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대옥보석박물관(大玉宝石博物馆) 이튿날(5월 7일) 우리는 먼저 대옥보석박물관(大玉宝石博物馆)을 참관하였다. 화련현 수풍향(寿丰乡)의 풍전(丰田)과 서림(西林)지구에 뱀무늬 돌층에는 부분적 연옥대(软玉带)를 함유하고 있는데 초기의 저장량이 60만톤에 달하였다고 한다. 품종으로는 주요하게 람석(蓝石), 묘안석(猫眼石), 취옥(翠玉) 7색옥(七彩玉)등이었으며 통틀어 “대만옥(台湾玉)”이라고 하며 그 빛깔이 정밀하고 아름다워 세계 명옥의 하나로 불리고 있다.  
▲미륵보살(弥勒佛)
 2008년 북경올림픽의 동메달에 박힌 옥도 바로 이곳의 옥이라고 한다. 그리고 2010년 상해세계박람회 때 대만관(台湾馆)의 대리석장식들은 모두 이 화련현의 대리석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화련현은 풍부한 석재와 돌조각예술의 발전으로 하여 “돌의 고향”, “돌예술의 고향”으로 불리고 있다고 한다. 대옥보석박물관에서는 이곳의 아름다운 옥돌들을 가공하고 수장하여 전시판매하고 있었다. 박물관에는 수천 가지의 옥돌 가공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큰것은 무게가 몇 톤에 달하였으며 작은 것은 불과 몇 그람 밖에 안되었다. 그 색갈 또한 붉은색, 푸른색, 노란색, 분홍색 등 각가지 색갈로 되여 눈부실 정도였다. 그중에서 크고 가장 값이 비싼 것은 황옥으로 조각한 미륵보살(弥勒佛)이였는데 대만화폐로 3,980만(인민폐로 847만)원이였으며 가장 아름답고 눈부신 것은 칠색옥 꽃병이었는데 대만화폐로 158만(인민폐로 33만6천)원이었다. 
▲  칠색옥꽃병(七彩玉花瓶)
 우리 팀에서도 인민폐로 몇 백 원에서 몇 천원에 이르는 반지, 팔찌, 목걸이 등을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으며 연길에서 온 한 녀성은 인민폐로 4천 원짜리 칠색옥 꽃병이 욕심나서 자꾸만 만지작거리며 살까말까 하다가 끝내는 돈이 아름차서 사지 못하였는데 상해에서 온 한 관광객은 칠색옥 꽃병을 인민폐로 3만8,000원에 사는 것이었다. 이때 나는 경제가 발달한 지역과 발달하지 못한 지역차이를 심심히 느끼었다, 경제가 발달한 지역에서 온 사람은 4만원 거의 가는 꽃병도 서슴지 않고 사지만 경제가 발달하지 못한 우리고장의 사람은 그렇게도 욕심이 나지만 4천원이 아까워 사지 못하는 것이었다. 대만에서 최남단인 간정국가공원으로부터 여기까지를 오면서 보면 오른쪽은 동해안이고 왼쪽은 전부 높다란 산이었는데 바로 중앙산맥이었다. 그러니 평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산과 바다사이에 단 한 가래의 철로와 한 갈래의 성급도로뿐이었다. 대만도의 최남단으로부터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오면서 보면 해안의 바위들은 전부 검은 회색이었는데 가이드와 무슨 바위인가고 물어보니 그것이 바로 산호초(珊瑚礁)이라고 하였다. 기차여행 대옥보셕박물관에서 나와 우리는 계속 북상하게 되였는데 이곳 북포(北埔)로부터 소오(苏澳)까지 약 65킬로미터 되는 거리는 도로가 너무 험하기에 안전을 위하여 기차를 탄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우리가 탔던 버스는 어떻게 하는가 하는 부질없는 걱정도 있었는데 가이드가 말하는 것이 우리는 지금 역시침 방향으로 북상 하고 다른 한 팀은 순 시침방향으로 남하 하는데 이 버스는 소오(苏澳)에서 기차로 이곳까지 와서 남하하는 관광객을 받아 싣고 다시 되돌아가며 우리는 기차로 소오까지 가서 저쪽 관광객을 싣고 온 버스를 타고 대북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버스와 버스가 서로 손님을 바꾸어 싣고 되돌아서 달리는 것이었다. 우리는 북포역에서 기차를 탔는데 작은 정거장이었다. 기차도 낡은 기차였으며 차량을 연결한 곳에서는 레일 장과 침목이 다 내려다 보이었으며 자칫하면 발이 빠질 위험을 느끼었다. 
▲ 북포역(北埔站)
 밖을 내다보니 산세는 매우 험하였다. 약 65킬로미터 달리는 가운데 턴넬이 8개나 있었고 크고 작은 다리는 너무도 많았다. 1시간 20분 달려 의란현 소오(依兰县苏澳)에 도착하였다. 소오역 역시 그리 크지 않은 정거장이었지만 그래도 북포역만 많이 컸다. 
▲ 소오역(苏澳站)
 기차에서 내리니 수십 대의 관광버스가 서 있었는데 우리는 지정된 버스를 타고 대북시로 향하였다. 버스에서 밖을 내다 보니 여기로부터는 대단히 넓은 평원이었다. 이곳은 대만에서 동북부에 속하는데 동부와 북부에서 가장 큰 벌판이라고 한다. 전부 수전이었으며 농촌 집들을 보면 농가마다 모두 2,3층으로 되여 있었다. 마치 강소, 절강일대의 농가와 비슷하였다. 이 평원을 지나 신북시(新北市)경내에 들어서서부터 또 전부 산이었으며 오후 2시가 되여 대북시에 들어섰다. 이렇게 5월 3일 대북시를 떠나 서부, 남부, 동부로 하여 대만도를 한 바퀴 돌아 다시 대북시에 들어섰다. 대만당국지도자사무청사 대북시에 들어서 처음으로 대만당국지도자사무청사로 향하였다. 대만당국지도자사무청사(대만에서는 총통부라고 한다.)는 대북시중정구중경남로(中正区重庆南路)와 개달격란대도(凯达格兰大道)가 교차되는 곳에 위치해 있으며 일본제국주의가 대만 강점시기 대만총독부청사로 지은것이다. 총독부는 1912년 6월 1일에 착공하여 1915년 6월에 주체공사가 완성되고 몇 년의 시공을 거쳐 1919년 3월에 마침내 준공되어 일본의 대만총독부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제 2차 세계대전기간에 미군의 폭격으로 많이 회선되었다고 한다. 대만광복 후 대만성행정장관공서(行政长官公署)에서는 이 “총독부”를 장개석의 생신 60주년을 맞이하여 1946년에 수복을 시작하여 1948년에 준공한 후 정식으로 “개수관(介寿馆)”으로 명명하였다. 1949년 장개석정부가 대북에 이주하여 장개석이 이곳에서 사무를 보면서 대만에서 명의상의 “중화민국총통부”로 되였으나 간판은 그냥”개수관”으로 있다가 2006년 민진당이 집정하면서 진수편의 지시에 의하여 간판을 “총통부”로 고치였다고 한다.  이 건물은 주체건물이 5층이고 중앙탑이 12층으로 높이가 60미터인데 원래의 설계는 6층이었으나 일본식민통치의 권위를 돌출이 하기 위하여 12층으로 높이였다고 한다. 이 청사는 몇 곳에 보초병은 있었지만 담장은 없었으며 청사앞에서 마음대로 청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수 있었다.  
▲대만당국지도자사무청사
 [후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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