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오늘 당신의 울타리는 열려있는가 어느 날 해와 달이 만났다. 해가 달을 바라보며 "나뭇잎은 초록색이야" 하고 말했다. 그러자 달이 나뭇잎은 은빛이라고 우겼다. 이번엔 달이 먼저 말했다. "사람들은 잠만 잔다."

그러자 해가 달에게 잘못 알고 있다며 대답했다. "아니야, 사람들은 언제나 바쁘게 움직인다." 해의 말에 달이 그렇지 않다고 하며 어느덧 다투었다.

그때 바람이 나타나 둘이 다투는 소리를 듣고 허허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은 쓸데없는 다툼을 하고 있구나. 낮에는 해의 말대로 나뭇잎은 초록색이란다. 사람들도 바쁘게 움직이고, 땅도 시끄럽지. 그러나 달이 뜬 밤에는 모든 것이 변해 땅은 고요해지고, 사람들도 잠을 잔단다. 나뭇잎은 달빛을 받아 은빛이 되지. 늘 우린 이렇게 자기가 보는 것만을 진실이라고 우길 때가 많단다." 이와 같이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지 못하면 그 사람의 생각과 고충을 알 길이 없다.

사람은 어리석어서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판단하고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남이 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넓은 마음을 키워야 한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역지사지'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본래 역지사지라는 말은 상대방의 처지·입장·관점·시각에서 생각해 본다는 뜻으로, 나 아닌 타자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 시대에 '역지사지'는 대부분 나의 유익(有益)을 꾀하기 위해 사용된다. 즉, '너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볼게'로서의 역지사지가 아니라 '나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봐'의 역지사지인 셈이다. 혹 '너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 하더라도, 그것은 상대방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관계에 있어서 보다 나은 위치를 선점하기 위한 것이다.

이른바 역지사지의 전용(轉用)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결국 사회는 '관계'의 총집합인 셈이다. 그 수많은 관계들 속에서 갈등과 반목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관건은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라 발생한 문제에 대한 해결이다. 원만한 해결을 위해서, 또는 더 넓은 지평(地平)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역지사지'는 필수적인 과정이다. 너무도 뻔한 이야기,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이지만, 우리는 결국 '역지사지'에 실패한다. 그 까닭은 '역지사지'를 나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나의 유익을 도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는 나'만'의 유익은 관계를 망가뜨리기 십상이다. 바둑을 수담(手談)이라고도 한다. 내가 놓은 한 수 한 수는 곧 내 뜻이고 말이 된다. 한 판의 바둑엔 수많은 대화가 있고, 갈등이 있다. 시비가 생기고, 화해와 양보가 있다. 이기기 위해 목청을 높이는 수도 있고, 엄살을 부리는 수도 있다. 이기기 위해서 … 승리하기 위해선,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내 말만 해서는 바둑을 이길 수 없다. 타인을 이해한다. 타자를 이해한다. 우리말로 하면 역지사지, 바꿔서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한다는 건데, 기본적으로 타자를 긍정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내가 나의 울타리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울타리를 열어서 타인을 받아들이거나 내가 나를 버리고 타인의 울타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타인을 받아들이거나 타인의 울타리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우선 나의 울타리를 열어야만 한다. 내 울타리를 꽉 닫아둔 채로는 그 어떤 소통도 이뤄질 수 없다. 나의 생각만 옳다고 생각하는 좁은 사고방식, 상대방의 처지·입장·관점·시각을 비난하거나 틀렸다고 지적하는 태도는 또 다른 갈등을 야기하고 만다.

이와 같은 시행착오는 늘 내가 겪어오는 것이기도 하다. 조선족들을 배척하고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국인들을 나는 원망하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한번 커피숍에서 한 작가와의 만남은 알량한 나의 역지사지를 뒤돌아보게 했다. 울타리의 문을 꼭 닫아놓은 채, 입으로만 역지사지를 떠든 것은 아니었는지 말이다. ‘저는 중국의 조선족들이 우리와 같을 것이라는 생각을 막연하게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직접 조선족들과 대면하고 보니 문화도 다르고 억양도 다르고 역사에 대한 지식마저 다른 것에 대해 깜짝 놀랐어요. 그리고 내심 당황하기도 하고 어떻게 조선족들을 대해야 할지 망설여지기도 했어요. 물론 지금은 많이 이해하고 있지만.’ 하지만 나는 한국인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만 생각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우리가 자신들과 다름에 대해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에 심히 부끄러웠다. 한국에 와서 동창만회에 참여한 적 있다.

동창들 속에는 내가 꼭 만나고 싶은 남자가 있었다. 중학교 2학년 학기 때 다른 한 반급과 같이 농촌에 내려가 모내기를 지원했는데 두 남학생이 몰래 담배를 피워서 비판대회를 하게 됐다. ‘모모야, 들어라 너희들이 담배를 피우는 것은 자본주의 길로 나아가는 싹을 키우는 것이다.’ 그때 반급의 간부였던 나는 첫 사람으로 일어나서 그들한테 질책을 퍼부었다. 그 후부터 그 남학생은 나만 보면 쫓아 오군 하는 바람에 그는 나의 공포대상이었다.

35년 만에 나는 진심으로 되는 사과를 전했다. ‘남자들이 뭐 그까짓 일을 기억한다고 그래. 친구여석이 하도 네가 좋다고 해서 다리 좀 놓아 주려고 했는데 이건 뭐 나를 보기만 하면 똥파리 피하듯 하니 별 수 있니?’ 아이러니한 그 동창생의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나의 울타리를 연다는 것은 결국 상대방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인다는 것이다. '내 말만 해선 이길 수 없다'는 말은 바둑뿐만 아니라 삶에서도 적용되는 진리다.

우리는 잘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듣는 사람’보다 ‘말하는 사람’이 훨씬 많은 현대사회에서 차분히 상대에게 귀를 기울여 듣는 것이 위대한 소통의 지혜이다. ‘들을 수 없는 병’에 걸린 현대인들은 상대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해 본다면 공감과 상생을 통해 상대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공격(반격)의 기회를 잡기 위한 듣기보다는 상대방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위한 '듣기'가 이뤄질 때, 사람과 사람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도 조금씩 따뜻해질 것이다.

오늘 우리 자신들에게 이렇게 물어보자. '나의 울타리는 열려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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