무사히 돌아만 와달라고 애타는 기도를 하셨으리라. 수개월 후에 수척한 모습으로 돌아온 오빠는 고개를 떨구고 있었고, 그 밥그릇에 소고기 반찬을 올려놓는 무뚝뚝한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그 후 오빠는 더 멀리 떠나갔다. 버젓이 성공해서 꼭 아버지 앞에 다시 나타나겠노라고. 그래. 네가 원하는 삶을 마음껏 살아봐. 대문 앞 버드나무처럼 등이 휜 아버지는 떠나는 아들의 뒷모습만 가만히 지켜보았다.…

세월은 그렇게 흘러 애 태우던 자식들은 다 반려자를 만나 각자의 가정을 꾸렸고 아들딸이 생겼다. 아이들이 유치원 갔다가 습관처럼 돌아오는 집, 퇴근하고 줄달음쳐 들어가면 아이들의 고사리 손이 목에 휘감기는 그 곳이 내 집이 되었다. 가장이 된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된장국을 끓이고 생선을 굽는다. 아이에게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이고 조금이라도 더 따뜻하게 입히려는 노파심에 온갖 잔소리에 꾸중까지 곁들여가며 하루를 시작한다. 순순히 말을 들어주지 않고 반항하는 아이들의 몸짓을 보며 나는 어렴풋이 나의 소싯적의 모습을 더듬어낸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틀린 말이다. 인생을 살아보면 자식은 결국 부모를 이길 수 없다. 부모의 집을 벗어나 다시 내 집이란 것을 만들면서 집의 의미를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진 것이니까. 그간 나의 생은 그 집을 이해하는 과정에 불과했던 것이다.

떠나고 돌아오고 만나고 헤어짐을 겪으며 아버지의 집은 행복과 슬픔과 그리움의 표정을 반복한다. 작은 평수에서 큰 평수로, 초가삼간에서 기와집으로 다시 아파트로 다시 기와집으로 집의 형태는 늘 변화에 변화를 거듭한다. 세월과 함께 마모되어 조금씩 무너져가고 나중에는 헐리거나 또 팔리겠지. 인간도 집도 영원하지 않다. 영원한 것은 오로지 그 집에서 함께 했었다는 사실과 그 소중한 기억뿐. 아버지의 집은 공간 개념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집은 부모의 인생 그 자체였다.

아버지가 중국으로 들어가시는 날, 모두 공항에 모였다. 어린 아이들이 보고 있는데도 나는 굳이 떠나가려는 아버지의 품속에 얼굴을 묻었다. 그 품은 아버지의 집만큼이나 넓고 아늑했다. 아이들을 다 키우고 왜소하게 늙었어도 아버지는 여전히 자식들의 수만큼이나 여러 개의 집을 품고 계셨다. 오래전에 나의 유년시절을 동반한, 아버지와 동고동락했던 그 집에서 맡았던, 아버지의 체취도 물씬 풍겼다.

그래. 아버지의 집은 없어지지 않는다. 언젠가부터 이미 우리가 부모라는 이름으로 다시 그 집에 들어가 살고 있으니까. 아버지가 더욱 그리워지는 이유이다.

2013년 3월25일 신당동 자택에서

 

[정연 수상자 수상소감]

 

 


수 상 소 감

안녕하세요. 대상 수상자 정연입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창간된 동포문학잡지에 자그마한 수필 하나를 발표했다가 뜻밖에 큰 상을 받게 되어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의 집'은 한국에 나와 살면서 아버지와 오랜만에 서울에서 재회한 딸의 마음을 그대로 적은 것입니다.

세상에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아버지이기에 효도도 제대로 못하는 못난 딸의 마음을 그렇게라도 적어서 스스로 위안을 삼고 싶었는데 그런 작을 글에 여러분들이 공감해주시니 제게는 너무 큰 힘이 된 것 같습니다.

글쓰기는 어렸을 적부터 좋아했지만 정식으로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첫 아이를 임신하고부터였습니다. 반드시 글로써 내 삶의 기적적인 변화를 기록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은 강한 느낌이 들었고 글을 쓰는 내내 저는 너무 행복했습니다. 나이가 이미 마흔이고 더 이상 젊지 않다고 생각하니 글쓰기가 이렇게 간절해질 수가 없습니다. 최근 들어 차분한 마음으로 여러 책을 읽을 수가 있어서 기분이 좋습니다. 책읽기와 글쓰기가 인젠 저에겐 삶의 일부분이 되었고 그로 인해저는 지금 아이를 낳은 이후 또 다른 참신한 세상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글쓰기는 아직 저에게 물질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진 못합니다. 하지만 그래서 좀 더 순수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동포문학잡지는 한국에 사시는 중국동포문인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졌고 쟁쟁한 선배님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저도 이사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만큼 더 이상 취미생활로 즐길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깨가 다소 무거워졌지만 이런 책임감이 저에게는 또 다른 원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마지막으로 부족한 글이지만 저에게 처음으로 글을 정기적으로 써서 발표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동포타운신문사의 김정룡소장님, 그리고 저에게 새로운 주제와 방향을 주면서 지속적인 글쓰기를 하도록 격려해주시는 동포문학 이동렬대표님 그리고 글쓰기의 기본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신 정인갑부회장님 기타 애독자 여러분들께 깊이 감사하다는 말씀을 올립니다.

2013.6.16  

정연 프로필 :  중국 대련 외국어대학 졸업. 산야초사랑모임 전운영자. 재한동포문인협회 이사. 시, 수필 수십 편 발표. 한국이주 13년, 여러 나라 좋은 책들을 선정하여 번역 출간하게 하는 저작권중계사 직업에 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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