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 미천왕(309-331)이 319년에 두개의 선비족(鮮卑族)과 연합을 하여 모용외(慕容廆, ?-333)가 이끄는 선비족을 공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모용외의 아들인 모용황(慕容煌)은 337년에 스스로를 연왕(燕王)이라 하고, 349년에는 전연(前燕)을 세웠다. 진서(晋書)에는 이 모용황에 맞서 고구려, 백제, 선비족이 연합하여 군사를 일으켰다는 내용이 있다.

송서(宋書)에는 고구려가 요동을 공격하여 점령하였고, 백제는 요서를 점령하였는데, 백제가 통치한 지역의 이름이 진평군 진평현(晋平郡 晋平縣)이라는 기록이 있다. 양서(梁書)에는 동진(東晋, 317-420) 때에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하였고, 백제는 요서(遼西)와 진평을 점령하여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송대(宋代, 960-1279)의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이 편찬한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346년에 백제가 녹산(鹿山)에 있는 부여를 공격하였으므로, 부여사람들이 흩어져 서쪽에 있는 연(燕)나라 쪽으로 도망을 갔는데, 연왕 모용황이 황태자와 세명의 장군(모두 모용씨)에게 1만 7천여명의 기병을 주어 이미 방어능력을 상실한 부여사람들을 공격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346년은 백제에서 근초고(346-375)가 왕으로 등극한 원년(元年)이다
 
11세기에 편찬된 자치통감뿐만이 아니라, 바로 당대 기록에 가까운 남제서(南齊書)에서도 북위(北魏, 386-534)가 10만 여명의 기병을 보내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4명의 장군이 이끄는 백제군에게 (488년에) 패했다고 말한다. 이 사실은 삼국사기 동성왕(479-501) 10년 조에서도 재확인된다. 또 남제서에는 동성왕이 495년에 사절단을 보내 북위의 공격을 격퇴하는데 공을 세운 백제장수들에게 장군 칭호를 내려 달라고 요청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 사서에 기록된 10만이라는 대규모의 북위기병이 북중국으로부터 장수왕 (413-491)이 통치하고 있던 고구려 땅을 온전하게 통과 해, 한반도의 서남부에 있었다는 백제에까지 쳐들어 왔다가 패해 돌아갔다는 것은 말이 안 되며, 또 이렇게 엄청난 사건이 당대의 기록에 누락될 리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치통감과 남제서가 말하는 백제란 분명히 요서에 있는 백제군을 지칭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동성왕의 요청에 의해 남제(南齊) 조정이 백제 장군들에게 수여한 칭호에 들어있는 광능(廣陵), 청하(淸河), 성양(城陽) 등은 모두 분명히 요서의 지명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에 열거한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백제는 4세기 중 어느 때인가 요서 일부를 점거하여 100년 이상을 통치하였다고 이해 할 수 있다. 백제는 그 역동적인 선비족의 연(燕)나라와 대치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끈임 없이 영토를 확장해 가고 있던 당시의 고구려와 맞서고, 동시에 전성기의 북위에도 굴복하지 않고, 요서 땅에 백제군을 유지했다는 말이 된다.

신당서(新唐書)와 구당서를 보면 백제의 고토(古土)는 신라와 발해말갈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고 적혀있다. 만약 백제의 영토가 요서에 없었다면, 그리고 백제의 강역이 단지 한반도의 서남부에만 국한되었었다면, 발해말갈이 백제의 고토를 분할 점령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얘기가 된다.

한반도에서 발생한 역사적인 사실들 중, 백제의 요서진출 기록만큼 그렇게 다양한 중국 정사(正史)에 그렇게 여러 차례에 걸쳐 확인 재확인된 역사적 사실은 없는 것 같다. 또 이 백제의 요서진출 기록처럼 그렇게 많은 일본 학자들은 (논리적? 분석이라는 미명하에) 그토록 미친 듯이 못 믿겠다며 반박을 하는 경우도 없을 것이다. 
 
겸손을 최상의 미덕으로 내세우는 한국 사람이라면, 신라의 대학자이며 소위 중화사상에 치우쳤었다는 최치원(崔致遠, 857-?)이 말했다는 “고구려, 백제가 한창 강성할 때는 100만 대군을 보유하였으며, 남쪽의 오(吳), 越(월)과 북쪽의 유(幽), 연(燕), 제(齊), 노(魯)를 공격하여 중국의 골칫거리가 됐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수수께끼 같은 말로 들릴 것이다.

만주원류고의 강역(彊域)편에는 백제의 강역에 대해 놀라운 내용이 요약되어 있다 즉, 백제가 요서의 일부 지역을 점거하고 있었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내용이다. 다음은 만주원류고 기록을 거의 있는 그대로를 번역한 것이다

“백제 강역의 경계는 서북쪽으로는 오늘날의 광녕(廣寧)과 금의(錦義, 금주- 의주)에서 시작되며,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틀어 조선의 황해, 충청, 전라 지역에 이른다. 백제의 강역은 동서로 보면 상당히 좁으나, 남북으로 보면 굉장히 길다. 유성(柳城)이나 북평(北平)에서 보면, 신라는 백제의 남동쪽에 위치한 것으로 보이고, 경상 지역이나 웅진에서 보면 신라는 백제의 동북쪽에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 또 백제는 북으로 말갈과 접경한다.

백제의 왕성(王城)은 동과 서에 각각 하나씩 있었는데, 이 두개의 성을 모두 고마(固麻)라고 불렀다. 송서(宋書)는 백제가 점거했던 지역이 진평군 진평현 이었다고 기록한다 통고(通考)에 의하면 이 지역은 당나라 때의 유성(柳城)과 북평(北平)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백제 수도 중 하나는 요서에 있었고, 다른 하나는 조선 땅에 있었는데, 양 무제(梁武帝, 502-519)때에 와서 백제는 수도를 한반도 남쪽으로 옮겼다.

당나라는 660년에 백제를 멸하고 동명도독부(東明都督府)를 포함하여 5개의 도독부를 설치하였다. 그런데 동명도독부라는 명칭에 나오는 동명은 백제 건국시조의 이름이며, 기록에 그가 원래 고리(高離)에서 강을 건너 왔었다고 하니 동명도독부는 고리 땅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역에 설치되었을 것이다. 요사(遼史)를 보면 고리는 봉주(鳳州)와 한주(韓州)를 의미하는데 이들은 모두 오늘날의 개원(開原) 지역에 위치한다. 따라서 동명도독부는 개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설치되었을 것이다. 당서(唐書)에는 백제의 옛 강역이 신라와 발해말갈에 의해 분할 점령되어 소멸되었다고 적혀있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1-3 (2005. 1. 8)
정리: 강현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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