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회 경기도문화상 수상작.

[서울=동북아신문]  1. 서울역 시계 탑, 6시 시계 침

염천교를 지나, 얼음에 팅팅 얼어터진 서울역 입구 지저분한 눈 위에 몇 번 나동그라졌다. ‘미군장병여행안내소’ 앞의 한국인 보초가 징그러운 웃음을 노랗게 던져왔다. 그 옛날, 식민지시대의 표상적 ‘서울역 건물’ 앞에서, 쓰러져 허리를 움켜쥐고 있는 나에게, 일본 헌병의 앞잡이 같이 생긴 보초는, 더욱 흥감부리며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 비웃음의 포위망으로부터 빨리 벗어나려고 허둥댈수록 해나(海那)의 몸뚱이는 제자리에서 물레방아 탈 뿐 움직여 지지 않았다. 서울역에서 서부역으로 넘어가는 구름다리 난간을 붙잡고 나서야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난간 아래로는 교외선 열차가 인왕산 노을을 머리로 해띵할 듯이 달려나가고 있었다.
정월의 매서운 바람 끝을 밀어내며, 턱 밑으로 고여 떨어지는 식은땀을 한 손으로 쓸어내려 눈보라에 흩뿌렸다. 식은땀은 말라붙은 젖 무덤 사이로, 뼈마디가 드러나 있을 등골 사이로, 봄날 깊은 골짜기 눈 녹은 물 흐르듯 흘러내렸다. 부삽으로 자궁을 파내는 듯한 통증이 다시 엄습한다. 현기증이 났다. 치를 떨었다. 깨물려 딱지가 앉은 입술을 다시금 깨물었다.

난간을 잡은 한 손이 부르르 떨리더니, 닫다가 왼 몸이 허공에 빙빙 돌았다. 헛구역질이 났다. 해나는 난간을 더욱 옥죄었다. 이마를 잡은 다른 손바닥에는 인공위성과 은하수가 쏟아져 내렸다. 얼음판 위에서 곤두박질 치듯 머릿속에 별들의 전쟁으로 어지럽다.

그러나, 가야 한다. 그것도 서둘러 가야 한다. 난간에 이끌려 한 걸음씩 걸음마 하듯 해나는 쇠 난간에 한 움큼씩 식은 땀을 고여내며 걸어나갔다. 무슨 영화 촬영 장면 보 듯 행인들이 발 뒤꿈치를 멈추며 해나를 핼끔거렸다. 5시 55분! 구름다리 끝 서부역 광장의 전봇대 시계 침이 남북으로 거의 일직선을 가리키고 있었다.
원형 시계 탑 그 뒤의 ‘한보아파트’ 간판을 칼질하듯 세로로 그어 놓았다. 세로로 된 일직선의 시계 침이 세상을 둘로 갈라놓는 것 같다. 장난같이, 운명같이 해나의 가슴을 두 개로 쪼갠다. 운명의 신은 수박통을 둘로 갈라 선택을 촉구하고 있다. 아, 5시 55분… 완전한 자연수 6이란 숫자에는 남북방향이 일직선으로 서 있다. 6이 되기까지 5가 셋이나 기묘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제 나머지 5분 동안, 어떤 쪽이든 결정해야 한다. 약속된 정각 6시면 무엇인가 운명을 선택해야 한다. 하나의 생명을 죽여야 하느냐, 살려야 하느냐, 아니면, 모자
가 다 죽을 수도 있는 주사위를 던져야 한다. 주어진 운명이 아니고, 주워야 할 운명인지도 모른다.  ‘수술동의서’에 갈기는 싸인 하나가 목숨을 좌우하는 것이다. 서부역으로 내려오는 층계난간에 머리칼을 가다듬으며 가뿐 숨을 쉬었다.
바로 길 건너로 ‘소화병원’ 초록색 형광 빛이 각막을 때린다. 그 병원의 인큐베이터 속에는 간단한 싸인 내 작업 하나로 죽어야 하느냐, 살아야 하느냐, 하는 무서운 생사여탈권이 내 볼펜 끝에 매달려 있다. 무의식, 무의지의 한 생명체는 전혀 나의 선택에 의해서 생사가 결정되어야 한다. 해나는 ‘나’라는 귀책사유에 다시 가슴을 쓸어내린다.
6시가 갈라주는 시계 침 마냥 왼쪽이냐, 오른쪽이냐, 수술할 것이냐, 아니냐, 선택해 주어야 한다. 성공률은 반반이란다. 오른쪽이 ○표이고 왼쪽이 ×표라고 마음 속으로 정한 다음에 해나는 벽시계를 마주보고 서서 그 중심에 배꼽을 맞추었다. 손 지갑을 높이 쳐들었다. 손 지갑이 떨어지는 쪽으로 의사에게 대답하리라.
오른쪽이면 의사의 수술동의서에 찬성이고, 왼쪽이면 그 반대다. 높이 쳐든 내 손끝은 가늘게 떨렸다. 수술에 찬성한다고 해도 그 다음 더 큰 문제가 엄청난 수술비이다. 하루하루 버티기도 힘든데 보험은 생각지도 못했다. 수술계약금이 든 손지갑은 공중에서 떨기만 할 뿐 떨어지지 않는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벌써 의사와 약속한 6시가 넘어가지 않는가?

사람이 약해지면 별 짓을 다 한다던데, 해나는 스스로의 불길한 예감에서 도망치듯 일어나 뛰어갔다. 아니, 기어갔다. 단, 1% 아니 0.01%라도, 아니, 아니, 억 만분의 1%라도 나는 수술시켜야 한다. 이미 태어난 생명체를 포기할 권리가 내게는 없지 않은가? 단지, 수술비가 없다는 이유로 아기 목숨을 없앨 수는 없다.
이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한 점 혈육이 될 지도 모른다. 해나는 자궁을 이 미 다 들어내어 다시는 아기를 가질 수가 없다. 늦게 가진 아이라 무슨 협착증이라던가 자궁을 드러내던가, 아기를 포기하던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을 때, 나는 단연 아기를 선택했다.
그러나, 아기가 태어난 얼마 후에는 또 ‘식도협착증’이란 게 아기에게 생겼다며 그 목구멍에 물 한 방울 넘어가지 못한다는 청천벽력이다. 아기의 식도(食道)를 넓히던가, 심할 경우 식도(밥줄)를 절단하여 인공호수를 가운데 끼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새끼 손가락보다 더 가는 아기의 목숨 줄을 무슨 팬티 고무줄같이 기계적
으로 말하는 원장의 입 놀림만 해나도 기계적으로 바라보았다.   
 
우선, 수술계약금부터 마련해 오느라 며칠 동안 노오란 하늘만 바라보며 뛰었다. 방바닥에 카드를 뒤집어서 늘어놓은 것같이 아기방 가득히 채워져 있는 인큐베이터는 유리장식은 비정한 생물실습실 같다. 고교 생물시간에 사지를 바늘로 찔러서 잔인하게 벌려놓은 개구리 해부 실험실 같이 섬뜩하다.

미숙아, 기형아, 불구아들은 하나의 실험용 새끼 토끼같이 그냥 ‘기다림’을 기다리고 있었다. ‘출입금지!’ 푯말 앞, 이중 유리창 밖에서 며칠 전, 정신 없이 다녀갔던, 나의 갓난아기를 더듬거렸다. 내 아기를 찾았지만, 똑같은 인큐베이터 유리상자는 전부 비슷했다. 전혀 구분이 안 되는 주먹만한 아기 목숨들이었다. 대개 죽었는지 살았는지 눈을 감고 있었다.

울먹이고 있는 해나 곁에 누군가 다가와서 어깨를 다소곳이 끌었다. 그 간호원이 구석에 있는 어떤 특수병실 안으로 어깨를 밀며 들어갔다. 그렇게 보고 싶던 아기인데, 막상 보려고 하니 종아리가 달달 떨렸다.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은 해나에게 간호원이 인적사항을 다시 묻더니 인큐베이터를 밀고 나왔다.
푸르스름한 아기의 얼굴에는 전기줄 같은 투명한 고무줄이 코로, 입으로 함부로 이어져 있었다. 머리 한복판으로 달아난 링거 줄을 만져보았다. 절벽 저쪽의 안개 줄 같이 전혀 닿지 않을 것 같았다. 이게, 한 토막 빨랫줄 같은 게, 나의 분신이란 말인가? 해나는 가슴을 한번 쓸어 내렸다.
아기의 콧구멍 쪽 희미한 전기줄에 바람결 같은 식물성 숨결이 안개같이 나들명거리는 것이 겨우 살아있다는 표징을 보일 뿐이다. 아! 엄마아, 나야, 역시 감은 눈 속의 아기는 그렇게 소리치는 것 같았다. 아니, 환청 같이 들렸다. 금붕어 새끼의 아가미 운동 같이 보일 듯 말 듯한 생명체 아, 그것은 바람보다도 더 희미한 목숨
이었다.
아기가 태어나면, 딸이든 아들이든 무조건 ‘밝고 맑아라!’ 하는 뜻으로 명청(明淸)이라고 이름을 지읍시다! 나 같이 이런 교도소 같이 어두운 곳에 있지 말고, 아기는 밝고밝은 곳에서 살아야지, 여보! 하고 껄껄 웃던 남편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한’이라는 내 성을 붙이고 보니 ‘한명청’ 불편한데? 당신의 성씨 ‘하’ 씨를 붙이는 게 어때? ‘하명청’ 물 ‘하’ 즉 물이 맑고 맑다아? 그거 괜챦은데? 

중국의 역대 어진 정치가 때때로 함정에 빠졌지, 특히 근현대사에서 위험하게 변질되었단 말야, 명나라는 한나라 문화보다 못했고, 청나라는 명나라보다 더 지독했거든, 거꾸로라면 더 좋았을 텐데. 청, 명, 한으로 말야. 그렇다고 성을 바꿀 수도 없고, 여보! 어쨌든 이왕 마음먹은 거니까 그대로 ‘한명청’으로 합시다. 명청이가 이
담에 커서 거꾸로 엎어진 권총정부 군사독재의 이 한국사회를 바로 잡으면 되니까, 안 그러우?
남편의 호탕한 얼굴이 떠오른다. 물론 나를 웃기려고 너스레를 떠는 것이다. 그러나 밝고 맑아야 할 명청의 얼굴은 푸르고 푸르기만 하다. 입술은 아예 새카맣게 탔다. 젖을 빠는지 입술이 그림자같이 흐미하게 우직인다. 담당의사는 나를 진찰실로 불러내었다. 곧 퇴근해야 한다면서 수술동의서와 서약서를 내던졌다.
‘수술이 끝난 후, 회복기를 거쳐 퇴원명령서가 발부된다. 약1개월간 아기를 찾아가지 않으면, 병원 측의 임의대로 영아원 등에 이동을 시켜도 아무 이의가 없음…’ 등의 서약서이다. ‘영아원’이라는 활자에 붉게 밑줄을 그은 글자만 지렁이 마냥 검붉은 고딕으로 꿈틀거렸다. 갓난아기 전문병원인 이 ‘소아병원’엔 창녀와 미혼모
들도 많아서 아기를 버리고 달아난다고 했다. 주춤해 있는 해나의 어깨를 아까의 인큐베이터의 간호원이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아기가 죽을 경우, 대학병원에 실험용으로 내놓으면 사례금도 줍니다.”
그때까지 말이 없던 의사는 처음으로 이 말 한마디를 해나의 머리 위에 던져놓고, 몇 개의 도장이 찍힌 서류를 챙겨 들고 나갔다. 전세금 2백만원에서 우선 계약금조로 빼온 3십만 원이 든 손 지갑을 간호원에게 넘겼다.

     2. 시간 속에서 피가 난다

해나의 남편은 아기의 이름만 ‘한명청’ 하고 지어주었을 뿐, 아기의 얼굴을 모른다. 뒤통수가 유난히 짱구인 자기의 분신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수술 성공률이 시계 침 6시와 같이 좌우 절반인 아기를 어쩌면 부자지간이 한 번도 못보고 헤어질지도 모른다. 아니, 남편은 아기가 수술대 위에 놓여있다는 사실도 아내가 위험천만의 수술을 했다는 것도 모른다. 모른다.
해나가 굳이 알리지 않았다. 이 차가운 겨울, 차디 찬 시멘트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있을 남편에게 또 하나의 고통을 보탠다고 해결되는 것은 없다. 갓난아기 엿가락 같은 여린 몸에 날카로운 칼을 댄다는 것은 차라리 그대로 죽게 하는 것보다 더 잔인한 일이라며 치를 떨었다. 그러나, 막상 수술동의서에 도장을 찍고 나니 후련해진다.
금년에 3.1절 특사에도 남편은 희망이 없다. 명청이의 푸르고 어두운 얼굴보다 더 어둡고 암담한 세상 빛이다. 새해라고 세상은, 거리는 모두들 들떠있지만, 남편 은 지난 해 성탄절 특사에도 제외되었다. 새해의 불탄절에도 어려울 것 같다. 그것은 지난 주에 서대문 교도소로 면회 갔을 때, 갑자기 청송감호소로 이감시킨 것이 암시한다. 남편의 죄는 그렇게 군함의 닻 쇠뭉치 같이 무거운 것일까?
무엇보다 남편의 대쪽 같은 성격이 어쩌면 평생 옥문 밖으로 나와질 것 같지 않았다. 그의 동료들과 같이 ‘반성문’에 간단히 싸인 하나만 쳐주면 이튿날로 나올 수도 있는데 북극곰 같은 곰탱이 고집이다. 그에게는 어쩌면 해나가 수술동의서에 단순하게 그어주어야 하는 싸인 만큼이나 절벽 같은 절망일 수도 모른다. 목숨 같은 신념 같은 거.  
모를 일이다. 바퀴벌레 하나 눌러 죽이지 못하고 도망가도록 부채질을 하는 위인이 그렇게 고래심줄 같은 철사 줄 고집을 등뼈에 심지로 박아놓고 있을 줄은 모를 일이다. 신세계, 미도파 쪽은 성탄절이 지난 지가 한 달이 넘었는데도 별빛보다 더 찔리는 츄리 데모로 발광하고 있다.
그 츄리 빛이 싫어서 명동 갓길을 돌아 충무로로 접어들었다. 멀리서나마 몇 달 만에 밟아본 명동이 몇 년 만에 만난 옛 애인인 듯 생경한 어색함과 소외감을 던져준다. 사랑과 사기, 음모와 음독, 극치와 음치가 설치는 애증의 땅에 해나는 멍청히 섰다. 누가 나를 이리로 밀었을까. 어머니는 나 대신에 병실에 누워 있는데? 도망
갈지도 모르는 환자 대신에 볼모로 잡혀 누워 있는데?

‘나는 이 허영의 거리에 섰는가. 성냥개피 알 같은 일상의 반복, 하루하루가 성냥불 같이 짧게 그리고 애련하게 타버리는 애살스런 시간들이다.’  연애시절 남편이 불쑥 내 핸드 백에 꽂아준 연애 시가 생각난다.
‘하나의 성냥개비를 켤 때/ 또는 타버린 것들을 버릴 때/ 더 깊고 단단하게 확인되는 밤… 쥐 떼들의 탐욕의 이빨이 빛나고/ 피 묻은 누군가의 꿈이 버려져 있다. … 흰 공기 속을 통과하는 햇빛의 정적/ 바람이 분다/ 벌판에 흰 빨래처럼 처박힌/ 저 어두운 바다가 운다… 문득 빈 수숫대처럼 어둠 속에 설 때/ 하얗게 일어나는 야윈 물 소리…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 향한 연애 시가 아니라, 민주화를 열망하는 열사의 시였다. 그런 저항 시로 인해 한 밤 중 그는 누구에겐가 끌려 갔다. 그리고 세 해가 넘어가는 데도 그의 옥문은 열릴 기미가 없다.   
남편과 연애시절, 자주 앉았던 ‘제비’ 음악다방에서는 마침 시 낭송회가 열리고 있었다. 추운 겨울에 냉 커피를 시켜서 남편과 나의 뜨겁게 타오르는 네 개의 젊은   눈동자를 식히곤 했었지, 얼음 조각이라도 어금니에 물고 있지 않았다면 그대로 타버려 재가 될 것 같은 눈빛이었고 만남이었다. 그때 해나는 뜨거운 커피 잔을 두 손으로 받쳐들고 빈 손과 빈 속을 데우고 있었다.
일제 시대 때는 이 다방을 이상이 그의 동거녀와 운영하기도 했다는 음울한 이곳에는 대개의 젊은 시 낭송자들이 음험하게 모여들었다. 피 토하는 저항 시들이 자욱한 담배 연기 속을 낡은 테이프처럼 뛰어다녔다. 툭, 튕기면 담뱃재 같이 금방 스러질 것 같이 헐거워 보였으나 권총 탄환이 날아와도 비켜나지 않을 장엄한 표정
들이기도 했다.

‘… 내가 앓는 눈으로 사물을 보자. 모든 세상의 것들은 정말 앓고 있었어…’ 그 당시, 남편의 습작시도 들린다.
‘살아서는 모두가 숨어사는 개 같은 도시/ 시간 속에서 피가 난다/ 소태 같은 바람이나 만지며 살라 한다/ 바람이 접시에 닿고 있을 때/ 빈사의 사람/ 의자 위에는 바람 한 가지만 남아 있다… 바람의 뼈, 황소 뿔에 받힌 한 해/ 음표처럼 쏟아지는 겨울 비를 맞는다/ 바다가 옷 벗는 소리… 바람 한 점 일어나/ 산 끝 그림자를 때 리고 있다…’
남편은 또 암벽타기를 즐겨했다. 어려서부터 고아였던 남편은 고아 특유의 근성 때문일까, 특수하게 위험한 짓만 일부러 골라하는 것 같다. 밧줄과 피켓, 고리 몇 개만으로 위험한 민 대머리 인수봉을 오르내렸다. 암벽타기는 최소한 두 사람 이상이라야 안전하다는데, 남편은 기껏 나를 대동하는 게 전부였다. 나와 만나기 이전에는 주로 혼자 탔다고 한다.
내가 따라간다고 해도, 나는 수직절벽 아래에서 점심을 나누어 먹고, 암벽으로 올라간 남편을 해질녘까지 기다리는 게 고작이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남편과의 데이트 기회는 희박했다. 해나가 남편을 처음 만날 즈음에 그는 남산대학 조 교로 있으면서 석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르크스 초기 공산주의와 유럽 문학 배경연구이던가? 제목부터가 살기를 띠었다.
어느 해던가, 눈보라가 몹시 치던 날, 겨울 빙벽등반을 떠난 적이 있었다. 아이젠, 보조 로프, 덧 장갑 등이 준비된 남편의 배낭 뒤를 해나는 털모자 하나 달랑 덮어쓰고 수락산 빙벽을 따라갔다. 조선조 초기 무학대사가 이태조에게 수락산은 서울을 등지고 앉은 산세이기 때문에 ‘반역산’이라고 불렀다는 수락산을 별로 말이 없는 남편이 장수원에 내려서야 등반의 목적지를 말해 주었다.
그날 오후 땅거미 질 무렵, 남편은 해나 때문에 바쁘게 하강하는 도중, 빙벽에 내려친 오른쪽 아이스 해머가 부러지면서 기우뚱 하더니 그대로 미끄러져 내렸다. 다행히 왼쪽에 박혀 있는 시몽코브라 아이스 밧줄에 걸려있는 로프가 남편의 허리를 잡아주었다. 허리가 빙벽 중간에 매달렸다.

해나가 악! 얼굴을 감싸 쥐고 한참 만에 열 손가락 사이로 남편을 올려다보았을 때, 남편은 구두 끈의 아이젠 피크를 빙벽에 박고 있었다. 욈 몸이 거꾸로 뒤집어 진 채 얼음 벽을 망치로 뚫었지만 기진한 힘은 미치지 못했다. 바로 해나의 머리 위 이삼백 미터 쯤에서 추락했다. 가뜩이나 등산객이 없는 한 겨울인데다가 극심한 눈보라까지 몰아쳐서 한 뼘 앞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때 해나가 남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더욱 어두워지는 깊은 골짜기 어둠에 대고 사람살려어! 하는 고함소리만 고작이었다. 아니, 앞으로도 그를 위해 평생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조바심이 났다. 비상 보조 줄이 없었더라면 남편은 그대로 저 아래 절벽으로 다이빙 했을 것이다.
남편은 해나가 아니었으며 원래 수락산 꼭대기에서 텐트를 치고 이튿날 내려올 계획이었다. 굳이 해나가 같이 가겠다고 따라나서자 함께 한 것인데 빙벽을 너무 올라갔다가 앗차! 해나가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피크도 없이 급히 하강하다가 메인 줄을 놓친 것이다.

얼굴 전체에 피가 흘렀다. 거친 바위 벽에 길린 것이다. 피범벅인 된 이마의 땀을 아무렇지도 않게 닦으면서 해나 앞을 우뚝 섰을 때, 그미는 냉갈령하게 뒤돌아 섰다. 그리고, 분명히 선언했다. 이후, 암벽타기를 하면 다시는 안 만나겠다고, 둘 중 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몸부림쳤다.

땅바닥에 드러누운 채, 자기를 위험에 몰아넣었던 빙벽을 올려다보며 그는 재미 있다는 듯이 크게 웃었다. 골쩌기가 울리도록 찌렁찌렁 호탕하게 웃었다. 바퀴벌레 한 마리 못 잡는 선비가 이런 때는 땡크 캐터필러 같이 강인하게 굴러가디니? 정말 모를 일이다. 교수대 위 밧줄을 목에 감은 사형수의 마지막 너털웃음이 그랬을까? 세상의 모든 것을 체념하고 아니, 가볍게 털어버리고 난 해탈 같은 거?
 
 어느 새 해나는 ‘제비’ 음악다방을 나와 남편과 자주 게임을 하던 탁구장 의자에 앉았다. 탁구장 주인여자가 아는 체를 했으나, 그미는 고개를 돌렸다. 도시, 요즘에는 누가 안부를 물을 때마다 대답할 말이 빈곤했다. 배터를 쥔 젊은 남녀들이 제비처럼 그들의 사랑을 이리저리 때리고 받았다. 그들은 게임의 스코어보다 사랑의 스코어에 더 열중해 있을 것이다.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 지금 어머니는 나 대신 병원에 볼모로 잡혀 있을 텐데… 잃은 것이 많았으면 분명 얻은 것도 더욱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남편과는 이빨이 맞지 않는 톱니바퀴 처럼 서걱이었다. 밤새 악을 쓰다가 결국은 내 쪽에서 먼저 울음을 터뜨리곤 했었지, 전혀 나를 잃어버리고 그에게 아예 동화되어 버리는 거야, 그게 더 편안해질지도 몰라, 적어도 지금 보다는…
엄마의 잔소리이다. 그러나, 그것도 이미 늦었다. 나는 원래 혼자가 아닌가. 먼지 낀 창 밖으로 은하수가 보인다. 남편도 지금쯤 환기통으로 저 밤하늘을 보고 있을 까? 혹여 나를 생각하고 있을까? 아님, 쓰레기 같은 이 사회를 걱정하고 있을까? 달려가면 금방 만날 수 있는 거리인데 무엇이 나를 가로막는 것일까?
우리는 처음부터 소시민적인 생활에서 행복을 찾아야 했던 거야. 애기 광목 기저귀나 빨아주며 그냥 쬐그맣고 작게 살고 싶었는데, 그런데 남편의 톱니바퀴는, 너무 커어, 크단 말이야… 70년대 청년들은 교도소 나들명 거린 별이 몇 개냐며 김지하의 ‘오적’(五賊) 등을 레닌 훈장 같이 가슴에 달달 외고 다녔다.

그미는 다시 탁구장을 나왔다. 남편의 체취를 사냥개마냥 핥았다.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여자같이 추억을 줍고 다니던 해나가 갈현동 박석고개에 내린 것은 병원 현관문이 이미 잠긴 뒤였다. 응급실 쪽으로 돌아가서 초인종을 눌렀다. 서울역 미군장병 여행안내소 그 헌병 같은 매부리코로 매서운 수위가 날카로운 찍어댈 듯이 위 아래로 찔러보며 ‘뭔 여편네가 밤 늦게 싸 돌아댕겨?”
삐꺽거리는 철문이 열리며 야간 당직 간호원인지 응급실 복도 끝에서 푸르른 담배 연기를 밤 하늘에 붐어 올리고 있었다. 이 병원 원장의 무슨 친척이라는 그 수 위의 매부리코는 이곳 일신종합병원 산부인과 과장의 코와도 비슷한 독수리 주둥이었다.
병실 문을 열자, 피고름 썩는 냄새를 억지로 탈색 시키는 독한 소독제 냄새가 덮쳐왔다. 그 동안 병실에 줄곧 있을 때는 몰랐는데, 바깥바람을 쐬고 들어오니 악취가 뒷골을 때렸다. 해나가 입고 있던 환자복을 대신 입고 누워있던 어머니의 작은 얼굴이 진짜 환자같이 누렇게 떠 있었다. 요즘 부쩍 시들어버린 흰 머리칼은 아예 흰 눈을 뒤집어쓴 것 같다.
참으려고 천장을 올려다 보았던 눈물 몇 방울이 어머니의 앙상한 손등에 떨어졌다. 그러나, 어머니는 모른 척 하고 옆으로 돌아 누웠다. 어머니가 정말 이렇게 깊이 잠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머니의 잠은 이미 아버지가 강탈해 갔다. 어린 남매를 낳아놓고 훌쩍 만주로 도망 가버린 아버지, 아버지 덕분에 해나의 어린 시절은 늘 무겁고 어두운 구두 발자국에 처참하게 짓밟혔다.
처음에는 일본 헌병의 군화 발자국이 강보에 싸인 해나 오빠의 포대기를 함부로 짓밟았고, 해나가 기저귀를 차고 있을 때쯤에는 인민해방군 보안대원들의 군화가 방바닥을 피 칠했다. 조선 왕조의 마지막 왕족의 민비 집안의 혈족이었던 어머니는 마포 동막궁 안에서 외할머니의 품에 나비같이 잘 수 있었다. 유년 시절 나비 같은 당신의 잠은, 아버지를 만나면서부터 그 나비의 날개가 찢겨지기 시작했고, 깊은 잠을 빼앗아 가버렸다.
“이것 좀 보소 새댁! 인자 일어나 보라요! 좀 있으몬 의사들 회진 시간아이라요. 우예, 아침 좀 묵어야지요. 정신채리이소 잉, 정신! 내사마 우째 못 보것구마 잉…”
커튼을 영러 젖혔는지, 닫다가 강렬한 햇살이 눈가죽을 뚫고 침투해 들어왔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겨우 일어나 앉았다. 오랜만에 깊은 잠에 떨어졌나 보다. 어젯밤 다시는 안 놓칠 듯이 어머니의 등허리를 끌어안고 잤었는데 어머니는 안 보인다. 화장실에 갔을까?
“새댁요, 속이 비몬 눈에 암 것도 안 보이는 기라요, 나또 이 알라 땀시로 미쳐갖고 댕겼지만요, 우선 뭘 묵고 정신차리이쇼 잉…”
곁에 있는 침대의 아주머니가 다시금 재촉해왔다. 이 병원 환자 대부분이 교통사고 등이듯이 이 아주머니의 5살 짜리 꼬마도 무슨 국회의원 승용차에 치여 누워 있었다. 교통사고 현장이 무악재 고개인데도 굳이 이곳 박석고개 병원까지 끌고 온 이유를 모르겠다며, 억하심정으로 나대는 경상도 아주머니는 식판을 해나 침대 위 에 하나 놓아주었다.

비좁은 방에 네 개의 침대가 비집고 있어서 시중 드는 가족들은 다니려면 서로 끌어안고 한 바퀴 도는 형국이었다. 이 병실에서는 해나가 고참인 셈이다. 벌써, 두 달하고도 다시 첫 주가 시작된다. 교통사고 환자들은 대개 외상이나 골절상들이어 서 응급실에 걸레가 되어 들어올 때와는 달리, 한달 정도만 지나면 언제 그랬냐 싶게 각 병실과 복도를 뛰어다닌다. 사람의 치유속도는 놀랍다. 그러나, 육체의 병은 쉽게 회복이 되지만, 마음의 병은 그렇게 쉽지가 않다.
“이 놈의 병원은 죽어가는 시체를 놓고 뜯어먹는 까마귀들이라요. 아, 우리 집 근처에도 병원이 쌔고 쌨는데, 와 안 보내주능교? 최신식 시설을 갖춘 새 병원도 얼마 전에 우리 동네에 들어섰는데, 글로 보내달라카이, 그 원무과장인가 원장의 처남인가 하는 늑대가 눈을 부라리며 안 된다 안 카요?”
“아주머니, 여기 온 지 얼마나 됐지요?”
해나는 억지로 웃어 보이며 물었다. 국물만 몇 모금 넘기는 데도, 목구멍이 불에 덴 듯 고통스러웠다. 그러자, 아주머니가 국에다 밥을 반이나 덜어서 말아주었다. 그리고는 숟갈로 더서 먹여주었다. 해나는 저능아처럼 울 듯이 받아먹었다.
“아, 벌씨로 보름이 안 됐능교? 맨날 빨간 약만 발라주고 싫다는 링거만 꽂아주고는 치료랍시고 이케 하루 종일 가둬 놓으니, 나보다도 이 어린 얼라가 울매나 갑갑허것소, 이잉, 어제 점심 참에 원무과에 가서 그 동안 병원비를 물어보니 160 만 얼맨가 나왔씁디다. 뭔, 2주에 1백 하고두 6십이란 말여? 날도둑 놈들이제!”
간호원이 약 봉지를 들고 들어왔다. 그래도 그 아주머니는 들으라는 듯이 더 큰 소리로 떠들었다.
“내가 팔을 걷어붙이고, 원무과장 좀 만나자고 했더니, 법으로 하든 뭐로 하든 맘 대로 하라며 즤 어멈 뻘 되는 나보구 삿대질 합디다아! 보험회사구 병원이구 다 그 통속이 한 통속들인데 시상 어디 가서 하소연 해본들 뭘 합니까?”

간호원이 그 할머니에게 약봉지에서 노란 약과 파란 약을 꺼내며, 할머니 이건 지금 손자에게 먹여주시고오, 조건 이따가 점심 먹고 먹여 주시고오…  그러나 그 할멈은 들은 척도 안 하고 더욱 악을 썼다. 
“이봐요, 아가씨, 그런 소화제는 이제 안 먹어도 이 얼라는 노란 똥을 잘 싼대두 자꾸 가져오네 잉? 이 동네 그 국회의원인지 서캐위원인지 그 금빼지 놈 내 가만 안 둘끼구만, 내 무식한 시골 무지랭이지만 할 말은 안 할 줄 아능겨? ”
어머니가 들어왔다. 새벽녘에 어디 근처 절이라도 갔다오는지, 다소 생기 있는 얼굴이다. 아니, 생기 있는 척하는지도 모른다. 병원비를 못 내고 있는 해나에게 배식이 끊어진 지도 오래 되었다. 어머니는 간이 찬장에다 두루마기 속에 숨겨온 것들을 몰래 채워 넣었다. 어머니가 살고 있는 동네인 근처 구파발이나, 절간 부엌에서 또 구걸해온 일용할 양식일 것이다.
“내사마, 내 돈 들어가는 기 아이고, 보험에서 나오는 깅께, 상관할 필요가 없지
만서두, 그 쌩돈 병원에 쳐 넣느니 위자료를 좀 주면 울매나 좋소 잉, 이 얼라아 집에 가서 묵을 한약 값이라도 쬐끔 보태주몬 울매나 좋것소 잉?”
  간호원이 약봉지를 침대 위에 던져놓고 문을 세차게 닫고 나갔다. 
“문딩이, 콱 썩어뒈질 년이… 얼라가 이케 된 걸 사우디에 가 있는 즈그 아베가 알면 내 다리 몽뎅이가 당장 분질러질 꺼라요. 이런 줄 알았으몬 그 금빼지인가 똥빼지 비서인가에게 합의서 도장을 안 찍는 긴데.. . 이 병원 사무장에게 깜박 속았지라우, 도장을 안 찍으몬 보험금이 한 푼도 안 나오고 당장 병원에서 좇아낸다구 하더라카이, 얼라를 살려야 한다는 급한 마음에 우선 도장을 꾹 눌러주었제… ”
경상도 아주머니는 어머니를 보자. 다시금 어머니를 붙들고 하소연했다. 어머니는 해나의 이마를 만져보더니 그미의 다리를 주물렀다. 해나는 이불을 머리 위까지 뒤집어 쓰고 다시 누웠다.

3. 김재박의 자서전 대필

6.25 피난 중, 군산 낯선 객지에서 장티프스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해나에게, 어머니는 당신의 검지 손가락을 깨물어 해나 입 속에 피를 흘려 넣어 주었던 생각을 끄집어 내었다. 그래서 명청이가 부르르 떨며 의식을 잃어갈 때도 해나는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의 새끼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었다. 독수리코 산부인과 과장은 해나의 어머니를 혐의자 마냥 앉혀 놓고 다그쳤다.
“아니 뭘 이렇게 꾸물거립니까? 빨랑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될 게 아닙니까? 시간을 자꾸 지체하다간 할머니 따님이나 손자가 둘 다 희생되는 수가 있습니다
아…”
그러나 어머니는 어쩌지 못했다. 딸을 죽일 수도, 그렇다고 4대 독자가 될 손자를 포기할 수도 없다. 옥중에 앉아 있는 사위에게 연락을 해얄텐데 그냥 떨리기만 할 뿐이다. 심한 산욕증과 중독증으로 자궁 벽에 아기가 늘어붙은 것이다. 그때 간호원이 뛰어들어왔다. 딸이 깨어났다는 것이다. 이미 과도한 하혈과 악성빈혈로 의
식을 놓고 있던 해나가 정신이 들었다고 했다.

달려간 노모에게 해나는 몸부림치듯 아랫배를 가리켰다. 아기만은 살려달라는 애원이었다. 거의 6시간의 집도 끝에 둘 다 소생할 수 있었다. 기적이다. 어머니의 백일 기도 탓일까, 어쨌든 명청이가 햇빛을 보게 되었고 신생아실에서 다른 새 생명들과 같이 참새 같이 짹짹 목청 연습을 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아예 신생아실 복
도에 거적대기 같은 담요를 깔아놓고 잠을 잤다.

혹시나 누가 갓난아기를 바궈치지 않을까? 하는 생뚱한 노파심이었다. 머리카락 끝이라도 다치지나 않을까 안달을 했다. 닷새쯤 되어 퇴원 준비할 즈음 신생아실이 발칵 뒤집혔다. 명청이의 호흡이 멎은 것이다. 담당의사가 한밤 중 달려오고, 산소 호흡기니, 강심제니 하면서 소동 끝에 명청이는 서부역 소화병원 어린이 전문 병원에서 보내온 구급차에 실려나온 것이다. 빨간 불과 빨간 앰브런스 싸이렌 속에 명청이는 깨어나지 못한 채 실려 나왔다. 기도가 막힌 것이다. 

한 달 전의 일이다. 그날 새벽, 달려간 해나 앞에 담당의사는 스케치 북만한 엑스레이 사진 속에 볼펜 끝을 가리키었다. 그 냉갈령한 볼펜 끝이 가리키는 식도가 볼펜 속 심지같이 가늘어 지더니 밥통(위장)과의 연결 끝이 희미하게 보일락말락 했다. 식도의 기형이라던가?  1천명당 한 명꼴로 이런 기형아가 생기는데, 식도와 밥
통 사이에 특수 인공대용품을 끼워 넣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신생아이기 때문에 피부조직이 연약하여 위험은 그만큼 가중된다고 한다. 5 차례에 걸쳐 대수술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성공하더라도 나중에 좀 커서 유아시절에 한 번 더 수술을 해야 한댔다. 바다 건너 다른 나라, 무슨 아프리카 아이의 사건인 듯 싶다. 생뚱하게 듣고 있던 해나는 수술계약금을 갖고 사흘 안에는 반드시 와야 된다는 의사의 선고를 듣고서야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것은 사흘 동안 아기의 수술가능 상태를 최종적으로 검사해 보는 시간이라며 의사는 사무적으로 일어섰다. 그러고 보니 명청이가 신생아실에서 보리차 물만 먹어도 토해 내고 푸른 똥만 싼다고 걱정하던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해나는 그길로 구파발에 가서 쌀가게 집 주인에게 전세금을 빼달라고 부탁했던 돈을 받아온 것이다.

박석고개 일산병원 자신의 병원비를 일부라도 갚으려고 미리 얘길해 두었던 것인데, 우선 명청이의 소화병원이 더 급했다. 어제 저녁 6시에 건네준 명청이의 목숨 계약금 3십 만원은 그 일부이다. 그러나 잔금 170만원으로는 명청이의 수술비 절 반에도 못 미친다. ‘아이를 찾아가지 못할 시에는 법원에서 지정한 영아원 등에 이동을 시킬 수 있음’ 이라는 구절이 시뻘겋게 달군 연탄 집게마냥 가슴을 지져왔다.
“아니, 이 할마씨야, 대관절 언제 퇴원하려고 이래, 지금 병실이 모자라 되돌려보내는 사람이 수두룩한데, 이렇게 죽치고만 있으면 어떡허냔 말야. 내참, 누구 망하는 꼴 보려고 하나? 이 늙은 할망구가아?”
회진 시간에 나타난 것은 담당의사가 아니라 원장과 원무과장이었다. 요즈음에는 원무과장이 아예 반말투다. 수다스런 경상도 아줌마는 주춤 물러 서 있고, 어머니는 아들 같은 원장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초등학교 아이 같이 서 있기만 했다. 왕년의 왕족 후예지만 단지 돈이 없다는 이유로 당연히 지불해야 할 딸의 출산비를 못 내고 있다는 이유로 굴욕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원장까지 대동한 것으로 보아 무엇인가 단호한 선언이 있을 모양이다. 해나는 어머니를 가로막고 섰다. “돈 대신 할 수 있는 게 무엇입니까? 무슨 일이든 시키는 데로 하겠습니다.” 대신 화살을 받았다.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 같은 원장이 천정을 잠깐 올려다 보았다. 원장의 처남인 원무과장이 앞으로 나왔다.
“할머님, 전세금이 있다지요? 그걸 있는 대로 싹 뽑아오세요, 이렇게 무작정 있으면 입원비만 더욱 늘어나는 게 아닙니까?”
“원장 선생님, 그저 죽을 죄를 졌어요, 사위 녀석이 전과 같이 벌기만 했어두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원장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애기가 또 소화병원에 입원하여 수술해야 산다지 않습니까? 전세금을 다 빼버리면 우리 모녀는 당장 어디 갈 데도 없습니다.”
“그건 그쪽 사정이지 우리가 남의 집 걱정까지 할 수 없습니다. 나도 자선사업하자고 병원 차린 게 아니니까, 오늘 저녁 6시까지 결재를 하지 않으면 이 침대에 다른 환자가 옵니다.”
“여기 딸 아이 수술비도 문제지만, 손자 녀석 수술비도 그저 막막합니다. 전세금은 사글세 방 얻을 돈이라도 남겨야지, 다 빼오면…그러니까 저를 믿고 내보내주면 매달 얼마씩 갚아나가겠습니다.”
“할머니를 무얼 보고 믿습니까? 지금까지 370만원가량 밀려 있는데, 할머니의 딱한 사정을 보아서 10만원 정도는 빼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일단은 전세금을 모두 빼 오십시오.”
  원장이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원무과장이 다시 반말로 욱박질렀다.
“이 할망구야, 그것도 안 된단 말야? 어엉! 원장 선생님께서 특별히 봐 주신다면 감사하다고 백 배 절은 못할망정 뭐가 안 된다는 거야. 당장 경찰을 불러 넘기기 전에… 엉! 나참 별 떨거지가 다 속 썩혀!”
어머니는 원무과장의 경찰이란 말에 찔금 거리더니 하얗게 안면경련을 일으켰다. ‘제복’의 의미가 어머니에겐 가장 무서운 권총이다. 일본 헌병의 당꼬 바지 제복에 아버지를 잃었고, 6.25 때는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 때에 남편이 빨치산들에게 잡혀 대죽 창에 찔려 잃었다. 그리고 또 피난 다니다가 정착한 마산에서 3․15 의거 때, 단 하나의 외아들을 경찰 제복의 무차별 총격에 잃었다.
아버지는 외세(外勢)의 식민지 제복에, 남편은 빨치산 군복에, 외아들은 내세(內勢) 제도권 제복에 제사 지냈다. 그리고 지금은 사위마저 생 이별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머니의 깍지 낀 열 손가락이 눈에 보이게 떨리는가 싶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아니, 보자 보자 하니 젊은 양반, 너무 하잖소? 당신도 어머니가 있고, 할머니가 있을 텐디, 고런 말버릇 엊다 대고 하능교? 병원이랍시고 약한 사람 등치는 데여? 여기 원장 선생님이 교회 장로 아잉교? 눈물 콧물도 없능교?”
“아니, 등 치다니? 이 경상도 아주머니는 사사껀껀 시비꺼리만 찾고 있어? 정당하게 들어간 수술비용 달라는데, 무가 등 친단 말입니까, 네에? 이거 진짜 경찰 부를까요?”
복도에서 환자들이 왕창 모여들고 있었다. 해나는 며칠 전부터 주억거리던 생각을 실행하기로 했다. 그것은 명청이의 끊어진 식도를 보면서부터 진작 각오한 것인지도 모른다. 일단은 식도를 이어주고 볼 일이다. 만사 제쳐 놓고 생명을 건져놓고 볼 일이다. 그런데도 순간순간 해나의 발길을 제지시키고 한 것은 순전히 남편 때문이다.
남편은 자기의 이념, 자기의 신념을 위해선 자신의 생명까지도 호탕하게 내던질 사람이다. 그 사상에 어긋나면 제 발로 걸어서 사형대라도 갈 사람이다. 그런데 해나는 남편과 정반대가 되는 보수 꼴통과 ‘타협’을 해야 한다. 남편의 이상과 해나의현실이 첨예하게 충돌되는 순간이다.
해나는 광화문 행 버스에 올랐다. 덕수궁 정문을 지나 조선호텔 근처쯤이긴 한데 헷갈린다. 지난 겨울, 한번 왔던 기억을 추슬러 회색 건물을 찾아 올라갔다. 13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호텔 같이 복도에도 고급 양탄자가 깔린 내부는 화려하다 못해 어떤 위압감까지 주었다. 황금색으로 도금한 데스크에서 스튜워디스 같은 아가씨의 안내로 ‘비서실장’ 문을 두드렸다.
그 비서실장은 서른 살도 안된 젊은 나이에 벼락 출세햇다. 현 권총 정권의 실세 중의 실세이다. 남편과 고교 동창생이다. 마산시 모 지방신문 서울지사장이란 명패
가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도 위장 지사장이지 실제로는 사주(社主)이다. 앞 머리가 반달형으로 벗겨져나간 기름진 대머리 위로 맥아더 원수 같은 파이프 담배 연기를 천천히 올리고 있었다.
김재박(金在薄) 사장은 해나를 안내해 온 비서실장이 허리를 굽히고 나가자, 해나에게 정중하게 자리를 권했다. 엉덩이가 따듯해지며 편안하다. 남편에게도 이런 자 리가 평생에 한번이라도 찾아올까? 커피 잔을 두 손으로 받치며 생뚱한 생각에 잡혀 있었다. 남편이 이 막강한 실력자의 동창생에게 부탁만 해도 간단히 옥문을 나올 수 있을 텐데…
  “한심이 갸는 밥 잘 먹고 있겠지요?”
해나는 깜작 놀라, 커피 잔을 떨어뜨릴 뻔 했다. 그는 담배 연기로 도너츠를 만들어 올리며, 먼저 그미 남편의 안부를 물었다. 남편의 이름이 ‘한강철’인데도 그는 한심하다며 ‘한심이’이라고 조롱하는 것이다. 김재박은 그 남편이 10년 형기 중 2 년째 넘어가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대학은 서로 다르지만 마산 고교 때에는 한때 삼총사 중의 하나였다. 이승만의 부정선거 규탄, 3․15 의거 때는 같이 잡혀서 마산경찰서 지하실에서 곤욕을 당하기도 했단다.
그러나, 지금은 두 사람의 세계와 신분이 천상천하로 대조적이다. 그 동안 직접적인 충돌은 별로 없었지만 간접적인 적대의식은 남모르게 불꽃이 일어왔다는 걸, 연애 시절의 남편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고교동창 중 초 고속 출세한 김재박이가 전화만 한 통 걸어준다면 간단하다. 아직 나이가 어려서 지방신문 지사장 직함이지만 실제로는 중앙정보부 감찰실 고급간부이다.
이 건물도 실상은 서울시내 정보를 수집하기 위한 극비 정보부란다. 김재박의 친 형은 이름 석자를 함부로 부를 수 없는 청와대 막강한 권력부처에 숨어 있다. 그것은 남편과 같이 민주화 운동을 하던 고교 동창들이 남편 교도소에 면회 왔다가 이따금 해나를 만나면 논물도 보이고, 하늘에 주먹질도 해대며 떠들던 소문들이다.   
“한심한 한강철! 그 녀석! 와 그리 고생을 사서 하능교? 그래 봤자, 세상에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지만 고생이제, 한 세상 적당히 살아가는 기제, 이케 집 사람까지 고생 안 시키능교?”

해나는 대꾸 대신 김재박의 박제된 독수리 주둥이를 무표정하게 올려다 보았다. 그 주둥아리는 금방 창 밖으로 날아가 하늘로 올라 갈 것 같이 양쪽 날개를 당당하게 벌리며 햇병아리 같은 해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이번 호부터 저희 월간지를 변경해 볼라꼬 안 카능교 중앙 일간지들이 전부 여성지니 주간지니 해서 재미를 많이 보고 있는데, 아무리 지방지라고 해서 성인군자마냥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요.”
해나는 지난 번에 그가 제안한 ‘김재박 평전’ 대필 문제 얘기가 나오기만을 기다
렸다. 대필계약서에 싸인만 하면 우선 그 계약금을 손 안에 쥘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 계약금으로 우선 일신병원에 잡혀 있는 어머니를 끌어 내오고… 아니, 명청이의 수술 게약금을 먼저? 
   “우쨌던 간에 언론이란 우선 많은 독자들을 잡아놓고 봐야 안 되능겨? 그래서 좀 기발한 아이디어가 하나 있는데, 한국판 ‘플레이보이’ 잡지를 하나 새로 창간하려고 안 카능교? 원래 미국 플레이보이 잡지 수입권을 따내려고 했는데, 미국 놈덜 너무 바가지라 아예, 우리가 창간할라고 안 카능겨? ”
  그는 연신 걸려오는 전화와 비서가 전달해 주는 쪽지를 받으며 능청을 떨었다. 이미 문 밖에는 많은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소문에는 마산 땅 절반은 다 빼앗다시피 해서 반강제로 차지하고 있단다.
“아주머니가 이 플레이보이 한국잡지 창간 작업 한번 안 해 보겠능교? 국문과 출신이고 하니까, 더욱 전공과도 안 맞능교? 월급은 두 배로 주리이다. 내가 강철이를 도와 줄 힘은 없꼬, 대신 아주머니를 도와주면 안 되겠능교?”

재박이는 노골적으로 해나와 한강철(韓鋼鐵))이를 능욕하고 있는 것이다. 반어법으로 스스로를 과시하면서 포르노 잡지로 능멸하려는 수작이다.
“인자, 한국도 플레이보이 잡지 정도는 볼 수 있는 차원이 아잉교, 이미 웬만한   상류 층에선 미군 P.X에서 흘러나오는 새빨간 원서를 다 보고 있는 판이라예, 내가 하면 전국의 공공기관들이 다 연간구독을 할 끼라예, 딴 언론사에서 냄새를 맡고 있는 모양인데, 내가 어떤 놈인데 그냥 둘 낀교? 어림없제, 내가 누군교?”
“아버님 자서전 자료는 이제 다 모아 놓았습니까?”
해나가 살얼음 깨지는 소리로 겨우 물었다. 작년에 그는 자기 아버지의 자서전을 하나 꾸미는데, 그 대필 후보자 가운데 한 사람을 굳이 해나로 지정해 놓았던 것이다. 해나가 남편의 공안사건 문제로 김재박을 처음 이 사무실로 찾아왔을 때, 엉뚱하게 해나를 찍은 것이다. 그의 아내와 단짝 친구가 해나와 같은 남산대학 독서 써클 멤버였다. 당시, 전국대학가 독서회는 마르크스, 레닌 이념 서클이었다.   
“아참, 내 정신좀 보래이! 저희 아버님 자서전 문제로 왔지러. 가만있자, 증말로 쓰실 수 있능교? 아주머니의 필력이면 안심하지만, 그 동안 어떻게 냄새 맡았는지 웬 떨거지들이 쓰겠다고 울매나 덤비던지…무료로 써 주겠다니 차암,”
전자 벽시계의 빨간 아라비아 숫자판 첫 글자가 하나 더 보태어졌다. 그는 새삼   생각난 듯이 테이블 위 초인종으로 비서를 불렀다. 곧 그 아가씨가 자서전 자료 부스를 안고 왔다. 해나는 대학을 졸업반 때, 지도교수가 소개해 준 여학교도 마다하고, 박봉에다 업무량이 많은 잡지사를 굳이 선택했다. 그것은 단지 ‘창조적’ 직업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자기 같은 편향된 이념의 머리로 순수한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게 걸렸다. 교육이란 가슴으로 해야지, 머리로 하는 게 아니다. 몇 군데 군소 잡지사를 전전하다가 좌파 이념을 선도하는 계간 문학잡지에 정착하였다. 그미가 처음 생각한 것마냥 마음껏 뛰고, 마음 껏 쓸 수는 없어도 원한만큼 직성을 죽여가며 견딜 수 있는 직장이
었다.
그러나, 그 잡지는 편집위원회에서 결정되는 것을 그대로 따라 해야만 하는 로봇이나 마찬가지이다. ‘창의적’인 것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우파 잡지들이 ‘북한문학 2중대’라고 공격했다. 발표되는 소설 내용은 늘 때려부수는 줄거리이다. 가정을 때리고, 사회를 찢어발기고, 국가를 전복시키는 주제들이다.
신혼부부를 이혼 시키고, 어머니의 불륜을 고발하고, 아버지의 부정을 폭로시켰다. 피 튀기는 벽지와 피 터지는 소리만 났다. 그래도 전국의 젊은이들은 이런 게 바로 한국문학의 정체성이요, 진정한 노벨 수상 깜이라며 열광했다. 실제로 해마다 발표되는 우리나라 3대 문학상들은 다 이들 잡지나 출판사에서 발표되어야만 그 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때는 처녀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사장과 또는 주간과 싸우다가 나오기도 했고, 필화사건으로 쫓겨나기도 했지만, 잡지계는 늘 들고 나는 자리가 많았다. 지금도 마음 내키면 옛 잡지사 어디고 들어갈 수가 있지만, 잡지계 연령으로는 이미 늙었고 무엇보다 건강이 악화돼 있다. 이번 명청이를 낳으면서의 불행의 원인도 악성빈혈과 영양실조가 주요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의사는 충고했었다.

그것은 남편의 옥바라지 때문만이 아닌, 잡지사 특유의 열악한 환경과 과도한 노동 조건에 그 이유가 크다. 마감 날이 가까워지면 야근도 예사였다. 특히, 겉으로는 청소년 교양지 입네 하고는, 어린 여학생들에게 저속한 사탕발림으로 팔아먹고 있는 ‘서울하이틴’ 잡지는 직원들까지 혐오스럽게 하여 잡지계에서 정평이 나 있었다.   그 여 사장은 직원들을 후라이 팬 위에 올려놓고 콩 볶듯 튀겨 잡숫고 있던 잡지였는데, 그 여 사장이 바로 김재박 부인이었던 것이다. 그미의 용병술은 남편과 차원이 달랐다. 다른 잡지사보다 월등한 대우를 해주고 대신 직원들을 집요하게 부려먹었다. 다른 데로 가고 싶어도 대우 문제로 주춤하게끔 하는 고도의 전략이었다. 그때 해나는 거의 6 년간이나 교제를 해오던 남편과의 혼인문제를 놓고 다투던 때였다. 남편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직장이 확정되면 신혼살림을 시작하자고 했고, 해나는 자기가 남편의 등록금까지 댈 테니까 당장 방을 얻자고 투정부릴 때이다.

해나가 서울하이틴 잡지사 사장과 싸운 얘기를 남편에게 하소연하자 남편이 그 특유의 파안대소를 했던 것이다.
그때 처음 김재박과 남편과의 오래고 미묘한 관계를 해나는 눈치챘던 것이다. 남편은 늘 그렇게 말이 없었다. “아주머니 계약금조로 우선 1백만원을 드리겠습니더예, 원고가 탈고되면 나머지 잔금 2백만원을 드리면 안 되겠능교. 중간에 돈이 꼭 필요하면 언제든지 오이소 예, 대신, 원고내용이 마음에 들 때까지 고쳐주어야 되겠습니더. 예에?”
그는 일방적으로 원고료며 집필내용을 결정했다. 싫으면 관두라는 말투다. 그미의 가난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다. 이미 남편의 동창회 아니, 그의 중앙정보부 정보망에는 전국 공안사범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매일 거울 같이 잡혀 보고 된다. 그가 낙서하듯 간단하게 싸인하여 써 던진 빳빳한 수표 쪽을 해나는 접고 접어서 외투 안쪽 깊숙이 찔러 넣은 다음 얼른 일어섰다.
박제된 독수리의 날카로운 주둥이를 피하듯, 재박이의 피 튀는 눈길을 피해 나왔다. 그의 미묘한 비웃음 소리가 복도 끝까지 따라 나왔다. 바쁜 마음에 엘리베이터 대신 층계를 뛰어내렸다. 남편이 이 사실을 안다면? 해나는 머리를 강하게 흔들었다. 어쨌든 명청이의 수술비부터 준비하고 볼 일이다. 아니, 지금쯤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있을 어머니부터 모셔와야 한다.
골수 친일파 김재박 부친을 마산지방 독립투사 또는 만고의 자선사업가로 페인트 칠을 진하게 해주어야 한다. 그 동안의 소문이 왜곡된 헛 소문이란 것을 그의 자서전에서 능란하게 휘갈겨야 한다. 역사의 미화 내지는 날조를 위해 해나는 결국 현실에 무릎 꿇어야 한다. 처참하게 망가지고 굴복해야 된다. 어쩌면 몸 파는 창녀 보다 더 비굴한 정신을 팔아 먹어야 한다.
김재박의 마음에 들 때까지 고쳐야 한다는 엄포는 바로 영혼도 팔아야 한다는 암시이다. 이미 그런 치욕도 계산에 넣으면서 수표를 낼름 받은 것이다. 명청이의 목숨만 건질 수 있다면 정말 영혼이라도 악마에게 넘겨주고 싶다. 그러나, 남편에게도 알려진다면?  얼굴은 전혀 감각이 되지 않으면서 발걸음만 빠르다. 로봇이 걸어가는 것 같다. 벌써 저녁 해는 남산 뒤로 꼴깍 넘어갔다.

층계의 비상계단을 타다가 끝이 안 보여 중간에서 엘리베이터를 다시 탔었다. 1층을 지나 다시 지하로 내려갔다. 빈혈과 헛구역질 속에서 빨리 내려야겠다면서도 구두가 움직여지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는 다시 13층까지 올라갔다. 담배 재 같이 사위어가는 의식을 해나는 뺀찌로 물 듯이 입술을 깨물었다. 엘리베이터가 멈출 때마다 타고 내리는 소님들의 눈 도끼가 날카롭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몇 번 오르내리는 동안, 빌딩 손님들의 신고를 받았는지, 정문 수위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와 해나의 겨드랑이를 나꾸어 챘다. 그의 물리적 힘
에 의해 원형 출입문 밖으로 밀려났다. 찬바람을 얼굴을 감쌌다. 정신이 번쩍 든다. 목 둘레 식은 땀을 훔쳐내며 조선호텔 앞 화단 위에 엉덩이를 잠깐 걸쳤다.
몇 년 전 바로 이 자리에서 남편과의 첫 번 째 긴 이별을 맞보았다. 남편은 그미에게 공수부대 입대 영장을 보여주었다. ‘11월3일까지 제1공수특전단 신고’ 라고 붉게 밑줄 친 활자 아래엔 퍼런 스탬프 도장도 보였다. 남편을 저승으로 체포해가는 영장이라도 되는 듯 그미는 기절해 뒤로 쓰러졌다. 남편과 같은 요주의! 공안사
범들에게는 흔히 발부되는 거친 영장이다. 그때의 일기장을 지금 읽어보면 좀 유치
한 것도 같다.

 

      4. 청송감호소 면회

‘……처음으로 나에게 슬픔을 알게 한 이가, 처음으로 기쁨도 가르쳐 주었어요.’ 용서 없는 사랑은, 사랑 없는 용서처럼 공허한 것이다. 사랑은, 사랑 중에서도 뼈마디 아파 오는 이별을 앓는 이여! 불로 구워서, 몇 번이라도 불로 구워서, 두드려 만드는 시련의 구리 기둥을 보라… 암실에서의 뜨거운 그리움, 애정의 함정! 한 개피의 성냥으로도 능히 지옥의 불 바다를 부를 수 있는 나는 위험한 불씨…그대 고단한 배가 되어 항구에 들어오실 땐……
이런 낙서들이 생각난다. 숙명여대 김남조 교수의 수필집이던가에서 베껴온 것이다. 그때는 이런 문장 한 귀절에도 귓가가 빨개지고, 김수영 싯귀 하나에도 땅바닥에 주저 앉았다. 덕수궁 문닫을 시간인지 아베크 족들이 그쪽에서 데모하듯 몰려나온다. 누가 떼어놓기라도 하려는 듯이 쌍 두꺼비처럼 젊음들이 늘어붙어서 대한문을 나온다. 얼음 판 길에 기우뚱할 적마다 위태롭게 즐거워했다.
쌍쌍이들은 시청 쪽으로, 정동 덕수궁 돌담 쪽으로 흩어져 나갔다. 그들 속에 나와 남편이 팔짱 낀 뒷모습도 보인다. 남편은 시청 건물을 보고도 못마땅해 했다. 일본 놈들의 식민지 건물을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논리였다. 중앙청, 시청, 한국은행, 법원, 서울시경 등 적산가옥이 그대로 이 땅의 정치, 경제, 법률을 아직도 좌지우지하고 있지 않느냐는 주먹질이다.
남편은 왜 저런 갑돌이, 갑순이 쌍쌍들 같이 보통사람이질 못할까. 무슨 국가와 민족 어쩌구! 하면서 그게 모든 가치의 우선 순위이다. 나도 남산대학 시절 때부터 그런 남편을 경모하고 떠 받들었던 이념의 여인이었지만, 사회생활을 하고부터 서서히 변질되어 갔다. 아니, 그냥 평범한 생활인이 되어 갔다. 특히, 명청이를 맞딱
드리고 부턴 이건 아니다! 나도 그냥 평범한 소시민 명청이의 엄마이고 싶었다.

남편은 아직도 왜, 어머니가 말하는 아버지 같은, 또 같이 있으면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어린 시절 오빠 같은 냄새가 날까? 그냥 히히덕 거리고, 그냥 못 본 척 지나치며 살지 못할까? 그게 불만이었다. 남편과의 데이트는 은근한 밀어보다 격렬한 토론 쪽이었다. 사실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모르고, 사춘기에는 오빠마저 부재된 집안이었다. 남자들의 근육 같은 굵직한 사랑이 결핍되어 자란 해나에게 한강철 선배는 오빠이자, 아빠이자, 정신적 스승이었다. 언젠가 백령도에 파견 나가 있다며 남편이 보내준 엽서에 쓴 구절이 떠오른다.

…돈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용기를 잃어버리는 것은 인생에 있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더구나 신용과 명예를 잃어버리는 것은 인생의 전부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닐까요? 해나 씨!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일이에요…고향과 같은 수락산 정상의 달밤에 우리는 야간 점프를 합니다. 하늘 끝에서 땅 끝으로, 우리는 젊음을 날리는 것입니다. 장난감 같은 낙하산이 장난같이 산 속 골짜기로 때로는 험난한 바위 절벽 아래로 흘러내립니다. 죽음 같이 흘러 내립니다. 어젯밤에도 우리 내무반 동료 두 명이 이 근처에서 추락했지요. 오늘 밤은 그들 시체를 찾으러 다시 뛰어 내리는 것입니다…이렇게 위험한 밤, 왜 나는 그 동안 해나를 좀더 즐겁게 해주지 못했던가 후회해 봅니다. 이번 휴가 때는 그 깊은 그리움을 덕수궁 분수 앞에서 마음 껏 목욕해 보자우요….
해나는 남편과 걷던 덕수궁 돌담 길로 해서 MBC 앞으로 나왔다. 마침, 무악재 고개 방향으로 나가는 택시에 합승했다. 몹시 허기가 지는데도 손 끝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돌이 될까부다. 독립문을 지나자 다시 버럭 겁이 났다. 남편이 김재박을 만난 사실을 안다면? 그리고 대필 사실을 안다면?
“아이구, 아가! 이제 들어오니? 그래 뭘 좀 먹었니? 여기 좀 앉아 봐라!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어머니의 얼굴이 전에 없이 밝다. 해나는 침대 끝에 엉거주춤 엉덩이를 걸쳤다. 목돈이 생겼으니 우선 밖에 나가서 어머니에게 더운 국밥 한 그릇이라도 사 드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외투를 벗지 않았다.
“얘, 나, 취직했단다. 한 달에 1십 만 원 받기루 하구”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있는 해나에게 어머니는 더욱 똥그란 눈으로 들떠서 그미의 곁으로 바짝 다가왔다.
“아까, 이 병원 원장 사모님이 부르신다고 해서 내려갔더니, 나보고 청소일 같은 거 할 수 있느냐고 해서, 시켜만 주시면 변소 깐 청소도 할 수 있다고 하니까, 이 병원에 남아서 일하라고 하더구나. 처음에는 경찰이 와서 부르는 줄 알고 도망가려고 했지. 히히,”
해나는 어머니의 손목을 말 없이 끌고 나섰다. 뒷골목을 돌아 순대국 집에 들어갔다. 어머니와는 참 오랜만의 외식이다. 지난 해의 환갑 잔치도 건너뛰었다. 환갑은커녕 생일 케잌도 한 번 자른 적이 별로 없다.
“원장 사모님은 종교인이라 아무래도 정이 남다른 게야. 먹여주고, 재워주고 1십 만원이면 이 나이에 어디 가서 그런 대우 받겠니?”
그 부인은 이 병원 산부인과 의사이기도 해서 명청이의 탯줄을 잘라주기도 했다. 그러나, 해나는 콩나물 국물을 마시는 척하며 눈물을 마셨다. 원무과장은 해나 모녀에게 병원비를 다 받아낼 승산이 없다는 걸 확인하자, 전세금 전액 이외의 나머지는 어머니의 육체적 노동으로 때우려는 계산임을 해나는 계산해낸 것이다.
그렇다면, 1년에 120만원씩 계산으로 어머니는 적어도 2년 이상은 이 병원에 잡혀 있어야 한다. 먹여 준대야 식당에서 환자들의 먹다 남은 밥을 먹여줄 것이고, 재워 준대야 환자들의 피고름이 묻은 빨래 쌓아두는 창고 방이 고작일 것이다. 병실이 모자라 환장하는 원장인데 청소부 방을 따로 마련해 줄 것 같진 않다.
다시 서둘러 서부역 소화병원으로 갔다. 그 동안 명청이의 수술여부는 검사결과가 나왔는지? 만약, 손 쓸 수도 없이 단념해야 한다면? 
 
솜을 두텁게 넣은 누비옷을 준비한 보퉁이를 끌어안고 해나는 지정된 면회실에서 기다렸다. 청송감호소로 이감된 후 다섯 번째 면회 신청이다. 저번마냥 남편이 또 면회 거절을 하고 따돌릴 것 같아 조바심이 났다. 앞의 할아버지 면회객이 나가자 다음 차례에 남편은 옛날 같이 다시 활발하게 나타났다. 광대뼈가 더욱 툭 불거진 것이 훨씬 야위었으나, 쇠절구 찧는 듯한 우렁우렁한 목소리며 자신감은 그대로였다. 아니, 더욱 날이 선 듯한 느낌이다.
“여보, 명청이는 무럭무럭 잘 크고 있어요, 당신 닮아서 뒤짱구이에요!”
“여보, 당신 닮았으면 똑똑한 아기일 꺼요, 어머니는 건강이 좀 어떻소? 겨울 이면 기침이 심하곤 했는데에? 올 겨울은 더 빨리 찾아오는 것 같소.”
“어머닌 명청이 땜에 아주 즐거워 하세요. 기저귀도 꼭 어머니가 갈아주시구. 그런데, 이번 공판은 잘 될 꺼 라고 인권협회 채 변호사님이 말씀하셨어요.”
해나는 이제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는, 채 변호사 얘기까지 꺼내며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아, 모두들 애쓰는 구려. 그러나 여보,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그냥 놔 두구려. 아마, 금년에도 옥중 수기 문제로 쉽지 않을 것 같소. 아니, 그것보다 당신이 아기도 있고 하니… 다신 오지 말구려, 날씨도 험하구.”
“또오, 그런 말씀, 저는 이제 명청이가 곁에 있으니까 절대 괜찮아요.”
남편은 해나에게 다시 재혼을 권유해 왔다. 아직은 젊으니까 마음을 돌리라는 강요 같은 것이다. 그래서 몇 달 동안 일체 면회도 거절해왔던 것이다. 남편은 아마, 이 군사정권 아래에서는 못 나올 것이라는 것을 에감하고 잇는 것 같다. 이번 면회 허락도 어쩌면 그가 연필과 공책이 필요하기 때문일 것 같다.
남편은 공수부대에서 제대를 하자 대학원 박사과정 진학도 포기했다. 법대 공법학 교수에의 꿈도 꺾어버렸다. 그리고는 원래부터 잠재해 오던 언론계에 투신했다. 경남일대 마산 지방 특파원에서 시작하여 유럽 전역을 드나드는가 싶더니 원래의 날 선 목소리가 다시 터졌다. 덕분에 신혼생활이란 것이 자주 출장 나가는 남편의 여행준비 물을 담은 가방을 김포공항으로 전달해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국내선 또는 국제선 공항에서 긴 이별 또는, 짧은 이별을 위한 만남으로만 세월을 죽여왔다.
입회 간수가 중간 점검한 책, 연필, 고약 등을 솜 누비옷 속에 싸 들고 남편은 다시 학교 기숙사에 들어가듯 가볍게 그리고 힘찬 발걸음으로 되돌아 갔다. 10분간, 제한시간도 채 안 되었는데 남편은 한 번 더 큰 웃음을 해나의 가슴에 남겨주고 사라졌다. 그미는 남편보다 더 큰 울음을 가슴에 안고 일어섰다. 황망하고 삭막한 교
도소의 높은 담장이 남편의 돌이킬 수 없는 가슴처럼 절벽 같이 막아 섰다. 
길게 뻗어나간 철조망이 명청이의 얼굴에 죄 없이 잠긴 링거 줄처럼, 아픔처럼, 감겨 왔다. 그미의 등뼈 추간판 사이사이를 찬 바람이 찔러왔다. 일신병원에서 퇴원 이후, 미역국 한 그릇 제대로 몸조리 못한 탓에 약간의 야생 바람에도 신경이 닳는다. 사지가 전혀 타인의 것 같다. 억지로 굳은 철문 박으로 나왔다.
누굴 면회 오는 지, 지팡이에 왼 몸을 의지한 어느 할멈이 혼자 뒤뚱거리며 마주 오고 있었다. 지팡이가 걷는 건지 할멈이 움직이는 건지 모르겠다. 한발 앞으로 나갔다가 두 발 뒤로 물러난다. 거위 같은 그런 보폭으로 걷다간 면회 마감시간이 지난 뒤에야 면회 신청하게 될 지도 모른다. 해나가 달려가 업고 갈까? 하는데, 다행
히 검찰청 호송버스가 할머니 곁에 멈추더니 삼키듯 태우고 들어갔다.
교도소 앞 버스 정류장에서 몇 대의 버스를 그냥 보냈다. 정류장 근처에도 면회 가족인 듯한 사람들의 절망들이 머리 위에 무겁게 얹혀져 서성거렸다. 다시 올 것 같지 않은 에감에 떨었다. 버스가 다시 왔다. 서성거리던 면회객들이 가기 싫다는 듯이 올라 탔다. 한국에서는 마지막 지옥이라는 청송감호소 그 냉갈령 한 담장만 바라보며 해나는 전혀 버스에 오를 생각을 못하고 있다.

전셋돈 남은 것 170만원과 김재박에게서 원고 계약금으로 받은 돈 100만원, 도합 270만원이다. 그 중에서 먼저 일신병원 원무과장에게 220만원을 내주었다. 나 머지 50만원으로 사글세 방을 얻었다. 구파발에서 의정부 쪽으로 넘어가는 장흥이란 시골에 30만원에 3만원짜리 사글세를 얻은 것이다. 원장이 20만원 깎아준 병원
비의 나머지 350만원 중에서 220만원 내놓았기 때문에 어머니는 130만원 어치 노동력으로 약13개월만 청소부로 일하면 될 것이다.
소화병원에도 들렸다. 명청이는 나날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쬐끔은 살도 오르고 우유도 마셨다. 왼쪽 옆구리의 끔찍한 수술자리도 실밥을 뽑았다. 콧구멍 등에 몇 개 연결된 줄만 제거하면 퇴원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담당의사가 얘기한대로 일주일 내로 퇴원 수속하기는 불가능하다. 명청이의 병원비를 감당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약 1500장의 원고를 채우려면 하루에 1백 장씩 쓴다 해도 보름이 더 걸린다. 일반 신문기사나 보고서 종류라면 옛날 잡지사 기자 시절마냥 하룻밤에 1백여 장도 쉬웠지만 쓰기 싫은 남의 글을, 더구나 날조된 인물의 똥구멍을 닦아주는 찬사를 나열해 놓아야 한다는 것이 다음 문장을 쉽게 이어주지 못했다. 벌써 며칠째 제 1
장을 제목을 써 놓고 전진하지 못하고 있다.
미치는 제자리 걸음이다. 칵, 양잿물이나 마실까부다. 명청이 얼굴만 생각하면 손 끝이 부들부들 떨린다. 빨리 끝내야지, 정작 원고지 앞에 앉으면 단어 하나하나 잇
기가 똥 덩어리를 삼키는 기분이다. 이런 개똥만도 못한 악한 인간을 천사 얼굴로 페인팅 하여 날조해 내자니 차라리 전혀 새로운 인물을 창조해 내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5. 장흥 유원지 가는 길

인큐베이터 방 값은 일반 병실의 3곱절은 더 비쌌다. 아직도 해나는 살 지 죽을 지 모르는 명청이를 인큐베이터 덮개 유리창 안으로 들여다 보았다. 동네 문방구 점 장난감 인형 같이 누워 있다. 아니, 참나무 기둥에서 기어 나온 애벌레 같다.
숨을 쉬는 건 지, 안 쉬는 건 지? 아기의 코에 손 등을 갖다 대어보려고 내밀
었다. 인큐베이터 덮개 유리창에 살짝 부딪혔다. 명청이가 깜짝 놀란 듯 안개같이  웃었다. 생사가 불분명한 한 달짜리 갓난아기에게 이름이 무슨 소용 있을까? 명청
이는 자기 엄마를 정말 알아보고 웃는 건지 강아지 같은 갈걍스런 웃음을 눈곱 같이 내밀었다.
담당 간호원이 너무 오래 있으면 안 된다고 팔꿈치를 잡아 끌었다. 복도 창 밖에서 여전히 명청이를 건너다 보며, 망연히 서성거리고 있으려니, 중간 계산서를 가지고 왔다. 굵은 고딕활자로 인쇄된 병원 영수증 속의 파란 글씨가 애벌레 같이 꿈 틀거렸다. 병원비 아라비아 숫자가 그냥 무감각하다. 출판사의 교정지 같이 기계적이다. .
뒤돌아 서울역 쪽 먼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허연 서리가 내린 복도 창 밖으로 회색, 청남색 비둘기들이 와앙, 하늘로 오르고 있다. 고개를 왼쪽으로 잠깐 돌리면 며칠 전 남편이 떠나 간 서대문 감옥소 쪽이다. 그는 지금쯤 청송감호소에서 신입신고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한번 들어가면 병신이 되거나 시체가 되어야만 나
온다는 유럽 19세기 한국식 괘씸죄 중죄인 영창이다.   앞에는 명청이의 인큐베이터, 뒤에는 검붉은 비둘기 떼, 더 먼 그 뒤에는 청송감호소, 왼편에는 남편의 피 땀이 배어 있던 얼마 전의 서대문 교도소, 더 먼 그 뒤에
는 지금쯤 어머니가 의료 쓰레기를 태우고 있을 박석고개 일신병원, 그리고 다시 더 그 뒤에는 며칠 전 새로 입주한 해나의 사글세 방이 웅크리고 앉아 있다. 사면 어디에도 빛과 희망은 없었다. 
‘한강철, 그리고 사랑해애…’ 엄머어? 한강에도 강철이 있나요? 강철을 어떻게 사랑해요? 깜짝 놀라, 뒤돌아 보니 아까의 그 담당 간호원이 붉은 도장이 진하게 찍힌 영수증을 내밀었다. 유리창에 쓴 글씨를 보며 해나에게 미소 지었다. 그미는 자신도 모르게 쓴 글씨를 보고 놀랬다.
손바닥으로 서리 낀 유리창의 글씨를 얼른 지웠다. 그러나, 쓸 때와는 달리 잘 안 지워졌다. 맞았어! 정지용 시가 생각났다. 그가 잠 안 오는 한 밤에 일어나, 은하수를 바라보며 절규했다는 ‘유리창’ 명시도 죽어간 자기 아들을 그리워하며 서리 낀 겨울 유리창을 호호 불며 긁었다지?  ‘아아, 소리 없이 하늘로 날아간 작은 새여…
어느 젊은 부부가 뜬금없이 들이닥치더니 간호원이 밀고 있는 인큐베이터 앞을 가로 막고 몸부림을 쳤다. 좁은 복도 간이의자에 앉아있던 어느 아주머니가 덩달아 눈시울을 붉혔다. ‘에구, 오늘 벌씨로 세 번 째, 뒷마당으로 가는 디이…’ 뒷마당에는 아기 시체를 처리하는 간이 화장터가 있다. 그 젊은 부부는 아기의 사망통고를 받고 달려온 것이다.
안 보려고 했으나, 돌아 본 그 인큐베이터 아기도 명청이 같이 그냥 자는 듯 했다. 모기 같은 숨도 쉬고 있는 듯했다. 생사의 갈림길이란 이렇게 분명하지 않는 것 같다. 죽는 건 지, 사는 건 지, 살고 있는 것인지, 죽어가고 있는 것인지? 남편이랑, 사랑하는 건 지, 결혼한 건 지, 안 한 건 지 모르겠다. 세상을 모르겠다. 세상은 모
르고 모르는 것뿐이다.
뒷마당으로 끌려간 인큐베이터 아기들은 날카로운 메스로 사지가 다시 잘려 서류 봉투에 담겨 한강 쓰레기 장으로 나간다. 화장하는 데 드는 기름값 20만원을 못 내는 부모들은 아기를 두 번 죽여야 한다. 강남의 어느 산부인과 병원에서는 병원비를 못 내고 도망 친 부모의 아기들은 아직도 숨을 쉬는 갓난아기들의 장기를 부위별로 잘라내어 밀매하기도 한단다.
그들은 살아 있는 아기도 죽었다며 거짓말 하고 장기매매를 하기도 한단다. 도살장 소마냥 부위 별로 오장육부를 잘라 팔면 그 수익금이 병원비의 몇 배나 된단다. 특히, 쓸개와 신장은 부르는 게 값이란다. 홍콩의 밀매업자들은 산 아기를 그대로 햇볕에 말려 아예 믹서기로 갈아서 한약재 약용으로 판다고 했다. 문둥병이나 해
소에는 특효라고 황제내경에도 나와 있다나?    
해나는 치를 떨었다. 이슬람 교도들이 시퍼런 반달 칼로 어린 양을 잡던 TV 장면을 떠올렸다. 머리를 세게 흔들자, 다시 아래 부분의 통증이 올라왔다. 부삽으로 사타구니를 내리 찍는 통증이 몰려왔다. 지난 달, 자궁을 다 드러낸 통증이 아직도 지진 휴유증으로 남아 있다. 쪼개지려는 이마를 차가운 벽에 잠시 의지했다. 창 너
머로 명청이를 흘깃 넘겨다 보았다. 그리고 허둥거리며 층계를 내려왔다.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 불광동 시외버스 주차장에서 내렸다. 주차장 건너편, 소년교도소 잔디 밭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장흥 행 매표구에 줄을 서다 말고 자신도 모르게 그 소년 교도소 철문을 넘어섰다. 음력 설빔을 위해 근처의 ‘은평천사원’ 고아들의 무슨 자선음악회 현수막이 내려다 보고 있다.
대부분 갈 곳 없는 이 동네 노인들과 꼬마들뿐이다. 청중들은 음악을 듣는 것보다 저희들끼리 히히덕 거리는데 더 열중이었다. 고아원 소년 음악회 회원들이 동료 소년 죄수들의 설날을 위해 주민들에게 구걸하기 위한 음악회이다. 이맘 때면 매년 열리는 구걸 작전이다.

그러나, 동전을 던져 줄만큼 청중들의 동정을 끌기에는 실패 했다. 노인과 꼬마들에겐 그냥 눈요기일 뿐, 자선을 베풀만한 여유가 빈약한 사람들이다. 몇몇 소년과 소녀들의 키타, 하모니카 등의 합주와 독창도 있었고, 어설픈 연극도 있었다. 그들의 반복되는 징글 벨 크리스마스 노래와 참 아름다워라아, 주님의 세계느은…오오직 예수여어! 하는 찬송가 합창 소리는 발가락 끝을 떨리게 했다.
그것은 화음이 아니라 발악인데도 가슴 끝 실핏줄을 한 올씩 뜯어내는 절규였다.
누가 누구를 위한 자선이어야 하는가? 고아와 죄수 어느 쪽이 덜 불행한가?  아니, 어느 쪽이 더 행복한가? 수녀들과 여승들이 관객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자선 냄비를 흔들어 댔지만, 몇몇 아줌마들의 쩔렁! 동전 떨어지는 소리 이외에는 별로 들리지 않았다.
교외로 나갈수록 어두운 냄새가 난다. 길거리에서도, 버스 속에서도 음식 쓰레기 통 썩어가는 어두운 빛이다.  ‘장흥면’ 무슨 리라는 정류장 팻말을 어둠 속에서 겨
우 찾아내어 내렸을 때는 초승달이 구름에 쫓겨 다니고 있었다. 가로등 하나 없는 아 직은 낯선 산골짜기 돌길을 더듬거리며 올라갔다. 반쯤은 얼음이 녹아 흐르는 시냇물 길을 따라 유원지 나무 울타리를 돌았다.
겨울이라 유원지는 공동묘지 같은 음험한 함몰을 준다. 유원지 관리인 집 유리창
의 희미한 불빛을 발견 하고서야 해나는 조금 긴장의 허리끈을 늦출 수 있었다. 곧 오른쪽으로 철길이 나왔다. 이제는 폐선(廢線)이 된 철길은 아련한 향수도 불러 일으켰다.
초등학교 때, 오빠와 나는 저녁만 먹고 나면 철길에 나가 귀를 대고 기차가 오길 기다렸다. 통금이 있던 그때는 밤 자정까지 급행열차가 셋, 완행열차가 하나 지나갔다. 피난지 군산 근처에서 그때 우리의 제일 큰 꿈은 제1 국민병에 나간 아빠를 기다리는 것이다. 아빠는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에 편입되었다고 같이 끌려간 군산 광복동 목수 아저씨가 말했다.
아빠와 같이 이북 함흥 고향에서 함께 내려온 피난민인 그 아저씨는 팔 다리를 흰 붕대로 칭칭 감고 귀가했다. 한쪽 눈도 나갔다. 상이군인으로 전역해 돌아온 것이다. 우리 아빤 언제 집에 온대? 완행열차만 서는 간이역인데도 우리는 마지막 급행열차까지 지나간 뒤에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아버지는 이미 지리산 피아골 전투에서 빨치산들에게 포로로 잡혀 죽창 찜질을 당했다. 그때까지 어머니는 아버지의 죽음을 우리에게 숨기고 있었다. 아버지의 시체를 찾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니, 일부러 안 찾으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험악한 지리산 어느 굴 속에서든 아버지가 살아 있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철길과는 묘한 인연이다. 우리가 6.25 피난시절 군산에서 살다가 풍문에 큰 아버지가 살고 있다는 마산으로 무작정 떠났다. 백부는 그때 14후퇴 때, 흥남 부두에서 미 해군 마지막 수송선을 얻어 타고 남한으로 넘어와서 거제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석방되었다고 한다. 밀가루 노점상을 하던 백부 집에 억지로나마 우리 남매는   의지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마산 자산동에 집을 얻었다. 거기에도 묵중한 철길이 지나가고 있었다.
나중에 오빠의 이름도 올라가 있는 3.15의 의거탑이 자산동 근처에 올라갈 줄이 야? 지금도 그 철길에는 경마선 12열차가 다닌다. 의거탑 근처에선 약속 같이 기적이 빠아앙! 길게 몇 번 울린다. 의거탑 영렬들을 위로 하는 것이 아니라, 철길 근처에 함부로 올라가 장사를 하는 잡상들을 비키라는 기적이긴 하지만 해나는 어쨌거나 그 소리를 오빠를 포함한 민주화 영혼들을 위한 나폴리 광장 근위대 나팔 소리 쯤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생각이란 참 우스운 것이다. 예컨대, 빨간색을 남편 같이 혁명적이고 정열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머니처럼 핏빛 귀신이 덮칠 것 같이 섬뜩하다고 손을 내젓는 사람도 있다. 또는, 쿠바 앞 바다 수평선 위에 아침마다 찬란히 떠오르는 해와 같이 강렬한 꿈과 희망의 빛이라고 두 손을 번쩍 든 헤밍웨이도 있다. 그렇게 ‘노인과 바다’는 아침마다 월척의 꿈을 꾸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군산에선 석탄을 때던 화통 기차가, 중학생이 되어 마산으로 옮겨 살 즈음엔 증기 기관차로 발전하더니, 대학을 진학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을 땐 디젤 엔진 기관차로 변했다. 국가경제 수준에 따라 기차 등급도 오른 것이다. 지금은 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전기 기관차를 구상하고 있다는데, 해나가 지금 걷고 있는 이 철길은 폐선이 되었다.
폐선! 선고를 받고 기차가 다니지 않은 지 오래 되었는데도 철길은 뜯기고 있지 않았다. 걷어내는 비용이 신설하는 것보다 몇 배나 더 든다고 철도청에선 십여 년 째 내버린 자식이라며 유원지 관리인 할아버지는 주먹질을 해대었다. 시체같이 누워 있는 이 폐선 때문에 이 마을의 발전이 가로 걸려있다며 마을 유지답게 성토를 해대었다.
해나가 사글세로 얻은 이 집은 기묘하게도 철길이 마당 한쪽을 잘라먹고 지나 가는 판자집이었다. 방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댓돌이 철길이 되고, 신발은 철길 위에   놓이는 위험한 집이다. 세수를 하려면 철길을 건너 골짜기 아래로 내려가 야생의 생 물에서 해야 한다. 집 에는 낙엽송 숲으로 이어지는 낭만적인 동화도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그 숲 속을 한 뼘 들어가면 살벌하고 음산하다. 폐장된 채석장도 있어서, 애를 낳다가 그대로 죽은 듯한 가랑이 벌린 임산부 모양을 하고 있다. 산모의 배곱, 아래 부분은 거무틱틱한 화강암으로 희한하게 꽂혀 있다. 그 앞에는 검붉은 자갈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삭아빠진 군복도 보이고 개 뼈인지, 사람 뼈인지 흰 뼈다귀들도 굴러다녔다. 
해나의 판자집 같은 움막 집들이 골짜기 근처에도 몇 채가 더 있고, 폐가(廢家)된 빈 집들도 있었다. 옛날 채석장 경기가 좋았을 때, 일꾼 가족들이 살던 집이라며 반듯한 블록 시멘트 집들도 더러 보였다. 폐선에, 폐간에, 폐인이 된 가난뱅이 마을이다. 방 두 칸에 부엌을 같이 써야 하는 주인 집은, 주인 아저씨가 장님이었다. 그러나, 남매를 거느린 그들 부부는 즐겁게 살았다.
지금은 겨울이라 별로 재미가 없지만, 여름에는 바쁘단다. 아직은 쌓여 있는 채석장의 자갈 부스러기를 리어카에 실어 부부가 밀고 큰 행길가에 올려다 놓으면 공사장 트럭들이 싣고 가는데, 한 리어카에 한창 때는 3천원까지 받는다고 밝게웃었다.  조그만 행복이 큰 행복이다. 이들 부부에게는 거리낌 없는 진정한 행복이다.
또 일요일 같은 때는 유원지에 나가 남편은 바이올린을 켜주고 손님들에게 팁까
지 받았고, 주인 여자는 식당 일을 하며 일당을 보태었다. 8살짜리 큰 딸과 그 아래 작은 아들은 관광 온 꼬마들에게 풍선을 판다고 했다. 일상의 작은 사치 같은 큰 행복! 나도 이담에 명청이 손에 무지개 빛 풍선을 잔뜩 쥐어줄 수 있을까?  손 안 가득히, 꼬옥 쥔 손…
어느 덧 빗방울이 철길에 콩을 볶았다. 굵어지는 겨울 비를 그대로 맞으며 해나는 철길 복판의 침목을 하나씩, 하나씩 밝으며 점점 크게 들리는 장님네 가족들의 합창소리를 귀에 모았다. …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아기 잘도 자안다아… 그 막내 아들의 소프라노가 장님 아빠의 바이
올린 반주음보다 훨씬 높게 솟아오른다.
밝고 밝은 즐거운 불협화음이 무거운 겨울 빗방울 사이를 가볍게 날아서 이따금 밤 하늘로 올라갔다. 하늘에 게신 아버지도 이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이담에 명청이가 크면 저 집 막내 아들같이 씩씩하게 클 꺼야. 아무 꺼나 잘 먹고, 겨울에도 맨발로 눈 위를 달리는 저 막내 같은 꼬마가 될 꺼야.
 “아니, 이제 오능개벼? 샥씨를 기다리다가 우리 식구가 먼저 저녁을 먹었구먼유. 내가 불을 지펴놨는디 따뜻한 지 모르겠구먼유. 아, 어서 방에 들어가 앉으시우.”
“아주머니 고마워요…”
“물을 데워 놨승께유, 퍼다 쓰세유 예? 그래, 애기는 암 탈없이 잘 큰대유?”
해나는 고갯짓으로 대답하고 얼른 방에 들어갔다. 깨끗하게 펴둔 이불 속으로 옷 입은 채 들어가 누었다. 무덤 속같이 아늑하게 빠진다. 명청이가 지금쯤은 곤히 잘 자고 있을까? 자주 토해내곤 하던 모유가 조금이라도 목에 넘어갔을까? 무섭게 불
어나던 자신의 누런 젖을 컵에 담아 담당 간호원에게 부탁했었다. 해나는 다시 인 큐베이터의 거미줄 같이 얽혀 있는 링거 줄을 생각했다.
일산병원의 어머니를 만나지 않고 온 것이 자꾸 걸린다. 환자들의 피 오줌이 든 변기통을 들고 서 있을 어머니와 맞닥뜨릴 것 같아 발길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
던 것이다.
한쪽 구석에 밥상 위 신문지가 눈에 띄었다. 사과상자를 뒤집어 놓은 밥상이다. 평소에는 원고를 쓰는 책상도 된다. 어지럽던 원고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주인 아주머니의 정성이다. 해나는 다시 일어나 앉아야겠다면서도 허리가 방바닥에 굳어진 것 같았다. 밥보다 약속한 김재박 대필원고가 먼저 생각났다. 마감 날짜는 가까워 오는데 아직 단 한 장도 쓰지 못했다. 사과부스 하나 정도되는 자료조차 아직 꺼내보지 못했다.     
주인댁 두 남매가 다 떨어진 만화책을 들고 왔다. 그것을 읽어달라며 해나의 양쪽 겨드랑이 밑을 다람쥐 같이 파고 들었다.
“새댁유! 반찬이 없구 만유, 그래도 뭘 좀 들어 보래요?”
우거지 국에 노오란 콩밥을 소담스럽게 챙겨왔다. 해나는 만화 대신에 어젯밤에 들려 주던 피터팬 얘기를 아이들에게 이어주다가 일어났다. 주인 아주머니도 조심스럽게 다가와 TV에서 보았다는 이것저것을 물었다. 요새 세상에 이런 여자가 있을까 싶게, 친 자연 인간이다. 고향도 충청도 산골 오지라고 했다. 처음 듣는 지명
이다.
빡빡 얽은 곰보에 양 손도 다섯 손가락이 오그라 붙었다. 평생 시집도 못 가는 줄 알았는데, 다행히 장님인 남편을 만나서 이렇게 달덩이 같은 아들 딸도 두었다며 만족해 했다.
“제가 요, 신혼 시절에 실수도 많이 했지라우, 안마해 달라는 손님들 호텔을 찾아 다니다가 지리를 잘 몰라 엉뚱한 곳에 남편을 데려다 주었지유, 신랑한테 어찌나 혼이 났는지요. 초장부터 쫓겨난 줄 알았지유.”
입을 가리려고 올라간 손이 뭉턱하다. 곁의 아이들도 즤 어머니 따라 두 손을 입으로 가져가며 흉내 내며 키들거렸다.

“겨우겨우, 장님 신랑을 조선호텔 몇 호실이던가? 그 방 앞까지 데려다 주고 호텔 주변을 돌았당게유, 나중에서야 그게 명동이란 것을 알았지만서두 야, 대한민국에도 미국 같은 네온싸인이 휘날리는 것을 처음 봤어예… 티 브이에서 보던 미국보다 더 아름다웠어예.” 
안 족에서 남편이 부르는 소리가 났다. 엄마아, 아빠가, 막걸리 한 병 더 사오래애! 늬들이 사다 주라마, 장흥상점 아줌마에겐 우선 외상으로 달라고 혀! 그러면서 흥감부리듯 신혼시절 애기를 계속했다.
“신랑의 안마가 끝날 때꺼정 어정어정 돌다가 조선후따루(호텔)를 찾는 디 시상, 워디 있는 디 알아야디유? 행인들에게 조선후따루 지붕 모양을 땅바닥에 그려가매 겨우겨우 찾아갔는 디, 아 이번에는 또 그 방 번호를 잊어뿌렸당게?
“아, 지가 깜박해서 긴 복도의 이방저방을 헤매는데 누가 뒤에서 확 덮쳐서 낼로 방 안으로 끌고 들어가 침대에 내팽개치는 기라유… 숨도 몬 쉬고 오돌오돌 떨고 있는 디, 야, 너 조말순 아녀? 아녀? 기여? 어른 대답하더꼬 잉, 그때서야 고개를 들어보니 아, 글씨 우리 집 쥔 양반 아녀?”
“그래서요?”
이번에는 해나가 더 급했다.
“그래서유, 남자들이란 게 뻔할 뻔 자 아녀유, 내 오바를 홱 벗기대유, 그리구 금방 팬티까지 홀랑 벗기더만유, 원래 안마 기술자라 눈 간고도 구신 뺨 치는 양반이니께유.”
“아니, 그러엄, 조선호텔에서 잤다는 말예요?”
해나는 놀란 듯 소리쳤다. 
“그 조신호따루가 한국에서 젤 비싸다는 걸, 진작 알았지만서두… 내 우짜것능교?  그때나 이때나 다 신랑이 하는 일이라, 나중에 알았지만서두, 신랑이 한달 주물러 대어 벌어야 하는 방 값이 하룻밤에 날라갔다구 허대유.’
주인 아주머니는 아직도 부끄러운지 뭉턱 손이 다시 입술로 올라갔다. 그미는 아직도 남편이란 말보다 ‘신랑’이라는 용어를 썼다. 어쩌면 오래 쓸 것 같다. 베니어 판으로 가린 옆 방에서 남편의 고함 소리를 다시 듣고서야 두 남매를 데리고 건너갔다.
막걸리에 취한 주인 아저씨의 노래 소리에 맞추어 아주머니의 서툰 바이올린 현 소리도 들려왔다. 뜬금없이 깊은 산 속에 버려진 소외감이다. 양철 지붕 위에 얹힌 루핑에 떨어지는 두터운 겨울 비 소리도 배경음으로 들린다. 바하의 ‘폴로네이즈’ 그 목이 쉰 듯한 현 소리 또는, 빈 바람소리를 명청이의 얼굴에도 얹혀서 같이 들어 본다.
‘폴로네이즈’ 인도 코브라 노점상의 피리소리 같다. 터번을 감은 힌두교 인도 노인의 피리 앞에서 춤을 추는 독사의 모습도 연상되는 밤이다. 어디선가 싸래기로 깨를 터는 받는 듯한 목탁 소리가 환청 되는 것도 같다. 해나는 짐짓 무릎을 꿇고 하늘까지 닿는 마음으로 두 손을 모았다.
‘나무관세음 보살!’ 양양 낙산사 해수 관음보살상 손 끝에 촛불을 올리는 심정으로 조용히 일어나 합장을 했다. 명청이 목숨만 살아난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 을 것 같다. 김재박이 보낸 즤 부친의 관련자료 부스를 뜯었다. 낡은 일기장 등 한 권씩 꺼낼 때마다 검은 지네가 겨드랑이로 올라오는 기분이다. 좇아내려고 자꾸 헛 손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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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언젠가 해나가 입시준비 할 때, 극도로 쇠약해진 몸을 추슬리기 위해 찾아갔던 합천 해인사가 생각났다. 그때 곁에서 어머니가 달여주던 한약을 겨우 마시며, 목탁소리에 무릎을 꿇곤 했다. 특히, 새벽 3시 예불을 드리는 목탁소리는 겨울 밤 절간 처마 끝을 간단없이 때리는 빗소리 같았다.
오랜 기와지붕 추녀 끝 풍경 소리… 남편도, 어머니도, 아기도, 동서남북 제각기 떨어져 있는 이밤, 나는 또 어찌하여 이곳 장흥 골짜기까지 흘러와 혼자이게 하는가? 무엇이 우리가족을 갈갈이 찢어서 서울 밖으로 내모는 것인가? 돌아가신 아빠가 그냥 보고 싶다.
만주 벌판, 해란강 어느 초막, 우둥불 앞에서 찍은, 희미한 사진을 꺼내 본다. 아빠의 단 한 장 남은 흔적이다. 동북지부 광복군으로 지청천 장군 휘하에서 항일전을 벌였다던 그때 아버지의 사진이다. 광복이 되면서 남한으로 넘어와 다시 6.25에 참전하여 지리산에서 같은 동족, 빨치산에게 결국 피살 당한 것이다.
지리산 빨치산 이현상 부대! 그 중에서 어쩌면 아버지와 같은 고향 함흥 친구들도 있을 것이다. 아버지를 포위하여 함께 긴 죽창을 찌르던 고향 친구들? 지리산 야밤에, 이런 캄캄한 초승달 아래 그들은 누가 누군지 모르고 거저 죽여엇! 하는 명령에만 따라 동작했을 것이다.

대관절 누가 누구를 죽일 수 있는가? 심지어, 재판정의 판사라도 어떻게 사혀엉! 하고 같은 인간을 죽일 권한이 있는가? 구레나룻만 무성해 보이는 아빠가 그냥 그립다. 2십대에는 대일본, 항일전에, 3십대에는 대북한 반공전에 살륙의 일생이었다. 
그리고 오빠! 말이 없지만 굵직했던 오빠, 내가 오전 반인데도 오빠는 자기 밴또(도시락)을 슬그머니 내 책가방에다 넣어주고 달아나고는 했다. 도시락이라고 해야 감자나 고구마 몇 쪽이었다. 6.25 직후, 우리는 오전 11시까지만 수업을 하기 때문에 점심은 집에서 먹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집에는 점심도, 저녁도 없었다. 건너뛰기 일수였다. 군산 피난 시절, 그때의 가난이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우리 식구들은 머리만 큰 괴물 같다. 아빠도, 오빠도 그리고 남편까지 하필이면 그런 별자리를 얻어 갖고 태어났을까? 아니, 모두가 스스로 이념 또는 신념으로만 꽉 찬 가분수 괴물들이다. 해나는 어금
니가 저절로 떨리는 치를 떨었다.
떠나간 자 말이 없고, 남은 가슴은 빈 웅덩이에 낙숫물 채우기 바쁘다. 해인사 어느 암자 뒤뜰에 남 모르게 피어있던 연안홍과 밥티 꽃 그리고 법당 앞의 수국과 백목련… 밤마다 어머니와 껴안고 듣던 벌레 소리, 새 소리, 짐승 소리들, 한약보다 더 쓰고 독한 고적감? 이곳 서울 북쪽 끝, 장흥은 사춘기 해인사 시절과 같이 답답
하고 캄캄하지만 은근하게 아스라한 동네다.

…사랑하는 사람을 가지지 말라/ 미워하는 사람도 가지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괴로우니/ …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뿐이다/ 들리는 것은 들리지 않는 것뿐이다.
그때 조실 스님의 그 할(喝)! 지팡이 소리는 이제서야 조금 알 것도 같다. 그리고, 덕수궁 뒤, 일제시대 대법원 건물, 3심 공판 날, 남편의 마지막 법정 진술에서 그의 당찬 쇳소리가 또박또박 사면 벽을 울렸다. 신혼여행 아니, 동거생활 중, 어저면 멀리 떠나야 할 지도 모른다며, 남편이 뜬금없이 해나의 손목을 잡아끌고  독도와 울릉도를 다녀 온 얼마 후, 남편은 끌려갔다.
‘학문과 예술은 몰라도 잘 살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렇게나 살 수는 없다. 고뇌 없는 행동은 돼지와 같다. 따라서, 모순된 이 사회와 왜곡된 오늘의 역사에 대한 나의 저항과 행동은 내 깊은 고뇌가 겉으로 나타난 것 뿐이다… 오늘의 이 법정은 이 시대와 역사에 대한 일시적 다툼일 뿐이다. 뒷날의 공정한 역사 시간이 나의 행동을 그리고 이 재판을 올바르게 재평가할 것이다. ’
방청석의 많은 민주화 동지들과 재야 인사들이 주먹을 휘두르며 통곡했지만 어쨌든 그렇게 끝났다. 역사적 재판을 다툼하던 5명의 판사들, 검정 버선짝을 뒤집어 쓰고 근엄하게 앉아 있던 그 빈 자리를, 해나는 허허롭게 돌아보며, 남편 한 사람만 싣고 가는 법정 뒤뜰의 대형 호송차량을 또 허허롭게 돌아보며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해나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숨 쉬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남편의 그 찌렁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왔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이것이 있으면 저것도 없다고 해서 만물이 창조 안 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옷감 고르는 기분으로 또는 수박 쪼개는 기분으로 역사를 가볍게 다루고 있는 게 아닌지. 대관절 대학은 무엇을 하는 곳이냐. 사회는 많은 악(惡)이 존재하기 때문에 발전이 늦는 것이 아니고, 그 악을 이겨내지 못하기 때문에 퇴보하는 것이다. 교수들은 착각하고 있어, 역사학자들은 컴퓨터 언어를 반어적으로 주입시키고 있단 말야. 예를 들면, 새는 늘 긴장을 하고 달아날 준비를 한다. 나뭇가지에 앉은 새는 적의를 가지고 노려보는데 학자들은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거야.
해나는 자서전 원고를 써야 한다면서도 남편의 헌 공책을 계속 뒤적였다. 이미 오늘 밤도 잠들기는 글렀다. 육체는 더욱 허물어져 가면서도 정신은 더욱 날카로와진다. 아, 십자가를 달까요. 성호를 백 번 그을까요. 아니면, 염주를 들고 백팔번뇌를 백여덟 번 욀까요. 오늘이 며칠인지 어떻게 알아요. 명청이의 퇴원날에서 일주일을 빼어서 알지요.…
탁자의 유리컵에는 바다가 갇혀서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고 있다./ 햇빛 그친 낡은 문짝에 쇠못들이 박혀 녹슬고 있다. …바람은 오늘의 풀을 흔들고 지나가지만 흙속의 풀뿌리는 다치지 못한다. …자유와 꿈의 통제구역에 팻말이 꽂혀있다. 끝없이 거부하며 어둠으로 쓰러지고/ 풀뿌리 밑에는 피투성이가 되어 잠들곤 했다./ 팻말 뒤에는 펄럭이는 막막한 어둠 / 어두운 창 너머 벌판에는 비가 뿌리고 / 잠자면서도 절벽을 보았다. / 밤마다의 신간…
남편의 시(詩)들은 조실스님의 창(唱)과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했다. 우린 우리 안의 종기만 어루만지고 있어. 자기 안의 더럽고 추악한 것을 안고 있으면서 남을 욕하고 있는 게야. 남편의 꾸짖음 같기도 하고, 스님의 대죽비 소리 같기도 하다. 인간은 스스로 돼지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면서부터 불행이 시작된 게야.
헤어지는 연습이 있으면 기다리는 연습도 있어야지. 이런 밤, 이 좁은 방에 남편이 마주해있다면… 해나는 엉뚱한 비약까지 치솟았다. 반쪽뿐인 지성인의 얼굴, 그미는 그 반쪽 사이에서 울부짖고 있는 것이다. 빈 손과 빈 가슴… 언제나 나는 석류알처럼 뜨겁게 일어날 것인가. 탁자 위의 빨간 스탠드처럼 언제나 내 가족을 위한 사랑의 불을 켤 수 있을 것인가. 눈 속을 걷고 싶다. 춥고 지치면 톱밥 난로가 타오르는 찻집에서, 그이의 눈을 들여다보며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싶다. 해나는 거울에 비친 철부지한 얼굴을 펴며 일어섰다. 비닐로 가린 창 밖엔 사뭇, 굵은 빗줄기가 밤새 그치지 않을 것 같다. 
 
김재박 회사의 홍보실에서 넘겨준 자료는 추상적이고, 반복적인 내용뿐이었다. 그나마 국회의원 출마 때의 선전자료나 과시용의 소책자 몇권이 전부였다. 그 아버지가 했다는 실제의 업적은 거의 다 <할 것이다>라는 미래시제이고, <했다>라는 과거시제는 없다. 과거시제로서의 업적을 굳이 들추자면, 양로원에 흑백 텔레비젼을 기증한 것이나, 모교 초등학교에 축구 공 열 개를 희사한 것 등의 잡다한 것이다. 그러나 방위성금에는 기절할 정도로 동그라미가 많이 쳐졌다. 이러한 사실은 최소한 6하원칙에 의해 쓸 만한 것은 몇가지 안된다. 그러니, 제1장 출생부터 초등학교 입학즈음까지를 겨우 쓰고나니 진도가 안 나가는 것이다. 자서전이 진행되면 우선 고향인 마산부터 뿌려질 터인데 전혀 거짓말을 할 수도 없다. 해나는 남편을 통해서가 아니라, 대학졸업 후, 모 일간지 계통 월간지의 기획기사의 자료를 위해 마산에 내려갔을 때 3․15를 전후한 김재박 아버지의 비리와 음모를 소상하게 추적한 적이 있고, 그것을 나중에 다시 르뽀사로 전재한 적이 있다.

…강철은 또다른 모반(模反)에 가담했다. 바로 이웃에 사는 친구 하나가 마산 도립병원에서 죽어갔다. 그 친구는 중학교 때부터 같은 동네에 살았다는 이유만이 아니라 서로의 패기가 같았기 때문에 잘 붙어다녔다. 그 친구의 피가 모자란다고 하자, 반학생들뿐만 아니라 강철의 학교 빤댓돌 고교에서는 한쪽 팔을 걷어붙이고 도립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친우들의 뜨거운 헌혈에도 불구하고, 그 친구는 도립병원에 입원한 지 일주일만에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3․15사건이 터지고 난 열흘 후다. 그 이후 마산 전지역의 남녀고교에선 시위가 격화되었다. 남학생들은 돌멩이를 던지고, 여학생들은 가사실습용 행주치마에 돌멩이를 날랐다.
못살겠다 갈아보자! 자유당 독재 물러가라! 사실, 그 즈음엔 그 친구 뿐이 아니고 각 가정이나 교회, 사찰에 숨어서 치료받던 시민들이 하나둘씩 죽어갔다. 곁의 학우들이 차례로 피를 토하며 시체실로 옮겨지자, 빤댓돌의 졸업반을 중심으로 고교생들이 구마산 시민회관 앞에서 아예 아스팔트에 드러누워 단식투쟁을 모의했다. 또 한쪽에선 시체조차 못 찾은 부모들이 환장을 하고 시내를 헤매다녔다.

강철은 온몸이 참혹하게 찢겨져나간 친구의 마지막 모습에 치를 떨며 시민회관 앞에서 혈서까지도 마음 속으로 계획하고 있다. 그러나, 그 거사는 사전에 누설이 되어 주모자급 일부가 체포되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마산의 전 고교는 물론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던 선배들까지 내려와 합세를 했던, 살벌하고 위험천만의 모반이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국회조사단이니 신문기자이니 떼거리로 몰려다니며 유리창이 박살난 시청이나 반쯤 타버린 경찰서를 뒤지고 다녔으나, 마산시민들에겐 시원한 냉수 한 컵도 못주는 부분적인 조사보고서로서 일간지 활자를 어지럽혔다.
빤댓돌 고교 위 공동묘지에서 체포된 강철 등의 일당은 훨씬 나중에서야 김재박이가 배신자라는 낌새를 알았다. 그 사건만이 아니고, 그동안의 큰 계획들마다 주사바늘 꽂힌 축구공마냥 김새곤 했던 것이 그의 밀고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재박은 늘 앞장섰고, 늘 먼저 연판장의 도장을 찍었었다. 그러나 오랏줄에 묶인 조사과정에서 보면 늘 빠져 있었다. 일종의 끄나풀이었던 것이다.

그후 강철 등이 2학년으로 진급할 때쯤 재박은 학교를 포기했는가 싶었는데, 스위스에 유학하고 있다는 화려한 엽서가 뺀댓돌 고교 수취함에 꽂혔다. 대학교 다닐 때쯤 재박은 이미 신흥재벌 회사의 감사명함을 아직은 하숙생들인 동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때까지도 해나는 같은 마산에 살면서도 강철은 전혀 몰랐다. 3․15 당시 강철이가 빤댓돌 고교 신입생이었을 때, 해나는 초등학교 5학년 코흘리개이기도 했지만, 당시 서울 호랑이 대학교에 다니다가 급거, 고향에 내려와 빤댓돌 후배들을 지도하던 오빠가 시청 앞에서 총을 맞고 무릎을 꿇자 단지, 그 허탈 때문에 모녀는 몇 년간 구름 속인지 연기 속인지 허둥대며 살았을 뿐이다. 나중에 르뽀 기사를 쓰기 위해 현장추적 취재를 하면서, 해나는 어머니도 몰랐던 오빠의 행적이며 강철의 큰 발자국을 찍어 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밤새, 설해목 부러지는 소리에 잠을 설치다가 결국, 새벽녘에 담요를 걷어차고 일어났다. 판잣집이라 우풍이 드세긴 해도, 방바닥이 여름날 땡볕에 익은 바윗돌마냥 뜨거워서 이불을 깔아야만 했다. 주인 아주머니가 군불을 깊이 넣어주곤 했기 때문이다. 이곳만 해도 시골이라 잡목이 많았다. 주민들이라야 여름 한 철 유원지에 목숨을 걸고 빌붙어 사는 움막집 몇 채 뿐이어서 연탄불은 엄두도 못낸다.
허옇게 드러누워있는 시냇가 얼음을 따라 골짜기로 들어갔다. 채석장 검붉은 자갈 위에서 장님부부가 리어카에다 열심히 삽질하고 있었다. 장님 남편이 삽으로 뜬 자갈을 그의 아내가 잡고 있는 리어카에 던지는데 자갈 하나 흐트러짐없이 확실하게 리어카에 들어갔다. 첫 새벽부터 그들 부부는 하루일과를 시작하는 것 같다. 한여름에 버리고 간 피서객들의 웃음과 가식, 허영과 자만이 눈 얼음장 아래에서 질식해 있었다. 여름보다 더욱 생동감있게 살아나는 설경, 겨울의 비경이 해나의 몸을 은밀하게 감쌌다. 산 등성이를 마구 뛰어오르다가 미끄러져내렸다. 다시 뛰어 올랐다. 누군가의 무덤 곁에서 목까지 차는 눈 속에 빠지기도 했다. 내복까지 젖어드는 추위인데도 신이 났다. 산까치와 산꿩이 은가루를 하늘에 뿌리며 놀라 달아나기도 했다.

이런 날은 명청이랑 눈싸움이라도 하고 싶다. 가장 가까이 곁에 두고 싶은 사람들이 전혀 엉뚱한 곳에서 격리되어 있다. 남편은 정신적인 싸움으로, 명청이는 생명을 다투는 육체적인 싸움으로, 어머니는 생존을 위한 현실적인 싸움으로 말이다. 모두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러나 나는 어떤가. 해나는 소나무가지 위 잔설이 피워내는 설화(雪化)를 멍하니 올려다보가 눈덩이를 뭉쳐 힘껏 던졌다. 지금 나의 생존방식은 무엇인가. 남편과는 정반대의 거역을 하고 있지 않은가. 남편이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그 목표와 반역되는 현실적 타협을 하고 있다. 그것도 똥구멍을 닦아주는 정도가 아니라 핥아주는 일을 하고 있잖은가. 역사를 미화한다는 것, 더구나 날조한다는 것은 사마귀 같은 소름이 돋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명청이를 살리고 싶다. 목숨을 붙이고 볼일이다. 명청이를 살리기 위해선 그들의 피고름라도 핥아줄 용의가 있다. 해나는 몸부림치듯 눈위를 딩굴다가 골짜기 아래로 쳐박혀졌다.

어디선가 바람결 같은 목탁소리가 들렸다. 토끼같이 귀를 열었다. 합장을 했다 어머니에게 끄을려 대웅전에 들어서면 어머니가 정신없이 절하고 있는 사이 도망나오곤 하던 해나는 두 손이 소나무 가지 끝으로 피어 오르는 하늘 끝으로 향했다. 근처에 절이 있었던가? 이곳에 온 이후 한 번도 들어본 일이 없었는데? 눈을 털었다. 눈은 브래지어 안의 스커트 안 쪽, 홑 내복을 땀과 함께 축축하게 녹여내고 있었다.
골짜기를 내려와 목탁소리를 따라 발맘발맘 걸었다. 소나무, 잣나무의 설화를 손끝으로 털어내는 듯한 목탁소리는 산 쪽이 아니고 유원지 쪽이었다. 모퉁이를 돌아오니 탁발승이 철길 위에 서서 염불을 주억거리고 있고 어머니가 쌀을 쏟아주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해나는 단숨에 뛰어왔다.
“엄니? 어떻게 오셨어요?”
“아니, 아침 식전부터 어딜 그렇게 쏘다니냐? 몸도 성치 못한데…”
해나는 어머니를 껴안 듯이 밀고 들어왔다. 방 가득히 널려져있던 원고 파지가 어느새 정돈되어 있었다. 며칠 전에 원고지를 사러 나간 김에 소화병원에 들렀다가 어머니에게도 갔었는데, 마침 어머니는 간호원 대신에 산모환자를 받으러 앰브런스를 타고 갔단다. 그래서 배식하는 아주머니에게 약도를 그려놓고 왔는데 용케도 찾아오셨다. 시주를 했는데도 가지 않고 문 밖에서 계속 목탄을 두드리고 있는 스님에게 어머니는 다시 문을 열고 들어와 몸 좀 녹이고 가시라고 하자, 눈을 지긋이 감은채 창이 다 끝난 다음에야 90도 되도록 합장을 하고 윗집으로 갔다.

탁발 자체보다는 목청 연습하는것 같다. 아무리 혼자하는 염불이라도,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나 보다고 해나가 건성 우스워했다.
“저 스님은 머리깎은 지 몇년 안됐을 꺼다. 난 염불소리만 들어도 가늠할 수 있지. 그나 저나 내일 모레면 구정인데 아버지와 오빠 제삿상에 명태라도 한 마리 올려놔야 하지 않겠니?”
“어머, 벌써 구정이예요? 명청이 퇴원할 날도 며칠 안 남았네요?”
-“그래, 네가 쓰고 있다는 현장소설인가는 잘되는 거냐? 어느 잡지사라고 했지?”
“아니, 어머니 그런건 몰라도 돼요, 여하튼 이번 당선만 되면 명청이 병원비 지불하고도 좀 남을 수있으니까요. 딴 걱정은 마세요. 거기는 힘들지 않으세요?”
“난, 암 염려없다. 고기 반찬에 푹신한 침대에 오히려 호강이란다. 원무과장도 잘해주고.”
어머니는 시냇가로 나가서 준비해온 생선등을 칼질했다.
해나는 눈 쌓인 철길에 서서 그윽하게 구부러져 나간 평행선 끝을 바라보았다. 철길! 누군가에게 달려가고 싶고, 기다리고 싶은 철길! 멀리 아버지가 한복을 입은 모습으로 두 손을 높이 쳐들고 뛰어오고 있다. 그 뒤를 오빠가 한 손을 휘저으며 달려왔다. 해나는 흠칫 고개를 흔들며 철길을 따라 나갔다. 발목 아래로 눈이불을 덮고 있는 침목이 하나씩 밀려나갔다. 오빠의 뒤로 남편이 넓은 가슴을 활짝 벌리며 다가왔다. 해나가 넣어준 누비옷을 벗어버리고 넥타이에 정장을 한 모습이다. 아, 얼마나 그런 복장을 기대했던가. 쇠말뚝같은 남편의 팔에 매달려 다시 충무로를 걷고 싶다. 아주 낮게 그리고 평범한 남녀가 되고 싶다. 흐려진 눈 가장자리를 닦았다.

남편이 이 철길로 숨찬 기관차를 타고 온다면, 집 앞에 내리자 마자 신발 벗고 들어오면 안방이 된다. 남편이 얼마나 우스워 할까. 얼마나 편할까, 철길이 댓돌이니까 얼마나 쉬울까. 고단한 몸, 길게 누일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지금은 폐선! 아니, 이 폐선같이 남편은 아주 못 돌아올지도 모른다. 해나는 불길한 생각에 고개를 더욱 세게 흔들었다. 철길은 의정부로 나가는 국도 앞에서 뚝 끊어졌다가 아스팔트 길, 저쪽으로 다시 이어져 나갔다. 때때옷의 아이들이 아닌 청춘족들의 들뜸으로 버스정류장 근처를 서성거렸다. 명절이란 그들에게 다시금 사랑을 확인하는 시간을 부여하는데 또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의 빈 체온만 남아있고 어머니가 벗어놓은 옷은 없었다. 병원일 때문에 서둘러 나가신 모양이다. 어쩌면 모레 아침 제삿상 앞에 다시금 모녀만 애살스럽게 앉게 있을 걸 예상하고 도망간지도 모른다.

옆방에서 갑자기 찬송가 소리가 쏟아져 내렸다. 장님부부가 다니는 근처 교회의 교인들이 심방예배를 온 것 같다. 그들의 말소리는 믿음과 자신에 가득차고 그들의 합창소리는 희망과 결의가 오랏줄같이 배어 있다. 어린시절 군산에 피난해 있을 때, 교회에 가면 목사님이 나누어 주곤 하던 원조품 초코렛 맛이 생각난다. 폭격에 다 죽었다고 생각한 내 또래의 꼬마들이 어디서 그렇게 참새떼같이 쏟아져나오는지 교회마당은 새벽부터 시끄럽고 즐거웠다.
교인들의 반복적인 기도와 찬소와 잡담이 저녁의 검은 커튼을 더욱 어둡게 끌어내렸다. 질기고, 따뜻하고, 고독한 밤이다.

  해나는 어느 때보다도 즐겁게 그리고 당차게 앉아 있었다. 머리 끝을 쪼아댈 듯 노려보던 박제독수리의 주둥이도 부드럽게 보였다. 하나의 종이 독수리, 그렇게 위엄한 위협으로 내려다보지만 나에겐 하나의 벽그림에 불과해, 이 방의 주인 같은 녀석아! 그미는 여유있게 반격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전 탈고한 원고뭉치의 보자기를 김재박의 비서실장에게 넘겨주고 돌아오면서 명청이를 만났었다. 얼굴에 걸려있던 줄도 제거되고 안큐베이터에서 나와, 일반 생아실에서 우유빛으로 살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퇴원날짜가 일주일을 넘었지만 원장을 만나, 오늘까지 기다려 달라고 애원했던 것이다. 오늘이 원고료 잔금을 받는 날이다. 원고료만 받으면 명청이는 퇴원이다. 약속시간 한시간이 넘어서야 김재박은 나타났다. 고향에 갔다가 공항에서 바로 오는 길이라며 짐짓 허둥댔다. 그의 허풍과 과시도 오늘만큼은 스폰지 물 먹듯 받아줄 수가 있는 것은, 곧 그의 손에서 떨어질 수표쪽지 때문이다.
“부인의 글을 두 번이나 읽어 봤습니더, 역시 부인에게 의뢰한 것을 잘 했다고 생각이 들든데예.”
해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아, 이젠 명청이를 내 곁에 둘 수 있겠구나, 내 맨가슴에 꼭 껴안아 그동안 짜내어버리곤 하던 내 가슴의 즙을 내 온 몸에 갇혀있던 사랑을 아기의 입에 넣어주리라. 내게 명청이만 있다면 그 이상 아무것도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이번에 부친이 고향의 대학을 새로 인수 안 했슴니껴? 지금 막 그 계약서의 도장을 찍고 올라오는 길 아잉교, 그 대학이 역사는 오래 되었지만서두예, 재정난으로 허덕여온 것을 아버님이 크게 인심을 쓴기라예. 철학만 있으면 뭐 하능교 실천력이 있어야지. 안 그렇능교.”
“어제, 신문에서 봤습니다. 아마, 종합대학으로 확장하려고 하시려는 것 같아요.”
“뭐 그런 것은 차근차근 계획해야만 되겠지만서두예, 이미 몇 년전에 시(市)에서 불하해준 땅이 변두리에 한 오십만평이 있습니더. 거기에 청사진을 펼 계획입니다. 저기 있는 저 독수리같이 날렵하고 그리고 치밀하게 해나갈기라예, 이런 때 강철이 녀석이 있으몬 내가 울매나 도움이 되겠읍니껴. 녀석 머리 하나는 끝내주는 화성인아잉교.”
해나는 6시를 향해 달려가는 전자시계 깜박초침에 조바심이 났다. 원무과 직원들이 퇴근해버리면 명청이는 하루 더 묵어야 한다.
“그란데, 말입니더, 이 원고는 조금만 더 고쳐주면 좋겠슴니더. 이 책의 주인공이 이제 대학교 총장은 못하더라도 이사장은 안 되겠능교. 업적도 그만큼 크고 굵어야 안 되겠슴니껴. 참, 그런 게 애매하긴 해두…”
인터폰으로 불리운 비서가 원고뭉치를 가져와 해나 앞에 펼쳤다. 원고지 매장마다 빨간 색연필이 안 걸린 데가 거의 없다. 해나는 닫다가 눈앞이 불바다가 되는 걸 느끼며, 식은땀을 흘렸다. 어금니를 깨물며, 꺼져가는 성냥불 끝을 안 꺼뜨리려고 용을 썼다. 손가락 끝으로 이마를 지탱하고 있다가 콧등을 타고 떨어지는 이마의 땀을 손수건으로 묻혀내었다. 예상하지 아니한 건 아니지만 가벼운 수정 정도로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간줄이 많으면 거의 다시 써야 할 것 같았다. 재박이가 얘기한 대로 주인공의 없는 업적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것은 뒷구멍을 혓바닥으로 핥는 것보다 더 치욕적인 일일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업적에 대한 과시를 하다보면 그 반대 위치에 있는 인물이나 사건이 비례적으로 축소 내지는 부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해나 오빠의 시위주동이나 남편의 당시 행위 등도 싸잡아 격하되고 지탄되어야 했다. 덩달아 김재박과 그 변질자들은 그 아버지의 부상(浮上)에 따라 감자줄기 올라가듯 격상시켜야 되는 것이다. 김재박은 자서전 자체보다는 잠재적인 라이벌 관계에 있는 강철과 그 부인에게 자기와 자기 아버지의 위치를 주입 내지는 강조하는데 목적을 둔 것 같다. 굳이, 해나에게 자서전 집필을 지명한 것부터가 얼르고 뺨치는 것이다. 아니, 그 모든 것보다 명청이를 어쩌면 고아원으로 놓쳐버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해나의 의식을 발가벗겨 놓았다. 소화병원에 두 번씩이나 연기한 것은 이번에 못 찾으면, 나중에 서울시내 고아원을 전전하며 명청이를 찾아 내야 할 것이다. 그것도 빠른 시일내에 찾지 못하면 외국의 어느 입양 부모에게 팔려갈지도 모른다. 더구나 명청이는 수술은 성공했지만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한 번 더 확장수술을 하여 임시로 끼워넣은 알미늄 대롱을 제거하기 전까지는 좁쌀 한쪽도 넘기기 힘든 밥줄을 지니고 있잖은가. 고아원에서 아무거나 주워먹다가 목에 자주 걸릴 터인데, 그짓을 누가 따라다니며 토하게 해줄 것인가.

해나는 기다리던 수표대신, 붉은 줄만 보이는 원고 보따리를 들고 일어섰다. 종아리가 눈에 띄게 떨렸다. 그러나 재박이에게 약한 꼴을 보이고 싶진 않다. 그미는 한걸음 한걸음 쓰러지지 않게 엘리베이터까지 나왔다.
“부인! 다시 수전되는 대로 언제든 오이소예? 자서전일망정 하나의 역사를 기술하는 것이라 그만큼 신중해야 안되겠능교?”
재박의 그 말은 반대로 역사는 얼마나 조작이 가능한 것이냐는 물음이다. 실제 그들 부자(父子)는 자기들이 하고 싶은 대로 설쳐도, 대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세상과 사업이 잘 움직여지고 있었다. 그러나 재박은 개인의 역사는 날조가 가능해도, 사회의 역사는 그렇지가 못하다는걸 착각하는 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고교를 중퇴한 그가 외국에 나가 벼락같이 대학 졸업장을 만들어온 변칙과 같이, 사회의 역사도 얼마든지 변칙이 가능한 줄 알 것이다. 재박이의 강철에 대한 보이지 않는 정신적 찜질은 우습게 가증스러울 뿐이다.
해나는 덕수궁 대한문 앞에 섰다. 남대문 넘어 보일 듯 말 듯 비켜있는 소화병원의 명청이를 생각해본다. 그래, 명청아! 장난인 듯 운명인 듯 그렇게 어느 고아원이든 살아만 있어다오. 빨간 줄이 지워질 때까지 고쳐다가 써주고 너를 찾아오마. 절망 같은 희망을 몇번이고 다짐했지만 화단에 걸친 엉덩이는 일으켜지지 않는다. 시청 앞의 비둘기들도 비상을 멈추고 움츠려들고 있다. 팔방에서 교통되는 차량의 불빛들이 해나의 얼굴을 더욱 어지럽혔다.

이렇게 우리는 사는 의미를 진하게, 한 모금 마시는 거야. 남편의 수의(囚衣)를 처음 바라보면서 처음으로 면회하던 날, 남편이 한 말이다.
흐르는 것이 물 뿐이랴/우리가 저와 같아서/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일이 끝나 저물어/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샛강 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누나/우리가 저와 같아서/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해나는 몸부림치는 눈보라 속을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원고 보자기를 한 번 추슬려 그 중량감을 흔들어 보았다.  (끝)
 

 
신 상 성 申相星
writer119@naver.com

소설가, 문학박사.
동국대 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동아일보] 신춘문예(1979) ‘회귀선’ 소설당선. 한국펜클럽(PEN)국제위원장, 국제한국어평생교육원 원장, (사)한중문화예술콘텐츠협회 이사장, 한국문협남북문학교류위원회 위원장, 한국현대문예평론학회 부회장, 문예운동, 조선문학, 한국문학신문 등 편집위원, 피지(FIJI) 수바외대 초대총장, 서울문화예술디지털대학설립자 겸 초대총장, 용인대 명예교수. 중국 천진외대 석좌교수, 중국사회과학원(해외문학)한국대표, 경기도문화상, 동국문학상, 한국펜문학상, 국가유공자(월남참전), 국가훈장(황조근정훈장) 등 수상.
소설집; 처용의 웃음소리, 목숨의 끝, 행촌동 패랭이꽃, 멀리서 만나는 평행선, 인도의 향 등, 평론집; 문학의 이해, 한국소설사의 재인식, 김남천연구, 한국통일문학사, 북한소설의 이해, 수필집; 내일은 내일의 바람이, 시간도 머물다 넘는 고갯길 시집; 당신의 눈을 들여다보면, 등 저서 약50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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