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국신문(한국어판) 동북아신문]“아버지와 이토 선생님”은 일본 가정 영화 중 제일 클래식한 상태의 영화이다. 보잘것없는 세끼, 사발과 접시 부딪침, 해가 뜨고 지고, 뒤집어 지지도 않고 극단적으로 가지도 않고 시간은 생활 속에서 유유히 흐른다.  글/양스양(杨时旸)

겉과 속이 다르다는 말로 “아버지와 이토선생님” 영화의 모든 캐릭터를 표현하는데 가장 적당한 언어이다. 아버지, 딸, 예비 사위, 아들과 며느리 등 등장인물 중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겉과 속이 다른 첫인상을 남겼다. 마지막에 모든 사람들이 또 다른 면모를 드러내 사람들의 상상과 인지, 편견을 여지없이 뒤집었다. 보기에 믿음직하고 본분을 지키고 고지식한 사람들은 모두 교활하고 속물적으로 변했고 보기에 책임감이 없고 진취적이고 못하고 껄렁껄렁한 사람은 오히려 어른스럽고 신중한 모습이었다.

“아버지와 이토 선생님”영화가 시작되어 일상적인 생활의 윤곽을 드러낸 후 생활 속의 애매 모호하고 허위로 꾸민 장식물들을 조금씩 벗겨 나가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은 생활 속에서 더 진실한 모습을 보았고 이 드라마 모든 출연자가 메이크업을 지운 뒤 얼굴을 보여주었다. 이 모양을 보고 문득 다가오는 깨달음과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은 보기에 그렇게 믿음직해 보이던 사람들은 이렇게 저질스럽고 자신이 경멸의 눈길을 보냈던 사람들은 모두 선량하다. 그러나 실망하지도 말고 의기양양해 하지도 말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생활의 진실인 것 같기 때문이다.

야마나카 아야는 자기와 20세 많은 이토와 같이 생활하였다. 이토는 한 초등학교에서 즉석 요리를 만들고 야마나카 아야는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전에 그들은 편의점에서 같이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보기에 그들은 일본 하류 사회의 대표이다. 진취적이지 못하고 책임감이 없고 미래에 대한 계획도 없고 그냥 되는대로 살아간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를 부양할 수 있고 현재의 조용한 생활을 느긋하게 받아 들인다. 아버지는 원래 아들과 며느리와 같이 생활하였지만 관계가 화목하지 않아서 갑자기 가출하여 딸 야마나카 아야의 생활에 들어 왔다. 세 사람은 호흡을 맞추기 시작하였고 때로는 말다툼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따뜻한 연기를 뿜어 내기도 하였다. 결국 예상치 못 했던 것은 아버지의 이런 난입으로 모든 사람들을 바꿔 놓았다.

“아버지와 이토선생님”은 일본 가정 영화 중 제일 클래식한 상태의 영화이다.
보잘것없는 세끼, 사발과 접시 부딪침, 해가 뜨고 지고, 뒤집어 지지도 않고 극단적으로 가지도 않고 시간은 생활 속에서 유유히 흐른다. 그러나 극적으로 풀어내는 스토리 속에서 느닷없이 생활의 본 모습이 드러나곤 한다.

아버지는 처음으로 이토를 만났을 때 어색한 분위기이었다. 예비 사위는 본인 보다  몇 살 차이 밖에 나지 않고 여위고 허약하였으며 무뚝뚝한 편이었다. 아버지가 보기에는 그는 조금 피하는 눈치이고 속이 옹졸한 사람이었기에 자신과 같이 부지런하고 성실한 인생 태도에 비추어 볼 때 딸과 예비 사위는 반드시 업신여김을 당할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생활비를 딸에게 밀어 놓으면서 조금 무리하게 딸의 생활에 억지로 끼여 들었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출현은 이외로 참조물이 되었다. 전에 야마나카 아야와 이토의 생활은 자기 만족과 폐쇄적이었다. 그들은 외부의 더욱 “주류”나아가 더욱 “향상”된 생활과 연결하고 대비하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눈은 그들의 일상 생활을 심사하는 피할 수 없는 레이더로 변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이토의 견딜 수 없는 모습과 딸의 불만 그리고 점점 시들어 가는 생활을 상상하였다. 하지만 차츰 이 커플은 대수롭지 않게 심지어는 유연히 만족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그들의 가치관이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누구의 부담거리는 아니었고 미래를 위해 필사적으로 일하고 싶지 않고 누구와 견주려고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버지를 화나게 하여 가출시킨 큰 아들은 하루 종일 양복 넥타이를 매고 며느리는 부지런한 가정주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들은 기둥과 중견의 모습이 담겨 있었지만 마음 속은 비틀어져 있었고 머리 속은 온통 계산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책임감을 연기하면서도 모든 의무를 회피했다. 며느리는 시아버지를 보면 긴장하여 구토했다. 그러나 책임감이 없어 보이는 이토는 웃음으로 노인의 모든 강경한 말투와 괴벽한 성격을 받아들였다. 그는 딸보다 훨씬 더 세심하게 노인이 뭘 원하는지 알았다. 딸은 아버지를 모시고 볼링도 치고 온천에도 다녔지만 노인은 불쾌해 하였다. 이토는 노인을 모시고 공구 가게에 가서 남자들이 좋아하는 기계 놀이를 하였고 “화초(花草)”사러도 다녀 노인을 기쁘게 하였다. 딸은 그냥 아버지를 응대만 할 뿐이다. 그러나 이토는 진심을 다했다. 그는 노인이 자신들의 생활을 파괴하지 않았다고 여긴다. 그의 눈에는 줄곧 형언할 수 없는 너그러움과 연민이 가득 차 있다.

이야기의 설정에 노인은 줄곧 비밀이 있는데 한 박스에 숨겨 두었다. 마지막으로 비밀이 밝혀 지면서 그 박스에는 단지 숟가락만 쌓여 있었다. 노인은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려고 하는데 그 숟가락은 쓸모가 없게 되었다. 낡은 집이 망가졌고 숟가락도 없어졌지만 노인은 오히려 활달해 졌다.

곰곰히 생각해 보니 한집 식구가 한자리에 모여 앉는 꿈은 진짜 실현할 수 없는 것일까? 그는 이토와 딸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거의 꿈에 가까웠다고 생각한다. 적당한 간장을 넣은 돈가스에 옆에는 냉동 맥주 한 캔, 자신이 앉을 의자 하나, 익숙한 자리, 따뜻한 온기, 몇 마디의 잡담 그는 이것으로 만족한다.

아버지는 결국 양로원에 가기로 했다. 그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이 주는 안정감이 필요 없었고 딸은 책임감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노인과 이토가 산 그 작은 나무처럼 모든 것은 변한다. 그 나무도 언젠가는 자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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