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속의 중국

 "대학 때 중국 국립극단이 공연한 연극 크루서블(The Crucible, 薩勒姆的女巫)을 보면서, 아마도, 이것이 문화대혁명이었을 꺼야...." 이번 호에는 정련의 기억 속의, 문화대혁명의 일들을 더듬어보자.   

 정련 칼럼니스트
  [서울=동북아신문] 대학 때 중국 국립극단이 공연한 연극 크루서블(The Crucible, 薩勒姆的女巫)을 보면서, 아마도, 이것이 문화대혁명이었을 꺼야, 라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를 마녀라고 적발하지 않으면, 내가 마녀라고 잡혀버리는 그런 세상.

  그 중에 우리 학교 학생들에게 기립박수를 받은 명대사가 있었다.

  “上帝啊,你死了吗?”

  “하느님이여, 당신은 죽었는가? “

 

  내가 겪어보지 못한 문화대혁명이라고 이름지어 부르는 10년의 시간은, 드라마나 소설을 통하여 크게 부각되었던 것이 세가지 모습이 있다. 

 

  첫째, 도시청년들의 농촌 생산활동 체험을 위한 무작정 농촌 투입;

  두번째, 학교의 대 반란. 학생이 선생님 목에 비판 팻말을 걸고, 후진 유교사상을 숙청하기 위한 사상해방운동을 표방한 선생님들에 대한 무차별 공격과 횡포;

  세번째, 마녀사냥. 지주와 자본주의를 숙청한다는 구호를 만들어 족보를 씨의 끝까지 들춰내는 철저한 고발과 괴롭힘.

  물론, 이를 꿰맨 실처럼 개인 숭배를 만들어 절대 정의와 신의 절대 가치 같은 정서를 만들어 냈다.

 

  통신이 발달하지 못한 과거에, 넓은 땅에서 도시청년의 무더기 “하향”(도시청년들의 농촌 강제 이주)이 이산가족과 막장드라마 같은 복잡한 혈연관계와 여러 인생의 역전들을 만들어냈다. 중국에서는 상당히 많은 드라마와 소설이 이 10년의 시기 또는 이 10년의 시기 때문에 만들어진 가족 등 여러가지 이야기를 다룬다.

 

  지금의 중국 역사는 그 문화대혁명의 시기를 “10년 동란”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10년 동란”이기에 모든 것이 용서되고 모든 것이 덮이고 모든 것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으로 되어 버렸다.

 

  내가 좋아하는 위화 작가의 “인생”이라는 소설이 있다. 궁리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한 평범한 중국 도시 주민의 수십년의 생활상을 그린 책이다. 장예모가 연출한 작품으로 칸에서 상까지 받았지만 중국 내에서는 방송 심의를 통과하지 못한 금지 영화 였다.

  “인생”이라는 소설에서 문화대혁명의 모습이 짧게 묘사된다. 학교들에서는 선생님들을 투옥 시키고, 때리고 괴롭히고 병원에서마저도 교수님들을 괴롭혀 감금 시킨다. 그리고 굶긴다. 마침 이때 주인공의 딸이 아이를 낳게 된다. 병원에는 레지던트들만 득실거렸는데 어떻게든 아이는 받았으나 산후 출혈이 멈추지 않아 경험 없는 이 아이들이 당황하며 어쩔 줄을 모른다. 산모의 생명마저 위험하게 되자, 아이들은 감옥에 찾아가 산부인과 교수님을 모셔 온다. 교수님은 너무 허기가 져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고, 주인공은 딸을 살릴 마음에 빵을 잔뜩 사서 교수님께 갖다 드린다. 너무 오랜만에 음식을 본 교수님은 미친듯이 빵을 입에 쑤셔 넣기 시작했는데, 마른 빵이 목이 메어 버린다. 너무 급히 많은 빵을 쑤셔 넣고 목이 메어 물까지 마셔버린 교수님도 뜻하지 않게 중태에 빠지게 되고, 그러는 동안 딸은 죽는다.

 

  처음 위화의 소설을 읽으면서 예리한 필법과 사회에 대한 예리한 해독에 감탄하면서도, 너무 신랄하고 부정적이고 너무 특정 사회의 모습에 집착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작품들을 더 많이 읽으면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더라도 사람들의 가장 순수한 사랑, 정의감 이런 것을 내려놓지 못하고 그런 것들로 꾸역꾸역 살아가는 “성실”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음을 느꼈다.

 

  위화의 다른 소설, “형제”에서는 문화대혁명에 대한 묘사가 조금 더 길다.

각자 아들 한명씩 있는 남녀가 재혼을 하여 훈훈하고 조용하게 같이 잘 살고 있다가 아내가 몸이 안좋아 먼 상해의 병원에서 입원을 하게 된다. 상당기간 입원 생활을 하고 있을 동안, 남편이 뻔한 마녀사냥의 모함으로 갖은 모욕과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졸지에 의붓아들의 철 없는 아들의 말 한마디 때문에 동내 창고에 감금을 당하고 구타를 당한다. 드디어 아내가 퇴원할 시간이 다 온다. 지금처럼 휴대폰이 있을 시기도 아니다 보니, 아내는 남편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도 전혀 모르고 있었고 돌아올 때 남편이 상해에 마중 올꺼라는 약속 하나만 안고 기다린다. 남편은 이 상황을 해명하고 풀려나갈 방법을 도무지 찾을 수 없는 것을 알고 있기에, 퇴원하는 아내를 마중하겠다는 약속 하나라도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창고를 탈출하여 하여 상해로 가려고 한다. 겨우 겨우 기차역까지 갔는데, 쫓아온 학생들에게 잡힌다. 학생들은 선생님이었던 주인공을 가차 없이 때리고 밟고 또 때리고 또 밟는다. 남편은 끝내 기차역 앞 모래바닥에서 쓰러져, 피와 모래 범벅이 되어 죽게 된다. 

  어린 두 아들은 엄마가 퇴원한다고, 곧 올꺼라고 기차역에 룰루랄라 마중을 나왔다가 구타를 당한 남자의 시체를 본다. 하지만 못 알아본다. 주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 속에서 아빠의 이름을 듣는다. 아이들이 달려가서 얼굴을 살펴본다. 그리고 두 아이가 무너져서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운다.

출장 중의 어느 한 주말, 내가 묵던 호텔의 스타벅스에서 이 대목을 읽다가 엉엉 울어버렸다.

 

  문화대혁명이라는 것을 나는 겪어보지 못했기에 책, 영화, 어른 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아는 것이 다다. 아마도 薩勒姆的女巫(크루서블)에서의 마녀사냥처럼, 버릴 수 밖에 없는 학업, 도시생활, 꿈, 가족, 사랑과 나의 또 다른 내면의 전쟁 인 것 같다. 언젠가 당할 것 같은 불안감, 생존을 위한 훼방과 나 스스로의 타락, 그리고 그렇게 추락시킨 사람들에 대한 밑도 끝도 없는 죄책감. 살긴 살아야 하겠는데, 이게 사람이 사는 것이 맞는건지.

 

  중요한 것은 중국사람들은 그런 시간을 겪었고 그런 아픔을 겪었다. 그것도, 너무 길었던 전쟁과 굶주림과 모욕과 비굴함을 겨우 뒤로 할까 했던 시간에 이런 것을 겪었다. 

 

  왜, 중국에 이런 시간이 찾아오고, 왜, 중국의 그 당시의 지도층은 이런 일들을 벌였는지에 대하여 참 다양한 많은 설들이 있다. 어렸을 때는 그냥, 새로운 정권이 생겼고 나라 경영에 어려운 시간을 겪으면서 “분서갱유”식의 정권 다지기가 아닐까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핸리 키신저의 “중국 이야기”를 읽게 되면서 좀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딱히 책이 계기가 되었다 기 보다, 내 나이가 한살 한살 차면서 나의 생업을 떠나 세상 돌아가는 법과 사람들이 생각하는 법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조금 더 그 때 사람들의 생각에 대한 상상을 할 사회학적 “기본”같은 것에 눈을 뜨기 시작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중국 이야기”의 문화대혁명 서막기에 대한 묘사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모택동은 정서적 믿음과 철학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어디서부터 뭘 이야기해야 할까 싶을 만큼 내 머리 속에는 지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를 정리하기 위하여서는 중국 내전 승리 전의 중국 공산당의 핵심가치와 철학부터 이해를 하여야 할 것 같다. 여담이지만 내가 중국 사법고시 공부를 경제학 전공자로서 해나갈 때 가장 어려웠던 부분이 헌법과 법철학이라는 영역이었다. 그만큼 핵심 철학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컸고 그에 대한 해석과 합리화가 위의 두 과목의 핵심 과제였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항일전쟁과 내전을 겪으면서 중국의 수억 인구를 설득하고 이끌었던 중국 공산당의 철학은, 그 어떤 종교보다 더 확고하게 이상적이고 “성선설”의 극단 가정과 시스템을 조장한 막연한 “더 나은 세상”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이었다. 세상에 “내 것”이라는 것이 없이 살아온 수많은 소작농들과 비 자발적으로 생겨난 대형 중공업 도시와 기업들의 또 “내 것”이 없이 살아온 수 많은 사람들에게 현실적인 희망이 되었을 수도 있겠고 희망고문일 수도 있었겠지만, 최소한 그 때의 “공산당”은 “선동”만을 위한 철학을 창제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진심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었을 것이라고,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바로 보고 있는 선거 공략과 선거 후의 정책과 또 그런 정책들의 효과나 현실이 모두 별개인 것 처럼, “내 것”을 한번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을 모아 나라를 만들었을 지 모르겠지만, 막상 나라가 만들어지고 나서 그 나라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경제 체제의 확립은 아주 다른 이야기였을 것이다.

 

  우리는 문화대혁명의 종말로 알고 있는 많은 사건 뒤에, 지금의 강해지는 중국을 만들어낸 사람으로 등소평을 알고 있고, 유명한 “흑묘 백묘”의 이야기를 다 알고 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하면 알게 될 것은, 등소평은 문화대혁명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경제를 성장시키고 사람들을 먹여살리는 일에 대하여 고민하게 되었을까 하는 내용이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직후 얼마 지나지 않아, “대약진”과 대규모 재해와 고립된 국내외 환경 때문에, 중국 경제는 파탄에 이르렀고 모택동은 그런 정책과 환경이 잘못된 것이라고 단 한번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의 이념과 철학으로 나라를 바꿔나갈 것을 계속 고집했다고 한다. 나는 이 또한 진정한 그의 이념이자 그의 선의의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모택동은 철학가 이자 군사가, 심지어 문학가 였을 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그는 경제학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그는 성공적인 정치가는 아니었다는 생각을 해본다.

 

  2차 산업혁명에 의하여 세상이 격변하고 있을 시기에 모택동이 진정 기존의 철학을 고집하는 “옛날 사람”이었다면, 경제가 파탄이 나고 구 쏘련에서 사회주의 철학에 대한 권위가 흔들리면서 현실적으로 중국을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법에 대하여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새로운 시도를 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등소평의 흑묘 백묘는 그 때, 심지어 그 이전에 태동을 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이것을 “당내 갈등”이라고 표현하거나 정책적인 방황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철학과 현실과 꿈꾸었던 새로운 체제에서 마저도 “내 것”이 없고 굶고 있는 사람들이 분명, “나아진 것이 아무 것도 없어”라는 생각들과 말들을 하지 않았을까.

 

  나는 “문화대혁명”이 누구의 어떤 의도로 어떤 사람이 진행을 해나가며 그 합리성을 조장했는 지에 대하여는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신 중국”이 표방한 구 공산당의 철학과 그 전의 철학의 충돌이었다면, 모든 것은 합리적이다.

  새 철학을 주장하면서 “말”을 하는 “문인”들을 시골로 내려 보내 사회 구성과 발전의 축이라고 생각하던 “기층 농민”, 바닥 서민의 생활을 체험하라고 한 것도, 그런 문화와 철학을 가르치는 스승님들을 내몰고 구태의연한 유학을 청산한다고 만들어 낸 것도 3대를 뒤져 “가진 것”이 있었던 사람들을 잡아서 괴롭힌 것도 그냥 어떤 것이 이 새 시대의 “참 것”인지에 대하여 방황하는 사람들이 그 어떤 합리적인 자신의 입지와 자존감과 “미래”를 찾아가는 행동 일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그것이 그렇게 격하고 “인도적”이지 않을 만큼 폭풍 같았던 것은 그만큼, 모두가 방황하고 불안하고 내가 누구인지 내가 갈 길은 무엇인지 나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지 몰랐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이런 것을 겪어본 적이 없다.

  내가 이해하는 인성, 인격, 따뜻함 이런 것은 지금처럼 그래도 대부분은 먹고 살만하고 대부분은 교육을 받으면서 대부분은 스스로의 가치관에 대하여 고민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사회보편적인 선과 사회 보편적인 가치관이 인정 받는 시기의 인성, 인격과 따뜻함이다. 위화 작가의 책을 처음 읽으면서 거부감이 들었던 것도 지금과 다른 그때의 그런 시대상에 대한 이해가 얄팍하기 그지없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한국에 위화의 대부분의 소설이 한글 역작으로 출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많은 동료들에게 위화의 소설을 추천하게 되었다. 그 당시의 중국의 “무식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가 아니라, 중국 사람들이 외국 사람들이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의 야만적이고 불투명하고 비 합리적인 시기를 그것도 나 스스로도 뭐가 옳은 것인지 잘 모를 법한 격변기에 겪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고, 그들은 그런 시기를 그렇게 힘겹게 살면서도 나 한몸을 야만적으로 무식하게 던져서라도 지키고자 했던 소중한 가치와 소중한 감정들이 있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10년 동란, 대부분의 작품에서 마냥 어둡고 춥고 배고프고 무서운 세상처럼 그려지는 시간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죽지 않았고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그 10년동안도 많은 행복이 있었다. 사회라는 것이, 그리고 내 주변이라는 것이, 내 마음에 안 들고, 내가 어떻게 할 수 없게 되고, 나를 힘들게만 하고, 하더라도 행복이 없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위화의 다른 소설, <<허삼관 매혈기>>에서 느낀 것이다. 

 

  허삼관이라는 사람이, 동내 얼짱이랑 결혼을 하게 되고 자기 자식이 아닌 애랑 자기 자식인 애랑 키우게 된다. 때가 문화대혁명의 시기인지라, 똑같이 사회의 격변 속에서 애들의 성장과 생활고를 겪게 된다. 허삼관이란 워낙 무식하고 순수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세상아 짖어라, 하면서 변함 없이 자신 많은 소중한 것들에 웃음을 올인하면서 살아간다. 허삼관 매혈기, 말 그대로 피를 파는 이야기이다. 무식할 만큼 진지하고 무식할 만큼 순수하게, 세상이 미쳐 날뛰고, 동내 사람들이 마누라와 아이들에게 뭐라고 하고 어떻게 하더라도 “아버지”라는 이름 하나로, 마지막 한방울의 피 마저도 팔고자 하는 그런 이야기이다.

 

  마냥 모든 것을 다 알고, 마냥 살아온 모든 사람들을 본 것처럼 역사를 해석하고 역사를 논평하며 역사 속 사람을 평가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논평하는 사람의 입장에서의 해석과 이해일 뿐이다. 그 것이 아무리 목적성이 따로 없고 순수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냥 주관 적인 평가와 이해일 뿐이다. 게다가 수많은 목적성을 가지고 예로부터의 당위성인 마냥, 역사의 필요성인 마냥 다양하게 흔하게 이용되기까지 하니 말이다.

 

  지주에게 땅을 뺏기고 딸마저 빼앗기던 소작농도 문화대혁명의 혁명을 당하던, 목에 팻말을 걸고 날아오는 계란을 머리로 받던 그때의 중국인도, 그 시간의 그의 인생의 전부인 만큼, 그 시간의 모욕과 아픔만을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동정하고 해석하고 발전시킬 만큼, 우리가 원한 그림 뿐인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목에 팻말을 걸고 길에서 “투쟁”(문화대혁명 시기에 마녀사냥 당하는 사람에게 목에 팻말을 걸고 길거리에서 모욕하고 체벌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조롱하게 하는 행동)을  받고있는 아내에서 도시락을 싸다 주는 허삼관이, 흰 밥만 있는 도시락을 보고 실망하는 아내에서 곱게 웃어 보이면서, 사실은 다른 사람들이 투쟁 당하는 년이 밥 잘 먹는다고 손가락질 할가봐, 반찬을 밑에다가 숨겼다고 한다. 그러면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얘는 죄가 많으니까, 반찬 따위는 먹이면 안되지, 암, 그렇구 말구, 한다. 그 순간 그들은 더 없이 따뜻하고 행복했을 것이다. 그리고 허삼관은 그 누구보다도 더 대단한 사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 저러한 우리가 동정하고 우리고 해석하는 시대보다, 우리는 얼마나 더 나와 있을까. 우리는 마냥 시대의 정의와 역사의 흐름을 달관한 사람들처럼 얼마나 잘난 척을 하면서 함부로 동정을 남발하고 있었던가. 우리는 허삼관 만한 사랑을 한 적이 있을까. 먹고 살기 어렵고 목숨마저 받쳐야만 그런 절절한 사랑이 검증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엿 같아도, 나도 덩달아 비참해 지더라도 순수한 “나”라는 인간이 이 세상에서 가장 바람직한 모습이, 가장 바람직한 낭만이 아닐까 싶다.

 

  문화대혁명을 10년 동란이라고 해도 좋고 비열한 정치 싸움이었다고 해도 좋고 굶어 죽는 사람들이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시대라고 해도 좋고 내가 아는 중국사람들은 그 시대를 살았고 그 시대에서도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행복했었다. 이겨내는 것이란, 그 시대를 벗어나거나, 뒤엎는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의 이해와 존중은, 건방진 동정은 아니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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