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자만은 먹고 가주마. 하고 포장지를 뜯으면서 희미한 옛 기억을 마지못해 끄집어올렸다. 그래. 그 사람이 먼저 말을 걸어왔었지. 아무리 해도, 라고 할 정도는 아니였지만 이쪽에서 먼저 쉽게 이야기를 걸수 있는 사람은 분명 아니였으니까. 큰 보폭으로 걸어오는 모습, 맨발에 신은 큼직한 스니커즈… 올리짱을 떠올리자 가슴이 먹먹해져온다. 그 시절의 내 모습도 함께 떠올라버렸기때문이다.
    《…애완용 동물 사료 캔CF…》
    《CF에 나오는 사람 얼굴따위, 일일이 기억 못해.》
    《그게 아냐. 사람이 아니라. 왜 그런 CF에서 초원 같은 델 슬로우 모션으로 달리는 커다란 개 있잖아. 콜리라든가 골든 레트리버라든가.》
    《개?!》
    《응, 그런 개랑 닮았어.》
    푸른 초원이 잘 어울리고. 바람에 탐스럽게 날리는 갈색 털과 순한 눈동자를 가진, 그리고 한눈에 봐도 돈을 많이 들인 티가 나는 도시의 개.
    니나가와는 상자안에서 옛날 패션잡지를 꺼내더니 어느 페이지인가를 펼쳐서 나에게 보여준다.
    《하세가와가 만난건 진짜 올리짱이 틀림없어. 올리짱, 시청에서 촬영있다고 해댔지? 이 사진 좀봐. 확실히 우리 시의 시청이야. 페이지 오른쪽끝에 촬영지도 나와있어.》
    그가 말한대로 고풍스러운 시청앞에서 건물에 어울리지 않는 발랄한 미소의 올리짱이 포즈를 취하고있었지만 그것을 봤댔자 별 감흥은 없다. 아무래도 좋다. 지금은 과자가 맛있다는게 유일한 락이다. 고급 양과자인지 볼이 미여지도록 통채로 입에 넣고 씹자 달고 진한 맛이 혀바닥 가득 느껴졌다.
    《알았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촬영현장을 보러 갔을텐데. 하지만 그때는 아직 팬도 아니였고 올리짱이라는 사람 자체도 몰랐으니까… 이 사진을 발견했을 땐 정말 억울했어. 눈앞에 두고도 모르고 스쳐지나간 셈이여서. 아니, 정말은 스쳐지나간적도 없지만 말이야. 하지만 지금 정말로 그녀를 봤던 사람을 만나다니 진짜 운명이라는 느낌이 든다. 올리짱하고 나.》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간접적으로 이랴기를 전해들은 그보다 실제로 올리짱을 만난 내쪽이 올리짱과의 《운명》은 훨씬 더 강할터이다. 흥분해서 이야기를 계속하고있는 니나가와옆에서 올리짱과 만났던 날의 일들을 떠올렸다. 그녀는 그 어떤 기억보다도 선명하게 중학교때의 나를 상기시킨다. 지금보다도 주변에 무관심하고. 그런 까닭에 강했던 때의 나를.

    중1 여름방학은 다른 학교와의 배구 연습경기때문에 매일아침 전철을 타고 이웃동네를 오가던 나날이였다. 그리고 전철을 타기전에 역앞 무지에 들르는것은 빼놓을수 없는 나의 일과였다. 그날도 당연하다는듯 아침 열시에 개점하자마자 바로 그 가게에 발을 들여놓았다.
    산뜻한 배경음악이 흐르는, 흰색과 검정 그리고 베이지색의 잡화(雜貨)들로 통일된 점내를 나는 학교이름이 들어간 경기용 빨간 반바지와 티셔츠차림으로 네개의 배구공이 든 가늘고 긴 스포츠백을 둘러메고 걸어간다. 걸음을 뗄 때마다 깨끗하게 닦인 바닥우로 운동화바닥에 드러붙어있던 모래를 떨어뜨리면서.
    개점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이기때문에 탁 트인 3층짜리 건물에는 손님이 거의 없다. 《MUJI》라는 카페가 있는 널다란 1층 역시 텅 비여있다싶이 하다. 나는 뭘 살 생각은 없다. 그저 아침식사를 하고싶을뿐. 향긋한 커피냄새를 풍기는 카페를 지나 늘 가던 장소로 향한다. 바삭한 맛의 세계가 은빛으로 감싸인 곳으로. 넓은 콘플레이크 매장에는 각기 다른 종류의 콘플레이크들이 가득 들어찬 탱크가 죽 늘어서있다. 탱크의 검정 밸브를 당기면 수도꼭지에서 물이 흘러나오듯 콘플레이크가 갈색 종이봉투안으로 떨어져내린다. 하지만 밸브를 당길수 있는건 콘플레이크를 담을 종이팩을 산 사람들뿐이다.
    내가 노리는 건 탱크밑의 작고 흰접시에 담긴 시식용 콘플레이크. 전 종류 제패를 목표로 쓱 하고 손으로 집어먹으며 접시의 반 정도를 해치운 뒤 다음 접시로 자리를 옮긴다. 아침, 접시에 담은 얼마 안되는 시식용 콘플레이크는 어떤 종류든 고소하고 맛있다. 그중에서도 달콤하고 심플한 맛의 설탕 발린 콘플레이크가 가장 마음에 든다. 그리고 건포도가 섞인 콘플레이크도 맛있다. 나는 콘플레이크를 량손으로 집어올려 입으로 가져가 먹는다. 이 시식이 바로 나의 아침식사.
    그때 어딘가에서 나를 바라보는듯한 시선을 느꼈다. 콘플레이크로 볼을 가득 부풀린채 주변을 둘러보자 MUJI 카페의 손님이 이쪽을 보며 웃고있는게 보였다. 유리벽너머에 녀자 한명과 남자 한명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내쪽을 바라보며 로골적으로 웃고있다. 뭐야. 저 주접스런 애는! 따위의 이야기를 하면서 웃고있는것인지도 모르지. 혹시 그렇다고 해도 그만둘 생각은 없다. 아직 먹지 못한 콘플레이크가 두 종류나 남았는걸. 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선반 그늘에 숨어 라스트 스퍼트(Last spurt)를 올려 콘플레이크를 입에 쑤셔넣었다.
    《어디?―》
    불쑥 활달하고 큰 목소리가 카페쪽에서 들려왔다. 나도 모르게 숨을 죽인다. 어디? 하고 묻는걸 보니 목소리의 주인공은 사람을 찾고있는것 같다. 하지만 이쪽에 있는 사람이라곤 나밖에 없다.
    목소리는 한동안 어디?― 여기?― 하며 선반을 이곳저곳 기웃거린다.
    《아! 있다.》
    뒤에서 목소리가 나 돌아보자 방금전까지 카페의자에 앉아있던 녀자가 있었다. 스타일도 그렇고 치렁치렁한 갈색머리도 그렇고 마치 외국인처럼 생긴 녀자가 물컵을 들고 서있다.
    《콘플레이크 맛있니?》
    허스키한 목소리. 숨결에선 술냄새가 풍기고. 눈은 하품하고난 뒤처럼 젖어있다.
    《물이야. 콘플레이크만 먹으니까 목이 메이지?》
    키가 큰 그녀는 내 눈높이까지 허리를 숙여 컵을 건넨다. 눈앞에 갑자기 얼굴이 다가와 나는 무의식중에 턱을 끌어당겼다. 가지런한 생김새. 혼혈아인지 오로지 눈만 동양인같이 쌍거풀 없는 까만 눈을 하고있다. 그 눈과 높은 코가 잘 어울리지 않아서 외국인을 흉내내느라 과장스런 코를 붙인 개그맨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녀가 상냥하고 다정한 눈으로 뚫어지게 쳐다보는 바람에 얼굴이 달아오르고 식은땀이 솟았다. 몸이 축 늘어지는듯한 기분으로 컵안의 물을 단번에 마셔버렸다. 물에 젖은 입주위를 팔로 거칠게 닦아내는데 그녀가 《모노노케 히메(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원령공주>의 주인공― 옮긴이) 같애.》 하며 호들갑을 떤다. 그러더니 별안간 아이처럼 풀썩 쭈그리고앉아 내 다리를 주시했다.
    《네 다리 멋지다. 굉장히 빨리 달릴수 있을것 같은데. 단단해보이는게. 좋겠다. 나도 앞으론 이런 다리로 만들어볼까 나.》
    나도 덩달아 고개를 숙여 내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우엉 두줄기. 이 다리를 칭찬받아보기는 처음이다.
    《어머, 근데 어깨에 메고있는건 공이니? 그럼 달리기가 아니라 다른 스포츠를 하고있구나?》
    그녀가 안타깝다는듯 말했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안타까워하는 표정이 눈앞에 떠오르는 목소리. 어떻게 하면 목소리에 저렇게 표정을 잘 담아낼수 있을까?
    녀자의 하얀 손이 내 다리를 만진다. 장딴지의 근육이 반사적으로 굳어진다.  고 생각한 순간, 그녀가 벌떡 일어서더니 카페에 있는 남자를 향해 돌아서서 큰소리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영어다. 돌아오는 대답도 영어.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남자의 팔은 길고도 하얗다. 녀자옆에 서자 키가 콘플레이크 선반보다도 컸다. 두사람의 하얀 스니커즈 역시 이제까지 그런 사이즈를 본적이 없을 정도로 크다. 존재감 있는 네개의 신발은 잘 닦여 윤기가 나는 바닥우에 네척의 배처럼 떠있다. 여자가 내 다리를 가리키며 카메라를 가진 남자에게 뭔가 영어로 설명하는듯하더니 갑자기 내 다리가 플래시빛을 받아 번쩍였다.
    《이 사람은 카메라맨인데 기념으로 한장 찍었어. 네 다리.》
    녀자가 장난스럽게 웃는다. 카메라를 든 남자도 웃으면서 자신을 가리키며 포토그래퍼라고 한다. 그리고 녀자를 가리키며 슈퍼모델이라고 한다. 녀자가 고개를 젖히고 웃으면서 남자의 등을 때렸다. 대단히 사이가 좋아보인다. 나도 미소를 지으려고 했지만 얼굴근육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아 입술이 옆으로밖에 벌어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남자가 장난스러운 몸짓으로 시식용 콘플레이크를 집더니 녀자에게 먹이기 시작한다. 녀자도 새처럼 고개를 까딱여 콘플레이크를 집어 문다. 어딘가 에로틱한 광경. 하지만 여기서 멋쩍어하며 돌아서거나 하지 않으면 이 사람들과 친구가 될수 있을지도 몰라. 이어서 콘플레이크가 내쪽으로 다가왔다. 그의 갈색 눈동자가 기분 좋은듯 물기를 머금고있는게 틀림없이 술에 취한것 같다. 나와 눈을 맞추고는 있어도 날 보고있는것 같지는 않다. 바라는대로 콘플레이크를 먹으려고 입을 약간 벌렸지만 막상 먹으려니 망설여졌다. 코앞에서 흔들리고있는 이 한알의 콘플레이크는 이제까지 내가 먹은것과 다른 의미의 콘플레이크다. 그녀가 먹은것과도 다르다. 하지만 콘플레이크를 들고있는 이 외국인과 나는 아는 사이도 무엇도 아닌데…
    그래. 모이다. 모이라고 생각하자.
    나는 입을 반쯤 벌린채 목만 움직여 침을 삼켰다. 나 자신이 점점 어쩔줄 몰라하는 얼굴이 되여가는것이 느껴졌다. 솔직히 별로 먹고싶지 않다. 하지만 분위기를 깨는것도 두렵다. 나는 등을 곧추세우고 고개를 숙여 그가 손가락으로 들고있는 다갈색 콘플레이크를 앞이로 물었다. 혀에 딱딱한 엄지손톱의 감촉이 느껴졌다.
    나도 분위기를 타거나 할수 있다. 해냈다. 분위기를 띄웠다.
    고개를 숙인채 남자의 눈빛을 살폈다. 그 어떤 말보다 확실히 알고있는 그 눈빛. 남자는 기분이 상해있었다.
    《어머나, 미안 미안!》
    녀자가 큰소리로 사과하는 바람에 놀란 나는 물고있던 콘플레이크를 떨어뜨렸다. 그녀는 곤란한듯 웃으며 《미안해. 이런 장난을 쳐서.》라고 말한다. 전혀 악의 없는 말투. 하지만 《부끄러움》이라는 화살은 마구 비발쳐든다. 몸이 후끈 달아오른다.
    혹시 지금의 나. 꼴불견이였던걸까? 사과를 받아야 할 정도로. 어쩜 장난에 어울리지 않는 궁지에 몰린 표정을 하고있었는지도 모른다.
    당황해서 애교 부리듯 수줍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순간 웃고있던 녀자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고 나는 더 이상 자신이 모노노케 히메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북한 침묵을 깨려는듯 그녀가 경쾌하게 떠들어댄다.
    《우리는 사진촬영때문에 이 동네에 왔어. 너희 동네 시청. 왜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서양식건물 있지? 그앞에서 사진찰영을 할 예정이야. 이렇게 더운데 잡지 발매시기때문에 가을옷을 입어야 해서 걱정이야. 땀이 뻘뻘 날텐데. 그래서… 뭐, 그렇다는거지.》
    자기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으면서도 따분해진 그녀는 남자와 눈을 마주치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두사람은 서로 진지한, 술이 완전히 깼다는듯한 얼굴로 가게를 빠져나갔다.

    《니나가와, 나 슬슬 가볼게.》
    과자를 다 먹고 포장지를 손으로 구기면서 그렇게 말하자 올리짱에 푹 빠진채 이야기를 계속하고있던 그는 입이 반쯤 벌어진 멍한 얼굴로 일어서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날 올리짱의 눈에 나도 저런 식으로 비쳤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애잔하게 저며온다.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방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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