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련옥 프로필:

중국 흑룡강성 계서시 출생. 필명 송이. 중학시절부터 작품 발표 시작, 각종 간행물과 방송사에 60여 수(편)발표. 흑룡강조선족창작위원회 회원, 북방문단 흑토문학상 수상, 다인집 ‘흑룡강 땅에 핀 야생화(한국 초지일관출판사)’등이 있음. 흑룡강신문 산동지사에 근무. 2008년부터 한국에서 거주, 현재 재한동포문인협회 이사, 애터미㈜ 사업자.

[서울=동북아신문]4월은 나에게 잔인한 계절이다. 4월에는 많은 꽃들이 피어나는데 그 중에는 벚꽃이 절정을 이룬다. 벚꽃을 보면 5년 전의 아픔이 고스란히 기억의 빗장을 열고 튀어 나와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 무거움의 시간이 흐를수록 더 가벼워지고 있지만, 아직도 그때의 아픔이 복사한 듯이 고스란히 머리에 남아 있다.

5년 전 4월의 어느 날 나는 병원으로부터 유방암진단을 받았다.
그때가 마침 벚꽃이 가득 피어 있을 무렵이었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게 아마도 그런 것이리라…병원에서 진단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창밖으로 보이는 벚꽃은 나에게 슬픈 풍경이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고, 나는 순간 가장 가까운 남편부터 내 주위 모든 사람들 한명 한명씩 원망하다가 나중에는 자괴감에 들었다. 내 인생의 수레바퀴는 어디서부터 잘못 돌아간 걸까?!

한번쯤은 이렇게 글로서 이 힘들었던 시간들, 이겨냈던 시간들을 돌이켜 보고 싶었다.

5년의 투병생활이 없었다면 삶과 죽음에 대해서 지금처럼 많이 생각해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시간들을 받아들이고 지나왔기에 나는 오늘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고 보람찬 인생이란 어떤 것인지 고민해 보게 되었다. 아픔만큼 성숙해진 그 시간들, 5년의 시간을 되돌아본다.

암, 그리고 죽음에 대하여
암진단을 받는 순간,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지 않았던 죽음이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아,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인생 다 못 살고 이렇게 곧 가는 건가?…두려움과 공포가 순간순간 나를 찾아왔다. 나의 아픈 육신과 함께…과연 누가 죽음 앞에서 담담해지고 초연해질 수 있을까?…

항암 2차를 마친 어느 날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데 머리카락들이 추풍낙엽처럼 우수수 베개수건 위에 떨어졌다. 치료 끝나면 다시 자란다는 누군가의 귀띔도 아무런 위안이 되지 않았다. 처음 겪는 일에 나는 또 한 번 억장이 무너졌다. 동네 미장원에서 삭발하는데 어디서인가 꾸역꾸역 모여든 슬픔의 조각들이 비수처럼 마음을 찔렀고 나는 다시 한 번 눈물을 흘려야 했다.

정상세포까지 죽게 만드는 강한 항암제 때문에 다른 기관들이 기능이 떨어져 신장내과, 안과, 내분비내과 등 다른 분과들을 전전하면서 나는 8차의 항암치료를 받았다.

부친상, 그리고 이 세상과 저 세상
그해 6월의 어느 일요일 아침 걸려온 한통의 전화, 부친의 사고 소식이었다. 어딘가 다쳤을 거라고 생각하고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아버지는 영안실에 안치되어 있었다. 설상가상, 청천벽력이라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나와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너무도 갑작스레 당한 일이라 기가 막혀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유언 한마디 못 남기고 간 아버지, 사고 직전 고통스러웠을 그 끔찍함, 그리고 못난 자식 도와주려고 일하러 나갔다가 당한 사고라는 생각이 두고두고 나를 괴롭게 했다. 내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 것은 아버지와 같이 한 마지막 모습이 생각나지 않는 것이었다. 게다가 투병중이라는 이유로 마음껏 슬퍼하지 못했다는 미안함이다.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 다는 것을 왜 자식들은 항상 뒤늦게 알게 되는 것일까.

아버지는 떠났는데 장례식을 마칠 때 까지도 아무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납골당에 모시고 날이 갈수록 상실감이 마음을 파고들었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다는 내 힘과 노력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현실이 절망으로 다가왔고, 순간순간 마음에 찾아오는 그리움과 아픔은 몇 년 동안 마음을 힘들게 했다. 이 세상과 저 세상에 헤어져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때서야 나는 서서히 알아가기 시작하였다.

아버지와의 모든 추억과 기억은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 있는 데 정작 사랑하는 아버지는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아버지는 한줌의 재로 하늘나라로 긴 여행을 떠나셨다.

수술, 그리고 방사선 치료
항암중에 아버지를 보내고 나는 또 투병과 치료를 이어가야 했다.

가슴전절제를 할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말에 나는 수술을 포기할거라고 했다. 설득하려는 가족과 의료진을 피해 도망 다녔다. 게다가 전절제를 대비한 복원수술 때문에 성형외과 진료를 받아야만 했는데 성형외과 의사를 마주하고 설명을 듣는 순간 견디기 힘든 슬픔 때문에 오열 속에 뛰쳐나오고 말았다. 여자에게 가슴이 갖는 의미는 얼마나 큰 것일까…건강할 때는 소중한 줄 몰랐던 가슴, 가슴보다 더 소중한 것이 생명이라는 의료진의 세 번의 설득으로 결국 수술 받기로 했다.

어머니와 남편의 배웅 속에 수술실로 향했다. 그 시각,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 지……수술전어머니는 나의 손을 잡아 주었다.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어머니, 미안합니다……”한마디만 겨우 내뱉었다. 건강하게 낳아준 몸을 잘 간수 못한 죄스러움, 그리고 두려움 등 복잡한 감정이 마음에 가득했다.

수술실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느끼는 죽음 같은 외로움, 이대로 갔다가 못 나올 것 같은 두려움, 그 곳은 수술을 하기 위한 통로가 아니라 죽음으로 향하는 통로 같았고 수술 전 마취를 하는 순간, 내 육신은 이미 완정한 내가 아니었다. 마취로 긴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수술 전과 수술 후의 나로 달라져 있었고 인두 같은 수술자리가 흉터로 남았다. 간절함 때문일까, 성공적으로 마친 부분 절제수술로 나는 건강과 한발자국 가까워 졌다.

30여일 매일 매일 진행된 방사선 치료로 피부는 거멓게 어두워져 갔고 그때의 치료 후유증으로 아직도 피부에 가끔 상처가 나곤 한다.

새로운 삶, 새로운 시작
못살 것만 같던 괴로움, 그리고 슬픔, 그리움들이 시간 속에서 쌓이다가 허물어지고 또 쌓이다가 허물어지기를 5년, 쓰나미처럼 다가오는 그리움 속에 나는 괴로우면 괴로운 데로 슬프면 슬픈 데로 보고 싶으면 보고 싶은 대로 그렇게 세월을 살았고, 이제는 고인이 남기고 간 추억으로 살지만 그리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 모든 것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이 있다. 세월이 약이라더니 죽을 만큼 힘들었던 그 순간도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무디어지고 옅어지고 연해져 갔다.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던 그 순간들이 지나고 이제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삶을 마주하게 되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리라. 또한 내일도 오늘처럼 살리라. 그 하루하루를 모아모아서 후회 없는 삶을 살리라. 이 순간 떠오르는 한마디“견딤의 크기와 깊이가 쓰임의 크기와 깊이를 결정한다.”나는 이 지구 위에서 어떤 쓰임으로 남을 수 있을까?

5년의 투병생활로 나는 좀 더 성숙된 자세로 내 인생을 마주하게 되었다. 살다 보면 심각한 상황이란 없다. 심각한 것은 바로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가짐의 빛깔이리라.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인 것처럼 살자.

올해에 피어날 벚꽃들은 어쩐지 찬연하게 아름다울 것만 같다.

2017년 1월, 내곡동 자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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