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재연 프로필

중국 길림성 반석현 출생. 길림성 영길시 조선족고등학교 졸업교사, 자영업 종사. 현재 아모레 퍼시픽. 1989년 '도라지' 문학지에 수필(처녀작) <천국의 주인은 누구?> 발표. 그후 시 작품 다수 발표.

재한동포문인협회 총무부 차장

 [서울=동북아신문]어제 밤새 창밖에서 두드려대던 빗소리에 잠을 설쳤다. 아침 일찍 창문을 열어보니 가을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차가운 빗방울이 한 때는 열망으로 춤추었지만, 지금은 이미 퇴색한 나뭇잎들을 흠뻑 적시며 소리 없이 떨어지고 있다.

내일이면 아버지의 12번째 기일이다. 비록 12년이란 세월이 흘러서도 이때가 되면 아버지의 영상이 마치 약물에 담근 인화지처럼 점점 선명해진다.    

중학교 1학년 때이다. 아버지는 화학 공업사설계원으로 근무 하시다가 사직하고 엄마와 함께 식당을 운영하셨다. 아버지는 식당일로 바쁘셨지만 시간이 나면 신문이나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화장실에도 신문을 꽂는 자리가 정해져 있었다. 아버지는 역사책을 즐겨 읽으시고 고금중외 역사인물들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셨다. 우리 삼남매의 잠자리는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역사인물들에 대해 어찌나 생동하게 얘기하는지 이야기 속에 빠져 들어가면 밤이 깊어 가는지도 모를 때가 많았다. 학교에 가서 아버지께 들은 이야기를 해주노라면 친구들이 내 주변에 어느새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훌륭한 아버지가 계신다고 친구들은 나를 엄청 부러워하였다. 우리 집은 넉넉한 살림이 아니지만 벽 한쪽이 전부 책궤이었다. 아버지는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한편 의미심장하게 "나는 너희들에게 물려줄 재산은 없으나 인생살이 하면서 가장 큰 재산은 천하를 얻는 것 보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란다."라고 조언하시곤 하셨다.

엄마의 손맛 덕에 식당은 거의 매일 단골손님들이 문전성세를 이루어 냉면 맛집으로 주변에서 소문이 났었다. 식당 옆에는 초등학교가 있었는데 매년 운동대회를 열면 우리식당에서 학생들에게 냉면을 무료로 후원하겠다고 아버지가 선포하였기에 운동대회 하는 날이면 식당은 마치 잔치집처럼 북적거렸고 웃고 떠드는 아이들 때문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우리 삼형제는 앞치마를 두르고 하루 종일 일하는 날이었고 일손이 부족하면 친구들까지 불렀다.

매년 봄이면 어르신들의 크고 작은 행사에도 항상 아버지는 후원의 손길을 아끼지 않았다.
"아버지 하루휴업하면 손해가 얼마예요? 아버지 때문에 우리도 힘들어요."
그때마다 아버지는 허허 웃으시며 말씀 하셨다.
"너희들 고생하는 거 다 알고 있다. 장사꾼은 이득부터 계산하지만 나는 그런 장사꾼보다 훌륭한 상인이 되어 함께 나누며 살고 싶다."

아버지는 늘 단벌신사로 소매 기슭이 닳아 헤어질 정도로 퇴색한 옷을 십년 가까이 입고 다니셨다. 자전거도 폐달을 밟을 때마다 찌걱찌걱 소음이 멀리서도 들렸고, 칠이 벗겨지고 안장까지 터실터실 헤어져서 당장 버려도 아깝지 않았다.
"아버지 제발 그자전거 좀 버려요. 창피해 죽겠어요. 내 친구들이 시끄러운 자전거 소리만 들어도 아버지인줄 알 수 있데요. 아버지는 식당 사장이신데 옷도 좀 갖춰 입고요."
"그 자전거 아직도 삼년은 더 탈거다. 겉만 번지르르 사치한 것보다 실속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
그때마다 나는 아버지 앞에서는 할 말을 잃게 된다.  

엄마의 건강이 점차 나빠지면서 나는 학교를 그만두고 엄마의 일손을 돕게 되었다. 내가 식당에서 일을 해도 아버지는 월급 한번 주신 적이 없었다. 때로는 아버지가 너무 야속하고 미워졌다. 월말이 되면 봉급을 달라고 조르기도 했지만 그 때마다 아버지는 차분 하게 말씀하셨다. "네가 가정을 위해 고생하는 건 알고 있다. 때가 되면 다 보상 해줄 거야!"

당시 나는 지병으로 계시는 어머니 옆은 떠날 수는 없었고 꾹 참으며 집에서 일손을 도와야만 했었다.

결혼한 후 남편은 친구와 함께 사채 돈을 빌어서 무역동업을 하였다. 시간이 지나도 이자는 올라가는데 돈이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그 친구가 불법으로 무역거래를 하다가 형사 처분을 받고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 친구와 함께 빌린 사채 돈을 몽땅 우리가 갚아야만 하였다.

우리는 몇 개월 사이에 빚쟁이가 되어버렸고 채권자들은 아침부터 문턱이 닳을 정도로 찾아와 협박을 해서 하루도 발을 펴고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나는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때 아버지에게 너무나 야속하고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다른 사람은 잘 도와주면서 정작 딸이 곤경에 빠진 것을 외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너무 억울해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두 볼을 적셨다.

어느 하루, 아버지는 내가 일하는 곳으로 찾아 오셨다. 아버지의 얼굴은 주름이 더 깊게 패었고 피부도 까슬까슬해져 많이 초췌해 보였다. 아버지는 나를 바라보며 상냥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연아, 고생 많이 했다. 빚을 빨리 갚으려면 일해서 언제 갚겠나? 작은 가게라도 하나 내야지 않겠나?"
나는 끓어 오른 불만을 참으며 아버지를 향해 격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 도리를 내가 왜 모르겠어요? 손에 쥔 게 있어야 가게를 하든지 않겠어요? 빚도 태산 같은데 또 빚을 내서 가게를 어떻게 해요?" 
"나는 너희들이 젊어서 고생도 좀 해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독수리는 날개가 강해지기까지 수없이 털갈이를 하고 낭떠러지에서 몸부림치며 날아오르는 연습을 하듯이 인생사도 마찬가지란다. "

아버지는 온화하게 말씀하시며 검은 천으로 싼 작은 보따리를 건네주셨다. 나의 손을 꼭 잡은 아버지의 손등은 나무껍질처럼 거칠고, 힘줄은 퍼렇다 못해 곧 터질 것만 같았다. 나는 콧등이 시큼해 났다. 그동안 아버지를 이해 못한 내가 갑자기 한없이 미워졌고, 제 설음에 어린애처럼 펑펑 울고야 말았다. 아버지가 가만히 나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얘야, 이건 가게 하나 꾸리라고 준비한 돈이다. 이 돈은 네가 몇 년간 식당에서 일한 보상이다. 네가 제일 힘들 때 줄려고 따로 모아 두었다. 나는 네가 잘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동안 아버지 많이 미워했지?"라고 등을 도닥여 주었다.

아버지가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활처럼 굽은 등이 눈에 꽂혀 들어왔다. 순간, 무언가 예리한 것이 화살촉이 되어 내 심장을 뚫고 들어왔다. 가슴이 미어지듯 아파났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그 돈은 오빠가 몇 년째 심장병으로 고생하시는 아버지에게 수술하라고 드린 돈이었다. 아버지는 그 돈을 누구도 모르게 나의 몫으로 차곡차곡 저축해 놓았던 것이다.

나는 그 돈으로 식당을 운영하였다. 2년이 지나자 빚도 다 갚고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연세가 드시면서 심장병으로 숨이 턱에 닿아 고생하시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경비를 얼른 마련하여 수술을 받게끔 해야겠다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에 엄마한테서 문득 불길한 전화가 걸려왔다.
"연아, 놀라지 말고 들으렴. 흑, 흑, 아버지가…방금 돌아가셨다!"
청천벽력이었다. 순간, 나의 머리는 하얗게 공백이 생겼다. 다리에 힘이 쭉 풀려서 서있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 아버지는 왜 이 못난 딸이 효도할 시간도 주지 않고 그리 급히 떠나셨나요?……아버지, 사랑해요!"
 장례식을 치른 후 구석에 멈춰 세운 아버지의 두 다리와 마찬 가지었던, 주인을 잃고 먼지를 뽀얗게 덮어 썬 낡은 자전거가 눈에 밟혀왔다. 아버지의 손때가 고스란히 묻어있었다. 아직도 귓가에는 아버지가 찌걱찌걱 자전거 페달을 밟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듯싶었다.

내가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주변에 거미줄처럼 좋은 인맥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회사에서 전국조직 역량강화 과정에서 작은 '신화'를 만들었다고 상을 받게 된 것도 내 인생에 항상 큰 나침판이 되어 나를 이끌고 있었던 아버지가 계셨기에 가능하였다.   

창밖에 내리는 쌀쌀한 가을비가 마음을 차갑게 적신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그윽한 그리움만은 눅잦힐 수가 없다. 아버지가 생전에 그토록 즐겨 드시던 배추전처럼 풋풋한 나눔의 맛과 청국장처럼 깊은 사랑의 맛이 가을비 속에 파랗게 살아난다.

"아버지……아―빠!……“

오늘도 나는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추억의 빈자리를 가만히 보다듬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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