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타야 리사  (정유리 옮김)


와타야 리사:1984년 교또에서 출생. 현제 와세다대 교육학부 재학. 2001년 17살때 입시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쓴 소설 《인스톨》이 제38회 문예상을 수상하면서 문단 등단. 2003년 장편소설 《발로 차주고싶은 등짝》이 일본 최고권위의 문학상 아쿠타가와상 공동수상작으로 선정되면서 력대 최연소 수상자로 기록됨.
     

    쓸쓸함은 울려퍼진다.
    귀가 아플만큼 높고 맑은 방울소리로 울리며 가슴을 죄여오기때문에, 적어도 주위에는 들리지 않도록 나는 프린트를 손가락으로 찢는다.
    가늘고 길게, 가늘고 길게.
    종이를 찢는, 귀에 거슬리는 그 소리는 고독의 소리를 지워준다. 따분해하는것처럼 꾸며주기도 하고.
    엽록체? 오오카나다모?(아르헨티나가 원산지인 다년초 수중식물로 일본내에서 광합성 실험용으로 흔히 쓰이고있다― 옮긴이) 흥. 이라는 식의 태도.
    당신들은 미생물을 보고 법석을 떨어대지만(쓴 웃음). 난 사양하겠어. 벌써 고동학생이고. 뭐, 당신들을 곁눈질하면서 프린트라도 찢지요. 따분하게. 라고 하는듯한 태도.
    까만 실험용 책상우에 놓인 조각난 종이더미우에 또 하나. 국수발처럼 가늘고 긴 종이조각을 올려놓는다. 높이 쌓인 종이의 산, 내 고독한 시간이 응축되여있는 산.
    현미경을 들여다볼 차례는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다. 같은 조 녀자아이들은 즐거운듯 법석을 떨며 번갈아 렌즈를 들여다보고있다. 그녀들이 움직이거나 웃을 때마다 일어나는 작은 먼지가 창문으로 비춰드는 해살을 받아 아름답게 빛난다. 이 정도의 날씨라면 현미경도 필시 선명하게 보일테지.
    반사경이 자꾸만 해빛을 반짝반짝 튕겨내며 내 눈을 쪼아댄다. 창가의 검은 커튼을 모조리 내려서 이 과학실을 암흑으로 만들어버리고싶다.
    ―오늘은 실험이니까. 다섯명이 적당히 한조를 만들어 앉도록.
    선생님이 아무 생각없이 던진 그 한마디에 과학실안에는 심상치 않은 긴장감이 돌았다. 적당히 앉으라고 해서 정말로 적당히 앉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극히 한순간에 치밀한 계산― 다섯명 전부 친한 친구로 뭉칠수 있을지. 아니면 모자라는 부분을 남는 아이들로 채우지 않으면 안될지― 이 이루어지고. 친구를 찾아헤매는 시선들이 순식간에 뒤엉키며 조가 짜여진다. 어느 시선끼리 묶이게 될지 나는 손바닥 보듯 환히 알수 있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해 아직 2개월밖에 되지 않은 6월의 이 시점에서. 반 아이들의 교우관계를 도표로 그녀낼수 있는 사람은 기껏해야 나밖에 없을것이다. 정작 자기 자신은 그 도표의 틀밖에 있으면서도.
    유일하게 믿었던 키누요한테서도 버림받고, 《누구 남은 사람 없어요》 하는 질문에 손을 들어올릴 때의 그 비참함, 적어도 입으로 대답했으면 좋았을거다. 두리번거리다가 말없이 이마 높이까지 손을 들어올리는 내가 마치 무슨 괴물 같았겠지. 또 다른 나머지 한사람도 나처럼 비굴하에 손을 드는 방법을 취해 씁쓸했다. 이 들어올린 손으로, 아직까지 반에 친구가 없는 인간은 나와 또 한명의 그 남자아이, 니나가와뿐이라는게 명백해졌다.
    인원수 관계상 나와 니나가와를 자기들의 조에 끼워넣을수밖에 없게 된 녀자아이 세명은 당연하다는듯 낡은 나무의자를 나와 니나가와에게 넘겨주었다. 아니, 넘겨주었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우리들한테로 굴러들어왔다. 고 하는 편이 옳겠다. 나머지들에게는 나머지 물건이 제격이니까. 이건 따돌림이 아니다.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잘 어울리니까. 딱 들어맞으니까. 어쩔수 없는 일이다.
    등받이와 다리 부분의 검은 칠이 여기저기 벗겨져 나무부분이 다 드러난 의자는 오렌지색 쿠션까지 듬성듬성 벌레가 먹어 다른 아이들의 철제의자에 비하면 의자라 하기에도 민망한 고물이였다.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의자의 네다리가 포테이토칩을 씹을 때처럼 바삭바삭 부서지는 소리를 내며 삐걱거린다. 그래서 난 고개만 옆으로 돌려, 나와 같은 종류의 의자에 앉아있는 또 하나의 나머지 인간을 바라보았다.
    그는, 선생님에게 들키지 않도록 무릎우에 잡지를 펼쳐놓고 읽으며 시간을 죽이고있었다. 아니 그건 읽는게 아니다. 읽는 포즈를 취하고있을뿐이다. 그러니까 어두운 표정으로, 아무데도 보고있지 않은 멍한 눈으로, 오로지 같은 페이지만 주시하고있다.
    우리 반 아이들이 즐겁게 웃을 때마다, 선생님이 《조별로 협력해서 스케치하세요》라고 말할 때마다, 한살씩 나이를 먹어간다. 그리고 잡지를 보거나 프린트를 찢거나 하며 어떻게든 이 지루한 시간을 때움으로써 급격한 로화에 필사적으로 저항하고있는것이다.
    그런데 이 남자아이는 어딘가 이상하다. 어디가 이상한건지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이 애를 계속 바라보는 동안 마치 모래가 빠지지 않아서 서거거리는 된장국속의 조개를 씹었을 때와 같은 섬뜩한 이질감이 일순 꿰뚫고 지나간다. 어디지. 어디가 다른거지?… 아, 그래! 잡지다! 그가 보고있는 잡지가 기묘했던거다. 한쪽 눈섭을 치켜올린채 이쪽을 응시하는 녀자모델이 크게 실린 표지우에 《캐주얼한 여름소품으로 GO!》 라고 하는 제목― 녀성패션잡지잖아? ― 이 박혀있는, 센스있는 직장녀성들이나 애독할만한 잡지를 보고있다. 그것도 수업중에 당당히 펼쳐놓고있다.
    졌다, 졌어.
    녀성패션잡지를 수업시간에 펼쳐놓고 볼수 있는 저 아이에 비하면 나의 프린트 찢기는 지나치게 무난하다. 쓸모없는 프린트만 찢고있는 난 그저 인간 종이분쇄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저나 저런 패션잡지를 본다는걸 반 애들이 눈치채면 얼마나 재수없어할지, 그는 알기나 하는걸가?
    의자의 쿠션부분을 량손으로 잡아 엉뎅이에 붙인채 달팽이처럼 그의 곁으로 다가가 잡지를 넘겨다보았다. 틀림없다. 역시나 녀성용패션잡지다. 끈나시따위의 여름옷을 몸에 두른 모델들이 현란한 포즈를 취하고있다. 내가 옆에 있는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고양이등을 하고서 계속 같은 페이지만 주시하며 꿈쩍도 않는, 넋 나간 상태다.
    《재미있어? 그런거 보면?》
    순간 고개를 든 니나가와의 얼굴에 나는 흠칫했다. 앞머리가 너무 길다. 간장을 병채로 머리에 쏟아부은것처럼 무겁고 까만 긴 앞머리속에서, 경계하듯 빛나는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있다. 눈이 머리카락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대신 반쯤 벌어진 입속의 고르지 못하고 뾰족뾰족한 이발들이 오히려 두드러져보인다. 니나가와는 아무 말없이 다시 고개를 숙이더니, 이번에는 나를 피하듯 량어깨를 움츠리고 다시 잡지로 눈길을 돌렸다.
    나는, 무시당한것 같다. 자리를 옮기면서까지 왔는데 무시를 당하고보니 물러갈 방법이 마땅히 떠오르질 않는다. 별 생각없이 그가 보고있는 잡지를 뒤에서 넘겨다보았다. 그러자 어딘가 낯익은 얼굴이 잡지속에서 웃고있는게 보였다.
    《…아.》
    이 사람, 내가 아는 사람이다. 폭이 좁은 청바지를 입고 기분 좋은듯 기지개를 켜고있는 이 모델을. 중학교 1학년땐가 만난적이 있다. 이런 동네에서 모델같은 유명인을 만난다는건 굉장히 드문 일이다. 그래서 그 당시 한동안은 일부러 이 사람이 나온 잡지를 사 이 웃는 얼굴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반 아이들에게 자랑하기도 했었다. 그때랑 똑같이, 그녀의 웃는 얼굴에 손가락을 가져간다.
    《나, 역근처 무지(일본의 대중적인 생활용품젬 옮긴이)에서 이 사람 만난적이 있어.》
    돌연 니나가와가 내쪽을 돌아보았다. 그탓에 의자다리가 빼빼로 과자를 베어무는듯한 가벼운 소리를 냈다.
    《잘못봤겠지.》
    《아냐! 혼혈아같은 이 얼굴. 똑똑히 기억나.》
    코가 오뚝하고 륜곽이 뚜렷하면서도 눈만 동양인처럼 외꺼풀인 그 얼굴은 특이해서 잊을래야 잊을수가 없다.
    《왜 옛날 서양건물같은 커다란 시청건물 있지? 거기에서 잡지사진촬영이 있어서 이 동네에 왔다고 그랬어.》
    니나가와는 령혼마저 함께 빠져나갈것 같은 깊은 한숨을 쉬였다. 그리고는 손으로 앞머리를 움켜쥐듯 이마를 짚는다. 뭔가 말하지 말았어야 할것을 말한건가?
    《니가가와, 하세가와, 지금 딴 짓 할 때가 아닐테데.》
    조를 돌아보고있던 선생님이 다가왔다.
    《시험에 미생물그리기문제를 낼테니까 현미경배률을 잘 맞춰서 세밀한 부분까지 잘 봐둬. 교과서 23페이지 원핵생물확대사진도 잘 보고.》
    선생님이 지나가자 니나가와는 재빨리 책상밑으로 숨겼던 잡지를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그대신 교과서를 꺼내 23페이지를 펼치더니 빨간 줄을 거칠게 치기 시작했다. 책장이 붉은색으로 물들어간다. 첫째줄도, 둘째줄도, 셋째줄도… 한페이지에 그렇게 많은 체크포인트가 있을줄이야.
    《빨간색투성이네.》
    압도당해 중얼거리자 선이 크게 일그러진다. 니나가와의 손이 떨리고있다. 꾹 눌러 쥔 펜끝에서 빨간 잉크가 새여나와 종이에 동그란 얼룩이 서서히 번져갔다. 어쩌면 나, 이 이상 간섭하지 않는게 좋을지도 몰라. 빨간 얼룩은 이미 피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의자를 들고 종종걸음으로 물러나면서, 요상한 행동을 하는 니나가와와 그에게 희한한 동료의식을 느껴버린 나 자신이 증오스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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