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셀러 고량주 설원문학상 응모작품

▲ 권선자 : 소설가/수필가, 재한동포문인협회 이사

1980년대 문단 데뷔
50여 편의 소설과 수필 발표
진달래 문학상, 윤동주 문학상, 도라지 문학상 등
10여 차 수상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초록빛 보따리> 소설집 출간
장백산 잡지사에서 <엄마의 대지> 작품집 출간
 

[서울=동북아신문]파도마냥 일렁이는 차량들의 대이동, 출근길을 다그치는 사람들의 움직임, 그리고 학교 길에 구슬처럼 굴러 떨어지는 애들의 짜그르르 웃음소리…

도시의 아침은 마냥 힘찬 활기로 시작된다. 국가 일급 장애인 강기영 씨와 휠체어를 잡은 간병인 여자도 이 요란한 아침대렬 속에 끼어 있다. 휠체어에 앉은 이는 지체 장애인 장기영 씨고 휠체어를 잡은 간병인은 나의 시누이다. 장기영 씨가 국가인권위원회 상담사로 취직하면서 매주 월요일 그들도 이렇듯 분망한 출근행렬 속에 끼이게 되었다.  성한 사람의 외출도 아니고 전체 몸뚱이에서 움직일 수 있는 부분이 머리 하나 뿐인 장기영 씨의 외출은 그저 외출이 아니었다. 치열한 전투이다. 아침 식사 시키고 옷을 갈아입히고, 상담할 내용들을 들여다봐야 하고, 거기에다가 하루 동안 쓸 필수품들도 챙겨야 하는데 그렇게 분망하게 집을 나서다 보면 상담시간이 늦어질 때가 너무 많다. 그래서 어느 날 시누이가 나보고 자기를 도와 월요일마다 서울행차를 같이 할 수 없냐고 했다. 마침 그때 일을 그만두고 잠깐 집에 있을 때라 나는 흔쾌히 동의하며 시누이를 돕는 일에 나섰다. 버스 타고 지하철을 바꾸어 타고 거의 세 시간이란 천신만고 끝에 우리는 국가인권위원회라는 간판이 걸린 건물 앞에 도착한다. 그러면 장기영 씨와 시누이는 건물 안에 들어가고 나는 건물 밖에서 장기영 씨 상담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볼거리가 많은 서울 도심에서 주변볼거리에 눈을 돌릴 만도 하지만 이상하게 콧구멍을 활짝 열고 심호흡을 하면서 페 속 깊이에서부터 숨을 뽑아 콧구멍으로 내뿜는 순간이면 나의 눈을 강하게 찌르며 지나가는 풍경이 나의 시야를 빈자리 하나 없이 꽉 채우며 덮어온다. 앉아 있는 남자와 서 있는 여자,  양주 고읍에서 여기까지 오는 도중 휠체어에 앉은 장애인 장기영 씨와 휠체어를 잡은 나의 시누이한테 던지는 사람들의 시선을 나는 너무 많이 느꼈다. 사람들의 시선은 긴 시간 동안 그들한테 머물러 있었고 머리를 돌렸던 사람들이 다시 머리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내가 지금 말하고 싶은 건 나는 우선 그 시선이 싫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 자신이 지금 그들의 그 시선 때문에 엄청 흥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나를 이토록 흥분하게 하고 떨리게 할까.  휠체어에 장기영 씨가 혼자 앉아 있었다면? 아니다. 휠체어가 없이 간병인 시누이가 혼자 저 인행도로에서 활보하고 있었다면? 사람들의 시선이 그렇게 오래 동안 거기에 머물러 있고 다시 돌아왔을까? 나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들이 사람들한테 한 폭의 풍경으로 비껴든 건 남자는 휠체어에 앉아 있고 여자는 휠체어를 잡고 서있기 때문이다. 앉아 있는 남자와 서 있는 여자는 그 존재 자체가 상대적 극치를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색깔의 조화, 소리의 조화로 우리 앞에 펼쳐진 이 한 폭의 풍경은 사람들한테 크나큰 감동과 울림으로 다가가 어울려서 비로소 아름다워지고 어울려서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게 했다. 이 세상의 빛을 다 안은 듯 만면에 붉은 광택을 지니고 앉아 있는 장기영 씨와 이 세상의 행복을 다 가진 듯 천사마냥 생글생글 미소를 짓고 있는 우리 시누이를 보면서 쫓기듯 출근하는 사람들도 그지없는 아늑함과 평화로움, 그리고 여유를 느꼈을 것이다.  그랬다. 그들은 그렇게 옹근 하나가 되었다. 절반짜리 몸뚱이를 가진 남자와 절반짜리 머리를 가진 여자가 합쳐서 하나가 되었다는 말이다.  시누이가 도우미로 장기영씨를 간병한 지가 이젠 거의 20년이 되었다. 중국에서 시누이가 금방 장기영 씨한테 왔을 때 장기영 씨는 혼자였다. 방바닥에 묶인 신세로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 밥을 먹어야 하고 물을 마셔하고 다른 사람 손에 의해 오줌 누고 변을 보는 일을 해야 하기에 그때 장기영 씨는 다른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일을 줄이려고 마시는 물과 먹는 음식을 최대한으로 줄이고 바깥출입도 최대한으로 줄이고 있었다. 그런 강압적인 절제로 그때 장기영 씨의 몸 상태는 최악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근육이 굳어지는 면적이 날이 갈수록 많아지고 하루 종일 방바닥에만 앉아 있는 탓에 엉덩이는 욕창이 나서 말이 아니었다.  그런 장기영 씨한테 시누이가 제일 처음 한 일이 물을 양껏 마시게 하고 밥을 배불리 먹게 한 일이라 한다. 시누이는 장기영 씨를 편하게 하려고 속내의에 주먹만 한 구멍을 내어 덮개를 만들어 주고 바지 앞섶에도 단추 대신 지퍼를 달아 오줌을 누고 큰 볼일을 볼 때 엉덩이와 허리를 움직일 필요 없이 편하게 해주었다. 그 외에도 따뜻하고 폭신한 무릎토시를 만들어 무릎에 끼워주고 시간을 정해놓고 다리 안마까지 해 주어 늘 시리고 저리기만 하던 다리에 따뜻한 기운이 돌게 했다. 무릎토시 하나 더 끼었는데 전신에 난류가 흘러 든 듯 온 몸이 훈훈하다. “아줌마 손은 신이 내린 손이 아니에요?”장기영 씨가 감동해서 반문하듯 물었다. “참,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작은 일을 가지고 그렇게 큰 감동을 해요?” 그래 맞다. 이런 것들은 사실 아주 작은 일들이다. 성한 사람들 눈에는 절대 들어오지 않는 미소한 부분들이란 말이다. 그러나 이 작고 미소한 것들이 하루 종일 방바닥에 묶이어 있는 장기영 씨한테는 얼마나 혹독한 형벌이고 사슬이란 걸 누구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시누이는 그런 사슬을 마술사마냥 장기영 씨한테서 벗겨 주었다. 돌멩이처럼 딴딴하기만 하던 다리 근육이 손가락을 찌를 여유가 생기게 된 건 시누이가 온 다음부터였다. 의사선생님들은 이런 현상은 병 진행 중에 수시로 오고 가는 병변이라고 하지만 장기영 씨한테는 그게 아니었다. 환성이고 희망이었다. 밑으로 가라앉기만 하던 장기영 씨의 몸이 그때부터 위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줄어 들대로 줄어든 인생좌판이 다시 확장되고 다시 가동하기 시작했다. 장기영 씨는 그만두었던 대학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또 대학을 졸업한 후에 그 몸으로 여기저기 취직할 수 있었다. “아줌마가 없었다면 나 벌써 저 세상 사람이 되었을 걸요.”쭉 가족의 짐으로 얹혀만 살다가 한 가족을 책임진 가장의 인생으로 살게 된 것을 장기영 씨는 다 시누이 때문이라고 했다.  “제가 지금까지 여기를 떠나지 못하는 게 뭔지 아세요? 아저씨 몸에서 일어나는 하나하나의 작은 변화 때문이에요. 내가 있으면 아저씨가 저렇게 좋아지는데 어떻게 떠나요? 간다간다 하면서 아이 셋 낳고 간다더니 벌써 아저씨 집에 온 지도 20년이 되었어요. 강산이 두 번 바뀌었죠.”여자가 하는 작은 일에 남자는 큰 감동을 하고, 그러면서 그들은 어느 새 20년이란 세월을 밧줄 넘기듯 훌쩍 넘겼다. 돈 벌이 하려고 한국에 나왔고 돈 벌이 하려고 가족을 뒤로 했고, 그래서 모두들 그들은 돈 밖에 모른다고 했다. 이런 우리 동포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도 참 많다. 그렇지만 대한민국의 구석구석에서 우리 시누이처럼 동포들이 흘린 피땀, 노고, 그들이 하나하나 쌓아올린 돌멩이 같은 일들과 업적은 이렇듯 한 생명을 환생시키고 한 생명을 위로 솟구치게 하는 거대한 일을 하고 있다. 작은 일을 하면서 살아온 20년, 또 그 작은 일에 감동하며 살아온 20년이었고, 온 몸을 열고 인간세상의 아름다움을 만들어 온 20년이다. 작년에 장기영씨는 병으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시누이는 아직도 전철역 입구에 서면 자주 걸음을 멈춘다.  "장기영씨가 보여요, 내가 휠체어를 밀고 있는 것 같아요."하고 몇 번 되뇌이었다. 그럴 때 시누이의 얼굴표정은 더 없이 안온하다. 잔잔한 어떤 미소가 번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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