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흙속에 저 바람속옆(리어령.1962년) 련재 제24장입니다. 



    한국의 우정은 물질을 초월(?)한다. 그것이 우리의 미풍량속이며 《붕우유신(朋友有信)》을 지나 《붕우유조(朋友有助)》의 경지를 터득한 아름다운 모럴이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속담도 우리에게 있어서는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진귀한 싸움

한국의 다방이나 음식점 카운터앞에서는 이따금 진귀한 싸움이 벌어진다. 서로 손을 붙잡고 떠다밀고 옷을 끌어당기는 싸움이다.
    물론 몇마디의 기성(奇聲)도 없을수 없다. 그러나 더욱 신기한것은 주위의 어떤 사람도 그런 싸움에는 전연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또 그것은 거스름돈이나 차값의 계산때문에 손님과 주인사이에서 벌어지는 소동도 아니라는 점이다. 조금전까지만해도 다정하게 앉아 같이 차를 마시고있던 친구끼리의 다툼이다. 이 싸움은 아무리 길어도 1분을 넘지 않는다.


    그중 한사람이 상대방을 물리치고 카운터앞에 나서면 그 기괴한 레슬링시합은 막을 내린다. 그리고 싸우던 사람들은 차를 마실 때보다도 한결 다정한 모습으로 다방문을 나선다. 이 싸움은 항상 진 사람이 이긴 쪽보다도 더 미안해하는데에 그 특징이 있다.
    이쯤되면 아무리 고도한 《스포츠》정신으로도 설명될수 없다. 특히 외국인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리해될수가 없는 풍경일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어떤 싸움인지를 잘 알고있다. 누구나가 그런 싸움은 몸소 경험하고있기때문이다. 그것은 서로 차값을 치르기 위해서 다투는 《아름다운 싸움》, 《정다운 싸움》이다.
    어떤 민족이 그렇게 우애에 넘치는 싸움을 할수 있을것인가? 음식은 같이 먹고 돈은 제각기 치르는 리기적인 더치 트리트의 서양풍속으로 보면 확실히 《스핑크스의 수수께끼》같은 일일것이다.


    한국의 우정은 물질을 초월(?)한다. 그것이 우리의 미풍양속이며 《붕우유신(朋友有信)》을 지나 《붕우유조(朋友有助)》의 경지를 터득한 아름다운 모럴이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속담도 우리에게 있어서는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외국에서는 웬만큼 친한 친구라 할지라도 자기 집으로 초대한다는것은 특수한 경우에만 한단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잔치때가 아니더라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아니하고 친구 집을 수시로 드나들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고있다.


    서구의 응접실과는 달리 의례 한국의 사랑방은 별 볼일 없는 친구들로 법석대는 법이다. 농촌에는 소위 《마을 다니는》 풍습이 있어서 저녁밥을 먹으면 친구 집을 찾아가는것이 하나의 약속처럼 되여있다.
    그런데 친구끼리는 그렇게 다정한 한국인이지만, 낯선 사람들에게는 의외로 무뚝뚝하고 배타적이다.


    낯 모르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인사를 하지 않는다. 뿐만아니라 면식없는 사람들끼리는 사소한 일을 가지고서도 양보를 하지 않는다. 곧잘 싸움을 한다. 렴치가 없다. 호의를 받고서도 답례조차 없다.
    아는 사람끼리는 그렇게 례의가 바르고 그렇게 정답고 그렇게 온화한 사람들이지만 공중적인 면에 있어서는 한없이 랭랭하고 무례하기만하다.


―공공도덕의 제로 지대 


    낯선 사람을 만나면 마치 개들이 만났을 때처럼 서로 냄새를 맡아보고 빙빙 돌면서 상대방을 정찰한다는 서구인들이지만 그래도 우리보다는 인사성이 바르다. 길에서 만나면 낯선 사람이라 하더라도 굿모닝 정도의 인사는 하고 지나친다. 《바》에서는 낯선 사람끼리 어울려 술을 마시는 일도 있고, 함께 자리를 했을 경우에는 의례 자기 소개와 말을 거는것이 생활화되여있다고 한다.


    서구의 소설을 읽어보면 낯선 사람끼리 정담을 나누는 장면이 수시로 나오지만 한국소설에는 그런것이 거의 없다. 어디까지나 아는 사람끼리의 이야기이며 친구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다. 그 증거로 패이드먼이 증언하고있듯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보라. 작중인물들은 대개가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한잔 술을 사이에 두고 마치 죽마고우처럼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하거나 자기 생애를 송두리채 고백하고있는것이다.
    마셜F.필씨도 그 점을 지적한 일이 있다. 한국사람들이 말하는 《친구》는 영어의 《프렌드》란 개념과는 다르다는것이다. 그것은 《클로스 프랜드》란 뜻이다. 왜냐 하면 미국에서 《프랜드》라 할 때는 단지 알고 지내는 사람을 뜻하는것이기때문이라는 이야기다. 
    한국에서 그냥 알고 지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친구》라고는 하지 않을것이다. 거기에서 파벌주의가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또 킬로렌 신부도 말한 일이 있다. 한국의 가정을 방문해보면 어느 집엘 가나 따듯이 대해준다는것이다. 공손하고 정답다는것이다. 그러나 집안에서 만난 사람과는 달리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와 정반대의 인상을 준다는것이다.
    《가정》과 《거리》의 세계는 완전히 단절된 별개의 이국(異國)이란것이다. 《거리의 세계》는 《울타리안의 세계》와는 달리 사람들은 불친절하고 부도덕적이라고 그는 솔직히 말하고있다.


―한국인의 례절


    우리가 동방례의지국이란것은 의심할수 없다. 그러나 그 례의는 울타리안의것이요, 아는 사람끼리만의 례의다. 일단 《거리》에 나서면, 낯선 사람끼리 만나면 야만에 가깝고 거의 랭혈족으로 표변한다. 친지의 《모럴》은 그럴수 없이 발달해있지만 공중의 모럴은, 사회 전체를 상대로 한 그 인정은 메말라있기만하다.


    누구나가 다 친구가 아니라는 개념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모른다. 뻐스속에서, 백화점에서, 길거리에서 만나는 그 무수한 사람들을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것은 결국 사회와 개인이 단절되여있다는것을 의미한다.


    술집엘 가나 공원엘 가나 그것은 모두가 끼리끼리의 모임이다. 아는 사람끼리만 뭉쳐서 돌아가는 사막의 풍경이다. 그리하여 공중이 모이는 자리에 가도 공중 전체의 분위기란 없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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