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를 자처하는 두 괴물의 전쟁

▲ 이찬만/행정사, 언론인lcman2@naver.com
[서울=동북아신문]조선일보는 보수세력이지만 정보의 수급과 가공 능력만큼은 국내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때 조선일보 방우영 회장이 밤의 대통령이라고 불린 것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다. 한나라의 대통령을 만들겠다고 나서 우군을 조직하고 실행했으니 말이다.

조선일보는 청와대 내의 정보를 수집한 후 박근혜로는 보수정권의 재창출을 어렵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조선일보가 정권 재창출의 헤게모니를 쥐기 위해선 박근혜의 아킬레스건을 잡아야 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우병우 민정수석의 수상한 행보를 캐야 했다. 사실 그동안 정윤회 문건유출사건 등 청와대 안에는 실제 수상한 움직임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이때 등장한 사건이 미르재단의 설립자와 설립과정이었다. 미르재단의 설립이 청와대 비선실세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청와대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청와대도 녹록치 않았다. 보수를 자처하는 두 괴물 즉 청와대와 조선일보가 미르재단의 방영을 놓고 맞붙었다. 청와대는 친박과 진박을 넘어 골박(골수부터 박근혜)이라 불리는 김진태 의원이 총대를 메고 조선일보 송희영 주필의 희대의 수뢰사건을 흘린다. 이른바 대우조선해양 접대사건이었다. 그는 대우조선에서 마련한 전세기를 타고 유럽에서 골프와 각종 접대를 즐겼다. 즉시 송희영 주필은 사직서를 제출한 후 영어의 몸이 되었다.

상처뿐인 청와대의 승리

청와대가 조선일보를 길들이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송희영뿐만이 아니라 비리 혐의를 받고 있는 조선일보 고위층과 원정도박 혐의가 있는 방상훈 회장의 둘째 아들이 여차하면 다시 신문지상과 방송에 오르내리게 될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미르재단의 비선실세는 물론 우병우를 비롯한 측근들의 수상한 행보와 조선일보 고위층의 비리는 서로 상쇄되는 마찰에 불과했다. 이때만 해도 TV조선 재선정 계약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손에 쥔 청와대의 승리로 끝나는 듯했다. 미르재단의 비선실세 관련 기사가 조선일보와 TV조선에서 사라졌다. 청와대의 콧노래가 담장 밖으로 메아리 쳤다.

그러나 청와대는 괴물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는지는 몰라도 수많은 게릴라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청와대의 모든 수상한 움직임이 하나씩 둘씩 조선일보를 제외한 다른 신문과 방송에서 벗겨지기 시작했다.

정윤회의 퇴출과 강력한 비선실세의 등장

정윤회는 최순실의 전 남편이다. 정윤회는 한때 박근혜의 보좌관으로,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는 선거담당참모로 지근거리에서 박근혜를 보좌했던 인물이다. 박근혜와 최순실 그리고 정윤회는 사생활뿐만이 아니라 정치문제에 있어서도 조언을 주고받는 막역한 사이였다.

정윤회 문건유출사건의 피의자 박관천 경정이 당시 검사에게 말한 권력서열은 이때까지 유효했다. 최순실이 1위 정윤회가 2위 그리고 박근혜가 서열 3위라는 것이었다. 처음 비선실세는 우리 앞에 이렇게 등장했다.

그러던 어느 날 최순실은 정윤회의 수상한 낌새를 알아차린다. 정윤회가 대한항공 여승무원과 바람이 난 것이다. 이 둘 사이를 안 최순실도 결국은 약한 여자였나 보다. 가슴 속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서였을까. 이 때 최순실은 강남의 한 호스트바에서 고영태를 만난다.

고영태는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단체전 금메달, 개인전 은메달을 따낸 펜싱국가대표 출신이었다. 생활고 탓이었는지 동료들에게 “내 목표는 최고의 펜싱선수가 아니라,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고 말하고는 은퇴를 했다. 은퇴 후 호스트바에서 일하던 그는 최순실을 만나 인생역전을 이루게 된다.

비선실세의 타락

정윤회와 이혼 후 최순실은 강력한 박근혜의 멘토로 자리하게 된다. 강력한 권력을 누리던 최순실과 뜻밖의 권력을 탐했던 고영태의 사업은 청와대를 배경으로 더욱 튼실하게 자리 잡았다. 그러나 타락하기 시작한 최순실은 많은 남자를 알기 원했다. 그 때 만난 사람이 차은택이다.  

차은택은 광고계, 음악계, 영화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영상전문가다. 1997년 이민규의 ‘아가씨’로 데뷔한 후 가수 이효리의 ‘유고걸’, 보아의 ‘잇유업’ 등 무수히 많은 스타들의 뮤직비디오와 CF를 만들었다. 한마디로 잘나가는 아티스트였다. 차은택은 남자로서 매력이 있었고 고영태보다 지적 감수성이 예민한 문화계의 차도남이었다.

자연히 최순실은 고영태보다 차은택을 찾았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고영태는 질투했고 이 질투가 바로 최순실을 배신하게 되는 결정적 이유가 되었다.

호스트의 배신

고영태의 분노는 계획적으로 발산되었다. 최순실 국정농단의 일거수일투족이 그의 카메라에 녹취되었고, 다시 태블릿 PC에 차곡차곡 저장되었다. 최순실이 돌아왔으면 이 영상은 아무 의미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존재 자체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순실은 돌아오지 않았고 다혈질의 고영태는 계획을 넘어 실행에 착수했다.

고영태는 조선일보 기자인 이진동에게 영상과 함께 국정농단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TV조선은 이진동이 취재한 미르재단 관련 기사를 방영하기 시작했고 청와대는 격노했다. 보수를 자처하는 두 괴물은 이렇게 맞붙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송희영 전 주필과 비슷한 비리를 안고 있었던 조선일보가 꼬리를 내리면서 사태가 진정되자 약이 오를 대로 오른 고영태는 JTBC를 통해 태블릿 PC가 있는 위치를 제공했다. JTBC는 연일 특종을 터뜨렸고 사장이자 앵커 손석희는 시민들에 의해 대통령 후보의 반열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박근혜의 종말

그러나 국정농단의 주범이 최순실이었다고 하나 그에게 국정을 농단할 수 있는 권력을 쥐어준 것은 몸통 박근혜였다. 무수히 많은 불법행위의 지시가 박근혜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증언이 속속 나오고 있다. 이제 박근혜는 어떠한 방법으로든 국민에게 책임을 져야한다.

권력의 맛, 돈의 맛과 함께 사내의 맛에 취한 최순실의 비정상적인 행동으로 인해 박근혜의 임기를 채 마치기도 전에 국정농단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 할 수 있다.

박정희가 충실했던 부하 김재규의 총에 죽은 후 박근혜는 ‘배신’에 깊은 트라우마가 있었다. 한때 자신의 보좌관이었던 유승민을 찍어낸 것도 배신의 정치 때문이었다. 탄핵이든 사퇴든 박근혜가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종말을 맞이하게 된 것도 배신의 한 종류 때문이었으니 세상은 참 아이러니 하다.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