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리로 돌아오자 책상우에 쌓아놓았던 종이산이 사라지고 주변바닥이 군데군데 하얗게 변해있었다. 창문으로 불어들어온 바람이 산을 휩쓸고 지나가 종이조각을 바닥으로 날려버린것이다. 몸을 숙여 종이조각을 주우려 하자 과학실 수조의 비린내를 실은 바람이 종이조각들을 휙휙 날려보낸다. 도망가는 종이조각을 잡으려고 개구리처럼 팔짝팔짝 뛰여다니는 내 모습에는 일말의 따분한 기색도 남아있지 않고. 이젠 질렸다. 뭘 해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간신히 주워 모은 종이조각을 전부 책상우에 올려놓고 다시는 바람에 날려가지 않도록 재빨리 책상우에 엎드려 어미 새가 둥지를 지키듯 팔로 감싸안았다. 얼굴에 종이끝이 닿아 간지럽다.
    한쪽 귀를 약품냄새나는 책상에 붙이고 눈을 감자 오오카나다모의 세포를 그리고있는 연필심이 종이를 통과해 사각사각 책상에 부딪치는 소리가 고막으로 전해진다. 그너머로 현미경을 찰카닥거리는 소리, 이야기소리, 즐거운듯 웃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하지만 내가 있는 곳에는 종이조각과 정적뿐. 같은 책상을 쓰고있어도 저쪽 언덕과 이쪽 언덕은 이렇게나 다르다. 하지만 웃음소리 가득한 저쪽 언덕 역시 나름대로 숨이 막힌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있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차임벨소리에 잠이 깼다. 눈을 떴지만 하얀것이 시야를 가로막고있어 앞이 보이지 않는다. 종이의 둥지안에서 졸고있던 탓에 이마에 프린트조각이 눌러붙어있다. 눈을 한번 깜빡이자, 이마의 피지를 흡수한 종이는 속눈섭에 닿아 소리도 없이 떨어졌다.
    그러자 눈앞에 눈이 있었다.
    나와 똑같이 얼굴을 책상우에 올려놓은 니나가와가, 텅 빈 눈으로 나를 보고있었다.

    그건 죽은 사람의 얼굴이였다. 정말이지 죽은 사람의 얼굴이였다.
    《알았으니까 빨리 관찰노트나 베껴. 제출기한이 오늘오후 4시까지라니까.》
    《그래도 그 얼굴이 잊혀지지 않아… 동공이 열린다는건 분명히 그런 상태를 말하는걸거야. 눈동자가 새까맸다고.》
    《니나가와는 일본사람이니까 눈동자가 까만게 당연하지.》
    그게 아니라구.
    나를 보고있는듯하면서도 보지 않고있던 그의 눈에서는 생기가 몽땅 빠져나가있었다. 인간에게 생명의 전기가 흐르고있다는 가정하에 생생한 사람의 눈일수록 반짝반짝 빛난다고 한다면, 니나가와의 눈은 완전히 정전중이였다.
    《게다가 나, 니나가와네 집에 초대받았어.》
    《왜?!》
    《그건 내쪽에서 묻고싶은 말이야. 느닷없이 <오늘 수업 끝나고 우리 집에 와줄래?> 하더라구. 그 눈엔 왠지 거역할수가 없어서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괜찮을까?》
    《너한테 반한거 아냐?》
    키누요는 태평하게 웃었다. 남의 일이라는 태도다.
    《중학교때부터 함께 지낸 단짝친구한테도 버림받은 난데. 그럴리가 있겠어?》
    《또 그런 소리 한다.》
    키누요는 거북한듯 입을 다물었다. 거북한듯이라고는 해도, 그 거북한 기분을 즐기고있기라도 한지 입가가 고양이처럼 말려올라가있다.
    《미안, 급캔슬( 막바지에 갑자기 취소한다는 뜻의 속어―옮긴이)해서. 그게 말이야, 하츠가 우리 조에 들어오면 우리 그룹 애들중에 한명이 다른 조로 가지 않으면 안됐다구.》
    《급캔슬》이라는 단어의 가벼운 어투와 어깨를 들썩이는 제스처가 맘에 안든다. 고등학교에 들어와서부터 화장을 시작한 키누요는 눈꺼풀에 하얀 아이섀도를 덕지덕지 발라 눈을 깜박일 때마다 새가 깜빡거리는것처럼 보였다. 중학교때 새까맣던 머리도 일명 《겁쟁이 염색》이라 불리는 , 선생님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의 갈색으로 염색하고있다.
    《잘난척하면서 <급캔슬>이니 뭐니 하기는. 적어도 갑작스럽게 취소해서 정말 미안해. 하고 정중하게 사과해야 하는거 아냐?》
    나는 가는 고무줄로 묶은 작고 뾰족한 참새꼬리같은 머리꽁지를 손가락으로 휘저어대며 말했다.
    《…갑작스럽게 취소해서 정말 미안해.》
    《아직도 <캔슬>이라는 어감이 그럴싸해서 열 받으니까, 이번엔 막판에 배신해서 정말 미안해. 라고 한번 해봐.》
    《트럼프 시작한다 키누요!―》
    돌아보니 교실 가장자리에 키누요를 손짓해서 부르는 《키누요네 그룹》이 있었다. 그들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키가 크고 제법 덩치도 있는데다 긴 머리를 예술적일 정도로 복잡하게 땋아내린 녀자아이다. 관악부라고 했던가? 확실히 그녀는 페활량이 좋아보인다고나 할까. 아무리 커다란 관악기라 하더라도 너끈히 불어낼수 있을것 같다. 그녀옆에는 다른 학생들이 전부 하복 블라우스를 입었음에도 혼자만 동복 블라우스를 고수하고있는 단발머리의 신비계(神秘系) 소녀. 그리고 그녀들 뒤편에는 남의 눈치를 살피며 빌빌거리는 주제에 익살스러운 이야기를 입에 달고 사는 말라깽이 남자아이와, 무턱대고 목소리만 큰데다 늘 껄렁껄렁한 남자아이가 이쪽을 보고있다. 모두 얼굴도 체형도 가지각색이라 여러 종류의 잡초를 한데 모아 묶어놓은 다발  같다. 키누요는 어리광부리듯한 목소리로 《금방 갈게―》하고 대답한다.
    《괜찮아. 생물시간에는 하츠를 나 몰라라 하고말았지만, 이제부터 우리 그룹에 넣어줄게. 자, 빨리 관찰노트 베끼고 같이 트럼프하자.》
    《쟤들이랑 같이?》
    엷은 웃음이 피여오른다.
    《삐딱하게 좀 생각하지 마.》
    《삐딱하게 생각하는거 없어. 너무나 삐딱하지가 않아서 탈이지.》
    내 말을 무시한채 키누요는 자기네 그룹을 만족스러운듯 바라본다.
    《나, 옛날부터 남녀혼성그룹을 동경해왔잖아.》
    《확실히 남녀혼성그룹이긴 한데. 누가 녀자고 누가 남잔지 모르겠다.》
    나는 오오카나다모의 세포가 아닌 그들의 캐리커처를 빠른 손놀림으로 그려냈다. 완성되는데 한사람당 5초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는데도 특징이 잘 포착돼 네사람 모두 미안하리만치 닮아있었다. 키누요에게 보여주자 그녀는 조용히 웃으며 종이를 뒤집어 책사우에 살짝 올려놓는다. 그녀의, 우스울 때는 솔직하게 웃어버리는 부분이, 나는 좋다.
    《키누요.》
    《응?》
    《혼자서 이야기하고있으면 무슨 이야기해도 혼자말이 되여버리잖아. 당연한 소리지만. 그냥 그렇다는거야. 비참함이라고나 할까? 뭐라고 해야 할까?》
    《알아 알아. 상상하는것만으로도 괴로울것 같은데 뭐. 그러니까, 나랑 같이 쟤들이랑 한 그룹이 되면 좋잖아? 자, 트럼프―》
    《싫어. 그냥 둘이서 계속 잘 지내면 안돼?》
    《그건 사양하고싶어.》
    키누요는 머리꽁지를 흔들면서 책상을 둘러싸고 야단법석을 떨고있는 잡초 다발들에게 달려가버린다. 왜 저렇게 섞이고싶어하는걸까? 같은 용액에 잠겨서 안도의 한숨을 쉬고. 다른 사람들에게 용해되여버리는게 그렇게 기분이 좋은것일까? 난 《나머지 인간》도 싫지만 《그룹》에 끼는건 더더욱 싫다. 그룹의 일원이 된 순간부터 끊임없이 나를 꾸며대지 않으면 안되는, 아무 의미없는 노력을 해야 하니까.
    중학교시절, 이야기거리가 떨어지면 서로 눈둘데를 몰라하고, 별 볼일 없는 화제를 끈질기게 붙들고 늘어지고, 그리고 어떻게든 분위기를 띄워보려고 요란하게 웃어대던 그 시절에, 수업과 수업사이의 10분간이 나는 영원처럼 느껴졌었다. 나 자신이 그랬기때문일까. 나는 억지로 웃고있는 사람을 금방 알아챌수 있다. 큰소리로 웃고있지만 미간에는 주름이 잡히고, 눈은 고통스러운듯 가늘어지고, 의례 이몸이 다 드러날 정도로 입을 쫙 벌리고있는 얼굴을. 얼굴의 부분 부분을 보면 조금도 웃고있지 않기때문에 금방 알수가 있다. 키누요는 정말로 재미있을 때만 웃을수 있는 아이인데도 그룹속에 끼면 언제나 그렇게 억지웃음을 웃곤 했다. 그런 행동을 고등학교에 들어와서까지 계속하려는 키누요를 나는 리해할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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