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로 차주고싶은 등짝3

    해질 무렵, 써클활동을 마친 나를 니나가와가 교문앞에서 기다리고있었다.
    《왔어?》라고 한마디 건넸을뿐 더 이상 아무 말이 없는 그의 뒤를 따라 우리 집과는 정반대방향이라 한번도 다닌적이 없는 좁은 길로 들어섰다. 앞서 걷는 니나가와의 그림자가 검고 길게 드리워져 뒤따라가는 내 발치에 그의 머리 부분이 놓여있다. 그림자를 밟을 때마다 교과서가 들어있는 가방이 무거워지는 느낌이 든다.
    주변의 신축 양옥들과 달리 니나가와네 집은 낡은 단층집이다. 철문 안쪽으로 축축해보이는 납작한 돌들이 깔려있고 그끝에 미닫이식의 작은 현관문이 있다. 니나가와가 문을 열자 가늘고 긴 비명소리와 함께 문이 삐걱거렸다. 문패에 새겨진 충(蟲)변의 어려운 한자는 어딘지 모르게 달팽이를 련상시킨다.
    집에 들어가기전에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했지만 어두침침한 방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부모님은 일하러 나가고 안계셔.》
    그는 신발을 벗고 조용히 집안으로 들어간다. 옛날집이라 그런지 천장이 낮고 전체적으로 조촐하고 아담하다. 현관 정면에 있는 미닫이문 역시 닫혀있었다. 니나가와가 그옆의 반투명 유리문을 열자 마루가 깔린 어둑어둑한 복도가 나타났다. 길게 이어진 복도를 걷는 동안 양말을 통해 마루바닥의 랭기가 발바닥에 스며든다. 지금이 초여름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하는 집이다.
    복도끝에 있는 문으로 나가자 해빛이 잘 들지 않는 안뜰이 나왔다. 섬돌우에는 세짝의 슬리퍼가 놓여있다. 니나가와는 말없이 슬리퍼를 신고 뜰을 가로질렀다. 나도 슬리퍼를 신고 뜰에 내려섰다. 뜰은 분재와 헌 잡지, 작은 구식 세탁기와 건조대따위가 놓여있어서 결국 지붕없는 창고라 부를만한 곳이였다. 발목까지 자란 잡초엔 모기가 무리를 짓고있다.
    《왜 이런데로 온거야?》
    《내 방으로 가려면 이리고 가야 해.》
    니나가와는 뜰 저쪽으로 가더니 갈색 담벼락에 섞여있어서 그 존재를 깨닫지 못했던 쪽문 비슷한 작은 물을 열었다. 그러자 그 문 안쪽에 당돌하게도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잡초가 무성한 뜰에서부터 바로 계단이 련결된 그 광경이 너무나 기묘해 보고있자니 현기증이 이는듯했다.
    《이 집 원래는 단층집이였는데. 나중에 2층을 올리는 바람에 일단 정원으로 나오지 않으면 2층으로 갈수 없는 구조로 되여있어.》
    니나가와가 울퉁불퉁한 벽을 손으로 더듬어 불을 켜자 좁고 가파른 계단이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 증축된거라고 해도 이 2층은 내가 태여나기전부터 있었지만 말야.》
    확실히 계단은 년륜이 있어보이고 튼튼해보이는 거무스름한 나무로 되여있어 옛날 학교계단을 련상시켰다. 우리들이 계단을 밟고 올라설 때마다 천장의 오렌지색 전구가 푹죽의 불꽃처럼 가늘게 떨렸다.
    계단이 끝나고 정면의 빛바랜 장지문을 열자 거기에 다다미방이 있다. 마치 주사위속같은 정방형의 방은 커다란 창문이 있음에도 어두침침하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건 방구석에 놓인 학습용 책상.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책가방과 함께 선물 받았던것과 같은 모델로 정면에 만화 포스터를 장식할수 있는 타입이다. 그 책상만이 묘하게 아동틱해 그밖의 수납장이나 작은 구식 랭장고, 목각인형과 일본 인형이 담긴 유리상자따위가 놓인 낮은 옻칠서랍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거꾸로 말하자면 유일하게 책상만이 평범하고 다른것은 극히 로인취향이다. 남자방에 들어와 본게 처음이긴 하지만 이렇게 촌티나는 방에서 생활하고있을줄이야 라고 할까. 하긴 이 방이 좀 특이할뿐인지도 모른다. 
    《인형을 좋아하나보지?》
    《별로. 옛날부터 거기 있었으니까. 그냥 내버려둔것뿐이야. 돌아가신 할머니가 남긴 유품중 하나라던가.》
    유품… 목각인형을 잡으려던 손을 재빨리 거두어들인다. 
    유일하게 제대로 된 물건 같았던 책상도 가까이 가서 보자 아주 희한했다. 치솔·치약이 샤프·칼 따위와 함께 연필꽂이에 꽂혀있다. 책상선반에는 학습도구뿐아니라 고추가루병이나 우스타 소스(여러가지 과일과 야채를 혼합해 만든 일본의 소스―옮긴이)따위가 놓여있고, 교과서옆의 플라스틱상자안에는 숟가락·저가락·포크가 들어있는 나일론 주머니가, 책상의 국어사전우에는 치즈가루대신 먼지가 듬뿍 뿌려진 먹다 남은 스파게티가 얹혀있다. 의자등받이에는 목욕수건까지. 이 작은 학습용 책상에 하루  일과가 전부 집약되여있다.
    《여기서 밥 먹는거니?》
    《응, 편하니까.》
    이 딱딱한 나무의자에 앉아 스탠드 불빛을 받으며 밥을 먹고있는, 고양이등을 한 그를 어렵지 않게 상상할수 있다. 그때 갑자기 니나가와가 한쪽 팔을 천천히 공중으로 들어올려 깜짝 놀랐다. 최면술이라도 시작하려는건가? 하고 생각한 순간 에어콘이 낮은 기계음을 내며 돌아가기 시작한다. 방금 그 동작은 리모콘으로 스위치를 켜기 위한것이였나보다. 곧 까슬까슬한 랭기가 비린내가 도는 카츠오부시(가다랭이를 얇게 저며 쪄서 말린 포. 일본료리의 국물맛을 내는 조미료로 많이 쓰임―옮긴이) 같은 냄새를 풍기며 미끄러지듯 흘러나온다.
    《옷 좀 갈아입어도 돼? 집에 오면 제일 먼저 편한 옷으로 갈아입거든. 집에서 교복을 입고있으면 안정이 안돼서 말이야.》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는 멋대로 상의를 벗기 시작한다. 나는 꼼짝 않고 창밖을 노려보며 기다리는수밖에 없었다.
    왜지? 왜 나를 여기까지 불러들인거지? 갑자기 무서워지기 시작한다. 오란다고 어슬렁어슬렁 따라온것까지는 좋았는데 왠지 무섭다. 여기는 완전한 1인실이다. 공기가 방주인 한사람분밖에 없어서 숨이 막힌다. 시선을 돌리자 니나가와는 짙은 록색바탕에 검은 줄이 쳐진 오셀로판(바둑과 비슷한 쉽고 대중적인 보드게임―옮긴이) 같은 무늬의 낡은 셔츠와 밑단이 닳아서 하얀실밥이 늘어진 청바지로 갈아입고있었다. 뼈만 앙상하면서도 나보다 크고 생김새가 투박한 그의 발과 팔꿈치에 눈길이 간다. 
    《너한테 반한거 아냐?》 하던 키누요의 말이 떠올랐다. 수업중에 녀성용 패션잡지를 뚫어지게 보고있던 그.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지 전혀 알수 없는 아이.
    니나가와는 랭장고에서 페트병을 꺼내더니 책상 제일밑 서랍에 들어있던 컵에 차를 따라 나에게 건네주었다. 게다가 역시나 책상 제일 밑서랍속에 있는 명절선물로 들어왔을법한 과자상자를 열어 닭알모양의 양과자를 하나 꺼내준다.
    점점 주눅이 들어가는 나와는 반대로 자기의 수조(水槽)속에서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그는 이제 꽤 편해진 모양인지.
    《갑작스런 부탁이였는데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 라고 느리게 말하며 천천히 옆으로 다가왔다.
    《근데 말이야.》
    그의 입에서 침이 튕겨나와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는 《아! 미안!》 하며 당황해서 내 눈밑에 묻은 침을 엄지손가락으로 닦아냈다. 얼굴의 솜털이 싹 하고 쓸리는 작은 소리가 귀를 울리고, 촉촉하고 따뜻한 손끝의 감촉이 피부우로 전해져왔다… 고 생각한 순간 그가 잽싸게 내 등뒤로 돌아왔다. 어떡해! 브래지어를 벗길지도 몰라. 손안의 과자를 꼭 쥐고 겨드랑이밑에 힘을 주고있는데 눈앞에 불쑥 메모용지와 볼펜이 주어진다.
    《미안하지만 여기엡 그려주지 않을래?》
    《그리다니, 뭘?》
    《네가 올리짱이랑 만난 곳의 략도.》
    《올리짱이 누군데?》
    《내가 보고있던 잡지에 나온 패션모델.》
    《아아…》
    그 사람이 올리짱이구나.
    흠. 별로 관심없는데. 왜 지금 그 사람 이야기가 나오는거지?
    《생물시간에 말했잖아. 내가 그 사람을 만난 곳은 역앞의 무지라고.
    그 근방에 무지는 하나밖에  없지. 잡화점  자체도 거기밖에 없지. 눈에 띄게 큰 점포지. 약도니 뭐니 일부러 그리지 않아도 이 근방에 살고있는 사람이라면 절대 모를리가 없는데.》
    《응. 그건 들었어. 근데 그 가게 어디서 그러니까 몇층 뭘 파는 곳에서 그녀를 만났는지 략도를 그려주면 좋겠는데.》
    《그려줄수야 있지만…》
    《정말? 귀찮게 이런 부탁해서 미안해.》
    그릴게. 까짓거 그려드리지요. 뭐 이게 나를 이 집까지 불러들인 목적이라면 그려주어야 하겠는데. 왜 그런걸 알고싶어하는지를 알고싶다.
    《뭐니 그 모델. 네 잃어버린 누나라도 되는거야?》
    《설마, 아냐.》
    리유는 모르지만 일단은 감싸안은 무릎우에 종이를 올려놓고 략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얼마 안가 기다리기 힘들다는듯 니나가와가 들여다본다. 그의 코끝이 점점 종이로 가까이 다가오는통에 약도를 그리는데 집중할수가 없어서 나는 꼬물꼬물 몸을 움직여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러자 눈앞에 선채로 이 방을 둘러봤을 때는 알아채지 못했던 이상한 물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책상밑에 커다란 플라스틱상자가 있었다. 보통은 안입는 겨울옷따위로 가득채워 여름내내 수납장 깊숙이 넣어둘만한, 커다란 덮개가 달린 플라스틱상자가. 상자자체에는 이상하달게 없었지만 놓인 장소가 특이했다. 상자의 크기가 너무 거대해 책상밑의 빈 공간― 원래대로라면 의자에 앉았을 때 발을 까닥까닥 흔들기 좋은 장소― 을 거의 차지하고있었던것이다. 그럼 의자에 앉을 때 발은 어디다 두는거지? 의자우에 정좌하고 앉을수밖에 없잖아.
    《책상밑에 저렇게 큰 상자가 있으면 불편하지 않아?》
    《아니, 이건… 이렇게 하면 되니까.》
    니나가와는 의자우에 무릎을 세우고 쪼그려앉는다. 작게 오그라든 그의 모습이 민망해 눈을 돌렸다. 내가 부끄러워지다니 이상하잖아. 사춘기 남자고등학생이니까. 이런 꼴을 하고있는 그 자신이 좀 부끄러워했으면 좋겠다.
    니나가와가 의자에서 내려온 뒤 나는 지도그리기를 중단하고 책상밑의 물건을 살짝 끌어당겨보았다. 그러자 바닥에 붙어있는 바퀴가 다다미의 결을 따라 스르르 미끄러져 내앞까지 상자가 밀려나왔다. 투명하게 비쳐보이는 내용물중엔 확실히 옷가지도 들어있긴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이건 녀자옷. 언제라도 알현이 가능하도록 플라스틱상자 안쪽면에 붙여놓은듯 들어있다.
    나도 모르게 덮개 량측에서 검게 빛나는 고정핀을 벗겨내자 부드럽고 달콤한 냄새가 드라이아이스 연기처럼 상자안에서 흘러나왔다. 4월호, 5월호, 6월호… 한달도 빠짐없이 1밀리의 틈도 허락하지 않고 빼곡히 꽂혀있는것은 그가 과학실에서 보고있던 그 패션잡지다. 상자 가장 바깥쪽에 있는 잡지에는 예의 그 올리짱인지 뭔지 하는 모델이 표지를 장식하고있다. 잡지뿐만이 아니다. 니나가와는 절대로 걸칠것 같지 않은 크고 빨간 다알리아가 프린트된 현란한 블라우스와 반지 같은 액세서리류도 있다. 상자안의 세계는 굉장히 화려하지만 어딘가 꺼림칙하다. 그런 기분을 억누르기라도 하듯 나는 후닥닥 뚜껑을 닫았다.
    《거기 있는 잡지엔 전부 올리짱이 실려있어. 꽤 오래전에 나온 옛날 잡지도 인터넷 옥션에서 사 모았지. 그밖의 옷같은건 애독자 사은품이랑 라지오 경품이고. 사인이 들어있는 손수건도 있어. 올리짱. 연예활동한지도 오래됐고 활동폭도 넓고 해서 그 정도로 큰 상자가 아니면 다 안들어가.》
    변성기도 다 지난 남자가 올리짱, 올리짱하는게 꽤 거슬린다. 
    《왜 이런 짓을 하는거야? 이런걸 이렇게 잔뜩 모아놓고…》
    《팬이니까.》
    《팬…》
    멍한 목소리로 되새겨본다. 팬. 그 산뜻한 울림. 새로 시판된 청량음료의 이름 같다. 팬이라면 혹시 이 략도도?
    《나 올리짱 팬이야. 죽을만큼 좋아해.》
    그는 진지한 얼굴로 말한다.
    팬이라는 말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뭐라고 설명하긴 어렵지만. 그 경쾌한 울림과 올리짱에 대한 니나가와의 강렬한 감정은 전혀 련결되지 않는다.
    내가 그린 략도를 보더니 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난해하네. 그 가게가 이렇게 복잡한 곳이였나?》
    확실히 마음이 들떠서 그린 탓인지 길은 미로 같은데다 메모용지도 손때와 지렁이 같은 글씨로 더러워져 그걸 그린 나 자신조차 이미 해독 불가능이였다.
    《아니. 종이에 제대로 옮기지 못한것뿐이야. 미안해. 별로 도움이 못돼서.》
    도움이 못돼서. 라는 부분의 목소리에 날이 선다.
    《아냐. 도움이 안되긴! 이 략도대로 한번 가볼게.》
    니나가와는 당황해서 얼버무리고는 나를 사랑스러운듯 바라봤다.
    《내가 지금 이렇게 함께 있을수 있다니… 진짜 올리짱을 본적이 있는 사람과 말야.》
    기분이 어수선했다. 니나가와에게 나란 녀자아이는 《올리짱과 만난적이 있는 사람》으로만 가치가 있는것이다. 나한테 반한게 아니냐니. 잘못 짚어도 유분수지.
    《략도도 그려줬으니까 이제 됐지? 난 이만 집에 갈게.》
    《아, 이거 하나만 더 가르쳐줘. 올리짱 어떤 사람이였어? 닮은 사람이라든가 뭐든 좋으니까 이야기 좀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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