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구 前귀한동포연합총회 구로지회 부회장, 장기기증 등록하다

 이철구 전귀한동포연합총회 구로지회 부회장, 구로고대병원 정문앞에서
【서울=동북아신문】나이가 들면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한 보름 전 저녁 무렵에 걸려온 한통의 전화에 나는 깜작 놀라고 말았다. 2006년 봄에 내가 한국에 입국해서부터 지금까지 쭉 인연을 맺어온 귀한동포연합총회 구로지회 이철구 전 부회장의 전화였다. ‘세월아 물러 가거라’는 식으로 노년에도 항상 기운이 넘쳐 일을 하던 이철구 회장의 목소리는 풀이 아주 죽어 푹 가라앉아 있었다.

“이 선생, 나 구로고대병원에 입원수속 했소. 척추암이라고 하는데……이제 하느님이 나를 부르는가 보오.”“예?……척추암?……”척추암에 대해 잘 모르기는 하나 암세포가 신경을 자극해서 하반신에 마비가 오게 되고 결국에는 생명에 위협을 주는 무서운 암일 것이라는 생각이 앞섰다.  “하~, 너무 걱정 말아요. 요즘 암은 의학이 발달해 병으로도 안치는데 뭐요, 치료 잘 하면 나을 겁니다. 암에 걸려서도 몇 십 년을 사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뭐”라고 나는 위로를 해주었다. 한국은 암 환자가 특별히 많고, 또 스스로 암을 극복해서 건강을 찾는 환자들도 엄청 많이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도 걱정이 앞섰다. 7월 8일 저녁 나는 이철구 회장을 만나 구로시장 입구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이 회장은 나의 손을 꽉 잡았다. 얼굴은 살이 빠져 있고 눈은 쑥 들어가 있는데 흰머리가 많이 빠져 있어 병환이 몸에 깊숙이 배인 듯싶었다. “이 선생, 눈 감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하고 이 선생의 인연이 보통 인연이 아닌 것 같소, 그래서 이 선생 생각이 나서 바쁜 사람 붙잡고 이렇게 식사하자고 했으니 양해하오”라고 말꼭지를 뗐다. 사실 이튿날은 ‘동포문학 4호’ 출간식과 ‘제2회 한중국제문화예술교류대전’ 행사가 있는 날이기에 정말 몸을 뺄 수가 없이 바쁜 때였다. 그래도 이 회장의 소원은 꼭 들어주어야 하는 게 도리라 생각했다. “아마도, 이게 마지막 식사 자리가 될 것 같다”고 말해서 가슴이 뭉클했다.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으로 가는 사람과 혹시 마지막 식사라?…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우리 인생은 본래 그런 것이 아닌가!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지만, 인생의 10년은 눈 깜빡할 사이다. 2006년 봄에 동북아신문(www.dbanews.com) 편집국장으로 취임해서 처음 신문기자로 뛰게 된 나는 이철구 회장과 자주 만남을 가졌다. 서울조선족교회에 사무실을 낸 귀한동포연합총회의 홍보부장으로 임명된 이철구 회장은 협회 행사만 있으면 뉴스를 제공해 주었다. 열정적이고 강직하고 바른 성격의 소유자이다. 자기주장이 있는 분이다. 1992년에 한국에 입국해서 국적회복운동부터 동포사회의 인권향상과 불합리한 출입국개정을 위해 어떤 행사에도 거의 빠지지 않고 헌신했으며, 살아 있는 산증인이다. 또한 2003년 11월 14일 동포사회가 국적회복운동의 연장선에서 제기한 헌법소원을 제기 대표 3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명지대학 이민행정학 공부도 하며 자기 개발과 공부에도 힘썼다. 중국 고향 연수와도 끈끈한 인연을 이어갔다. 손수 연수향우회를 발족하여 연수현의 김수길 조선족 전임 현장을 초대해서 한국에 나와 있는 연수현의 농토관리문제를 해결하는데 일조했다. 재한연수향우회는 다양한 행사나 관광 등 모임을 갖고 몇 년간 지속적으로 이철구 회장이 이끌어 갔었다. 그는 동북아신문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2001년 동북아신문 창간 때부터 현재까지 쭉 관심을 갖고 참여를 하고 애독을 해왔다. 짬만 나면 기사나 칼럼을 보내왔다. 솔직히, 개인적으로도 나의 일이라면 발 벗고 도와주려고 애를 썼다. 그런 끈끈한 마음이 세월과 함께 이어져 왔고, 그 연결고리에 인간 냄새나는 진주알갱이 결실들을 조롱조롱 맺어놓았다. 그런데 갑자기 척추암이라니? …… 식사가 끝난 후 이철구 회장은 나한테 또 천만뜻밖의 말을 꺼냈다. “이 선생, 나 말인데 오래 살 것 같지 못해. 그래서 큰 마음먹고 결정했는데……요즘, 인생이란 무엇이고 그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네. 이 선생은 행복이란 뭐라 생각하나?”“네?……행복이란 것은……글쎄요, 무슨 결정을?…….” 이철구 회장은 나한테 녹색 카드 하나를 넘겼다. 등록일자가 2016년 6월 20일로 되어있고, 등록기관이 고려대학교구로병원으로 돼 있는 인체 ‘장기기증희망등록증’이었다. “성명 이철구, 등록번호 001336696, 기증형태 뇌사/안구” 등 사항이 적혀 있었다.  “난 내가 죽으면 장기 기증을 하기로 결정하고 이미 등록을 했네.” “죽으면……장기 기증을 한다구요? ……”정말 깜짝 놀랐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말이다. 왜?…자기 인체를 뜯어 타인에게 주려고 하지?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 부모가 준 몸 그대로 파손 없이 고이 자연으로 귀(歸)해야지 않는가! “난, 생각했네……인생이란 것은 결국 나누는 것이란 것을……그것이 곧 인생의 가치고 행복이란 것을…….” 그는 초연히 말했다.  이철구 회장은 어떻게 보면, 재한동포사회에서 살아있으면서 처음으로 장기이식을 신청한 중국동포 출신의 사람일지도 모른다.  등록증에는 이런 글도 찍혀 있었다. “한 분의 생명나눔이 만드는 기적-뇌사시 장기기증으로 최대 9명의 생명을 살리게 됩니다. 사후 안구기증으로 2명의 환우가 앞을 볼 수 있습니다. 인체조직기증으로 최대 100명의 환우가 생명을 유지하고 삶의 질이 향상됩니다. -질명관리본부 장기이식관리센터”  나는 이철구 회장한테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릴 줄 몰랐다. 그냥 안타깝고 무겁고 초조하고, 그리고 묵직해 나는 마음이었다. 이철구 회장이 병환을 이겨내고 좀 더 오래 앉았으면 하는 바람일 뿐이다. 헤어질 때 이철구 회장은 나한테 미국시인(1926~1994년) 로버트 N. 테스트의 “나는 영원히 살 것입니다”라는 시구가 적혀 있는 장기기증 안내 카탈로그를 건네주었다.  집으로 오면서 나는 그 시를 조용히 읊었다.“어느 순간 의사는, 나의 뇌가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모든 의미에서 나의 생명이 정지되었다고 선언할 것입니다. 그때, 기계를 이용하여 억지로 생명을 불어넣으려 하지 말아 주십시오. 나의 침상을 죽은 자의 것으로 만들지 말고, 산 자의 것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의 삶이 충만해지도록 나의 몸을 나누어 주십시오.……나의 뇌세포로 말 못하는 소년이 환성을 지르고, 듣지 못하는 소녀가 유리창에 부딪히는 빗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남은 것이 있다면, 재로 만들어 꽃들이 잘 자라도록 바람에 뿌려 주십시오. 만일 무언가 묻어야 한다면, 나의 실수와 나약함, 그리고 나의 편견들을 물어 주십시오. 내 죄악은 악마에게, 내 영혼은 신께 드리십시오. 혹시 날 기억하려거든, 당신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 위로가 되는 친절한 행동과 말을 건네십시오! 내가 부탁한 이 모든 것을 주신다면, 나는 영원히 살 것입니다.” 내 가슴 속에는 눈물이 흘렀다. 죽든 살든 기억할 사람은 꼭 기억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그리고 ‘나눔’의 의미를 깊이깊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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