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릿말
내가 상해 북단에 있는 장강 하구 도시 남통(南通)을 방문하게 된 것은 거의 우연에 가까운 일이다.

황소옥이라는 중국 한족 여사장을 안 것은 벌써 십여년전의 일이다. 북경에 있는 기독기업인들과의 미팅을 통해 소개받은 경우다. 그는 LG화학이 중국에 공장을 짓기 위해 1994년에 처음으로 기업 진출을 시도했을 때 통역 겸 컨설턴트로 참여했던 요원이다. 그 프로젝트는 무난히 성공하여 LG화학의 중국 진출에 교두보를 마련한 일이 되었다.
그 후 그는 한국 지인들의 권유로 한국 부동산개발사업에 상당한 자금을 투자했다가 1997년 IMF사태 때 큰 피해를 입고 한동안 한국과의 교류를 끊었던 적이 있다. 그러다가 기독교에 입문하여 중국 삼자교회의 성장과 인재양성을 위해 노력하던 중 한국에서 온 한국기독실업인회 소속의 필자를 만나게 되었고, 그 후 나는 여러차례의 미팅을 통해 중국선교의 일환으로 황소옥 사장과 그의 중국인 동료들을 만나 한중기독교교류협력에 대한 구체적인 사업을 의논하곤 했었다. 그런 과정에 한국을 다시 방문하여 국내 유수한 교회와 기도원 및 교육기관을 둘러보는 기회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종교정책상 공식적으로 외국인이 중국인에게 전도하는 것이 불법으로 되어있는 현실 때문에 몇 가지 논의했던 기독교교류협력 사업들이 모두 무산되자 그 후 오랫동안 서로 연락이 두절되었다.

그러던 차 최근에 내가 북경 옆 당산(唐山)시에서 추진하고 있는 ‘한국성’ 프로젝트의 컨설팅 업무를 위해 북경에 있는 한족 기업인들의 도움을 받을 일이 생겨 혹시나 해서 (5년전 황사장이 서울에 한동안 체류할 때 많은 편의를 제공해 주었던 우리 연구재단의 이동탁 사무처장을 시켜) 옛날 소지하고 있던 황소옥 사장의 전화번호로 연락을 취해보라고 일렀는데, 그때 마침 황 사장이 중국인 목회 지도자 몇 분을 모시고 와서 경기도 오산리 최자실금식기도원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회징님, 이건 기적입니다. 기도원에서 막 내려오는데 이 처장님의 전화를 받았어요.”
연락이 닿은 그날 오후 우리 재단 사무실에 찾아 온 황소옥 사장의 첫 마디가 이것이었다. 황 사장의 들뜬 목소리도 그렇거니와 나와 이동탁 처장도 감개무량하여 말이 제대로 안나오는 그런 정황이었다.

내가 서두에 ‘남통을 방문하게된 것은 거의 우연에 가까운 일이다’라고 표현한 이유는, 그렇게해서 다시 만나게 된 황소옥 사장으로부터 본인이 그동안 접어 두었던 기독기업인으로서의 꿈을 다시 한 번 펼쳐보고 싶으니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 후 보름도 채 지나지 않아 남통을 방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말이 길어졌지만 우리들의 ‘남통순회’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출장 중에 마침내 나는 남통에 망명 왔다가 자진(自盡)해서 죽기까지 잃어버린 조국의 광복을 꿈꾸다 돌아가신 한 조선인 애국시인의 생애를 알게 되었으며 이 사건(?)은 나에게 잃어버린 역사의 진실을 되찾는, 새롭고도 경이로운 각성을 경험하는 기회가 된 것이다

「남통순회(南通巡廻)의 교훈 - 저 푸른 창강(滄江)의 물결을 따라」
이렇게 제목을 달고, 그 역사적 흐름에 대한 탐구의식과 사명감을 정리해 가는 과정에 나는 우리 시대에 가능한 또 하나의 새로운 블루오션 이야기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이 글을 쓴다. 독자 여러분들께서도 이러한 믿음을 갖고 한중 간에 얽힌 ‘우정어린 역사의 여로’를 동행해 주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Ⅱ. 장강 크루즈 여행의 추억
  10월 23일(목) 12시경에 상해 푸동공항에 도착하니 황소옥 사장이 40분전에 미리 북경에서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회사(서화연료집단유한공사)에서 나온 승합차를 타고 곧 바로 남통으로 떠났다. 상해에서 남통으로 가는길은 두가지 방면이 있다.

상해 시내에 있는 홍차오공항에 내릴 경우는 주로 소주(蘇州)를 거쳐 ‘소통대교’란 다리를 건너 남통으로 가는 길이 있고, 푸동공항에 내릴 경우에는 장강 하구에 있는 상해장강대교와 숭천대교를 건너 다소 우회하는 길로 가게 되는데 전자는 1시간, 후자는 2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다.

상해장강대교를 건널 때 내가 새삼 옛날 생각이 나서 황 사장과 이 처장을 마주 바라보며 여태껏 아무에게도 소개하지 않았던 장강 크루즈 여행에 대한 추억담을 풀어 놓기 시작했다.

그동안 내가 중경(重慶)에서 장강 크루즈를 타고 여행한 경우는 두번이나 있었다. 첫번째는 1996년 당시 민정당 대표로 있었던 김윤환 의원을 단장으로 하여 국회위원 12명과 부인 7-8명이 동행한 20명 가까운 국회의원 부부팀을 모시고 중국탐방을 기획한 적이 있다. 그때 동행한 김윤환 대표의 측근 인물들로 신경식, 박희태, 이상배, 김중위, 변정일, 강성모 의원 등이 기억난다.

그들은 첫 방문지로 중국 최초의 국제사립대학인 연변과학기술대(설립총장 김진경 박사)를 택했다. 중국내 조선족 집거지역인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수도 연길시 북산가 언덕 위에 세워진 이 학교는 설립취지부터 특별하다. 한국기독인들의 헌금으로 건립되었을 뿐 아니라 교수진들도 모두 무보수 자원봉사제로 활동하는 독특한 건학 정신을 갖고 있으며, 이 학교가 들어선 자리가 옛날 조선족공동묘지 자리였기에 더욱 그러하다. 모택동 정권이 들어서면서 매장제를 화장제로 바꾸는 바람에 수십년간 폐허로 남아 있던 땅이다. 극적으로 표현하자면 ‘죽음의 땅’을 ‘생명의 땅’으로 바꾼 역사가 바로 연변과기대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학교 캠퍼스 뒷산 골짜기에 있는 ‘화장터교회’가 이를 극명하게 증언하는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일행들은 이런 학교에 와서 자원봉사로 헌신하고 있는 교수진들을 격려하고 또 조선족 학생들의 장학을 위해 성금을 전달한 후 백두산으로 가서 1박2일간 머무르는 동안 천지(天池)와 장백폭포를 답사하는 한편 국가 미래를 위한 단합대회도 가졌다. 그런 다음 북경으로 나가 북경대학에서 중국 교수진, 관료 및 기업인들을 초청하여 한중경제교류협력을 위한 특별 세미나도 열었다. 그 후 중경(重慶)으로 가서 임시정부 청사를 관람한 후 장강 크루즈를 타고 수몰 직전에 있는 삼협(三峽)댐을 지나 무한(武漢)에 이르는 3일동안 나는 집권 여당의 국회의원들과 함께 중국과 한국의 관계, 특히 ‘세계속의 한국’이라는 관점에서 한국과 한민족의 미래상에 대한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가졌다.

▲ 장강 크루즈 여행
그때 한 가지 나로선 잊지 못할 일화가 있다. 크루즈를 타고 가던 이틀째 되던 날 오후 , 선상 휴게실에서 끼리끼리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누던 일행들 중에 어느 한분이 나를 바라보며 이런 제안을 했다.

“이 회장, 이번에 좋은 여행을 준비해 주어서 고맙소. 그런데 학교(연변과기대)에 가보니 그동안 수고했던 노력과 성과가 엄청나게 큽디다. 김 대표께서도 칭찬을 많이 하시던데, 차제에 김 대표께 부탁해서 지역구 하나 달라고 하시지요.”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옆자리 다른 의원들도 이구동성으로 “그래 맞아. 이회장 같으면 우리 같이 일해도 좋을 것 같아. 이번에 아예 정치 한번 해 보시게.” 이러는게 아닌가.

나는 손사래를 쳤지만 다들 계속 욱박지르듯 권유하길래 내가 할 수 없이 이렇게 말했다.

“제가 지역구 갖고 있는 줄 모르십니까.”
이렇게 말하자 다들 당혹스럽고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아니 어딘데? 어디지요 우리가 도와 줄게.”

“도와주긴 뭘 도와주시겠어요, 오히려 훼방만 놓으실텐데.”

함께 자리한 다섯분들 가운데 세분의 경북 출신 의원들이 이구동성으로 도와주시겠다고 말하는 걸 듣고 나는 내가 경북 출신인데 당신들이 어떻게 쉽사리 나를 도와주겠느냐는 뜻으로 익살스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이분들은 더 큰 목소리로 자기들이 힘껏 도와줄테니 지역구가 어딘지 말해보라고 다그쳤다. 이런 강청을 계속 듣게 되자 나는 못이기는 체하며 눈을 지그시 감고 천천히 입을 뗐다.

“정 그렇게 알고 싶으시다면 말씀드리지요...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제 지역구입니다.”

그날 그분들은 내 말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한참을 웃고 떠들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지금도 혼자 생각해 본다. 나는 결코 정치를 할 사람도 아니며 또한 그럴 능력도 없는 사람이지만, 그날 그렇게 우스개 소리같이 했던 말은 그 후 내 인생후반전을 관통하며 이어져 내려 온 좌우명 같은 불후의 어록(?)이 되었다. 지금도 그때 크루즈 선상 휴게실에서 박장대소하며 함께 담소했던 분들을 어쩌다 만나게 되면, 아직도 내가 연변과기대 대외담당을 하며 사역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때 내가 했던 말이 결코 거짓말이 아니었음을 알고 ‘칭찬 반, 위로 반’의 묘한 웃음을 날리곤 한다.

두번째로 장강 투어를 가게된 것은 삼협댐이 준공된 지 오륙년이 지난 2005년 여름이었다. 박세일 서울대 교수를 중심으로 한국제도·경제학회와 한반도선진화를 주창하는 일단의 지식인 그룹 15명이 팀을 이루어 북경 경유, 중경(重慶)에 도착하여 한국임시정부 청사를 둘러본 다음 곧바로 크루즈를 타고 무한까지 내려가는 2박3일간에 걸친 장강 투어를 한 경우다. 그때 동행한 인사들 중 나성린 현 국회의원, 최광 국민연금 이사장, 이석연 변호사, 장오현 동국대 명예교수 등과 주로 많은 대화를 나눈 기억이 난다.

당시 일행들의 투어 목적은 4박5일간의 여정을 통해 중경과 상해에 있는 임시정부 청사를 돌아보며 한국의 현안 과제인 정치개혁 및 쇄신을 위한 대책을 협의하는 한편 삼협댐 준공 이후 만수가 된 장강을 유람하며 회원들 간에 우의를 다지는 그런 단합행사였다. 장강 크루즈 여행의 묘미는 역시 장강에 있었다. 1300Km 가까이 되는 거리를 배를 타고 가며 군데군데 정박해서 각 지역 특색의 경관과 풍물을 접하는 재미는 보통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말해 중국은 정치체제로서는 공산당 일당 독재하의 국가이지만 사회, 문화, 경제, 언어, 인종 차원에서 보면 ‘중화연합국’이라 불러야 할 나라다. 장강을 통해 유구한 역사와 문명을 일구어 온 중국의 중원지역은 한족사회를 중심축으로 삼아 여러 제후국가들이 먼 나라와는 화친을 하고 가까운 나라는 경계하는 병법을 주로 구사하며 엎치락뒤치락해온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일행들에게 장강 크루즈를 타고 가는 동안 중국역사 공부를 위해 한가지 서비스를 했다. 중경박물관에 계시는 중국인 학예사 한분을 초청하여 이틀간 오전에 두시간씩 중국 고대사를 강의하도록 조치했으며 곁들여 ‘삼국지’에 나오는 여러 지역과 인물들에 얽힌 이야기를 질의문답 방식으로 공부하는 시간을 만들었다. 다들 재미있어 했고 또한 중국인들의 관습과 문화를 이해하는데 매우 유익한 시간이 되었다. 배가 삼협댐에 이르러 갑문을 통과하는데 두시간 이상 걸렸다. 그 시설 규모와 위용은 입이 벌어질 정도로 거대했다. 공사기간 15년, 연인원 100만명, 투입된 예산이 350억 달러, 댐 준공 후 만수까지 5년 이상이 걸린 대역사의 산물(産物)이었다.

▲ 세계 최대 규모의 중국 삼협(三峽)댐   우리 일행들은 무한에서 하선하여 잠시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 현덕의 유적을 둘러본 다음 공항으로 가서 상해로 이동했다. 상해에서 한국임시정부청사를 참관한 후 저녁 시간까지 몇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원래는 자유시간으로 배정되어 있었으나 내가 일행들에게 양해를 구해 전원 버스를 타고 양산(洋山)신항으로 향했다. 억지로 끌고 가다시피 할 정도로 일행을 양산신항으로 모시고 간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는 내가 구태여 길게 설명을 안해도 될 것 같다. 삼협댐의 위용을 바라보고도 그리 크게 놀라지 않았던 일행들이 해상 교량을 건너 바다 안 깊숙이 건설되어 있는 양산신항에 도착하자마자 첫마디 이구동성으로 했던 말이 바로 ‘이거 이대로 있다간 큰일나겠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부산항을 두고 한 말이다.

주지하는바와 같이 상해 양산신항은 해안에서 24Km 떨어진 곳에 있는 돌섬을 컨테이너 전용부두로 완전개조하여 동중국해의 대외무역 신거점항으로 개발한 항만이다. 2005년에 1단계 공사를 마친 후 계속 2단계 공사에 돌입해 있는 상태였으며 최종 4단계까지 공사계획이 예정되어 있다고 했다. 우리가 현지를 방문했던 당시 1단계 항만 규모만해도 5선석이고 년간 물동량 계획고가 3백만TEU에 이르는 막강한 규모였다. 아니나 다를까 양산신항은 급기야 세계 3대 무역항으로 발돋움했고 이에 밀린 부산항은 오랜 기간동안 유지해 왔던 3위 자리에서 5위로 떨어진 다음 최근에는 6위권 까지 하락한 상태다.

그때 당시 여행에 참가했던 분들이 대부분 국가정책 수립에 관여하거나 사회단체장으로 활동하고 있던 분들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들에게 중국의 발전상, 특히 대외무역의 발전상을 일목요연하게 실감케 하는 방법으로 양산신항 시찰을 강행했던 것이다.

▲ 중국 상해 양산(洋山)신항   일행들의 반응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심각했다. 삼협댐은 중국 내수경제개발 항목일수 있지만 양산신항은 당장 부산항과 경쟁하게 될 대외경제 무역항이라는 점에서 우리 일행들에게 한국이 그냥 이대로 있다가는 중국 대외경제 판도에 잠식되겠구나하는 우려를 갖게했다. 우려라기보다 불길한 예감 같은 것을 느끼게 했다고 말하는 게 더 실감나는 표현같다. 아니나 다를까 그 후 10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중국은 세계 2대 경제대국으로 급성장했으며 얼마 전 발표에 따르면 GDP부문에서 미국을 제치고 세계1위로 부상했다고 한다.

아무튼 장강 크루즈 여행을 다녀오면서 일행들이 느끼고 깨달은 바는 그 후 여러 차례의 스터디 모임을 통해 걸러지고 정리되어 각자, 각 분야에서 중국과의 경쟁 및 협력관계를 조감하는데 매우 유용한 경험치로 활용되었다. 나도 1990년부터 지금까지 (연변과기대 사역을 통해) 25년째 중국을 오고가며 여러가지 산학관련 컨설팅업무를 다루고 있지만, 그때 양산신항을 답사한 이후 중국의 중장기 국가발전정책과 중국지도부의 ‘세계화’ 전략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예를 들자면, 중국의 서부대개발사업, 동북진흥계획과 창지투개발개방노선, 티벳, 동남아, 중앙아시아, 몽골 및 러시아로 연결되는 고속철도망 확장사업과 항공망 확충사업 그리고 이에 연관된 (리커창 총리가 주도하는) 광역권 신도시개발계획과 국내외 인프라투자개발사업에 대한 식견을 높이는데 있어서 그때 양산신항 답사의 경험이 매우 귀한 시금석이 된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나는 오랫만에 상해장강대교와 숭천대교를 건너 남통(南通)시로 가는 길에 장강 하구를 지나게 되자 그동안 두차례에 걸쳐 장강 크루즈 투어를 했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 나 그때 깨닫고 배운 바를 황소옥 사장과 이동탁 처장에게 전수하느라 시간가는줄 모르고 장광설을 늘어놓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2시간 걸리는 길이 금새 도착하는 길 같이 어느새 목적지에 이르게 되었다.
Ⅲ. 남통에서 만난 사람들의 첫 인상
  우리가 방문한 남통(南通)시는 강소성(江蘇省) 남부에 위치하며 동쪽은 동중국해(황해)를, 서쪽은 장강을 바라보고 있으며 상해는 장강의 남쪽 맞은편에 위치해 있다. 장강을 건너야 상해에 이르게 되므로 그동안 교통 불편 때문에 도시개발 속도가 늦어졌으나 최근에 소통대교(2008년 개통)와 상해장강대교 및 숭천대교(2009년 개통)가 연이어 건설되어 중국 최대 국제무역도시인 상해뿐 아니라 인근에 있는 유명 관광지인 소주 및 항주 등과 가깝게 연결되어 2000년대 들어와서 부터는 강소성 일대에서 가장 빠른 성장률(년 15% 이상)을 보이고 있는 제2선도구 개발지역으로 부상한 도시다.  
 
특히 남통은 장강 하구와 동중국해(황해)를 접속하는 장강 삼각주에 위치하므로 옛날 당나라 때부터 수도 장안(현재 서안)에서 장강을 따라 물류가 이동할 때 북쪽으로는 한반도 및 일본에 까지, 남쪽으로는 동남아에 까지 이르는 중간 환적, 환승 항구로 발전해 왔다. 그런 입지적인 장점을 바탕으로 남통은 전통적으로 해안에서의 소금 생산과 쌀 농사, 목화 재배 및 면직물 생산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으며 1970년대 들어와 등소평의 중국 현대화정책 하에 외국인 투자가 개방된 14개 항구도시중 하나로 채택됨으로써 도시 현대화 발전에 획기적인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런 기회를 얻게 된데는 지정학적인 입지도 중요한 요인이 되었겠지만 그 보다 오늘날 남통시민들은 19세기 말 부터 20세기 초반 약 30년에 걸쳐 활약을 했던 한 사람의 이름을 떠 올리며, 이 분이 남통 도시현대화발전에 기초를 이룬 것이 등소평 정부의 개혁개방정책과 더불어 부흥의 때를 만나게 된 근거가 되었음을 더 자랑스럽게 말한다고 하는데 그는 다름아닌 이 지역 강소성 출신 장 지안(Zhang Jian)이란 분이다.

그는 남통시에 중국역사발전을 상징하는 최초의 3대유업을 남김으로써 후대에 큰 위명을 날렸다. 중국 최초의 현대식 교육기관인 남통대학, 중국 최초의 민간박물관인 남통박물관, 그리고 중국 최초의 면방직공장을 세워 직접 경영에 까지 지도력을 보인 장 지안은 남통이 낳은 위대한 정치가요 실업인이자 교육가로 높은 평판을 받았으며 당시 청말(淸末) 시대에 남통을 일컬어 ‘장 지안의 왕국’이라 부를 만큼 그 치세능력과 영향력이 대단했다고 한다.

내가 이 점을 특히 강조해서 글을 쓰는 이유는 뒷부분에 나올 한 ‘조선인’과의 관계에서 이 분이 끼친 영향력과 우정의 도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사전에 약간의 정보를 드리기 위해서다. 아무튼 이번 ‘남통순회’는 나의 생애에 있어서 또하나의 예기치 못한 블루오션을 경험케 한 참으로 귀한 은혜의 시간이 되었다.

▲ 홀리데이 인 호텔을 방문한 일행들
(우로부터) 이승률 이사장, 황소옥 사장, 옌 바오린 동사장(류화그룹 회장), 이동탁 사무처장   우리 일행들이 남통시 북대가(北大街)의 중심 위치에 자리 잡은 ‘홀리데이 인’ 호텔에 도착한 것은 10월 23일 오후 3시경이었다. 이 호텔은 황소옥 사장의 파트너인 옌 바오린(殷寶林) 동사장이 경영하는 호텔이다. 옌(殷) 동사장은 강소서화연료집단(류화그룹)을 모기업으로 해서 산하에 호텔, 오피스텔, 연료기술학원, 에너지개발사업, 항만유통업 등을 경영하는 40대 후반의 남통 출신 기업인이다. 20대 초반에 집안이 하도 가난하여 친구따라 강남간다고 할빈까지 돈 벌러 갔으나 고생만 실컷하고 아무것도 벌어 들인게 없었지만 그때 배운 물류 유통의 경험과 성실한 인맥관리를 기초로 해서 아버지로 부터 지원받은 단돈 2000위안의 돈을 종자돈으로 삼아 일으켜 세운게 바로 이 류화그룹이라고 한다. 특히 모기업인 강소서화연료집단은 자사 보유 선박으로 내몽골산 석탄을 천진항을 통해 남통 연안까지 운송해온 다음 여기서 작은배로 환적한 후 강소성과 절강성 일대 즉 장강 주변 도시 및 농촌지역 실수요자들에게 직접 공급해주는 사업을 해서 지난 10여년 동안에 떼돈을 벌어들인 남통시가 내세우는 입지전적인 향토기업이다.

▲ 홀리데이 인 호텔(우), 오피스텔(좌측 뒤),
한국형 병원 예정(좌측 앞) 완공된 건물 모형
이 류화그룹이 운영하고 있는 호텔 뒷편에 있는 회사 부지에 잠실 롯데월드와 같은 실내형 놀이시설을 유치하고 싶다는게 나를 초청해서 자문을 받고자 한 첫번째 사유이고, 두번째는 호텔과 오피스텔에 연결되어 있는 9층 건물에 한국형 병원시설을 도입하고자 하는게 목적이었는데 이는 나의 큰 아들(이동엽 원장)이 참포도나무병원을 운영하고 있어서 충분히 대화할만한 여건이 된다고 해서 이번 출장을 오게 된것이다.
호텔 체크인을 한 다음 곧 바로 호텔 옆 오피스텔에 있는 류화그룹 본사 사무실로 가서 접견실에서 회사 업무 전반에 걸쳐 브리핑을 받았다. 그 자리에는 남통시에서 나온 몇분의 고위직 관리들도 있었는데 그 가운데 남통시인민대위원회 환경자원건설위원회 얀 시안(嚴憲) 주임이란 분이 특히 눈에 띄었다. 60대 초반 여성으로 한국에도 여러번 왔을뿐 아니라 이 도시의 환경 및 자원개발과 도시발전계획에 필요한 대외업무의 실질적인 책임을 지고 있는 분이었다. 이 분으로 부터 지난해 삼성전자가 중국에 최대규모의 반도체공단을 설립코자 부지를 물색하고 다녔을 때 이곳 남통을 가장 유력한 후보지로 판단하고 많이 고심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결국 정치적 판단이 앞서서 시진평 주석의 고향이라 일컫는 서안으로 확정되어 이미 공사를 시작했지만 이곳이 상해를 배경으로 삼성전자가 중국 뿐 아니라 해외로 뻗어가는 세계제일의 반도체공단을 꿈꾼 장소였다는 소식은 내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큰 뉴스로 마음에 새겨졌다

이외에도 내년 말이면 고속철도가 완공되어 상해역에서 이곳 북대가 남통역까지 40분 만에 도착하게 되어있고 또 여기서 20분 거리에 있는 남통국내공항을 상해 제3국제공항(제1공항은 홍차오 공항, 제2공항은 푸동공항)으로 확장 증축하는 사업이 2년후인 2016년말에 완공할 예정으로 되어있으며 또한 항만시설 규모도 중국 10대항 규모로 발전했을 뿐 아니라 장강을 건너 상해와 연결되는 4개의 큰 교량들도 완비되어 있어서 앞으로 철도, 도로, 공항, 항만 등 교통망 여건이 복합적으로 체계화될 것이므로 남통시 입장에서는 100년 전의 개화기 때 조성되었던 남대가(南 大街)전통지역을 잘 보존하면서 이곳 북대가 일대를 제2도시개발차원에서 국제적 수준의 특화도시로 발전시켜나갈 비전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서 그는 최근 중국 대도시의 부동산 개발이 주춤거리고 있는데 비해 이곳 남통은 중국10대 부동산개발업체가 모두 다 들어와서 신축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으며, 특히 한국 대기업으로서 포스코, LG, 한화, 효성그룹 및 동성건설 등이 진출해서 성공적으로 조업 활동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현재 도심인구 100만 명 정도 되는 도시를 2020년까지 500만 명 이상의 중대형 도시로 끌어 올릴 계획을 세워 놓고 있는데 이는 다름 아닌 도시의 광역화, 국제화를 뜻한다고 말하면서, 남통시의 이러한 새로운 도시개발사업에 옌(殷) 동사장이 향토기업으로서 좋은 파트너가 되어 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차제에 이렇게 오셨으니 좋은 인연을 맺어 옌(殷) 동사장의 사업뿐만 아니라 남통시 특화개발사업에 한국기업과의 교류협력이 더욱 확대될수 있도록 도움을 달라고 요청했다. 그런 말끝에 얀(嚴) 주임은 1989년에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때 ‘무역흥국(貿易興國)’이라 쓴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를 보고 무척 큰 감동을 받았으며 이는 자기뿐 아니라 많은 중국 지도자들에게 큰 교훈이 되었다는 말을 덧 붙였다.

저녁 만찬을 같이 하는 도중에도 얀(嚴) 주임은 끊임없이 내 옆자리에 앉아 중국과 한국, 상해와 한국, 남통과 한국의 관계발전을 입체적으로 설명하면서 이번 출장 목적으로 온 류화그룹의 사업항목이 잘 진행 될 수 있도록 부탁을 해 왔다. 우리 같으면 정경유착, 업자편들기, 부조리 관행이라 해서 체크당할 일일 것 같은 데 중국에서는 향토기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대책으로 관련 부서가 먼저 솔선해서 대외협력을 지원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정작 사업주인 옌(殷) 동사장은 아무 말이 없는 가운데 좌중을 주도하며 대화를 이끌어 가는 얀(嚴) 주임의 열의와 국제적인 매너가 남통에 대한 인상을 매우 강인하게 해 주었다.

만찬 후 관리들이 모두 돌아간 다음 우리 일행들은 회사 임원들의 안내로 남통시 전통문화지역인 하오허(濠河)풍경명승구로 관광을 갔다. 장강의 물이 도시 내부로 연결되어 리아스 식 호수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주변에 즐비하게 늘어 선 건축물과 조형 시설들이 유럽풍을 빼 닮은듯해서 마치 유럽 호반도시에 와 있는 듯한 분위기였다. 우리는 승선 인원 10명 미만의 작은 쪽배를 타고 한 시간가량 유람을 했다. 여기저기 수 십명으로부터 백여 명까지 탈수 있는 여러 종류의 유람선들이 야경을 즐기며 여유롭게 돌아다니는 모습이 매우 평화롭고 풍요스럽게 보였다. 이 호반도시를 백년 전에 현대식 도시계획으로 구상하고 개발을 한 장본인이 바로 앞서 소개한 장 지안이다. 그가 중국 최초로 세운 남통대학, 남통박물관이 바로 이 호반에 세워져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수면위에 비친 주변 레스토랑의 휘황찬란한 조명과 음악분수의 아름다운 조화가 유럽의 어느 도시 야경에 뒤떨어지지 않을 것 같다. 평소 이름조차 들어 보지 못했던 남통시가 이런 정도의 문화와 현대적 도시 미학을 갖추고 있다니 참 놀랍고 외경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 그날 남통에서의 첫날밤을 맞으며 가진 나의 솔직한 고백이다. 더군다나 ‘홀리데이 인’ 호텔에 돌아와 회사 측에서 제공해준 스위트 룸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동안 잠이 오지 않아 호텔 부대시설과 객실 내부를 샅샅이 돌아다니며 살펴보았는데 인테리어 디자인 뿐만 아니라 자재, 색상, 꼼꼼한 시공 마무리, 가구, 집기, 벽에 부착한 그림, 싸인 보드 등에 이르기 까지 어느 것 하나 눈간데 없이 깔끔하게 잘 정리정돈되어 있어서 여태껏 보아 온 중국의 어느 호텔보다도 우아하고 웨스터나이즈화 되어있음을 알았다.

▲ 하오허(濠河) 호반 야경 전경 (남통대학 부근)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아침 조찬 때 옌(殷) 동사장을 만나 칭찬을 해 주었더니, 자신이 처음에 계획한 것은 5성급 호텔이었으나 컨설팅을 맡은 인터콘티넨탈 체인에서 시설과 운영은 5성급 수준으로 하되 등급은 4성급으로 낮춰 영업을 시작하는 것이 경영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권유를 받아들인 것이 주효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내심으로 40대 약관의 기업인이 이렇게 굴지의 기업인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된 연유에는 이런 겸손한 품성과 성실성 그리고 사물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능력과 자신감이 동시에 갖춰져 있기 때문에 가능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아마도 저희 호텔이 홀리데이 인 호텔 체인 중에서는 세계 최고의 호텔일거라고 저는 자부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옌(殷) 동사장이 참 마음에 들었고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이 친구와 함께 일을 해보고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일어났다.

Ⅳ. 중국 현대화의 3대 유업과 장 지안(Zhang Jian)
  둘째날(10/24)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나는 황소옥 사장과 이동탁 처장을 대동한 후 호텔 뒷편에 있는 개발 부지를 먼저 답사했다. 그런 다음 회사 임원들과 같이 조찬을 하면서 그들이 그동안 구상해왔던 사업계획을 최대한 경청하는 시간을 가졌다. 조찬 후 옌(殷) 동사장이 직접 안내하는 대로 호텔 연회장 시설 및 중층부 비지니스 호텔 영업 예정구간을 둘러본 다음 21층짜리 오피스텔 건물의 내부 모델 룸(복층 구조)과 9층 규모의 병원용 건물 내부 구조 등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다. 그런 다음 오전 중에 남통시에서 후허호 관광지와 함께 양대 명승지로 꼽는 랑산(狼山)풍경명승구를 먼저 구경한 후 시가지 중심 상업구에 있는 백화점과 전문매장을 체크한 다음 중식을 하기로 했다. 그 후 남통박물관과 남통시 홍보전시관을 관람하고 시간이 남는대로 과거에 면방직공장이었던 곳을 개조해서 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현장까지 가 본 다음 호텔로 돌아와 최종적으로 업무 협의를 하고 나서 만찬을 갖기로 스케줄을 짰다.

나도 어디 출장을 가면 스케줄을 빽빽하게 짜서 강행군을 하는 스타일인데 이 회사의 안내원들이 짜 놓은 스케줄을 보니 만만치가 않았다. 이런 뜻을 황 사장에게 전했더니 그가 웃으며 옌(殷) 동사장은 일 밖에 모르는 분이라 직원들도 모두 그렇게 훈련되어 있는 것 같다고 말하면서 자기도 이런 스타일이 마음에 든다고 답했다. 물론 나도 적극 동의했다. 내심으로 한국 사람들만 열심히 일하는 게 아니라 중국인들도 눈코 뜰 새 없이 일하는 것 같아서 다시 한 번 중국의 저력을 느꼈다.

그런데 내가 이번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만남’을 만나게 된 것은 그날 아침 호텔 주변시설을 돌아본 다음 남통시 외곽 순환고속도로를 타고 장강 연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서 랑산풍경명승구를 관광하는 자리에서다. 해발 100여 미터 밖에 안되는 낮은 산이었지만 장강 삼각주 평야지대인 남통시에서는 가장 높은 산인 이 랑산은, 장강 하구를 바라보며 이리가 웅크려 앉아 있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랑산’이라 이름 붙여진 명소다. 꼭대기에 9층 탑형으로 지어진 사찰(寺刹)이 있고 거기에 오르는 구간 요소마다 작은 암자와 향을 파는 가게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종교시설 관광지였다. 구복을 소원하며 기도하는 무리들의 향불 냄새가 산길에 진동을 했고, 이른 시간이지만 유치원부터 중고등 학생에 이르기까지 단체로 견학을 온 학생들로 인해 랑산은 온 산이 떠나갈듯 시끄러웠다. 그래도 그들이 싫지 않은 것은 어디, 어느 나라를 가던 어린 청소년들을 보면 그 밝고 순진한 모습이 아침햇살에 빛나는 순결한 꽃 같아서 그렇다.

회사 안내원과 남통시에서 동행한 상무국 직원 두 명이 앞서서 우리 세 사람을 인도하여 함께 산을 오르고 있는데 어디 중턱 쯤 계단을 꺾어 올라가려던 참 이었다. 앞서 가던 안내원이 뒤를 돌아보며 “여러분들이 한국에서 오셨는데 여기 랑산에 한국인 묘지가 하나 있다”고 하면서 그분은 1900년대 초반에 조선에서 이곳으로 망명해 오신 문인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올라가려고 하는 방향과는 달리 산 우측 가파른 곳을 손으로 가리키는 것이었다. 만일 우리가 그 말을 그냥 흘려듣고 지나쳤으면 나는 이 ‘기적의 만남’을 영원히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꿈에서 조차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인연이란 참으로 묘하고 신기한 것이다. 그 천운을 놓치지 않고 붙잡았으니 말이다.

안내원으로 부터 그 말을 듣자 나는 왠지 한번 그 묘지에 가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산소가 멀리있느냐고 물었더니 안내원이 조금만 올라가면 된다고 답했다. 그럼 가보자 하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는데 정말 이삼분도 걸리지 않아 묘소 하나가 산 중턱 골짜기에 방치되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 랑산(狼山)풍경명승구에 있는 김창강 선생 묘소   묘소로 가까이 다가가니 직사각형 콘크리트 구조물이 하나 덩그맣게 누워있고 그 앞에 “韓詩人金滄江先生之墓”라고 쓴 돌비석이 외롭게 서 있었다. 너무나 쓸쓸하고 볼품없이 놓여있는 콘크리트 묘를 바라보며 나는 한동안 정신나간 사람처럼 그냥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이 보기에 민망했는지 안내원이 남통시에서 묘소를 다른 곳으로 이장하여 공원 형태로 꾸미려 한다는 말을 하면서 이분이 중국 청나라 말기 인물인 장 지안이란 분의 초청으로 남통에 와서 이름을 날린 조선인 문인이었다는 설명을 재차 해 주었다.
그때 비로소 나는 김창강(金滄江)이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되었으며 또한 장 지안이란 인물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한 상태였지만 당시 이 지역의 유력자라서 김창강 선생을 초청했겠거니 하는 정도로만 이해했다. 그날 오후에 하오허(濠河) 호반에 있는 남통박물관과 장 지안 기념관을 관람하면서 비로소 장 지안이라는 인물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장 지안을 알면 알수록 그가 어떤 연고로 김창강 선생을 이곳으로 초청하게 되었는지 그 사유가 더욱 궁금해 졌다. 그래서 이런 궁금증을 풀기 위해 저녁 만찬 때 만난 남통시 관리들에게 공개적으로 질문했더니 그때 마침 합석했던 남통시 위생국 차오 송윤(曹淞云) 부국장이란 분이 자기가 김창강 선생을 전문적으로 연구해온 학자 한분을 알고 있으니 필요하면 내일 만나 볼 수 있도록 조치하겠다고 해서 그 다음날 오찬 때 남통대학 챤 지안(錢健) 교수를 만난게 이번 여행의 ‘백미’가 되었다.

우선 여기서 장 지안의 경력과 인물평에 대해 먼저 알아본 다음 김창강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가는게 순서일 것 같다.
 
▲ 하오허(濠河) 호반 주변 레스토랑   둘째날 일정대로 시내 백화점과 전문매장을 잠시 들러 본 다음 우리 일행들은 장강 하안에 있는 가든형 전문식당으로 가서 장강에서 잡은 민물고기로 특색있는 오찬을 대접 받았다. 그런 후 곧 바로 남통박물관으로 이동하여 남통시의 현대화 도시형성과정에 있었던 여러가지 역사적 기록과 사진 전시물 및 유물 등을 살펴보는 동안에 나는 남통시 자체가 장 지안이라는 한 사람의 비전과 열정 그리고 강력한 조직적 추진력으로 형성된 것임을 상세히 확인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장 지안은 1853년 강소성 해문시(海門市, Haimen County)에서 태어 났다. 1894년 청나라 제국 과거시험을 치뤄 장원급제를 했으며 그 후 한림원(翰林院)을 세웠다. 1909년 장지안은 강소성 의회의 의장으로 선출 되었으며 1912년 중국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溥儀)의 사직칙령 초안을 작성했다. 그는 중국공화국의 임시정부 산업장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913년 북양(北洋)정부의 산업경제부 장관과 농림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914년 중국 전체 수자원의 관행관리 감독을 역임하였다.

▲ 장지안 기념관 내부에 설치된 장 지안 소개문 (중국현대화의선구자 표기 참조)
그가 이룬 대표적인 성과로 중국 초유의 3대 유업을 흔히 예로 드는데, 현대 중국에서 첫 일반학교인 남통대학 설립, 중국 최초의 민간박물관인 남통박물관 설립, 그리고 중국 최초의 면방직공장을 세운 일 이외에도 그는 일생동안 20개가 넘는 회사와 370개 이상의 학교를 설립하여 현대 중국의 산업화와 교육에 참으로 위대한 공헌을 한 정치가로 추앙받아 왔다. 그는 국가정책의 슬로건으로 “아버지와 같은 기업, 어머니와 같은 교육”을 주창하며 실용주의적 사회개량을 선도하여 중국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개화기 국가급 지도자로 봉직하는 동안 가장 중요한 덕목을 ‘미래지향형 인재양성’에 두었다고 한다.

남통박물관 뒷편에 장 지안 개인 기념관이 별도로 세워져 있었다. 그가 살았던 저택을 남통시에서 기념관으로 꾸며 일반인들에게 개방한 전시장이다. 그 집 앞 마당에 장 지안의 흉상이 조촐히 서 있었다. 그를 한 참 바라보는 동안 나는 나도 모르게 장 지안이 시대와 국적을 뛰어 넘는 아량으로 나를 친구로 맞아 줄 것 같은 마음이 생겨 그의 흉상을 끌어안고 사진을 찍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아 두손을 모우고 경배하는 자세로 사진을 찍었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해 보았다.

▲ 장지안 기념관 앞 장 지안 흉상과 이승률 이사장
“나도 그동안 25년이란 세월동안 연변과기대를 통하여 중국에 있는 조선족 후대들을 위해 ‘산업과 교육의 일치’를 위해 헌신해 왔는데, 내 비록 부족하여 당신만 못하지만 그래도 그 뜻을 저버리지 않고 이날까지 헌신해 올수 있었던 것은 당신이 주창했던 ‘아버지와 같은 기업, 어머니와 같은 교육’의 이념과 동일한 꿈과 비전을 갖고 초지일관 해왔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이제 당신이 나를 먼 훗날의 친구로 삼아 주신다면 나는 용기백배하여 중국과 한국의 미래를 위해 더욱 더 열심히 일할 수 있을 것 같소. 그러니 당신이 나를 선대(善待)하여 주셔서 당신이 이룩한 업적의 옷자락만한 성과라도 내가 따라 갈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날 장 지안의 흉상 앞에서 이런 생각을 하며 장차 내가 걸어 가야할 길에 대한 신념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 다음날 내가 남통대학 챤 지안(錢健) 교수를 만나 김창강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자마자 나는 몇분도 지나지 않아 장 지안이라는 인물이 역사의 간극을 뛰어 넘어 나와 김창강 선생을 연결하는 가교가 되어 주고 있음을 심령 깊이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장 지안이 29세 때 조선에 갈 기회가 있었을 때, 그때 조선에서 만난 여러 문인재사들 가운데 유독 김창강을 눈여겨봤다가 후일 그를 잊지 않고 중국 상해를 거쳐 남통에 까지 인도하여 후생을 동고동락하며 깊은 우정과 함께 ‘구국을 위한 창강의 꿈’을 실현시켜 주고자 노력했던 것과 같이 이제 나와 김창강 선생의 만남을 통해 나로 하여금 ‘잃어버린 창강의 꿈’을 이 시대에 다시 한 번 되살려 보라는 뜻으로 이해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연한 일 같지만 내게는 결코 우연으로 방치시킬 일이 아닌 것이, 죽기까지 조국 광복의 일념으로 살았던 김창강의 꿈이 나를 통해 한반도 통일과 한민족 통합의 꿈으로 다시 한 번 되살아나는 듯한 ‘정신적 유대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나라도 그때 김창강의 인생을 살았더라면 그렇게 행동(*그는 이루지 못한 구국의 한을 품고 78세에 자진(自盡)했다)을 공산이 크고, 또한 만일 김창강이 오늘에 현신해 살고 있다면 그도 나와 똑같은 이념과 헌신으로 자신의 일생을 바쳐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위해 영혼을 불태웠을 것이 틀림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김창강 선생에 대한 일대기는 다음날 챤 지안(錢健) 교수와의 대화를 통해 재조명키로 하고 오늘은 일단 장 지안의 치적에 대해 좀더 살펴보기로 하자. 내가 여기서 장 지안의 치적이라고 말함은, 그날 오후 남통박물관과 장 지안 기념관을 관람한 후 이동해 간곳 또한 장 지안이 100년전에 세웠던 면방직공장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허허벌판이었던 이곳 장강 삼각주에 면화씨를 도입하여 면화밭을 일구고 거기서 수확한 면화를 소재로 중국 최초의 면방직공장을 세워 원단을 제작한 다음 이를 장강 무역로를 통해 중국 내수시장으로 유통시켜 중국 인민들로 하여금 현대적인 의류산업에 눈뜨도록 만든 장본인이 바로 장 지안이다.

지금은 대부분의 공장 시설과 창고를 예술관으로 개조하여 매월 국제페어를 연다고 하는데 마침 우리 일행들이 도착했을 때도 여러 창고 건물에서 각종 의류 디자인 전시와 생활자기, 장식용 가구, 문화기획상품 등을 전시하고 있었으며 어떤 창고에서는 음악공연과 더불어 산업디자인 세미나도 열고 있었다. 나는 솔직히 한국인으로서 이런 장면들을 보고 깜짝 놀랐을 뿐만 아니라 기가 죽을 판이었다. 우리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 이만한 인물과 프로젝트가 있었을까? 그리고 이를 보존, 육성할 뿐만 아니라 현대화 컨셉에 접목시켜 세계화의 길로 확대발전 시킨 사례가 있는가? 최근에 이르러 한류문화를 운위하고 있지만 이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도시에서 이만한 문화산업적 소양과 저력을 갖고 완성도 높은 도시 미학을 구가하고 있다니, 직접 와서 보지 않았으면 믿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중국의 부상과 발전이 단순한 물리적 성장이 아니라 그 저변에는 인재양성과 정신문화적 역량이 결합되어 있고 그 위에 강력한 정치적 리더십이 국가사회를 이끌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는 각성의 기회가 되었다.

▲ 면방직공장을 미술관으로 개조한 국제페어전 내부   하루종일 맴돌았지만 여전히 ‘장 지안의 왕국’을 벗어나지 못한 느낌으로 호텔에 돌아온 나는 위축되려는 자신의 내면을 바로 세우기라도 하려는듯 연이어 이어진 실무회의에서 사업주 옌(殷) 동사장과 남통시 도시개발위원회에서 나온 관리들 앞에서 오늘 있었던 투어의 전모를 되돌아보며 “우리 한번 좀더 크게 생각해 봅시다”라는 말로 회의를 이끌어 나갔다.

우선 1차적으로 호텔 뒷편에 있는 놀이시설 개발예정지뿐 아니라 그 뒤로 연결되어 있는 상업지구 땅과 남통역으로 이어지는 국제무역센터 예정부지까지 합쳐서 이곳 전체를 남통시 북대가 신개발지의 중심축(中心軸)으로 건설하는 방향으로 사업계획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다. 내년 2015년 말에 이곳까지 고속철이 연장되고 또 2016년까지 인근에 상해 제3국제공항이 개항된다고 하니 교통여건이 획기적으로 개선되는 이 시점을 놓치지 말고 남들이 손대기 전에 이곳을 남대가 구(舊) 중심지에 있는 후허호 호반도심권에 버금가는 신생활 친환경 스마트문화관광중심지로 개발하겠다는 구상을 갖고 추진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하면서, 그렇게 해야 옌(殷) 동사장이 지금 운영하고 있는 호텔부지 뿐만 아니라 후속적으로 개발하려고 하는 땅의 부지 용도를 최대한으로 극대화 시킬 수 있는 방안이 될것이라고 설명했다.

“어제 얀(嚴) 주임으로 부터도 얘기를 들었고 또 오늘 하루 종일 이분들(남통시 상무국 관계자들)과 함께 도시 여건을 돌아보니 이곳 위치가 참으로 좋은 기회의 땅으로 분석된다. 이참에 옌(殷) 동사장이 큰 포부와 비전을 가졌으면 좋겠다. 주변 관계자들을 만나 보니 모두 다 옌(殷) 동사장을 도와 주려고 하는것 같다. 그러니 남통시와 잘 협의해서 아예 이 지역을 21세기형 국제문화관광특구로 개발하는 쪽으로 추진을 해보라. 그때 옌(殷) 동사장 혼자서 추진하기가 부담이 되면 이곳에 들어와 있는 부동산개발업체들과 손을 잡는 한이 있더라도 이곳을 남통시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렇게 되면 아마도 중국 정부나 남통시에서도 더 크게 협조해 줄 것 같고 나도 옌(殷) 동사장을 도울 수 있는 길이 있을것 같다. 한번 잘 생각해 보라, 비행기가 뜰 때 어느 일정 고도까지 올라갈 때는 모든 동력과 기체 기능을 총 동원해서 통합적인 역량으로 비상해 올라간다. 지금은 옌(殷) 동사장이 보유하고 있는 호텔 및 오피스텔 부지 하나만 갖고는 큰 게임을 할 수 없으므로 차제에 여기서 부터 저쪽 남통역 까지 북대가 전체를 일괄 통합개발방식으로 사업화하는 방안을 펴는게 더 빨리, 더 높이 비상할 수 있는 대안이라 판단된다. 그런 과정에 옌(殷) 동사장의 땅이 용의 눈알처럼 코어가 되도록 유도해 가는 방안이 내가 당신을 위해 조언해 드릴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미래전략이다. 이것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는 이유는, 첫째 남통시 자체가 갖고 있는 천혜의 지정학적 장점 즉 장강 유역의 청정 휴양지로서의 장점과 장 지안이란분이 이루어 놓은 후허호 주변의 근대적 전통문화기반은 다른 도시가 흉내낼 수 없는 역사적 자산이란 점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아가 여기에 더하여 최근 어느 나라에서나 문제시 되고 있는 고령화시대 현상과 중국의 개인소득 증대에 따른 고소득, 고소비시대를 합목적적으로 대비하는 혁신적인 신도시발전계획을 세우게 되면 이러한 여건들이 상해라는 거대국제도시기능을 등에 업고 지역개발 효용가치 측면에서 폭발적인 시너지 효과를 올릴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런 기본구상 위에 남대가 후허호 호반의 전통문화지구를 북대가 신개발지구에 계통적으로 연결하는 부도심 도시개발계획의 일환으로 스마트도시기능과 광역 교통망인프라를 기반으로 하는 초대형 국제무역전시장과 컨벤션센터, 국제수준의 고급쇼핑몰, 최첨단의료관광시설 및 현대적 국제교육문화시스템 등을 갖춘 융복합형 고급문화휴양시설을 조성하게 되면, 이런 신구(新舊) 역사개념의 중층구조화 도시개발방식이 남통시를 21세기형 특화도시로 발전시켜나가는 전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말해, 남통시의 장기발전을 위한 지속 가능한 신(新)거대전략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이렇게만 되면 남통시는 중국 어느 대도시보다 더욱 독특하고 매력적인 ‘작지만 큰 도시’로 거급나게 될 줄 믿는다.”
이상은 내가 그날 실무회의를 통해 결론적으로 제시한 의견이었다.

그러면서 끝으로 스티븐 코비의 ‘항아리 돌 채우기’를 예로 들면서 나의 견해를 마무리 했다. 스티븐 코비는 그의 저서에서, 항아리에 돌을 채울때 큰 돌부터 먼저 채운 후 그 다음에 중간 돌을 채우고 그런 후 틈새에 작은 돌을 골고루 채워 넣어야 항아리 전체를 완벽하게 채울 수 있다는 주장을 편 적이 있다. 나는 이 말을 가끔씩 써 먹는 편인데 이번 남통시 도시개발위원회 관계자와 사업주인 옌(殷) 동사장 앞에서도 이 말을 언급하면서 ‘생각은 크게, 그리고 실행은 구체적으로’라는 표현으로 나의 위상을 정립했다. 그들 앞에서 나는, 한국인으로서 작은 나라에서 왔지만 당신들 못지않게 큰 사고를 하고 있다는 뜻을 은연중에 전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자긍심과 자신감을 갖고 대하는 것이 그들 합리적인 중국인 지도급 인사들에게는 더 잘 어필되며, 더욱 확실하고 깊이 있는 이해관계를 이끌어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오랜 경험을 통해 터득해 왔기 때문에 나는 의도적으로 그렇게 처신했다. 그러자 옌(殷) 동사장이 소년처럼 순진하게 씩 웃으며 매우 고맙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내가 당신과 같이 사업을 해보고 싶어서 이러는거요’라는 말을 할까하다가 꾹 참았다. 그 말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을 것 같아서다.

실무회의가 끝난 다음 우리 일행 세 사람은 잠시 객실에 올라가 숨을 돌렸다가 시간에 맞춰 저녁 만찬장소로 찾아갔다. 남통시 항갑구(港閘區) 구장과 남통시 위생국 관리들이 추가로 합석한 가운데 화기애애한 만찬이 진행되었다. 그날 만찬에서 가졌던 대화중에 가장 극적인 두가지 사안은 내 아들(이동엽 원장)에 관한 이야기와 김창강 선생에 대한 탐문이었다.

▲ 『자세혁명(중국어판)』
(2014년, 동아일보사)
이번 출장을 준비할 때 황소옥 사장이 이곳 ‘홀리데이 인’ 호텔 바로 옆 건물에 한국형 병원이 들어서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제안했을때, 그럼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내 아들이 척추, 관절, 뇌신경 계통의 전문병원(참포도나무병원)을 운영하고 있으니 이 병원을 기반으로 해서 한국에서 수준 높은 전문병원 팀을 구성하여 남통에 진출하는 것도 한가지 대안이 되지 않겠냐고 말했던게 일의 발단이 되었다. 마침 최근에 아들이 2년 전에 개원하면서 지은 책 ‘자세혁명(동아일보사)’의 중문판이 출간되었기에 이 책을 몇권 들고 온 게 있었다. 그걸 차오 진해이(曹金海) 구장과 남통시 위생국에서 오신분들께 선물로 드렸더니 이때부터 대화의 방향이 완전히 병원의료사업쪽으로 집중되었다.
차오(曹) 구장도 알고보니 남통시 위생국장을 거쳐 구장(區長)이 되신 분이었다. 그는 만일 한국에서 병원팀이 들어오게 되면 구청뿐 아니라 남통시 차원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할테니 옌(殷) 동사장이 특별히 신경써서 이 책의 저자 이동엽 원장을 조만간에 한번 초청해보라는 지시까지 하는것이었다.

최근에 내가 서울에서도 가끔 세미나 행사장이나 친구들 모임에 가게되면 “이회장, 아들 잘 둬서 좋겠어”라는 소리를 더러 듣게 되는데, 그때마다 속으로 ‘효도가 따로 없구나. 자식이 잘되는게 효도로구나’ 라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곳 남통시에 까지 와서 아들 칭찬을 들으니 한결 기분 좋고 국위선양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킨 김에 나는 이 일을 적극추진해 보겠다고 약속했고 우리들은 일어나서 ‘러브 샷’까지 했다.

그러다가 내가 오늘 랑산명승구에 다녀온 이야기를 하면서 거기서 김창강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게 되었는데 혹시 이분에 대해 잘 아시는 분이 있으시냐고 물었다. 그러자 남통시 위생국 부국장으로 계시는 차오 송윤(曹淞云)이라는 분이 남통대학에서 이를 전문적으로 연구해온 교수들이 몇명 있는데 그중 한분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좀 무리가 된다 싶었지만 그분을 내일 떠나기 전에 만나 볼 수 있겠느냐, 필요하면 내일 오전 스케줄을 조정해서라도 학교를 방문하여 꼭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요청했다. 그러자 그는 시끄러운 방을 떠나 복도로 나가서 한참동안 전화를 거는 것 같더니 밝은 얼굴로 돌아와 내일 점심시간에 찬 지안이란 분이 우리 오찬 장소로 오겠다고 약속했다고 전달해 주었다. 나는 너무나 격앙된 나머지 평소 먹지 못했던 술(와인)을 두잔이나 연거푸 비웠다.

내가 계속 김창강 선생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자 좌중에 있던 분들이 그의 인물됨과 문인으로서의 자질 및 경력 등에 관해 자기들이 아는바 대로 설명을 해 주었다. 그때 나는 한가지 색다른 아이디어가 퍼뜩 떠울라 차오(曹) 구장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이렇게 건의해 보았다. 어제 밤에 하오허(濠河)에 가서 쪽배를 타고 호반 야경을 보았는데 너무나 훌륭하더라, 혹시 이런 도시기반을 가꾼 장 지안이란 분과 그가 평생을 두고 동고동락하며 구국 활동과 우정을 함께 나누었던 김창강 선생에 대한 일대기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하여 방영하게 되면 한국인들의 남통시 관광, 기업유치뿐 아니라 중국과 한국의 교류협력을 증진하는데 좋은 역사적, 인문학적 소재가 되지 않겠느냐는 말을 했다. 덧붙여서 2012년 년 말에 ‘안중근 의사 일대기’를 영화화 하기 위해 장이머우(張藝謀) 감독을 한국대종상시상식에 초청하여 국제협력상을 시상한 바가 있었는데 그때 그 초청 업무를 내가 맡아서 했노라고 말하자 좌중은 갑자기 조용해지며 내 말에 온통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었다.

차오(曹) 구장은 그것 참 좋은 생각이라고 하면서 그럴 뜻이 있으면 자기들이 최선을 다해 협조할 테니 나더러 다큐멘터리 보다는 영화나 드라마 제작을 추진해 줄 수 있느냐고 되물었다. 나는 대답하기를, 내가 그런 일에 투자를 할 수 있다는건 아니다, 다만 이곳에 계시는 분들이 영화 제작에 필요한 중국내 투자 유치를 이끌어 주신다면 캐스팅은 한류 배우들 가운데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인물로 얼마던지 내세울 수 있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나는 옆자리에 앉아 있는 이동탁 처장을 다시 한 번 소개하며 이분이 이야기하면 ‘별그대’의 주인공 김수현씨 까지도 불러낼 수 있다고 기염을 토했다.

좌중에 있던 사람들은 ‘김수현’ 이란 이름이 나오자 까무러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게 정말이냐고 되물었다. 이동탁 처장은 손사래를 쳤지만 내가 이 처장께서 잘 아시는 분이 ‘별그대’의 판권을 중국에 판 제작사 대표의 아버지라서 그분께 부탁하면 김수현을 얼마던지 캐스팅할 수 있다고 대신 설명을 해 주었다. 그러자 지금까지 아무말도 없이 듣기만 하고 있던 옌 바오린(殷寶林) 동사장이 김수현을 캐스팅 할 수 있다면 자기가 전적으로 투자하겠다고 나섰다. 대화가 이렇게 진전되자 좌중에는 더할 나위 없이 흥겹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넘쳤다. 물론 이 대화처럼 일이 될지는 미지수이지만, 아무튼 그날 그 시간에 우리들은 참으로 뜻 깊고 유쾌한, 우의로 가득 찬 만찬을 한껏 즐겼다. 참 즐거운 밤이었다.
Ⅴ. 잃어버린 꿈, 조선의 굴원을 아시는가
  세째날(10/25) 아침 조찬을 일찍 마친 우리 일행들은 회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설립되어 있는 모험놀이시설단지를 둘러보러 갔다. 힌국 평수로 3만평이 넘는 부지에 20여가지의 다양한 실외 놀이기구들이 장치되어 있었다. 실내 수영장과 물놀이 시설도 있었는데 대부분 한국의 에버랜드를 본 딴듯한 시설 형태였다. 놀이시설단지를 관찰한 후 우리들은 호텔로 돌아오는 대로 옌(殷) 동사장과 회사 임원들 몇분과 함께 이번 출장의 최종 실무회의를 가졌다. 옌(殷) 동사장은 내가 앞으로 자신이 추진하고자하는 개발업무에 컨설팅뿐만 아니라 병원 프로젝트에 합작파트너가 되어 달라는 요청을 정식으로 해 왔다. 나는 그럴 뜻이 있음을 분명히 답변해 주었고 그외에도 옌(殷) 동사장 개인사업에 필요한 몇가지 협조사항에 대해 구체적인 의향을 제시했다.

이 내용은 이번 글에서 밝힐 수 없지만 테마파크 건축 설계, 아쿠아리움 및 실내놀이시설의 운영관리, 제3국제공항청사 한국업체 입주, 국제학교 설립 등에 관한 내용을 주요 항목으로 채택했다. 그런 다음 이 모든 업무에 황소옥 사장이 중간 역할을 하기로 했고 옌(殷) 동사장은 사업의 원활한 투자를 위해 개인사업영역 뿐만 아니라 북대가 신시가지 주요개발사업 전반에 걸쳐 함께 동업할 기업으로 북경에 있는 중국 최대 건설집단을 이미 내정해 두었다고 밝혔다. 나에게 자신의 사업계획에 대한 현실적인 능력과 확실성을 보여줌으로써 국제적인 사업영역의 확대와 성공확률을 높히겠다는 의도로 비쳐졌다. 그는 자신의 의향을 마무리 하는 뜻으로 자신이 경영하고 있는 류화그룹의 석탄공급 거래처를 전국 규모로 다변화 시키고 또한 이를 위해 젊고 유능한 인재들을 더욱 많이 양성해서 앞으로 10년 안에 중국 최대의 물량 공급, 최고의 수익을 올리는 석탄딜러가 되고 싶다고 자신의 포부를 표출했다. 조용한 어조로 말했지만 그 내면에 확고한 비전과 자신감이 있어서 나는 내심으로 또 한번 그가 무척 마음에 들었고 미덥게 여겨졌다. 아직 40대 약관의 기업인이지만 중국 제일의 석탄딜러가 되고 싶다는 그 용기와 담대함이 가상하여 나는 그의 손을 힘차게 부여잡고 “할 수 있다고 믿으면, 그 믿음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축복의 메시지를 전했다.

체크아웃을 한 다음 호텔 내 오찬 장소로 갔더니 어제밤에 만났던 남통시 위생국 차오(曹) 부국장이 먼저 와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 다소 몸집이 크고 인상이 학자 풍으로 보이는 손님 한분이 앉아 있다가 나를 보자 벌떡 일어나서 인사를 청했다. 그가 바로 김창강 선생을 전문으로 연구해 왔다는 남통대학 챤 지안(錢健) 교수였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오랜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대화를 이어 나갔다.

▲ 김창강 선생 전문 연구가 챤 지안 교수(좌에서 두 번째)와 함께   그는 김창강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꺼내기 전에 우선 남통과 한국과의 관계에서 특별히 상고해야할 몇 가지 역사적인 교훈이 있다고 말을 잇기 시작했다.

“이 회장님, 혹시 설인귀란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는 당나라때 고구려를 침공했던 장수이지요.”

나는 옛날 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배웠던 것이 기억나 그렇다고 머리를 끄덕여 주었다. 그날 내가 오찬 때 들은 설인귀 이야기와 김창강 선생에 대한 일화를 보고문 형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설인귀
“설인귀(薛仁貴)는 당 태종(598-649)과 고종(628-683) 시기에 활약한 장수이다. 644년 당 태종이 고구려 침입을 위해 군사를 모집할 때 지원하여 익년 645년 요동 안시성 전투에서 공을 세워 유격장군으로 발탁된 인물이다. 그때 당 태종이 고구려 원정에 실패해 귀환한 뒤 설인귀에 대하여 ‘짐은 요동을 얻는 것이 기쁜 것이 아니라 용맹한 장수를 얻어 기쁘도다’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 후 그는 665년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죽은 뒤, 그의 아들 형제 간에 내분이 일어났을 때 장남 연남생이 원병을 요청하자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669년에는 평양성까지 점령하는 전과를 세웠는데 나중에 당이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어 군전을 실시 했을 때 안동도호부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이런 과정에 당나라에서 군사를 모집하고 선단을 이루어 동중국해(황해)를 거쳐 요동반도까지 진군하는데 중간 진지로 활용한 곳이 바로 이곳 남통이었다고 한다. 그때 당시 당나라 수도 장안과 남통 간에는 장강을 통하여 남부지역의 농산물과 상업물류가 빈번하게 교류하였으며, 남통 일대에서 모집한 군사들이 대부분 고구려와의 전쟁에 참여했기 때문에 이곳 지역에는 고구려 관습이나 농사법, 언어들이 많이 남아 있고 또한 고구려 사람들로 고구려 멸망 후 많은 유민들이 건너와서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 주민들은 이들을 ‘표류민’ 또는 ‘재난 당한 사람들’이라는 말로 신분을 지켜주며 우대 조치를 했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는 고구려 귀족 출신들도 많았으며 이들을 이곳에서는 ‘동이족(東夷族) 지도자’로 불렀다고 한다. 안동도호부 총독이었던 설인귀가 고구려를 침공한 장수이기도 하지만 고구려 유민들이 남통에 정착하여 사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대목이다.”
나는 설인귀에 관한 이런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지만 남통과 한반도가 당나라 때 부터 역사적 관계로 서로 소통했다는 사실을 듣고는 마음속으로 느껴지는 바가 컸다. 챤 지안(錢健) 교수가 이 이야기부터 먼저 꺼낸건 그 뒤 연이어 김창강 선생에 대한 일화를 이야기할 때 그 의도가 분명히 드러났다. 김창강 선생도 ‘표류민’으로 여기까지 왔지만 우리 남통인들이 잘 모셔드렸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챤 지안(錢健) 교수는 더욱 겸손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김창강 선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브리핑 했다.
(*이 보고문을 정리하는데 있어서 챤 지안(錢健) 교수의 설명과 나중에 한국에 와서 ‘네이버 지식백과’에 있는 내용을 총합해서 정리했음을 알려드린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김창강 선생이라 호칭했던 것을 앞으로는 ‘창강 김택영 선생’ 또는 그냥 ‘창강 선생’이라 부르고자 한다. 왜냐하면 창강이 호요 본명은 김택영임을 나중에 서울에 와서 알았기 때문이다.)
“김택영(金澤榮, 1850~1927)은 조선 후기의 개성 출신 문인이자 학자로서 소년 시절부터 시장(詩章)에서 이름을 떨쳤고 17세에 성균초시에 합격했다. 그러나 개성인을 등용하지 않는 조정의 정책과 무반 가계라는 신분상의 제약 때문에 급제하지 못했다. 그 후 20대 초반에 서울에 와서 이건창 등과 교류하면서 문명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나중 1883년 김윤식의 소개로 당시 서울에 와 있던 중국의 진보적 지식인인 장 지안과 조우하면서 친분을 쌓은 후 훗날 장 지안의 주선으로 중국 상해로 망명하게 된 인물이다.

중국 망명 전 그는 1891년 개성 출신인 등용을 위한 여론의 압력으로 진사시에 급제하여 가문의 오랜 숙원을 풀었으며, 그 후 벼슬길에 올라 편사국 주사(1894), 중추원 서기관(1895), 문헌비고 속찬위원 통정대부(1903)를 거쳐 학부 편집위원(1905)이 되었으나 일제가 조선을 병탐하자 곧 바로 사직한 후 1908년 장지안의 주선으로 중국으로 망명하여 남통에 있는 출판사(한림묵원출판사)에서 교정일을 보는 것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창강 김택영은 시(詩)와 문(文)이 모두 대가의 반열에 드는 우리나라의 몇 안 되는 문인가운데 한 분으로서, 중국에 망명한 뒤에도 국내의 문단과 끊임없이 교류하며 한문학 분야의 정신적 지도자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망명지 중국에서 우리나라 한문학을 중국에 소개하는데 진력하는 한편 남방의 문인들과도 활발한 친분관계를 맺으며 시문뿐 아니라 개화사상과 현대 국가체제론에 대해서도 진보적인 견해를 많이 발표하여 그들로부터 양계초(梁啓超)에 필적하는 대가로 인정받았다. 또한 그는 국내 문인으로 시에서는 신위(申緯), 산문에서는 박지원(朴趾源)을 가장 높이 평가하였는바, 신위와 박지원이 시와 산문분야에서 각기 조선 제1의 대가로 인정받게 된 데는 창강 김택영의 노력이 가장 크게 작용하였다고 한다.

유작으로 <신위시집>과 <여한구가문초>등을 편찬하여 한국 한문학의 진수를 중국에 알리는데 특히 공헌하였으며, 지기인 이건창과 황현의 문집을 편집하는 한편 망국의 한을 노래한 다수의 시편을 남겼다.
 
▲ 한림묵원출판사에서 발행한 김창강 선생 시문집 <창강고>

이런 점에서 창강 김택영을 논할때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그의 고려 유민(遺民)의식이다. 이는 조선 5백년동안 외면 당해온 개성인의 의식세계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는데 나중에 중국에서 중국인들에게 한국 역사를 소개할 목적으로 <한사경>을 저술했을 때 이 책에서 이성계의 건국을 부정적으로 기술하여 국내에서 큰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외에도 저서로서는 <한국소사>, <교정삼국사기>가 있고 시문집으로는 <창강고>와 <소호당집> 등이 남아 있다.”
이상은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이 내용을 참고하면서 내가 남통대학 챤 지안(錢健) 교수와 나눈 대화를 참조하면 창강 김택영에 대한 상세한 이력과 정신세계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 본다.

챤 지안(錢健) 교수는 장 지안이 29세때 조선에 갔을 때 김창강을 처음 만났을 때 부터 그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그 후 오랜 기간 끊이지 않고 교신을 하며 우정을 쌓았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그 후 1905년 조선이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고 유린당하는 것을 보고 비분을 참지 못한 창강이 이완용, 박제순 등과 같은 5적(五賊) 무리들을 향해 대항하다가 이들로 부터 고초를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당시 중국정부에 고관으로 있던 장 지안이 곧장 서신을 보내 중국으로 망명을 권유했던 점을 특히 강조해서 설명했다. 장 지안의 인격과 인재를 아끼는 도량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당시 창강은 상해로 건너와서 얼마간 머물다가 소주(蘇州)를 거쳐 작은 배를 타고 남통으로 왔다고 한다. 그때는 아직 상해 임시정부가 구성되기 전이라 함께 구국 활동을 할만한 인사들이 없기도 했지만, 상해 조차지역에 건립된 신도시 문명을 본받아 남통에 학교를 세우고 면방직공장을 세우는 등 중국의 개화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장 지안을 흠모하여 창강은 끝까지 남통에서 여생을 보내며 '시문'으로 망국의 한을 풀고 구국의 여론을 주도하는 역할을 했던 셈이다.

안중근 의사가 할빈역에서 이토 히루부미를 저격했다는 소식을 듣게되자 창강은 밤잠을 자지 않고 글을 쓴 후 자발적으로 인쇄한 호외 기사를 남통뿐 아니라 상해, 소주, 항주 등으로 배포하여 중국인들로 하여금 일제 항거에 동참하도록 충동하는 한편 상해 임시정부로 부터의 요청을 받아 들여 장 지안을 통해 중국 고위층에 임정의 어려운 처지를 알리는 등 중국정부로 부터 지원을 받도록 요청하는 일에 앞장서 협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본디 정치적 성향의 인물이 아닌, 문인으로서의 몸가짐과 학문에 열정을 쏟았던 사람이라 구국광복사업을 위해 전면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흔히 말하는 독립유공자로 분류되지는 않았지만 시문을 통해 중국인들에게 조선의 문화와 역사를 알리고 중국 지식인들과 함께 한국의 광복과 중국의 개화를 위해 헌신한 공이 지대한 분으로 중국 남방지역에서는 널리 평가받고 있다.

창강의 가족으로는 남통에서의 생활이 안정되자 조선에서 부인을 데려 왔으며 후손으로 딸이 한명 있었는데 딸은 장 지안을 의붓아버지로 섬기며 살았고, 현재 산동성 제남에 그의 손자가 한명 생존해 있다고 한다. 여성 관계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다만 남긴 글에서 보면 술집이나 기방에서 흥이 나면 여자들에게 시를 한수 지어서 선물로 준 경우가 더러 있었다고 하니 혹시 마음에 두고 사귄 여인이 있을 수 있지 않았을까 추정해볼 따름이다. 아무튼 그는 망국의 한을 품은채 20여년간 남통에서 살다가,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동고동락하며 우정을 나누어 왔던 장 지안이 서거한 그 다음 해 1927년, 만 77세 되던 해, 친구를 잃은 슬픔과 평생 유령처럼 뒤따라 다녔던 고려 유민(遺民)의식이 겹친데다 조국의 광복을 열망했지만 날이 갈수록 더 막강해지고 포악해지는 일제의 압제를 보자 더 이상 울분을 참지 못해 스스로 곡기를 끊고 병들어 자진(自盡)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를 아끼는 중국 남방 지식인들은 창강 김택영 선생을 가리켜 '조선의 굴원'이라 칭송하며 그의 유업을 길이 보존하고자 애를 써 왔다고 한다.

여기서 '굴원(屈原)'이란 분을 잠깐 소개하자면, 중국 전국시대의 정치가 이자 비극시인이며 학식이 뛰어나 초나라 희왕의 좌도(左徒:左相)란 중책에 임명되어 내정과 외교를 맡아 크게 활약한 인물이다.

그의 작품은 한부(漢賦)에 영향을 끼쳤으며 문학사에서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대표적인 주요 작품으로 <어부사(漁父辭)>를 꼽을 수 있다. <어부사>는 굴원이 정계에서 쫓겨나 강남에 머물며 집필한 작품이다. ‘창강’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깨친 바를 집필한 책이다. 굴원은 <어부사>에서 자신을 중취독성(衆醉獨醒)이라 일컬으며 초나라가 처한 상황을 한탄했다. 평소 그는 시문을 통하여, 죽어서 이 세상의 유(類:법,모범)가 되고 자살로써 간(諫)하겠다는 결의를 자주 밝힌 바 있는데 실제로 그는 창사(長沙)에 있는 멱라수(汨羅水)에 투신하여 죽었다.

굴원이 투신하여 죽은 날이 음력으로 5월5일 단오날인데 중국에서는 이날을 문학의 날로 기릴만큼 그가 남긴 문학적 업적과 가치는 후세에서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특히 단오날에 댓잎에 싸서 먹는 쫑쯔는 굴원을 기리기 위한 음식으로 유래되었는데, 쫑쯔를 강물에 던져 물고기들이 굴원의 시신을 뜯어 먹지 못하게 했다는 풍속이 전해지고 있으며 또한 중국에서 행해지는 용선(龍船)경주 시합도 강물에 빠진 굴원의 시신을 빨리 건져내기 위한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잃어버린 꿈'의 한을 품고 살았던 김택영의 호를 중국 문인 친구들이 '창강'이라 불렀던 이유가 무엇일까. 자진(自盡)해서 죽을 걸 미리 알고 ‘창강’에 투신한 굴원에 빗대어 일컬은 호칭인가? 아니면 조국이 걱정되고 두고 온 산천이 그립고 외로울 때마다 랑산에 올라 ‘푸른 창파 장강’을 바라보며 시름에 빠져있던 그를 위로하기 위해 그리 불렀던가. 어떤 이유에서던 랑산에 있는 묘소 비석에 ‘韓詩人金滄江先生之墓’라 쓴 글이 더욱 소중한 의미로 깨우쳐 진다. 더군다나 창강의 묘소를 랑산으로 택한 이유도, 랑산 바위언덕에 올라 발밑을 유유히 흐르는 장강 하구를 굽어보며 눈물로 시를 짓고 한탄으로 글을 썼던 그 단심과 충정을 동료 문인들이 길이 보존하고자 이곳을 택하여 묘를 쓴 게 틀림없을 것이다.

여기까지 글을 쓴 나는 문득 랑산에서 찍었던 사진 가운데 김창강 선생이 누워있는 콘크리트 묘와 비석앞에서 찍은 사진을 스마트폰에서 꺼내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그러자 한동안 가슴이 쓰리고 아픈 듯 하다가 차츰차츰 그 슬픔이 변하여 새로운 만남의 기대로 가슴이 벅차 오르는 것을 깨닫는다. 당시 장 지안 기념관에서 장 지안의 흉상을 바라봤을 때 그가 나와 김창강 선생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한 감흥을 느낀 것이 기억속에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그렇다! ‘잃어버린 창강의 꿈’을 이 시대의 나를 통하여 새로운 구국의 길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주는 듯한 환상을 가졌다. 즉 한반도 통일과 한민족 통합의 길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주는 가르침과 힘이 장 지안의 흉상에 깊숙이 내재(內在)되어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건 결코 우연이 아니라 창강 선생과 나의 운명적인 만남이고 또한 중국과 한국 간에 새로운 블루오션을 준비하도록 요청하는 역사적 필연으로 믿어진다. 그래서 나는 그날 남통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가졌던 오찬 자리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저의 제1 고향은 물론 한국이지요. 생각같으면 두번째 고향으로 이곳을 정하고 싶지만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엄연히 살아 있으니 제2고향은 양해를 바랍니다. 다만 이곳을 앞으로 제가 평생토록 동고동락하며 함께 일할 제3의 고향으로 여기고 자주 오겠습니다. 장 지안 선생과 김창강 선생의 우정을 생각하면 더욱 그런 신심이 들고 특히 옌 바오린(殷寶林) 동사장 같이 유능하고 포부가 큰 친구가 있는 곳이니 제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함께 동역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또 함께 일할 좋은 친구들이 있어서 저는 남통이 참 좋습니다. 짧은 시간의 만남이었지만 이건 제 진심입니다.”

내 말이 지금 이렇게 글로 쓴 것처럼 정확하게 전달된 건 아니었겠지만 황소옥 사장의 통역을 거쳐 나는 이런 뜻이 옌(殷) 동사장과 회사 임원들 그리고 남통시에서 나온 몇 분의 관리들 마음속에 깊이 아로 새겨지기를 원하면서 매우 진지하게 마무리 인사말을 했다. 그리고 남통대학에서 오신 챤 지안(錢健) 교수께도 내가 장 지안과 김창강에 관한 책을 하나 쓰고 싶으니 그동안 연구하신 자료를 보내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흔쾌히 대답하며 1988년에 대만 문사(文社)잡지에 기고한 김창강에 대한 최초의 논문을 카피해서 보내 줄수 있으며 또한 그 후 남통시 문연(문학예술연합회)을 통해 발표한 논문들도 여러 편 챙겨서 보내 줄 수 있다고 아량을 베풀었다.

남통에 도착하던 첫날부터 이곳 현지인들이 매우 순박하고 친절하며 예의가 바르다는 것을 많이 느꼈는데 마지막날 만난 챤 지안(錢健) 교수로 부터도 그런 인상을 강하게 느꼈다. 그동안 중국 여행을 하며 많은 지역 출신들을 만나 보았지만 이곳 사람들만큼 소박하고 진지한 사람들을 만나본적이 없는듯 느껴졌다. 국제무역상업도시인 상해가 바로 인근에 있어도 전혀 상업주의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인간미를 지키고 있는 남통인들이 참 대견스럽고 우러러 보인다. 김창강 선생께 베풀었던 장 지안의 우의도, 한반도에서 건너 온 ‘동이족(東夷族) 유민’을 우대하고 친구로 맞아주었던 오랜 전통속에서의 남통적(南通的) 인간미의 소치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내가 여기온지 며칠도 되지 않아 이곳을 제3의 고향같이 여기게 된 게 아닐까? 아무튼 첫날부터 마지막 미팅까지 줄곧 좋은 인상으로 여행을 마치게 되어 나는 참으로 기분 좋고 유쾌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 가운데 내 마음 한구석에서 이런 생각이 일어남을 숨길 수 없었다. 만일 이곳 남통시에서 창강 선생의 묘를 이장하여 창강공원을 만들어 준다면 내가 사비를 들여서라도 그 공원 안에 창강문화원을 하나 지어 드려서 그의 아름다운 유업을 기릴뿐만 아니라 남통과 한국 간에 새로운 우정과 협력의 가교를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렇게만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음력 5월5일 단오날이 되면 '조선의 굴원'을 상기하는 창강문화축제도 열고 또 이 랑산에서 옛 문인들의 정서와 고매한 인품을 새롭게 각성하고 기리는 그런 위대한 문화유산의 전승대회도 한번 열어 보면 어떨까. 이런 생각을 하자 내 마음은 그저 하늘 높이 솟아 오르는 풍선같이 부풀고 유쾌해 졌다.

▲ 상해장강대교 전경   나는 이번 출장을 통하여 많은 것을 배우고 또 깨달았다. '남통순회'라 일컬어도 좋을 만큼 한중 간에 새로운 비즈니스의 기회의 창이 열리는 희망을 느꼈다. 또한 그동안 두 번씩이나 장강 크루즈를 타고 가며 꿈꾸었던 한중 간 역사문화의 소통과 인적교류, 그리고 한반도 통일과 선진화 사회를 위한 지식인들의 노력이 새로운 시대정신을 수용하며 폭 넓게 펼쳐지는 듯한 감격을 느꼈다. 무엇보다 장 지안의 인격과 그가 이루어 놓은 남통시의 3대 위업, 그리고 조선에서온 '표류민' 김창강 선생과의 우정을 통해 보여준 그 놀라운 인간적 유대(紐帶)의 능력은, 앞으로 한중 간 뿐만 아니라 이 동북아 지역에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새롭게 지침하는 참으로 귀하고 큰 지렛대와 같은 교훈으로 내게 임해 왔다.

“창강의 잃어버린 꿈”이 우리를 통하여 새롭게 찬연히 피어날 그날을 기약하며 우리 모두 동북아시대의 유능한 길잡이가 되어보자고 다짐한게 남통을 방문했던 우리 세사람의 동일한 염원이 되었다.

남통을 떠나 푸동공항으로 돌아가는 고속도로 위에서 우리들은 이런 다짐과 각오를 하며 마냥 즐거워했다. 더군다나 옌(殷) 동사장이 마지막까지 예의와 신의를 지키려는 듯 공항까지 배웅을 나왔다. 승합차에 같이 타고 가면서 우리가 상해장강대교를 건널 때 나는 이렇게 큰 소리로 말했다.

“장강의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치고 나가듯 옌(殷) 동사장께서 중국의 다음 시대를 이끌어 가는 주요인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 장강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것이 나의 ‘남통순회’의 마지막 인사말이 되었다. 상해장강대교 밑으로 유유히 흐르는 '푸른 창강(滄江)의 물결'-그 푸른 블루오션의 물결 위에 가을 오후의 햇살이 눈부시도록 찬연히 빛나고 있었다.
  2014년 11월 19일
(사)동북아공동체연구재단 이사장 이승률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