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청춘이란 인생의 깊은 샘에서 솟는 신선한 정신,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를 뿌리치는 모험심을 의미한다. 때로는 이십세 청년보다 육십세된 사람에게 청춘이 있다. 나이를 먹는다고 늙는 것은 아니다. 이상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는 것이다. 비탄이란 얼음에 갇힌 사람은 비록 나이가 이십세라 할지라도 이미 늙은이와 다름없다. 그러나 머리를 드높여 희망이란 파도를 탈 수 있는 한 그대는 팔십세일지라도 영원히 청춘의 소유자일 것이다. - 사무엘 울만

     곽용호 조선족청년연합회 회장
사전에는 청춘이란 정의를 이렇게 내렸다. 청춘이란 만물(萬物)이 푸른 봄철이라는 뜻으로, 십 대 후반(後半)에서 이십 대에 걸치는, 인생(人生)의 젊은 나이 또는, 그 시절(時節)이다. 국가, 지역, 종족, 가정, 문화배경, 가치관, 성격에 따라 청춘에 대한 정의는 여러 가지로 있을 수 있다. 본 글에서 필자는 사전이 말하는 “청춘”이 아니라 필자가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청춘을 논하고자 한다.

청춘의 목표는 배움 그 자체에 있다. 1995년, 나는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영어를 전공으로 선택한 것은 영어가 세계 공동언어이고 향후 첨단 기술이나 경영지식이나 기타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지식을 쉽게 접근 할 수 있는 지속적인 배움을 위하여 기초를 다지기 위한 선택이었다. 1995년부터 연변대학은 학점제도를 실시하였다. 요구하는 학점을 따지 못하면 규정한 학점을 딸 때까지 공부하여 졸업시키는 제도이다. 1,2 학기 때는 별로 공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3,4학기때는 공부를 억수로 하였다. 별로 찾지 않던 도서관도 찾아 다니면서 열심히 공부를 한 생각이 난다. 영어학과 교수님들은 언어란 교류의 수단이지 기술은 아니라고 거듭 강조하였다. 영어를 기초로 새로운 분야의 지식을 배워야 경쟁력이 있는 인재가 될 것 이라고 강조하였다. 나는 경희대 정보통신 석사를 졸업하고 숭실대 마케팅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아직도 새로운 정치, 문화, 경제, 과학, 기술, 경영 등 분야의 책을 보며 지식을 쌓고 있다. 청춘때만 배우는것이 아니라 인생의 전반 여정에서 배움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대학생활은 다채로웠다. 청춘 그 자체를 흠뻑 만끽하였다. 우리 반 축구대표선수로 활약하여 4년내내 외국어학과 학번별 축구경기에서 일등을 했다. 그때 당시 5개의 영어전공, 5개의 일어전공, 합계 10개 반이 외국어 전공에 속하였다. 우리 반이 일등 한 후, 외국어 전공 축구대표선수로 발탁되어 여러 학과 학생들과 축구를 통해 교류했다. 사범계열 체육대회에서 응원단장의 중책을 지고 여러 학생들을 조직, 다채로운 응원을 통해 외국어학과가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데 일조하였다.

청춘은 부지런함이다. 수업이 끝나거나 주말이 되면 영어 과외를 하였다. 수입이 만만치 않았다. 영어를 중요시 하는 분위기여서 초등학교 때부터 자녀에게 영어를 가르치려는 부모들이 대학생을 찾아 공부시키는 붐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나는 주말에도 쉬지 않고 가정에 찾아 가서 개인 과외를 하였고 학원에 가서도 영어 강의를 하였다. 과외를 한 수입으로 등록금을 충당하였다.

청춘은 활기찬 계절이다. 친구들과 20세기와 21세기, 두 세기를 살아오는 우리가 정말로 대단하지 않는가 하면서 어깨를 우쓱거리던 때가 생각난다. 97년 홍콩이 중국에 귀속 되었을 때, 드디어 홍콩이 조국의 품에 돌아왔구나 하면서 친구들과 경축하던 시절이 새록새록 기억난다.

잔혹한 계절인 청춘을 맞이하게 된다. 아프니깐 청춘이다. 96년, 시름시름 앓던 아버지가 암으로 이 세상을 떠나셨다. 잔혹한 현실이었고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어려서부터 지력개발을 위하여 장기, 오목, 바둑, 다이아몬드 게임도 함께 하시던 자상한 아버지와 함께 하던 장면이 눈앞에서 필름처럼 지나갔다. 화장하던 날 하늘도 괴로운지 비를 뿌렸다. 젊은 나로서는 눈물이 앞을 가리웠고 그 고통이 아프고 아팠다. 고통은 인간의 위대한 교사이다. 정신의 깊은 곳에서 서로 대화를 나눌만한 상대를 찾지 못해, 아픔을 호소할 상대를 찾지 못해 수개월 고독했다. 인내를 하기 시작하였고 인생을 잘 살아보자는 희망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

청춘은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도전정신이 필요하다. 나는 1999년 연변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25세 나이에 조선족 명문 고등학교인 연변1중에 취직을 하였다. 연변1중이라면 조선족 최우수 학생들이 모이는 학교이며 수능 평균 점수도 같은 조선족 고등학교에서 제일 높다. 이 학교의 고등학생들은 중국명문대인 칭화대학, 북경대학에 제일 많이 진학하는 편이다. 따라서 교사 많은 그때 당시 이미 6명의 영문과 동문들이 2개월간 연변1중에서 실습을 마치고 영문과 교사들과 교장에게 얼굴 도장을 찍은 실정이었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용기는 사람을 번영으로 이끈다”고 하였으며 미국의 사상가 에머슨은 “지식과 용기는 위대한 일을 성취한다. 이 두 가지는 인간을 영원한 존재로 만든다”고 했다. 나는 용기를 내어 교장실 문을 노크하였다. “저는 연변일중 교사로 취직하고 싶습니다. 학생들을 위하여 제가 배운 것을 책임지고 가르치겠습니다. 단 한번의 시범 수업 시간을 주시면 저의 능력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라고 당당하게 말하였다. 드디어 나는 시범 수업에 도전하였다. 영어과 교사 8명, 학교 임원진 4명 앞에서 영어 수업을 진행한 것이다. 처음에는 긴장하였는데 2,3분 지나니 서서히 적응되고 준비하였던 영어 수업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13년이 지난 지금 그 때 수업내용이 승용차 관련 주제였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변대학교에서 유일하게 연변일중의 영어교사로 임명되었다. 조선족 명문고등학교의 영어 교사가 된 나는 항상 뿌듯함을 느꼈고 미래의 기둥인 학생들에 대한 책임감도 느꼈다. 새내기 영어교사로서 아침 일찍 영어 교무실 청소를 하였다.

“현재 상태로 머무르면 당신이 원하는 바를 결코 달성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수업 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선배 교사들의 수업을 청강하면서 수업의 질적 수준을 높이려고 노력을 하였다. 영어 수업을 진행하면서 아마도 영어 교사들 가운데 멀티미디어 교실을 제일 많이 이용하였다. 학생들에게 팝 노래도 가르치고 서방국가와의 문화차이도 극복하여 향후 글로벌 인재가 되기를 희망하였다. 노력은 성공을 크게 안겨준다. 내가 가르쳤던 학생들은 이미 여러 분야에서 리더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는 수없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겪는다. 청춘은 봄이다. 봄은 청춘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이듬 해 봄이 오면 또 설레인다. 이유인즉 똑 같은 봄은 이 자연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곽용호 프로필 :

1995~1999 연변대학 영문학과 졸업
1999~2001 중국 연변1중 영어 교사
2001~2003 경희대 멀티미디어학과 석사 졸업
2005~2007 숭실대 마케팅박사 수료

2012~현, 조선족청년연합회 회장
2011~현, 중국동포축구연합회 사무총장

2011~현, 재한연변대학학우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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