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화순: 중국 심양 소가툰 출생. kbs방송국에 수필 다수 발표, 우수상과 장려상 여러 번 수상, 특집에도 당선.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서울=동북아신문]사월이라 여기저기서 봄꽃소식이 막 들려오고 동내의 앞뜰에도 연록색의 어린 나뭇잎에서부터 싱그러움이 가득하다. 곱게 핀 꽃들을 산책도 할 겸 손가방에 준비물을 넣고 있는데 간지러운 휴대폰 벨소리가 울린다.

 몇 개월 전에 중국에 일보러 가셨던 시가의 큰형님이 두 시간 전에 비행기에서 내려 방금 큰딸 집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서로 보고 싶었던 심정이라 마침 내일 휴일 날이 정해져 있어서 당장 우리 집으로 형님을 초대하기로 하였다.  

형님은 크지 않은 체구에 마음씨 착하고 너그럽고 부지런한 분이였다. 나와 남편이 약혼을 하였을 때는 시가의 양친부모는 이미 이세상과 하직을 하셨고 남편은 부모 없이 큰형, 큰형수와 한 지붕아래서 같이 생활을 하였다. 시가의 형제는 4남 2녀로 여섯 남매로써 남편은 막내 출신 이였다. 형님은 자매 넷을 둔 부모로써 그때의 어려운 경제난을 극복하면서 우리의 결혼을 치러주셨다.  

시집살이란 전혀 모르는 저를 항상 너그러운 마음으로 가르쳐주셨고 일거일동 부족한 저를 웃는 얼굴로 도와준 일 이루다 말 할 수 없다. 더욱 잊지 못할 것은 내가임신을 하였을 때 아무것도 먹지 못할 때 없는 시간을 짜 내여 남새밭에 야들야들한 시금치를 가꿔서 떡을 만들어서 입맛을 돋우게 해주셨고 없는 돈을 모아서 귀한 과일을 사서 나의 입맛을 정상으로 돌아오게 해주셨다. 그 뿐만 아니라 내가 해산을 했을 때 궂고 힘든 일을 내 손으로 할 때까지 보살펴 주셨다. 마치 친정어머니처럼.  

유기농 농산품이 없는 시내의 생활을 하고 있을 때 고추장이며 된장, 콩나물, 깨끗하고 먹음직한 고춧가루, 여러 가지 다종다양한 마른 채소 등등, 하나라도 더 챙겨서 든든하지도 못한 그 신체로 짊어지고 차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우리 집으로 오시는 형님, 내가 부족한걸 아시면 꼭 채워 주시려고 하고 디딤돌을 고여 주시려고 하시는 형님이 시간 여유만 있으면 영사막같이 떠오르는 것을 억제하지 못해 휴대폰 다이얼을 눌러 보군 한다. 

형님이 시가에 갓 들어 설 때가 겨우 열아홉 살이었고 저의 남편은 겨우 일곱 살이었다. 생산대에서나 부근마을에 영화나 극을 보러 갈 때면 시동생을 업고 같이 갔고 시동생은 항상 형수님을 졸졸 따라 다녔다고한다. 시집살이에서 재미난 일도 우스운 일도 많았고 힘들고 지친 일도 많았다고 한다.  

매일 세끼 아홉 식구의 밥상을 차려야 했고 밑에 시동생시누이 시집장가 다 보내고 나니 아버님 병시중 들어야 했다. 아버님이 세상을 뜨기가 바빠서 어머님이 병으로 누우셨다. 물마를 사이 없는 형님의 거칠은 두 손으로 이물질이 많이 묻은 어머님의 이불을 깨끗이 빨아서 바늘로 한뜸한뜸 꾸며냈고 동서들이 옆에 있었어도 소대변 시중은 항상 자기가 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느끼는 형님이셨다. 

몇 년 몇 개월을 하루같이 시중들고 보살피고 지극정성이 담뿍 들어있는 선한 마음으로 어머님을 하늘나라로 보내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없는 살림을 다 모아서 마지막 시동생 혼례도 치르고 나서 허리 좀 펴고 살려니까 큰 아주버님이 당뇨병으로 인해 합병증까지 걸려서 고생하시는 남편을 시중하느라고 온갖 고난 다 겪었다. 남편과 영영 이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국바람이 불어 딸이 한국으로 가면서 외손녀를 받아 키워야 했다. 연세가 많음에도 농사까지 지으면서 거리가 8 리나 되는 조선족학교에 외손녀를 자전거로 교정까지 데려다주고 데려 오군 하셨다. 손녀딸의 공부 뒤 바라지가 끝났다싶으니 형님은 한국에 와서 간병 일까지 하면서 돈을 벌었다. “더 늙어서 못 움직일 때 자녀들 한데 손 안 내밀기 위해서”라면서. 

얼굴에 주름살은 그렇고 연세 칠십 중반이라 허리 다리가 원모양은 어디로 가고 보기가 너무 흉하게 구부려졌다. 환자들과 보호자들은 “간병 하는 것보다 도리어 간병 받아야겠다.”면서 도리머리를 젓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사람들의 비웃음속에서도 아랑곳할 수가 없는 형님은 힘든 환자일수록 배의 정성을 다 쏟아 부었기에 젊은 사람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잘 해내셨다. 오리지 않아서 그의 지극정성은 환자들과 보호자들의 믿음과 신입을 얻게 되었다. 병원의 원장은 자기의 어머님을 형님께 친히 맡기셨고 그의 일이 끝난 후에는 또 자기의 부친까지 부탁드렸다. 병원 벽보에도 형님의 사진과 표창사적이 실렸고 신문에까지 실리기도 하였다. 

한평생 가시밭길 헤쳐 가며 살아오신 그는 아직 좋은 생이 얼마나 남이 있을지 누구도 알 수 없는 미지수이지만 그가 잡고 있는 줄행랑은 아직까지도 놓지 않고 있다. 한평생의 일편단심 지극정성과 보람 있는 그의 삶은 우리 부부와의 보답으로 바뀌는 것 같기도 싶다. 

남은 인생은 꼭 우리와 함께 같이 쉬면서 항상 건강 챙기면서 매일매일 행복하기를 축복하고 싶다. 늘 그이를 친부모와 같이 생각하는 존경하는 형님으로 모셔보려고. 아직도 늦지 않은 지금 우리부부는 앞으로의 멋진 환상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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