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오늘은 석 달만에 아버지와 만나는 날이다. 아버지가 상해를 떠나 한국으로 오신 지 꼭  석 달이 되었다. 엄마의 빈자리를 그동안 어떻게 견뎌냈을지 무척이나 근심스러웠던 나는 정작 아버지를 만난다고 하니 그동안의 걱정, 궁금증과 그리움이 활화산처럼 폭발하여 전날밤 잠까지 설칠 정도였다. 그러고는 아침부터 아버지에게 몇 차례나 전화를 하며 부산을 떨었다.

“아직 출발도 안했다. 천천히 나오면 된다.”

아버지가 건대입구까지 오시려면 둬 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다. 7호선 갈아탈 때 전화를 주겠다고 하셨다. 그런데도 나는 혹시라도 늦어서 아버지가 기다리실까봐 서둘렀다. 석달만의 만남이라고는 하지만 물건을 건네 받고는 금방 헤어지는 짧은 만남이다. 그 짧은 만남으로 그리움이나 궁금증이 해소되는 건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아버지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한없이 설렌다.


▲ 올해 아버지 생신날 양수리 두물무리에서
엄마를 저세상으로 떠나보내고 나서 나와 동생들, 고모, 삼촌이 가장 걱정한 사람은 아버지였다.  그만큼 아버지의 인생에서 엄마는 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결혼해서 40년을 엄마와 아버지는 한 번도 떨어져서 지낸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늘 엄마와 함께였고 엄마 또한 아버지를 많이 의지했다. 아버지는 이날이때까지 엄마 빼고 혼자서 노래방에 가신 적도 없고 발맛사지 한 번 받으신 적 없다. 삼촌은 늘 아버지를 “해바라기”라고 놀리셨다. “이제 엄마도 안 계시니 아버지도 원하는 인생을 살아요.” 하고 모두가 말했지만 정작 아버지가 원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는 누구도 모른다. 엄마를 떠나보낸 후 아버지는 오랜 세월을 엄마와 함께 생활하셨던 상하이를 떠나 한국으로 가셨다.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해서 가끔 전화를 해보면 아버지는 그냥 잘 있다, 걱정말라는 두 마디 말로 모든 상황을 명료하게 대답하는 성격이라 궁금증은 전혀 풀리지 않는다. 다시 동생에게 전화를 해서 이것저것 물어본다. 뭐든지 잘 드시고, 친구들 집에 놀러도 잘 다니신다고 해서 다소 마음이 놓였지만 직접 아버지를 만나보고 싶은 마음은 더욱 간절했다.

고향에 계실 때 그 많은 농사일을 혼자서 힘들게 하실 때면 아들 욕심이 났을 법도 한데, 아버지는 한 번도 그런 내색을 내신 적이 없다. 상하이에서 살 때 언젠가 한 번 “나는 아무 것도 한 거 없이 이렇게 인생이 다 지나가는구나.” 하시는 걸, 막내동생이 “아버진 딸 셋 낳아서 잘 키우셨잖아. 그러면 성공한 거지.” 하자 그냥 허허 웃으시고 말았다.

책을 펼쳐들었으나 오늘따라 시간은 유달리 느린 속도로 흐르는 것 같다. 책을 덮고 방안에서 괜히 왔다갔다 한다. 아직 탈수가 채 안된 세탁기를 몇 번이고 가서 보며 몇 분 남았는지 시간을 확인한다. 창밖의 구름이 여러가지 모양으로 변하는 것을 한참 바라보기도 한다. 가산디지털역에서 7호선 바꿔타시면 전화 주신다고 했는데, 핸드폰이 혹시 진동으로 되어있나 싶어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아니다. 전화가 들어오지 않았다.

10시 반, 나는 드디어 집문을 나선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기보다는 먼저 건대입구역에 가서 아버지를 기다리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흐린 날씨지만 햇살은 여전히 따갑다. 나는 한 손에 신영복선생님의 『담론』이란 책을, 다른 한 손에는 핸드폰을 쥐고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 십여 년 전 상하이에서
내 인상 속의 아버지는 늘 말보다는 묵묵히 행동으로 모든 걸 보여주시는 분이었다.  고중에 입학하자마자 ‘문화대혁명’이 터졌고 그후로는 학교 문에 들어가 보신 적이 없는 아버지는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잘했다고 하신다. 초중 때 수학숙제를 하다 아무리 풀어도 안 풀리는 응용문제를 만나면 나는 그 문제에 동그라미표기를 해 두고 잠이 들곤 했다.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 보면 마실을 나갔다가 밤늦게 돌아오신 아버지가 공책에 응용문제를 절차대로 풀이를 해놓으셨고 그 옆에 상세한 설명까지 덧붙여놓곤 하셨다. ‘화학원소주기표’를 못 외워서 아궁이에 불을 때면서 억지다짐으로 외우고 있노라면 아버지는 곁에서 일을 하시다가 문득 깨알같은 힌트를 주기도 하셨다.

아버지는 독서를 즐기셨다. <흑룡강신문>, <청년생활>, <장백산>, <연변여성> 등 신문이나 잡지를 정기구독을 하셨는데 잡지가 배달되면 나와 아버지는 늘 서로 보겠다고 약간의 실랑이를 벌이곤 했다. 가끔은 밥상을 차려놓았는데도 신문이나 책에 빠져있는 아버지를 보며 “울 집에 선비 났다”고 하면서 엄마가 놀리기도 하셨다.

그러던 아버지는 나중에 상하이에 오셔서 내가 끊임없이 책을 사들이자 “여자가 책만 읽으면 엉덩이가 무거워져서 안돼.”하며 그만 사들이라고 핀잔하셨다. 그래도 내가 수필집을 냈을 때 아버지의 얼굴엔 흐뭇한 기색이 역력했다. 한번은 아버지의 생신 때 책을 한 권 사서 선물한 적 있다. “난 책 같은 거 안 봐, 아무런 쓸모도 없는거.”하며 거들떠보지도 않던 아버지의 말에 엄청 서운했으나 언제 읽으셨는지 며칠 후에 나와 동생에게 그 책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에 피씩 웃음이 나갔다.

고향에 있을 땐 농사일만 하시느라 양말 한짝도 씻을 줄 모르던 아버지였지만 상하이에 오신 후로는 가계부를 적으시는 건 물론, 설거지와 집청소를 도맡아 하셨고 라면도 곧잘 끓이셨다. 나의 딸애는 “라면은 외할아버지가 끓인 게 젤 맛있어요.” 하면서 라면만은 무조건 외할아버지에게 끓여달라고 특별주문을 하기도 했다.

아버지에겐 귀여운 면도 있었다. 무거운 일, 자잘한 일 다 하시지만 정작 당신의 것은 하나도 챙길 줄을 모르셨다. 언제 한 번 맛있는 음식 먹으러 외식을 하자고 하신 적도 없고, 여행을 가겠다고 하신 적도 없고 비싼 옷을 사겠다고 하신 적도 없다. 한 번은 샤워하러 들어가면서 갈아입을 속옷을 엄마가 미처 준비해 놓지 않았는데 아버지는 벌쭘하니 서서 “뭐 입으라고?” 하고 물었다. 그 모습이 마치 모든 걸 엄마에게 의지하는 유치원 어린이 같아서 나와 동생이 빵 터진 적도 있었다.

▲ 엄마의 병 간호하시는 아버지
이러시던 아버지는 엄마가 간암에 걸린 후로 주방을 독차지하셨다. 인터넷을 검색하여 엄마의 병에 좋다는 음식은 전부 레시피를 따와서 당신이 손수 만드셨다. 유기농야채를 사오시고 씻고 다듬어서 즙을 내서 달이고 육수를 만드셨다. 아버지는 매일 정확하게 시간에 맞춰 엄마에게 약을 대령했고 엄마의 상태를 체크하셨다.

아버지에 대한 상념에 빠져있는 동안 어느새 나는 건대입구에 도착을 했고 아버지한테서는 그때서야 전화가 왔다. 가산디지털역에서 7호선 갈아타려는 참이라고 하신다. 왜 벌써 왔냐고 걱정하시는 아버지에게 책 읽으며 기다릴테니 괜찮다고 했다. 지하철노선도를 찾아보니 가산디지털역에서 건대입구까지는 44분이 소요된다고 뜬다. 책을 꽤나 읽을 수 있는 시간이다. 이제 아버지가 내쪽으로 오는 지하철을 탈 것이 확인되었으니 시름놓고 책을 읽을 수 있다.
 
400페이지가 넘는 두터운 책이었지만 나는 곧 신영복 선생님의 물 흐르듯 펼치는 고전 해석과 인문학 담론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신영복 선생님은 또한 서예가이시기도 하다. 한국인들이 매일 마시는 소주병의 “처음처럼”이란 글씨도 신영복 선생님의 필체다. “서도의 관계론”에 대한 이야기에서 신영복 선생님은 예로부터 명필은 장수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명문장 중에는 요절한 사람이 많지만 명필은 오래 살아야 된단다. 오래 사는 것만큼 세상을 달관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추사 글씨도 죽기 사흘전에 쓴 봉은사의 “판전”을 최고로 친다고 한다. 당나라의 명필인 구양순과 안진경도 장수했고 왕희지와 미불도 당시로 놓고 보면 장수했다고 할 수 있고, 원교, 이광사, 추사, 다산 정약용도 장수했다고 한다.

문득 아버지도 글씨를 참 잘 쓰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도 잘 그리신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늘 화투패를 그려서 설날이면 친인척들에게 선물하곤 하셨다. 아버지가 그린 색채가 살아있는 화투장이 아직도 내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내가 학교 미술시간에 그린 인물화도 아버지의 손길이 한번 가면 확 살아났다. 언젠가 아버지에게 그림이나 서예를 한 번 배워보라고 권유했는데 이 나이에 뭘 하냐며 단마디로 거절을 하셨다. 격렬한 운동보다는 시간 소일도 되고 마음의 평정도 얻을 수 있는 이 작업이 아버지에게 참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당초에 설득할 자신이 없다. 엄마도 안 계시는데 아버지라도 오래오래 장수하셨음 좋겠다. 그동안 못한 효도라도 실컷 할 수 있게.

▲ 2014년 5월 아픈 엄마와 함께 한국 요양원에서
드디어 아버지한테서 전화가 왔다. 내가 플랫홈에서 기다린다고 했는데 입구에 나가서 기다리신다고 한다. 헐레벌떡 계단을 내려가 입구쪽으로 갔다. 나를 보자 아버지가 활짝 웃으신다. 가을햇살처럼 넉넉한 웃음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아버지가 이렇게 찬란한 웃음을 지으시는 걸 본다. 걱정했던 것처럼 살이 빠지거나 더 늙어보이지도 않았다. 무척 좋아보였다. 아버지는 건대입구에서 고향친구랑 만나서 식사를 하기로 하셨다면서 물건을 건네주고는 “얼른 가봐라.” 하고 한마디만 하고는 성큼성큼 걸어가셨다.
 
나는 지하철을 타려고 다시 플랫홈에 섰다. 갑자기 눈물이 나오려고 해서 침을 삼키고 눈을 크게 뜨며 눈물이 흘러내리지 않게 하려고 갖은 애를 다 썼다. 서서히 열차가 들어서고 나는 자리를 찾아 앉았으나 마음은 쉽게 평온해지질 않는다. 무슨 감정인지는 나도 딱히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냥 눈물이 자꾸만 나오려고 한다.

늘 그렇듯이 돌아오는 길은 갈 때보다 가까운 것 같다. 역에 도착해 집 쪽의 출구로 향했을 때 갑자기 쏟아지는 강렬한 햇볕에 나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입출구의 긴 계단으로 온통 가을햇살이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밖으로 나오자 어느새 맑게 개인 가을 하늘이 유난히 청명하다.
 
가을 햇살에 곱게 물든 플라타너스 이파리가 사뿐히 땅에 내려앉고 있었다. 가을날의 낙엽에게는 새로운 꿈이 있으리라. 아버지에게도 꿈이 있을텐데, 아버지의 꿈은 뭘까?

이버지가 언젠가 다시 붓을 들었으면 좋겠다. 그건 참으로 행복한 일일텐데. 아, 아, 아버지! 사랑하는 아버지!


▲ 2014년 5월 엄마와 함께 한국으로 가는 날 공항에서

 아,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 수필은 딩웨호(订阅号) “지행자(知行者)”에 실렸던 글입니다. 편집자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