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淸)의 건륭제(1736-96)는 삼한(三韓)의 명칭에 대한 중국 기록들의 혼란상에 주목하였다.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의 "한(韓)"은 분명히 지도자-통치자라는 의미의 칸(汗, Khan)을 뜻하는 것이었는데, 중국 역사가들이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건륭제는 “중국대륙 동북방의 만주족과 그들의 선조들은 중국 역사가들의 기록에서 이런 식의 부당한 대접을 받아 왔다”고 역설했다

청나라 통치자들은 1636년까지도 그들 자신의 왕조를 후금(後金)이라 부르면서 스스로를 금(1115-1234) 왕실의 직계 후예라 천명했다. 건륭제는 1777년 9월 20일 자로 유지(諭旨)를 내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를 편찬토록 했다. (6년 후인 1783년에 완성.) 건륭제는 그 유지에서 만주족의 유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자신이 읽은바 금나라 역사(金史)에 의하면, 금 왕실의 선조들은 옛 숙신(肅愼)지역 내에서 말갈연맹의 일원으로 살았던 것이다. 그 지역은 장백산과 흑룡강이 위치한 곳이고, 바로 만주족이 일어선 고토(古土)라는 것이다.

청나라 황족은 자신들의 성씨를 애신각라(愛新覺羅)라고 쓴다. 만주어로 아이신(愛新)은 "금(金)"을 뜻하는데, 건륭제 생각에는 바로 이 사실만 해도 청 황실을 여진족 금나라 황실의 직계후손으로 간주하기에 충분한 증거가 된다

청조의 통치자들은 만주족의 원류를 숙신-말갈-여진 퉁구스족은 물론, 예맥 퉁구스족의 삼한(三韓), 신라, 백제뿐만이 아니라, 범 퉁구스의 발해까지 포함시켜 추적을 하였다. 그들은 이 모든 퉁구스족의 공통점으로서, 뛰어난 말 타고 활 쏘는 솜씨와 싸움 잘하는 능력 등을 크게 부각시켰다. 그러나 만주원류고는 선비-거란과 고구려는 포함시키지 않았다. 선비족들은 청조 통치자들이 생각하는 만주족의 원류와 명백히 아무 관련이 없다, 하지만 발해가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범 퉁구스적 존재로 팽창했었던 고구려를 만주원류고에서 배제한 이유는 다르다. 예맥 퉁구스인 고구려의 부각은 숙신-말갈-여진 퉁구스가 만주역사를 주도했다는 그들의 이념에 상당한 손상을 가할 것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배제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역사를 연구하는 서구 혹은 한족 전문가들은 만주원류고에 기록된 다음과 같은 중요 사실들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즉, 금사(金史)에는 금 나라의 시조가 고구려로부터 왔다고 기술되어있으나, 대금국지(大金國志)에는 금의 시조가 본래 신라에서 왔으며, 그 부족 명칭이 완안(完顔)이라고 기록되어있다는 사실. 또 금(金)은 본래 신라에서 수십 세대를 걸쳐 내려온 왕성(王姓)이기 때문에 금 나라의 국명이 되었다는 만주원류고의 기록. 금 왕조의 창시자가 신라에서 왔다는 것을 만주원류고가 여러 차례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 또 만주원류고의 서문 역할을 하는 건륭제의 그 짧은 유지(諭旨)의 1/4이 한반도 사람들과 관련된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 등.

동아시아 역사 강의 1-2 (2005. 1. 1.)
정리: 강현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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