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범송 흑룡강신문 논설위원

[서울=동북아신문]이른바 황제란, 어떤 세계에서 절대적 힘을 가진 사람, 지고무상의 권력자를 지칭한다. 신하란, 임금을 섬기어 벼슬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즉 황제와 신하, 양반과 상놈은 인간지간의 상하관계와 위계질서를 나타내는 용어이다. 21세기 재중한국기업에서 ‘황제와 신하’의 위계적 질서가 한국주재원과 조선족직원 간에 재현되고 있다. 현재 ‘산이 높고 황제(본사)와 멀리 떨어진(山高皇帝远)’ 중국의 오지에서 한국주재원이 황제 노릇을 할 수 있는 것은 조선족직원이라는 친신의 ‘공경스러운 섬김’이 있기 때문이다.

외주재원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로는 고급아파트와 안정된 직장, 풍족한 수입과 여유가 있는 여가생활 등이다. 현재 한국 대기업의 해외주재원은 품위와 차량유지비, 주택보조와 자녀의 학비, 어학연수와 의료비, 귀경 교통비 및 해외 근무수당 등 각종 명목의 혜택을 향수한다. 대개 주재원은 호화아파트에서 살고 주말이면 골프치러 다니며 주재원부인들은 조선족 가정부를 하녀 부리듯이 하면서 안방마님의 행세를 한다. 최근 중국에서 공부하는 한국유학생들의 ‘공통된 꿈’이 주재원이라고 할 정도로 해외주재원은 인기가 높다. 특히 중국에 파견된 한국주재원은 더욱 행복하다. 그것은 재중한국기업에 주재원에게 충성하고 한국인의 정서를 인지하고 있는 같은 한민족, 조선족직원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재중한국기업은 조선족에 대한 통역·번역 의존도는 크게 낮아졌지만, 주재원과 조선족직원의 ‘공생관계’는 여전히 끈끈한 맥이 이어지고 있다. 주재원들이 조선족직원을 선호하는 이유는 언어가 통하고 한국문화를 이해하는 조선족직원이 그들의 특권 향수에 도움이 되며 주재원 ‘시중을 드는’ 신하의 역할에 만족하기 때문이다. 반면 조선족직원이 황제(주재원)의 지시를 전달하는 ‘2인자’, 한족직원의 상사로서 우월감을 갖게 되는 것은 주재원들의 신임과 지지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조선족직원의 ‘공경스런 섬김’이 없다면 주재원의 ‘황제 노릇’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회사에서 주재원은 ‘황제’, 조선족은 ‘신하’인 공생관계가 재현되는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물론 이러한 한민족 간의 ‘공생관계’는 현지기업의 발전에 ‘유익한 일면’도 없지 않지만, 그에 따른 역효과도 만만치 않다. 예컨대 현지기업의 현지화 경영에 필수불가결한 베테랑 중국인관리자들의 회사 이직을 촉발하는 것이다. 따라서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큰 한민족 간의 상호의존 ‘공생관계’는 악어와 악어새의 그릇된 공생관계에 비유할 수 있다.

한국회사에서 무소불위 황제로 군림하는 주재원 특권으로, 우선 조선족직원의 ‘24시간 근무’가 지적된다. 대개 조선족관리자들은 근무시간 외에도 주재원의 개인적 술좌석에도 배석하고 주말이면 한국주재원들의 골프활동에 동참해야 한다. 일부 주재원들은 퇴근 후 기숙사에 주거하는 조선족여직원을 ‘스트레스 해소’에 필요한 맛사지, 쇼핑 등의 사적인 일에도 ‘통역’으로 데리고 다닌다. 철강회사 P사의 현지파트너인 미모의 K사장(조선족)은 주말이면 더욱 바쁘다. 현지주재원들의 골프모임에 필히 참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조선소 S사에서 대리로 취직했던 한국 대학원 후배 조선족 H군의 기막힌 퇴사 이유는 ‘어글리 코리안’의 치졸한 행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직계상급 한국인 팀장(주재원)이 현지애인의 통역으로 시도 때도 없이 후배를 불러내 괴롭힌 것이 주요인이다.

평소 주재원들은 조선족직원에게 당한 피해를 확대과장하면서 조선족은 ‘한국어를 아는’ 중국인이라고 험담한다. 반면 ‘황제’로서의 특권을 향수할 때는 ‘피를 나눈’ 한민족이란 이유로 민족의 동질성을 강조하면서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요하기도 한다. 또한 업무차질이 빚어지거나 사고가 발생하면 주재원들은 무작정 조선족직원만을 탓한다. P사의 영업부 S과장은 한국회사에서만 십몇 년 간 근무한 베테랑 일꾼이다. 그런데도 ‘조선족’이란 이유로 월요일 오전 주간회의에서 독재자로 군림하는 주재원(CEO)의 책망을 가장 많이 받는 화풀이대상이다. 그래서 중국직원들 사이에는 ‘일 많이 하는 직원일수록 욕을 더 먹는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대개 한국주재원들은 늘 애꿎은 조선족직원을 질책하는 방식으로 중국인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권위를 나타내고 허세를 부린다.

기가 팍 죽어 있는 S과장은 마치 잘못을 저지르고 ‘양반앞에 선 상놈’을 연상케 했다. 오호통재라, 불쌍한 조선족이여! 그네들은 오로지 ‘신하의 존재’로만 살아가는 이 시대의 사회적 약자이며 영원한 ‘2등국민’인 약소군체일 뿐이다.

현재 대다수의 주재원들은 평소 중국직원들에 대해 나이 여하를 불문하고 ‘애들’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 더욱이 ‘언어가 통하는’ 조선족직원들에게는 경력여하를 불문하고 무조건 반말과 막말을 일삼는다. 마치 양반이 상놈을 대하듯이 하는 상투적인 용어에서도 황제(주재원)와 신하(조선족)의 위계질서를 엿볼 수 있다. 또 한국회사의 기업문화 특징인 회식에서도 주재원과 조선족 직원 간의 상하 위계질서가 여실하게 반영된다. 회식장소에서 항상 주재원들의 기분과 비위를 맞추고 분위기와 흥을 돋구는 것은 당연히 조선족 직원의 몫이다. 또한 술좌석에서 주재원들이 강권한 폭탄주를 과음하고 다음날 아침 출근에 간혹 지각해서 한바탕 야단을 맞는 것도 역시 조선족 직원들이다. ‘불쌍한 신하’들이다.

대개 한국주재원들은 현지기업에 엄격한 상하 수직관계와 차별대우, 스트레스 등 한국 기업문화를 그대로 옮겨와 주재원들의 특권과 권위를 행사한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야근·잔업의 강요이다. ‘칼 퇴근에 습관된’ 중국인 직원들은 거의 야근을 하지 않는다. 주재원의 권위를 나타내는 잔업의 ‘최적임자’가 만만한 조선족 직원들이다. 또한 회사에서 업무상 차질이 발생할 경우, 주재원들은 곧바로 ‘언어가 통하는’ 조선족 관리자들을 불러 문책한다. 아울러 문제의 책임은 조선족 관리자가 떠안는 것이 통상적 관례이다.

철강회사 P사 중국법인에서 발생했던 사례이다. 언젠가 본사 재무검사팀이 왔다간 후 책임감이 강한 조선족 Y(재무)과장이 의외로 경고처분을 받았다. ‘재무전문가’인 관리부장 밑에서 ‘시키는 서방질’이나 한 Y과장이 억울한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은 자타가 공인한 일이었다. 주재원(부장)의 무책임한 책임전가에서 기인된 ‘원통한 사건’이었다.

현재 한국회사에서 조선족 직원들은 ‘같은 한민족’이라는 이유로 현지주재원들의 애꿎은 화풀이대상이 되는 ‘억울한 일’은 비일비재하다. 중국인 직원에게는 불가능한 평일야근과 주말서비스는 ‘당연한 일’로 치부된다. 평소 한국주재원들은 걸핏하면 조선족 직원을 불러 한족 직원들 앞에서 호통을 치고 훈계를 하면서 황제의 존재를 각인시킨다. 또 중국정부에 대한 불평·불만도 조선족 직원에게 늘어놓는다. 이래저래 불쌍한 것이 조선족 직원들이다. 어쩌면 그들이 한민족으로 태어난 것이 ‘잘못’이며 한국어를 아는 것이 ‘죄’다. 주재원이 조선족(직원)을 무시하고 깔보면서 심적인 열등감을 심어주는 행태의 심리적인 이면에는 ‘우리는 황제(양반)이고 너희들은 신하(상놈)’라는 괴상한 논리가 깔려있다.

한국회사에서 ‘만년과장’으로 장기간 근무한 베테랑 조선족 관리자들은 한국 기업문화와 한국인의 문화정서를 인지하고 있다. 또한 다년간 한국회사에서 한국주재원의 독단행정과 차별대우에 습관된 그들은 주재원의 특권 남용 등에 대해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그들이 갖은 수모와 인격무시를 감내, 황제(주재원)에게 충성하고 ‘섬김에 열중’하는 것은 한족 직원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중간관리자 위치를 확보하고 회사 ‘2인자’로서의 요직을 지속적으로 차지하기 위해서이다. 오로지 상하 위계와 수직문화가 범람하는 경영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 권위에 영합하는 얄팍한 처세술이다. 미상불 이는 21세기 재중한국기업에 실재하는 ‘2등국민’ 조선족 직원의 현주소다. 이 또한 소수민족 삶의 비애이다.

현재 주재원과 조선족 직원의 잘못된 ‘공생관계’는 재중한국기업에만 특유한 현상으로서 반드시 지양되어야 한다. 이는 현지화 경영에 차질을 빚는 중요한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한국주재원들은 조선족과 한족 직원에 대한 강한 선입견을 버리고 편견없이 대해야 한다. 그것이 현지 인적자원을 충분히 활용하는 현지화 전략에 부합된다. 또한 중국의 내수시장 진출에 필수불가결한 현지 우수한 고급인력을 중용하고 적재적소에 배치해야 한다.

요컨대 한국주재원과 중국 직원 간의 상호신뢰를 전제로 하고, 그 바탕에서 ‘평등하고 차별없는’ 공존공영의 상생관계가 이뤄질 때, 중국에서의 현지화 경영이 성공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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