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측에서는 민족 정체성을 강화한다고 하지만 새로운 신분을 발명한다고 해야 맞다.”

 

문장 / 차오란(曹然)

 

2017년 1월 중순, 세르비아 남부 평원에 큰 눈이 휘날리고 있다. 작은 마을과 도로는 전부 눈에 뒤덮여 있다. 이 땅은 마치 500년 전 터키인들이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인적이 드물었다.

마케도니아 공화국의 수도 스코페로 가는 고속 버스에 고향으로 되돌아 오는 마케도니아인들 외에 친척 방문을 온 세르비아 소수민족 후손들- 알바니아인이다.

“좌석을 조절해도 되나요?” 알바니아인 소녀가 유창한 세르비아 언어로 물었다.

푸레쎄워(普列谢沃) 세관에 입경 한 후, 마케도니아 경찰은 모든 사람들의 증명서를 받았으며, 유독 나만을 차에서 내리라고 하였다.“단기 비자는 마케도니아에 입국할 수 없습니다.”그는 진지하게 말하였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마케도니아 외교부의 정보에 근거하여, 나의 신분증은 완전히 입국 요건에 부합된다.。그는 또 나를 사무실로 데리고 가서 두 동료와 토론 하였으며 컴퓨터에서 관련 정책을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한 여성 경찰관은“5년만 비자를 받으면 마케도니아에 입국할 수 있다. 당신은 그리스에 갑니까? 이런 상황은 반드시 중계 비자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지 말고 세르비아로 돌아가세요?”라고 했다. 이런 규정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에게 전화를 걸어 상급 기관에 문의할 것을 건의했다.

두 경찰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면서 말했다.“당신 몸에 돈이 있습니까? 50유로이면 됩니다. 탁자 밑에 놓으세요. 여기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요. 밖에 나가지 말하면 안돼요. 당신은 그냥 여행을 하러 온 거지요”

버스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분노했다. 한 유럽 연합에 속해있는 나라에서 이러한 날치기가 발생할 것이라고 믿을 수 없었다.

사실 마케도니아에 오는 것이 처음이 아니었다. 2011년 런던에서 마케도니아 비자를 신청할 때 왕복 항공권을 요구하지만 나는 마케도니아에서 차를 타고 코소보에 가서 몇 달간 일을 해야 했기에 돌아오는 비행기 표가 없었다.“당신은 어떻게 마케도니아를 떠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나요?” 그리고는 비자 신청을 거부하는 바람에 런던에서 마케도니아까지의 항공권을 낭비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스코페는 유럽에서 가장 저속한 수도라는 독보적인 칭호를 얻었다.

시 중심 광장에 들어서자 기이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중심에 위치 한 곳에 하늘 높이 솟아 있는 용맹한 용사의 형상이다. 높이가 22미터 되고 아래에 커다란 받침대와 부조가 있다. 이 용사 형상의 이름은 “말 위의 무사”이다. 그러나 다들 이건 사실 알렉산더 대제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고대 마케도니아 국왕 세계의 정복자이다. 알렉산더 조각상 주위에 참신한 새로 지은 고전 풍격을 갖춘 건축물이 있었다. 19세기의 원시 건축물들은 이미 1960년대 대지진에 의해 파괴되었다. 여기 새로 지은 건물들은 법원과 외교부 청사, 고고 박물관, 호텔, 쇼핑몰, 파리 개선문을 모방해 지은 건물 등이 있는데 대부분이 유백색 페인트로 되여 있고 대리석의 질감을 모방 하였지만 조금씩 나타나는 갈라진 흔적과 페인트가 벗겨진 외벽에는 내부의 시멘트가 노출되어 있다. 집권당인 마케도니아 민주당 본부 건물은 알렉산더 조각상 오른 편에 위치해 있었고 부지 면적은 1200㎡이고 건설비는 6000만 유로로 금색의 장식과 알록달록한 유리로 이 건물은 광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 중 하나이다.

관심 밖으로 밀려난 조각상이 더 있다. 역사적 인물, 보통 시민, 형상적 혹은 추상적인 형형색색의 다채로운 조각상들이 전체 광장에 가득 차있어 이런 조각상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70석이라고 한다.

바르다르강 위에 오스만 시대의 석교를 사이 두고 알렉산더와 강 건너 편에 아버지 필립 국왕이 서로 바라보고 있다. 필립 국왕의 주변에도 크고 작은 조각상들이 둘러싸고 있다. 사실주의 청동 작가 조각상이 사회주의의 유풍을 가지고 있는 하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조각상 옆에 바짝 붙어 있다. 초라한 분수 주위에 커다란 고대 그리스 차림의 모자상이 둘러앉아 있다. 바르다르강 위에 “예술교”와 “문명교”에 조잡한 옛 인물 조각 상들이 가지런히 줄지어 강 맞은편에 있는 외교부 청사에까지 뻗어 나갔다. 그곳에는 적어도 20개의 조각상이 더 있다.한마디로 말하면 공자와 처칠이 어렴풋이 당신을 향해 손짓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2010년, 전임 총리 거루이브스키(Nikola GRUEVSKI)가 출마를 선언했을 때 “스코페2014”건설 항목을 발표 한 적 있다. “새로운 신 고전주의 풍격으로 유럽 도시를 재 건설하여 마케도니아 민족 특색을 살리자” 라는 구호로 관광업의 발전을 추진하는데 목적이 있다. 1993년 유고슬라비아 독립 이래 정체성 논란이 마케도니아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그들은 누구 인가? 백 만 명의 인구를 가진 유고슬로비아인은 오랜 세월 동안 오스만, 터키,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와 그리스의 지배하에 생활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야 유고슬라비아 연맹 중 처음으로 마케도니아라는 국가가 나타났다.

서구 진영에 수용되고 하루 빨리 EU에 가입하기 위해 공식 선포한 '마케도니아 공화국'은 유럽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스코페에서 유럽 풍격의 시 중심은 부근의 터키 식의 구시가 지역보다 더 눈에 띤다. 하얀 클린스 기둥은 오스만 시대의 나무 재질로 된 옥상과 이슬람교식 뾰족탑보다 낫다. 넓은 길을 좁은 굽은 자갈길을 잊게 한다. 이 점들은 마케도니아인들이 방향을 찾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우리도 이것(조각상과 건축물)들을 좋아하지 않아요. 정부가 이 물건들을 지으면서 자금 세탁을 하는데 우리도 어쩔 수 없어요.” 곧 북경에서 중문 문학 박사 학위를 받게 된 펑하이청(冯海诚)은 스코페 본토인이다. 그는 이런 현상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들은 이런 바르코와 신고전주의 건축물들은 스코페 역사상에 존재한 적 없는 것이라고 한다. 알렉산더 대제와 필립 국왕도 현대 마케도니아인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들은 자기들의 역사를 9세기 비잔티움 통치 시기의 슬라브족의 키릴 문자를 발명한 동정교 성인 키릴로스와 매토디 형제로 프라이드를 느낀다. 지금 정부에서 민족 정체성을 강화한다고 하지만 새로운 신분을 발명한다고 해야 맞다.

그러나 집권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독립한 지 20년 되는 지금, 필립 국왕 상 맞은편에 새롭게 지은 “마케도니아가 외적과의 전쟁 관련 박물관”이 있다. 이것은 아마도 발칸 지역에서 유일하게 공식 안내원이 동행 및 사진을 찍을 수도 없는 박물관일 것 이다. 티켓 구매 시 해설원은 전체 참관 시간이 한 시간 반 정도 걸린다고 통보한다. 안내원은 몇 명의 외국인 관광객들과 동행하면서 마케도니아 민족 영웅의 밀랍 인형을 참관 시켰고 “대 마케도니아 지역”의 지도를 보여 주었다. 이 지역은 오늘의 알바니아와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고 그리스의 일부분이 포함된다. 나는 왜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이웃 나라와의 분쟁을 피하려면 문을 닫고 전시하는 편이 비교적 나을 것 이다. 만일 해설원의 해설 과정이 없다면 여행객들은 “정확한 마케도니아 역사”를 알 수 있을까? 두 시간 동안 우리는 격동된 어조로 각 나라들에서 마케도니아를 분열시키고 국민들을 억압했던 죄를 고소하는 하소연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1993년부터 독립된 마케도니아와 이웃 나라 그리스는 오랜 세월 계속된 '명칭 싸움'을 벌였으나, 오늘까지도 해결되지 않았다. 이것도 마케도니아가 유럽 연맹에 가입한 것에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은 이유이다. 그리스는 마케도니아가 처한 위치가 마케도니아라는 지리적 영역의 일부분이고 “북 마케도니아”이기 때문에 마케도니아라고 호칭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스는 또 이웃 나라에서 점유한 마케도니아 기타 영토를 요구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스 북부 테살로니키 일대도 마케도니아 지역으로 추정되는 마케도니아 공화국이지만 이는 일종의 지리적 개념이다.

“마케도니아는 본래 지리적 개념이기 때문에 민족 개념 등과 동일시되는 것은 잘못된 관점이다.” 펑하이청은 이렇게 말했다. “이로‘대 마케니아 국가’를 건립한다고 호소하는 것은 도리가 없는 말입니다.” 그가 보기에는 마케니아 민족의 기초는 매우 모호하다. 마케도니아어와 볼가리아어는 사실 동일한 언어이다.“모두 인정하지 안을 뿐이지요” 1940년대에 그의 구세대들은 그리스에 살았다. 내전 중 공산당을 지지하여 마케도니아(그때는 유고슬로비아의 한 개 공화국)와 볼가리아로 망명하였다. 그때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자주 쓰는 말은 “슬라브 그리스인” 혹은 “마케도니아 지역의 볼가리아인”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아직도 소수의 슬라브인들은 그리스에서 생활하고 슬라브 언어를 사용한다. 그들은 “로컬 사람”이라고 자칭하고 어떠한 민족적 정체성도 거부한다. 이 지역에서 민족의 형성은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보다 훨씬 늦다. 발칸 전쟁 학자 마크 저커버그 20세기 초 자료에 이렇게 썼다.마케도니아 공화국과 세르비아의 국경에서 한 영국인 여행자는 한 소년에게 세르비아인, 불가리아인, 그리스인 중에 어느 민족인지를 물었다. 그러자 소년은 멍하게 그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기독교인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박물관은 “스코페 2014”의 핵심 항목이다. 항목 최초 예산은 8000만 유로였는데 폭풍 상승하여 7억 유로를 사용했다. 거대한 알렉산더 조각상만 900만 유로를 사용했다. 정부는 건축 디자이너의 견적에 의해 지불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들은 성실하다. 불황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지속적으로 건설을 완수했다. 그렇게 2011년에만 7억 유로의 빚을 졌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일반 국민들의 주머니를 털어 내야 한다.

 

펑하이청 부부는 나를 데리고 바르다르강에 새로 심은 3그루 나무를 보러 갔다. 강 중앙에 세 개의 화단이 있는데 각각 “신”(信), “망”(望), “애”(?)라고 씌어져 있다. 화단 내에는 3그루의 작은 버드나무가 있었다. “아무도 이런 아이디어는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30만 유로를 썼다고 하는데 가능한 일인가?”

그들은 나에게 몇 년 전 사진을 보여 주었다. 그때 스코페는 전형적인 사회주의 수도의 모양이었다. 반듯하고 깨끗한 중심 광장에는 이해할 수 없는 장식품들이 없었고 강가에는 녹색 잔디만 있었다. 평범하지만 정상적이었다.

전임 총리는 이런 도시가 외국인 관광객에게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현재 그의 계획은 효과를 보기 시작한다. 관광객들은 '수도'가 얼마나 독특한 지를 궁금해 한다. 다행히 이 웅장한 공사는 구시가지에 까지 만연되어 있지 않다. 구시가지에서 반짝이는'마케도니아 민족 정체성'은 자리가 없다. 오스만 제국의 유물, 부패한 동방 문화, 알바니아인과 터키인들의 어두운 구석 만 존재한다.

2001년 알바니아 민족과 마케도니아의 충돌은 자칫하면 이 나라를 내전으로 비화시킬 뻔하였다

구 도시의 길거리에서 불고기를 굽는 연기가 낮은 처마 아래에 감돌고 있고 금은방의 창가에는 과장된 장신구들이 진열되어 있다. 터키 후식 가게의 아몬드 과자, 크림 치즈 케이크와 버터케이크는 풍요로운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이것은 18세기 혹은 19세기에서 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오늘의 광경은 그저 전등 만 더 있을 뿐이다.

여기서부터 시내로 걸으면 이슬람교 사원과 옛 시장 장로 및 향기가 넘치는 커피숍을 지나면 이 도시에서 가장 빛나는 캐롤라이나 성에 도착한다. 이곳은 스코페가 탄생한 곳으로 인류 활동 흔적은 청동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기원 6세기부터 오스만 제국의 붕괴까지 성곽이 축조되어 무수하게 복구되었다. 수많은 민족과 무수한 문화가 이 땅에서 서식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민족과 문화가 있는 반면 중도에 자취를 감추어 버린 민족과 문화도 있다. 이곳은 스코페를 내려다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다. 중심 광장은 바둑판 모양과 같고 여기 저기 널려 있는 조각상들은 싼 가격의 플라스틱 바둑알처럼 그 속에 장식되어 있다. 이에 비해 외곽에 둘러싸인 사회주의 시기의 암울한 건축물이 더욱 품위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구시가지는 어두운 그림자 속에 숨어 있는 이 초현실주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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