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 플랜만은 양보 못한다.
    첫번째 바퀴는 달리고 두번째 바퀴는 첫번째보다 좀 더 빨리 달리고 세번째는 두번째보다 빨리라는 식으로 운동장을 거듭 돌 때마다 스피드를 높혀 마지막 바퀴에서 전속력으로 달린다. 
    서서히 차오르는 숨이 드라마틱한 육상트레이닝, 업 플랜. 나는 이 업 플랜을, 남의 시선을 상관하지 않고 진심으로 달린다. 초반에는 제일 뒤에서 얌전히 달리다가 마지막 바퀴째에서 최대한 스피드를 내 다른 부원들을 한사람씩 제치고 결국에는 악으로라도 1등으로 골인한다. 업 플랜은 어디까지나 연습이고 각자의 페이스를 조절하기 위한것일뿐이지만 진짜 경기에서는 절대로 이길수가 없으니까 여기서 열심히 하는수밖에 없다. 
    《빨리 다릴수 있을것 같다》는 말을 들은, 보기에는 그럴듯한 이 다리는 비겁하게 움직이는데 있어서 또한 남다르다. 모두의 허를 찌르기 위해 갑자기 페이스를 바꾸거나 다음날 아침 근육통으로 움직일수 없을만큼 라스트 스퍼트를 가하거나 커브에 접어들 때 옆 아이와 우연을 가장해 부딪치는 등 이기기 위해서 뭐든 다 하는 씩씩한 내 다리.
    하지만 아무리 이기고 싶다 하더라도 과욕은 금물이다. 앞서 달리는 부원을 제치려고 마지막 커브에서 몸을 너무 기울이면 자칫 굴러버릴수 있으니까.
    《하츠! 괜찮아?》
    입주변에 모래를 잔뜩 묻힌채 갓 태여난 염소새끼처럼 몸을 일으키다가 이내 쓰러지고 마는 나를, 달리기를 중단하고 다가온 선두의 아이가 걱정스러운듯 내려다본다. 다른 부원들도 달리기를 멈추고 《괜찮아? 괜찮아?》하며 내주위로 모여든다.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고 있을리가 없다. 단지 모두 어떻게든 땡땡이치고 싶은것이다. 업 플랜은
    《선생님, 부상자가 생겼어요!》
    《하츠는 가서 상처를 씻고 오고 다른 사람들은 트랙으로 돌아가 업플팬을 계속하도록.》
    《어? 몇바퀴째였지?》
    《선생님, 하츠가 넘어지는바람에 놀래서 다들 몇바퀴 뛰였는지 잊어버렸는데요.》
    시치미를 떼는 부원들에게 선생님은 떠름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너무 연기하는 티가 난다. 미간에 어색하게 주름을 잡는 폼이.
    《어쩔수 없는 놈들이군. 그럼 지금부터는 부 운영회의 시간을 갖겠다.》
    《그 말씀은 이걸로 기초훈련을 끝이라는거죠?》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는데?》
    선생님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부원들을 흘겨본다. 선생님이 부원들에게 보내는 이 《장난스러운 시선》을 목격할 때면 늘 한가기 돈다.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선배 부원들이 손벽을 치며 과장스럽게 기뻐하자 신입 부원들인 1학년생들도 즉시 흉내를 낸다. 판에 박힌 전개과정이다. 부원들은 선생님의 작은 실수에도 깔깔 웃어주고 선생님의 필사적인 개그― 그러나 그다지 신통치 못한 ―에도 깔깔대며 맞장구를 쳐줌으로써 올해부터 고문을 맡은 백발에 입이 좀 비뚤어진 설교자풍의 선생님을 《엄격하나 좀 어딘가 모자란 선생님》이라는 전시품(展示品)으로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선생님 역시 《나도 알고보면 재미있는 사람이란다》 하는 식으로 그녀들에게 다가간다. 어쩜 서로의 수요와 공급이 잘 맞아떨어진건지도 모르겠다.
    옆에서 허들 종목을 연습하던 남자 부원들은 선생님이 어르고 달래지는 모양을 씨익 웃으면서 바라보고있을뿐이다. 녀자들이 추켜세워주는 편이 효과적일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긴 하지만 녀자를 밝히거나 하는건 아니니까. 선생님은 녀자들이 모여드는게 기쁜게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드는게 기쁜것이다. 내게는 그것이 보인다. 그리고 선생님이 사람들에 둘러싸여 날아오를듯한 표정이 될 때마다, 생기가 넘쳐흐를 때마다 나는 스스로의 삶의 방식에 대해 자신을 잃어간다.
    《그렇지만 회의는 할테니까. 모두 써클룸으로 이동하도록!》
    좋아하던 선배들의 얼굴이 순신간에 교활한 표정으로 바뀐다. 
    《써클룸이 아니고 교실이지요? 그런 좁은 써클룸에는 녀자부원이랑 남자부원이랑 다 못 들어가요. 에어컨도 없고.》
    선배들의 얼굴은 우, 아래가 전혀 다른 표정을 하고있다. 눈은 째려보고있다는 말이 딱 어울릴만큼 키쳐뜬 눈이고 입은 치아가 예쁘게 드러난 상큼한 미소.
    《그럼 교실로 할가?》
    선생님, 당신께서 물으시면 어찌합니까? 철근이 들어있기라도 한듯 곧은 등에 체육복 차림을 한 선생님이 녀고생들한테 휘돌리고있는 꼴을 보고있자니 화가 난다기보다 허탈해진다. 녀자부원들은 잽싸게 몸을 움직여 스트레칭도구와 연습도구따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남자부원들 역시 아직 선생님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벌써 허들을 체육관 창고로 나르고있다. 이런식으로 써클활동을 빨리 끝내고 남는 방과후의 시간을 남녀부원들은 서로간의 친목을 다지는 시간으로 삼고있는것이다.
    뒷정리와 더불어 모래먼지가 연기처럼 피여올라 나는 콜록거리며 일어섰다.
    운동장의 하얀 지면에 푸릎에서 흘린 피가 떨어져있다. 어쩐지 창피해져 운동화바닥으로 지우고 해빛이 반사돼 눈부시게 새하얀 지면우를 아픈 다리를 끌며 걸었다. 
    하늘이 맑게 갠 날이 운동장은 한없이 넓다. 저 멀리 운동장 한쪽에서 수도가가 빛나고있었다. 걸어가는 도중 운동장중앙에 똑바로 정렬해있는 하이삭스의 흰 빛이 눈부신 핸드볼부옆을 지나쳤다. 더워 보이는 긴 팔자주색 유니폼을 입고있음에도 그녀들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늘어서서 선생님의 점호에 옛! 옛! 하고 대답하고있다. 
    제법 기합이 들어있네.
    중학교시절의 배구부가 떠오른다. 그런 단체경기는 이젠 무리다. 분명 몸이 따라주지 않을거다.홀로 싸워야 하는 육상을 알아버린 지금 팀원들과 주고받는 눈사인은 낯간지럽다. 
    보송보송 말라있는 수독가에 다달아 커다란 수도꼭지를 비틀었다. 해빛에 새하얘진 콘크리트 개수대우로 폭포수같은 물이 떨어져흘러간다. 수도를 우쪽으로 향하게 하고 무릎에 난 상처에 물을 갖다대자 상처의 빨간 색이 더욱 선명해졌다. 태양열에 데워진 미적지근한 물이 무릎을 타고 흘러내려 양말을 적신다. 상처부위의 모래를 다 씻어낸 뒤에도 수도꼭지를 잠그지 않고 용솟음치는 물이 복사뼈 부근까지 스며드는것을 아무 생각없이 그냥 내버려두었다. 
    수돗가 너머로 학교건물에서부터 완만히 뻗어내린 가로수언덕길을 따라 이쪽으로 달려오고있는 사람이 보인다. 점점 가까와진다. 달리는 진동에 맞춰 머리카락이 검은 해파리처럼 흔들리고있다. 니니가와다. 내 앞에까지 온 그의 앞머리는 땀에 젖어 얼굴에 무겁게 눌어붙어있다.
    《계속 운동장에 있었어?》
    《응.》
    《그래? 그런줄도 모르고 괜히 학교건물을 다 뒤지고다녔네.》
    몸을 앞으로 조금 숙긴채 눈을 감고 호흡을 진정시키고있는 그는 여름햇살과 운동장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저기, 혼자서 무지에 가봤는데 역시 그 약도로는 올리짱을 어디서 만났는지 잘 모르겠거든. 네가 좀 안내해주지 않을래?》
    《지금은 써클활동중이라 곤란해.》
    《써클활동? 아무도 없는데…》
    뒤를 돌아보자 눈앞에 아무도 없는 황량한 운동장만 펼져진다. 질질 끌고온 내 다리가 남긴 구불구불하고 기다란 선만 운동장을 가로질러있고 그밖에는 정적. 
    육상부원들은 선생님과 회의하러 교실로 들어갔다 쳐도 소프트볼 부원들이나 축구부는 어디로 사라졌지? 방금전까지 분명히 들렸던 구호소리나 호령소리도 없다. 모두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내 뒤에 틀어놓은 수도꼭지의 물줄기소리만 주위로 울려퍼지고있다. 
    《광화학 스모그주의보가 발령됐다는 교내방송이 있었어. 그래서 실외써클활동은 전부 중지된걸로 알고있는데? 우리도 빨리 어디 그늘로 들어가지 않으면 눈이 아리기 시작할거야.》
    그러고보니 아까 업플랜드 도중에 선생님이 학교건물에서 달려나온 학생과 이야기하고있는것을 얼핏 본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때 분명 과화학 스모그경보가 발령됐다는 소식을 들었겠지. 그럼에도 선생님은 그 사실을 부원들에게 알리지 않고 실내회의로 몰고 가버렸다.
써클활동을 중지해야 했던건 광화학 스모그탓이였음에도 마치 자기가 선심 쓴것처럼 보이기 위해 선생님의 머리속에 맴돌았을 그 치졸한 계산을 생각하자 울고싶어졌다. 
    《어? 다쳤네?》
    니나가와가 가방에서 작고 빨간 곽을 하나 꺼냈다. 뚜껑을 열자 안에서 당연하다는듯 반창고가 나온다. 반창고의 종이껍질을 벗겨내는 그의 손놀림을 보고있는데 땅바닥우로 땀방울이 떨어져 까만 얼룩이 번진다. 넘어졌을 때 팔에 들러붙은 모래는 해볕에 그을린 팔보다 오히려 하얗다. 하늘 저 멀리에서 헬리콥터의 낮은 소리가 점점 가까와지고있었다.
    《터진 상처를 보기가 무서우니까 이렇게 반창고를 붙이는거야.》
     바자속에 교복셔츠를 넣어 입은 왜소한 구급대원은 광범위한 찰과상에 신중히 반창고를 붙였다. 나도 모르게 간지러운듯한 기분 좋은 감각이 몸안으로 퍼져나간다. 니나가와를 내려다본다는건. 어쩐지 기분 좋은 일이다. 그의 까만 머리가 금방이라도 손에 닿을듯한 곳에 있다. 
    《라고, 올리짱이 잡지카럼에서 말한적이 있어. 자, 그럼 또 봐.》
    그는 몸을 일으키더니 교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오늘 학교에서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눈 사람.
    《기다려, 나도 갈게.》
    나는 종종걸음으로 그를 쫓아 아무도 없는 운동장을 뒤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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