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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中國新聞月刊
홍콩 반환 20년, “수퍼 연락책”의 역할로 전환하다
[편집]본지 기자  |  pys04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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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8.13  11: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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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신문한국어판=동북아신문] “일국양제-한 나라 두 가지 제도”가 존재하는 한 홍콩은 우세가 있습니다. 본 잡지 기자/민제(闵杰)

홍콩 융허실업(永和实业)회사 린지옌펑(林健锋) 회장은 1997년 6월 30일 홍콩에 큰 비가 내린 날의 광경을 정확히 기억한다.
십 여 시간만 더 지나면 홍콩에 주둔해 있던 영국정부가 156년간 통치했던 땅을 떠나게 되며 새로운 역사의 장이 열리게 되는 시점이었다.
태평 신사(太平绅士) 린지옌펑이 연이어 몇가지 활동을 마치고 보니 옷이 모두 비에 흠뻑 젖었다. 시간이 촉박해서 집에 돌아가 옷을 갈아 입을 시간도 없었던지라 그는 바로 정권교대식 현장으로 향했다
 “온몸이 비에 흠뻑 젖어 불편했죠” 당시의 상황을 상기하며 린지옌펑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 어색한 에피소드도 그가 이 방대한 광경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순간에 대한 자랑스러움을 가릴 수 없었다. 영국 국기가 내려지고 중국 국기가 게양된 순간 너무 격동되었다. 그는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잊어 버릴 수 없습니다”고 했다.
20년 뒤에 재계 대표로 일했던 린지옌펑은 홍콩 입법회 의원이 되었다. 그는 인터뷰가 있던 이날 오전 홍콩 특별행정부 량전잉(梁振英) 행정장관과 걸프지역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저는 행정장관님과 이런 대화를 나눴습니다. 우리는 주강삼각주 지역에서 30여 년 간 발전을 모색했습니다. CEPA(내륙 지역과 홍콩 사이에 포괄적 경제 동반자 관계를 형성할 데 관한 결정)를 맺은지 10여년이 지났고 중앙 정부가 홍콩에 많은 정책들을 줬지만 아직까지 써먹지 못한 정책들이 많습니다. 이 부분이 제일 큰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린지옌펑은 '중국 뉴스 위크'와의 인터뷰에서 홍콩이 내륙지역과 융합되어 발전하고 있는데 “대문은 열렸지만 작은 문을 열지 않은 격”인 문제가 포편적이라고 말했다.

교제하면 평안해지고 교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홍콩 상업계에서 린지옌펑은 유명한 장난감 업체의 선구자였고 대표적인 홍콩 비즈니스 맨의 전형적인 성공 경로를 걸어 온 사람이다. 그는 1970년대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홍콩으로 돌아와 가업을 이어 받았다.
1979년에는 상업적인 감각이 뛰어났던 린지옌펑은 이미 양안 변화의 기운을 느끼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직도 눈치를 살피며 망설이는 사이에 과감하게 광동 둥관(东莞)에 투자해 공장을 세웠고 처음으로 “꽃게를 먹은” 홍콩 상인이 되었다.
홍콩 경제는 1970년대에 경공업 발전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시기를 경험했다. 80년대 들어서서 홍콩의 본토 가공 제조업은 홍콩의 발전과 상승으로 인해 외부로 공장을 옮기기 시작했고 지리적, 문화적인 이유로 주강삼각주 지역은 최초로 홍콩 공장들이 자리를 잡은 지역이 되었다.
1950년대 초부터 1970년대 말까지 여러가지 원인으로 광둥성에는 몇 차례 홍콩지역으로 이주하는 바람이 불었다. 2014년에 방영된 드라마 ‘역사의 전환 속의 덩 샤오핑(鄧小平•등소평)’은 그동안 숱한 해묵은 '홍콩으로의 도망'에 대한 빙산의 일각을 보여준 드라마이다. 1977년 11월, 정치무대에 복귀한 덩샤오핑은 광둥성을 첫 시찰지역으로 정했고 이곳을 찾았다. 광둥성의 주요 지도자들이 덩샤오핑에게 상황을 보고할 때 ‘홍콩으로의 도망’을 중요한 내용 중 하나로 다루었다. 보고를 받은 뒤 덩 샤오핑은 “홍콩으로의 도망은 주로 생활고 때문입니다. 차이가 너무 큽니다”라고 말했다.
 ‘홍콩으로의 도망’은 끊임없이 발생했고 막을 수 없었다. 최고 위치에 있는 지도자들은 홍콩으로 건너가는 사람들에 대해 ‘막는 것’만이 방법이 아니며 그들을 ‘인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개혁 개방을 유도하는 방법으로 경제를 발전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1980년 경제 특구가 ‘홍콩으로의 도망’이 가장 심각한 선전(深圳)에서 가장 먼저 건설되었다.
홍콩으로 이민 간 광둥 사람들은 홍콩에 정착한 후 첫번째는 '금의환향'을 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고향에 돌아가 공장을 세우려는 결심을 했다.
이들은 홍콩 친척들을 앞세워 ‘삼래일보’(三来一补, 중국이 외자를 유치하는 네 가지 방식, ‘3래’는 원자재를 수입하여 가공하는 것, 건본을 수입하여 가공하는 것, 부품을 수입하여 조립하는 것이며 ‘일보’는 물건, 설비, 기술 등을 외상으로 수입해온 후 생산된 상품으로 상환하는 보상무역을 가리킴)형 기업을 선전과 둥관(东莞)에 들여왔으며 나중에 주강삼각주의 유명한 ‘전점후장’(前店后厂) 즉 홍콩에서 물건을 받아 광둥에서 생산하는 산업 형식을 형성하였다.
이는 두 곳의 합작이 이루어진 ‘허니문’이라고 표현할 수 있으며 홍콩 자본이 투입된 완구, 신발, 방직 등 ‘원자재 공급 및 제품판매를 국외에서 하는’ 기업들이 공장을 선전과 동관에 지었다. 많은 홍콩 상인들은 그 당시 홍콩에서 동관까지 다섯 시간 걸렸고 오가는 도로도 안좋았지만 투자를 원하는 홍콩 상인들이 끊이지 않았으며 시장의 주문이 밀려들어 이익을 낼 수 있는 공간이 커 많은 업종의 이윤이 35%나 되었고 경쟁상대도 별로 많지 않아 호황을 이루었다고 회상했다
이 시기에 도대체 얼마 동안 홍콩 상인들이 내륙으로 건너와 공장을 건설했는지 자세한 수치는 고증하기 어렵다. 참조할 수 있는 것은 2002년까지 ‘전점후장’(前店后厂)' 모델이 쇠퇴해지면서 홍콩 공업 총회는 홍콩공업대학과 연합해 시장조사를 펼쳤는데 홍콩 본토의 10만개 무역 회사 중 6만 개 정도의 회사가 주강삼각주 지역에 투자해 공장을 세웠으며 1000만 명 이상의 사람을 고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1980년대 심천과 홍콩 사이의 합작은 아주 효율적이었습니다. 두 지역의 경제 발전 격차를 잘 활용해 양측의 합작 방식을 잘 찾아내 우세를 차지하는 업종 특히 제조업의 발전이 잘 되었기 때문입니다” 선전시위 당교 탄강(谭刚) 부교장은 오랜 시간 동안 지역 경제와 심천 홍콩 합작 문제에 대해 연구를 해왔다. 그는 선전과 홍콩 사이의 합작을 4단계로 나눠 설명했다. 1단계는 특구에 홍콩에서 지속적으로 와서 투자를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는 것인데 정부에서 모든 것을 컨트롤 하는 것이 아닌 민간과 기업이 주체가 되어 추진하는 방식으로 ‘3래1보’의 형식을 띤 제조업을 중점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으로 홍콩의 제조업을 내륙지역으로 이동시켜 선전에서 가공 무역 생산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 단계는 선전에서 홍콩을 벤치마킹하고 자신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홍콩을 쫓아가는 과정을 거쳐 확실한 효과를 거두는 것이었습니다."
홍콩 자체도 지난 세기 몇 차례 빠른 속도로 변신하였다. 1841년부터 지금까지 홍콩은 세 차례의 산업 변환을 경험했다. 1차 변화는 19세기 50년대 초에 시작돼 홍콩을 하나의 어촌 마을에서 중요한 무역 도시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두번째는 20세기 50년대부터 80년대 초까지 중계 무역 위주였던 자유항에서 제품 수출 위주로의 자유항으로 바꾼 것이다. 1980년대 초 홍콩의 발전이 최고봉에 도달했을 때 제조업은 홍콩 GDP의 23%를 차지했고 홍콩 근로자의 41%를 차지했다. 세번째는 1980년대 초부터 홍콩 제조 업체들이 잇달아 북상해 공장을 내륙지역으로 옮기면서 시작되었는데 홍콩은 국제 금융 허브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중국의 고속 성장 경제 체제를 등에 업은 유일한 ‘파이프’ 도시로서의 홍콩은 금융업이 대규모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자본 시장은 전대 미문의 호황을 누리며 인구가 급격히 팽창하여 상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홍콩의 1인당 국내 총생산(GDP)은 1994년 기준으로 22497달러에 달해 아시아의 최고수준이었고 전 세계에서 가장 큰 화물량 컨테이너를 보유한 항만이자 전 세계에서 세번째로 큰 항만으로 꼽혔다. 홍콩은 세계 3대 금융 허브와 세계 4대 황금 무역 중심으로 거듭났으며 경제 자유도와 경쟁력은 세계 1위로 올라섰다.
 “1997년 홍콩 반환 전후로 광둥성과 홍콩 두 지역에는 변화가 생겼습니다.” 탄강(谭刚)은 그 이유를 이렇게 분석했다. 당초 80년대에 성공한 합작 모델을 앞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었는데 민간 차원의 합작이 거의 끝나는 분위기에서 정부 차원의 합작으로 일을 추진할 필요가 있었다. 예를 들면 두 지역의 인적자원과 화물교류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상황에서 효율성이 높은 국경 검문, 세관 검사와 통관 절차가 뒤따라야 했다. 특히 제조업과 함께 선전에 진출한 홍콩의 서비스업 특히 금융업과  물류 등은 가까운 곳에서 홍콩 기업들에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 많은 서비스업 분야를 중앙에서 개방하지 않고 줄곧 페쇄된 상태였다.  탄강은 "두 곳의 협력이 상대적으로 정체돼 있어 새로운 것이 없었고 옛 것을 우려먹는 형식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탄강이 보기에 두 곳의 협력은 답보 상태에 있었는데 이는 선전 자체에 체제 전환의 어려움을 겪는 것과도 연관되었다.
2002년 11월에 1만 8000자 분량의 '선전, 너는 누군가에게 버림받았다'는 글이 인터넷에서 퍼지면서 전국적으로 열띤 토론이 붙었다.
28세의 작가인 궈중샤오(呙中校)는 글에서 당시 선전이 당면한 문제점을 지적했다. 특히’특구의 어려움’이라는 글에서 "중국이 WTO에 가입한 상황에서 경제 특구가 점점 더 특수성을 잃고 있다. 비록 경제 특구마다 그 특수성을 포기하려 하지 않지만 여전히 점점 더 분명하게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경제 특구로서의 중국의 역사적 사명이 끝난지 오래되었다…대외와 대내 개방이라는 두 가지 부담감을 느끼면서 경제특구의 존재는 이미 중요한 정책 기초를 잃어버렸다. 창구로서의 역할을 현저히 적어진 상황에서 선전은 다시 정부의 특별한 혜택을 받기 힘들어졌고 개혁 시범구로서의 중요한 임무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적었다.
상하이의 고속 성장과 비교했을 때 선전은 발전폭이 크지 않았다. 1990년대부터 중앙에서 푸둥(浦东)지역을 개발하면서 “상하이는 전체적인 발전면에서 정책적인 지원과 지지를 받아왔지만 경제특구로서의 선전은 홀시되어 왔거나 제한을 받아왔다”
탄강은 “선전은 그 시절에 좀 방황하는 시간을 거쳤죠”라고 회상했다. 선전은 ‘종합 인프라 개혁시범구’라는 타이틀을 달고 싶었지만 끝내 그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다른 한 방면으로 늘 뒤에 따라다니던 홍콩이라는 ‘막내 동생’도 경계심을 드러냈다. 呙中校는 글에서 "오랜 기간 홍콩은 선전에 경각심을 늦추지 않아왔고 협력하는 면에서도 부족했었다. 예를 들어 홍콩이 창업 판을 하려고 할 때 선전에서는 그 창업판을 선전에 설립하여 에너지 자원을 절약하고 협력하여 발전하기를 희망했지만 홍콩은 그렇게 실행하지 않았다. 24시간 통관 문제, 서부 대통도 등 문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고 적었다.
선전은 방황기를 겪고 있고 홍콩도 반환 이후 5년동안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1998년 아시아 금융 위기가 발발하면서 1년여 만에 주식 시장은 1만 여 점의 주가가 급락해 시중에서 2만 여 억 홍콩달러가 증발해 일반 시민들도 피해를 봤다. 홍콩반환 전 수년 간 계속되어 왔던 이민 붐도 홍콩의 자신감을 떨어뜨렸다. 1980년대부터 반환되기 전까지 홍콩인 70만명이 이민을 떠났는데 거의 모든 이민자가 중산층에 속했고 평균 5000여 억에 달하는 자금을 가져갔다. 도시 전체의 투자, 소비와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1997년 홍콩의 집값은 ㎡당 9만 홍콩 달러에 달했고 2002년에는 집값이 절반 넘게 폭락해 1㎡당 3만 홍콩 달러에 불과했다.
“홍콩의 경쟁력이 떨어져 경기 침체가 지속되고 있어 선전과 협력을 확대하지 않으면 경쟁력을 잃게 됩니다” 궈중샤오가 2002년 이 글을 썼을 때 홍콩은 위기를 겪고 있었다. 2003년 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인 사스의 여파로 홍콩은 제3차 충격을 입어 GDP가 1.4% 떨어wu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가 설상가상으로 더 어려워졌다.
나락으로 떨어진 홍콩은 다시 구원의 눈빛을 내륙이라는 방대한 시장에 돌릴 수밖에 없었다. 궈중샤오가 말했듯이 “홍콩과 심천은 교차되면 심해지고 교차되지 않으면 안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CEPA의 체결은 홍콩 경의 귀환이다.

2003년에 체결된 '내륙과 홍콩의 포괄적 경제 동반자 협정'(이하CEPA)은 홍콩이 중국에 융합된 중요한 변곡점이다.
당시 홍콩 재정사 사장을 지냈던 량진숭(梁锦松)은 홍콩을 대표해 서명을 한 인물이다. 그는 초대 행정장관을 지낸 둥지옌화(董建华)가 임명한 재정사 사장으로 2001년 5월부터 2003년 7월까지 2년여 간만 직무를 맡아왔다. 하지만 이 2년 사이에 량진숭은CEPA의 중요한 추진자의 역할을 잘 해왔다.
CEPA내용에는 23개 조항이 있으며 상품 교역, 서비스업, 무역 편리화 등 세 개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즉 2004년 1월 1일부터 273개의 내륙지역 납세 목록에 포함되었던 홍콩 제품(식품, 의약품, 방직, 전자 제품 등)이 원산지 규정에 부합되어 내륙시장에 들어올 때 무관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홍콩의 서비스 교역 시장 진출과 관련해서는 컨설팅 서비스, 컨벤션 서비스, 광고 서비스, 회계 서비스, 건축 및 부동산, 의료 및 치과 의사, 할부 판매 서비스업, 물류 등을 포괄적으로 취급하고 있다. 투자 편리 면에서는 통관 및 온라인 비즈니스 등 7개 부분에서 수속절차를 간편화하여 홍콩의 자금이 자유롭게 내륙 시장에 흘러들 게 하도록 규정하였다.

CEPA는 "홍콩이 다시 경제 회생의 길을 걷는 중요한 일환"이라고 덧붙였다. 2017년 6월 일찌감치 정계를 은퇴한 량진숭은 홍콩 난펑(南丰)그룹 사무실에서 '중국 뉴스 위크'와의 인터뷰를 가졌다. 그는CEPA는 홍콩이 국제 금융과 상업 무역 중심으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세계 여러 지역의 투자자들로 하여금 홍콩이 특별한 우세를 갖고 있고 방대한 내륙시장을 개척하는데 최적화된 곳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하였다. 특히 거대한 내륙 시장의 잠재력을 발굴할 수 있는 최적의 발판이라는 것을 인식시켰다.
 ‘일국양제’의 틀 안에서CEPA는 독특한 제도적 장치에 속한다. 가장 특별한 것은 홍콩 특별행정구가 독립적인 관세 구역으로 중앙 정부와 협정을 체결하고 WTO의 규정에도 부합되고 ‘일국양제’의 방침에도 부합된다는 점과 두 지역 간의 경제 무역 교류에서 나타나는 제도적인 장벽을 없애는데 부합된다는 것이다.
"1997년 홍콩은 정치상의 회귀가 이루어졌으며CEPA협정 체결은 홍콩은 경제 상의 회귀를 말합니다" 난펑 그룹 회장 사장인 량진숭은 ‘중국 뉴스 위크’와의 인터뷰에서 CEPA의 가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CEPA는 2004년부터 시행된 이후 거의 매년 한 차례씩 보충 협의를 해왔다. 2013년까지 10개의 추가 협상을 벌여 처음 273개의 홍콩 원산지 품목과 18개 서비스업 분야에서 시작해 1770여개의 홍콩 원산지 상품과 48개의 서비스업 분야로 확대됐다.
CEPA의 체결로 어려움에 처해 있던 홍콩의 경제 성장률이 2004년부터 2011년까지 8년간 연평균 5%씩 높아져 갔으며 같은 기간 다른 경제 대국 평균치의 두배 가까운 수치의 성장율을 보였다.
특히 2003년 자유 여행을 자유롭게 개방한 뒤로 자유 여행이 가능한 도시는 최초의 광둥성에서부터 전국 49개 도시로 개방돼 홍콩의 소매 서비스업을 자극했다. 2003년부터 2013년까지 홍콩의 소매 판매액은 매년 20%이상 증가해 10년 만에 한 배 증가했다.
홍콩의 ‘일국양제’ 연구 센터의 팡저우(方舟) 주임은 자유여행이 홍콩에 가져다준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그는 “1998년 아시아 금융 위기를 맞아 홍콩은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2008년 미국 발 금융 위기를 맞았을 때 홍콩이 받은 충격은 많이 줄어들었고 홍콩 경제는 2개 분기만 침체 상태에 빠졌고 다시 회복세를 보이면서 실업률도 별로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2015년까지 내륙의 서비스 무역 산업은 홍콩에 거의 문호를 개방하다시피 했다. 대부분 대문이 활짝 열렸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구체적인 부분에서 아직 실행이 되지 않고 작은 문을 아직 열지 않았다는 점이다.” 탄강은 ‘중국 뉴스 위크’와의 인터뷰에서 홍콩의 고급 서비스업이 어떻게 인정받는지, 어떻게 내륙에 정착해 발전해 가는지 등 세부적인 면에서 명확하지 않다고 말했다.
중국 (선전) 종합개발연구원 궈완다(郭万达) 부원장은 '중국 뉴스 위크'와의 인터뷰에서 직접 겪었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홍콩이공대학이 선전에 와서 산업화를 추진함에 있어서 특별한 문제가 없고 CEPA가 이미 개방된 상황이었다. 그런데 막상 와서 보니 등록 문제에 부딪쳤는데 국유기업으로 등록할 것인지 생각해 봤을 때 그것도 아닌 것 같고 사업 단위로 등록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공상국에 가서 회사 등록을 하려고 보니 영리기구도 아닌 것 같아 그것도 아니다 싶었다. 홍콩에서 영리 사업을 하거나 비영리 사업을 하거나 똑같이 등록 절차를 거쳐야 하며 거기에 따라 영리인가 비영리인가를 결정하려고 했다. 하지만 선전 쪽으로 가면 등록할 수 없다"고 말했다.
궈완다가 보기에 CEPA는 WTO의 틀에 기초해 체결된 것으로 이른바 '대문은 열렸는데 작은 문은 열리지 않았다”는 점은 두 지역의 체제가 맞지 않고 법률적으로도 다른 부분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는 "제도적 장벽이 있다는 문제입니다. 내륙의 개혁과 함께 법규 면에서의 규제가 낙후하고 개혁에서 미흡한 면이 있습니다.”
 “업종별로는 소관 부처가 다르고 각 부처마다 규제와 규칙이 따로 있지만 홍콩에서 보면 산업을 개방했다고 해도 실질적으로 그 시장에 들어갈 수 없는 상황입니다” 홍콩 일국양제 연구 센터 팡저우 연구 주임은 ‘중국 뉴스 위크’와의 인터뷰에서  과거 몇 년 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인 문제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저는 개인적으로 중앙에서 광둥성에 권력을 위임해 홍콩의 전문적인 서비스 방식의 광둥 유입에 대한 심의 권리를 넘겼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그 권력을 광둥의 관련 부문 위원회에 맡겼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기초를 닦아야 한다

방황기를 겪은 선전과 홍콩은 약속이나 한듯이 두 지역의 통합을 희망하고 있다. 탄강은2006년 전후 선전과 홍콩의 여러 다른 기관들이 독립적으로 ‘홍콩 선전 대도회(大都会)’를 건립할 것을 제기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당시 홍콩 행정장관을 지냈던 정인취옌(曾荫权)은 홍콩은 선전과 더 밀접한 협력 관계를 구축해 세계 대도회(大都会)를 건설하고 선전을 더 중시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당시 광둥성 서기를 지낸 왕양(汪洋)은 홍콩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광둥성과 홍콩의 협력을 강화했습니다"고 말했다. 탄강이 보기에 이는 광둥성과 홍콩 합작의 세번째 단계이며 초반의 부진을 딛고 하나의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재기점을 찾게 된 시작이라 생각해 여러가지 협약을 체결해 성과를 거두었다.
이 단계에서 공식적인 두 지역 정부 차원의 협력도 제도화 단계에 들어서면서 다양한 플랫폼을 구축했다.
“광둥성에는 처음에는 홍콩과 직접적인 소통을 할 수 있는 채널이 없었고 나중에 중앙에 이 문제를 제기해 광둥-홍콩 연석 회의를 열 수 있는 기구를 구성했다. 이런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되자 광둥과 홍콩은 직접 협상을 할 수 있었다" 팡저우는 '중국 뉴스 위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두 지역 협력의 중요성 플랫폼으로 1998년 ‘광둥-선전 합작 연석 회의’(이하 ‘연석 회의’로 약칭)가 발족됐으며 광둥성과 홍콩특별행정구 정부 고위 관계자들로 구성되었다. 이로서 전국적으로 광둥과 선전 두 지역은 다방면의 합작을 추진할 수 있었고 경제, 무역, 기초건설 등 면에서 협력관계를 건립할 수 있었고 난사(南沙) 발전 계획, 주강삼각주 지역 합작, 강주아오 대교 건설 등 경제무역, 금융, 인프라 건설 등 분야의 협력 계획을 수립하는 등 연석 회의는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
현재 연석 회의를 비롯해 홍콩특별행정구 정부와 내륙 사이의 크고 작은 협력 채널은 6개이며 선전-홍콩 협력 회의를 비롯해 범 주강삼각주 지역 합작 발전 포럼, 후강(沪港) 경제무역 합작 회의, 징강(京港)경제무 협력 회의 및 홍콩-광둥 합작 고위층 회의로 구성돼 있다.
2014년에 홍콩에는 센트럴 점령 사건이 폭발해 홍콩과 광둥지역의 합작이 또 다른 위기를 맞이했다. “센트럴 점령 사간 이 후 홍콩의 생태에는 많은 문제가 나타났습니다. 두 지역의 협력에서 기본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었던 많은 항목들이 올스톱 상태에 들어갔고 침체되어갔습니다” 탄강은 이런 상태를 '두 곳이 다시 방황하기 시작했고 다시 기초를 잡아야 하는 상황'이라고 정의했다.
그가 보기에 홍콩 반환 20주년이 되는 시점에 일부 존재하는 문제를 제기해 되돌아볼 필요가 있었다. 예를 들어 지역 협력을 어떻게 하면 공동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협력을 하다가 협력이 홍콩의 이익창출에 효과가 크게 나타나면 적극적으로 나섭니다. 그러나 효과가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으면 이들은 높은 적극성을 보이지 않습니다. 또 홍콩은 단순히 선전과의 협력만으로는 부족하고 광둥과 국가 차원에서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탄강은 “파트너와의 공통된 이익을 생각해 보면 자신만의 이익을 생각했을 때 협력에 문제가 생기거나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고 말하며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강주아오 대교라고 말했다.
강주아오 대교는 건설 구상을 하고 착공을 시작해서부터 우여곡절을 겪었다. 1983년 홍콩 상인들은 홍콩과 주하이 사이를 잇는 대교를 만들자는 파격적인 방안을 제기했다. 이런 대담한 발상에 대해 당시 홍콩-영국 연합 정부는 '필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2002년 초 후잉샹(胡应湘)은 다시 홍콩 정부에 바다를 잇는 다리를 건설하자는 제안을 했고 홍콩의 전 행정장관인 둥지옌화의 지지를 받았다.
량진숭은 홍콩 특별행정부 재정사 사장을 지낼 때 공개석상에서 강주아오 대교의 건설을 지지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중국 뉴스 위크’와의 인터뷰에서 “2002년부터 다리 하나를 만들고 싶어 했는데 둥지옌화 당시 행정장관이 전폭적인 지지를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전 행정장관님께서도 이 다리가 16년이 지나도록 건설을 완성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동쪽으로 홍콩을 잇고 서쪽으로 마카오, 주하이를 잇는 50㎞에 달하는 ‘수퍼 대공정’은 그 진도가 느렸다. 2003년 7월 말 국가 발전 개혁위원회의 보고서에는 강주아오 대교를 건설할 데 대한 내용이 있었다. 2008년 12월 공사 타당성 보고서는 전문가의 심사를 거쳐 국가 발전 개혁 위원회에 이를 보고했다. 2009년 10월 28일 국무원에서는 강주아오 대교 공정의 사업 타당성 검토 보고서를 채택했다. 같은 해 12월 15일. 강주아오 대교가 건설을 시작했다. 하지만 강주아오 대교 홍콩지역의 건설은 2011년 12월 14일에야 정식으로 착공했다.
인증보고를 마친 후 이 대교의 건설을 놓고 긴 토론 시간을 거쳤는데 그 중 쌍Y로 할 것인가 아니면 단행Y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중점적인 쟁점이었다.
쌍Y는 한쪽은 홍콩과 선전을 잇고 다른 한 쪽은 마카오와 주하이를 잇는 구상이다. 단행Y는 현재의 방안으로 다리의 동쪽은 홍콩만 잇는 구상이다.
광둥성에서는 이 다리는 쌍Y의 구조로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다리의 양 쪽을 홍콩, 선전과 주하이, 마카오 4개 지역을 통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최대의 효능을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홍콩에서는 단행Y 방안을 고집했다.
쌍Y를 단행Y 방안으로 수정하면 홍콩쪽에 유리하며 이는 주강 서안의 자원을 선전을 통하지 않고도 홍콩에 가져올 수 있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서안의 일부 자원을 선전에 가져가려고 해도 홍콩을 경유해야 한다.
이렇게 되자 선전은 따로 다른 구상을 하는 수밖에 없어다. 2004년 단Y방안이 정식으로 확정되자 같은 해 선중(深中)통도 계획이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선전은 방법이 없어 적극적으로 선중통도를 추진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어쩔 수 없이 이 방안을 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탄강은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주강 서안의 주해에서 선전으로 통하는 통로는 직선 거리가 40키로미터이지만 현실적으로 북상광(北上广) 을 통해 후먼(虎门) 대교를 지나 다시 남쪽인 선전에 이를 수밖에 없었고 그 거리가 200키로미터에 달했다. 2016년 선중통도 건설이 시작되었다. 선중통도 건설 예산은 400억 위안에 달했지만 후먼대교를 통하는 것보다 주강 서안과 동안으로 통하는 거리를 대대적으로 축소시켰고 강을 끼고 달리는 선전 고속도로와 연결되면 주강 서안과 동안의 교통 체중을 대대적으로 줄일 수 있다. “홍콩은 물류시장이 분산되는 것을 걱정했고 선전이 홍콩의 경쟁적수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탄강은 ‘중국 뉴스 위크’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분석했다. 예전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는데 선전의 옌티옌항(盐田港)도 부두로서의 홍콩의 적재량과 사용량을 감소시켜 홍콩 국제 항운 센터의 지위를 싱가폴에 뺏기는가 하면 나중에 상하이, 선전과 저우산(舟山)에 의해 뺏겨 적재량이 세계 5위에 머무는 항구로 전락되게 하였다.
탄강이 겪었던 사례도 이런 문제를 드러냈다. “선전 종합 개발 연구원이 추진했던 프로젝트 중 ‘선전-홍콩 포럼’이 있었는데 3개 기구에서 함께 추진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전 경제특구 연구회와 홍콩의 중앙 정책팀도 함께 추진하는 프로젝트였습니다” 어느 한 포럼에서 선전과 홍콩의 금융합작에 대한 토론을 벌렸다. “포럼의 방안에 대해 잘 구상했으나 홍콩과 토론을 할 때 그들은 이 건의에 대해 토론을 하고 싶지 않고 교육 방면에 대한 의제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왔습니다. 그들은 금융합작으로 홍콩의 국제금융 허브로서의 지위가 영향을 받을까봐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금융은 홍콩의 자주산업이며 핵심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산업으로 이 영역에서의 합작은 쉽게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선전 챈하이(前海)가 이를 말해주는 사례이다.
2010년 8월 26일 선전경제특구가 30주년을 맞는 날에 국무원은 선전에 주는 ‘생일선물’로  ‘첸하이항 현대 서비스 산업 합작 총체 발전 기획’을 비준했다.
최초의 구상은 15평방키로미터의 첸하이를 따로 떼내어 선전에 또 다른 특구를 만들기로 계획하였다. 이렇게 되면 첸하이는 내륙 지역에서 가장 많이 개방되고 혁신 공간이 가장 넓고 혜택을 가장 많이 받는 지역으로 부상할 수 있으며 선전과 홍콩 사이 합작 교류의 시범 구역으로 발전할 수도 있었다.
“처음에는 파격적인 구상을 많이 했습니다. 예를 들면 수저우(苏州)와 싱가폴의 공업산업단지 합작 방식을 참조해 두 지역 정부가 직접적으로 합작하거나 토지를 아예 홍콩에 위탁해 운행을 하고 홍콩의 법률, 경제제도를 그대로 이식해 와 경영하는 방법 등 여러가지 구상을 해봤습니다” 궈완다는 2010년 ‘중국 뉴스 위크’와의 인터뷰에서 두 지역이 법치와 체제면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런 대담한 기획들은 초창기부터 실행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판명났다고 설명했다.
 “홍콩정부는 싱가폴 정부가 아닙니다. 싱가폴 정부는 테마섹 홀딩스가 있지만 홍콩정부는 직접투자를 할 수 없으며 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궈완다는 이는 체제 차이에서 비롯된 문제라고 설명했다.
훠완다는 제도적인 이유도 있고 이윤 배분에 대한 이유도 있다고 말하며 “첸하이가 처음에 금융을 중시하자 홍콩은 긴장하기 시작했고 중환(中环)지역과 경쟁 구도가 형성될까봐 걱정했습니다.”
량진숭은 ‘중국 뉴스 위크’와의 인터뷰에서 “홍콩은 첸하이의 참여도와 발전에 대해 그렇게 큰 희망을 품지 않았습니다. 왜나면 대부분 사람들이 다 이를 부동산 프로젝트로만 봤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선전 정부는 홍콩의 여러 큰 재단을 찾아갔지만 그들 역시도 이 지역의 가능성에 대해 큰 기대를 하지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팡저우는 ‘중국 뉴스 위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비교적 일찍 첸하이 개발에 뛰어든 사람이다. “선전은 이윤을 홍콩에 돌려주기를 원했지만 당시 적지 않은 재단에서 이 지역의 비전에 대해 별로 탐탁지 않게 보는 분위기였습니다. 내륙지역의 표준에 따라 15만 평방미터는 큰 편이 아니지만 홍콩의 표준으로 15만 평방키로미터 전부를 중앙 비즈니스 구역으로 하기에는 너무 큰 면적이었습니다. 중환 지역은 몇 평방키로미터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 역시도 몇 십 년의 시간을 들여 건설한 지역이니깐요.”
걱정이 되는데 그 비전까지 탐탁지 않게 생각했으니 이 지역에 들어온 홍콩 기업과 자본은 첫 몇 년은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었다. 첸하이 기획에 따라 2014년 말까지 1000 개의 홍콩 기업을 유치할 계획이었으나 실제로 2014년 홍콩에 들어온 기업은 600개도 안되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그 증가 속도가 빨라 2016년에는 4300개로 늘었다.
성장속도가 빠르지만 첸하이는 ‘7년지양(七年之痒)’을 맞이했다. 최초에 구상했던 두 지역 산업의 호상 보충, 경제 일체화와 사회 융합은 단기적인 시간 내에 실현하기 어려웠다. 또 최초에 구상했던 두 지역 공동 개발의 방식도 최종적으로 선전이 주도하는 프로젝트가 되었다.
“두 지역의 합작은 한 지역의 경내에 있으면서 다른 지역에 예속된 토지의 형식인 ‘영지’방식이나 공동합작의 방식을 택해야 합니다” 궈완다는 합작에는 깊이 있는 합작과 옅은 범위에서의 합작이 있는데 홍콩과 첸하이 지역의 합작은 아직은 옅은 범위에 머물러 있다고 말했다.
탄강은 고차원의 서비스 산업을 위주로 한 합작단계에 들어서면 여러가지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는데 ‘전점후장’ 경영 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홍콩의 서비스업은 홍콩사람들만을 위한 서비스 입니다. 내륙지역에 온 후 이를 그대로 실현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서비스 산업은 특정된 대상에 따라 진행되어 온 것이고 산업 특징의 변화에 따라 합작 방식에도 혁신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행정장관의 도전

많은 사람들이 내륙지역의 개방 규모가 커지면서 홍콩지역이 가지고 있던 우세가 줄어드는 것이 아닐까 걱정하며 ‘수퍼 연락책’으로서의 역할에도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궈완다는 다른 의미에서 이를 해석했다. “내륙지역 사람들은 자신들이 돈을 벌었다고 생각하는데 홍콩과 비교했을 때 아직까지 차이가 큽니다. 홍콩이 가지고 있는 많은 우세는 내륙 지역 도시들이 대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이 점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홍콩이 가지고 있는 우세는 아주 분명하다고 말했다. 국제자유항, 낮은 관세, 자본 흐름에 제한이 없는 것, 인제의 국제화 수준도 매우 높고 법률, 중재, 융자, 대주거래, 인민페 역외 중심, 업종 표준 등 면에서 큰 비교적 우세를 갖고 있다. “예를 들면 다음번 폭우 때 선전은 잠길 수 있지만 홍콩는 끄덕없습니다.”
그는 ‘일국양제’가 존재하는 한 홍콩의 우세는 존재하기 때문에 국가적인 측면에서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홍콩의 우세를 충분히 활용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홍콩은 중개자의 역할을 하거나 수퍼 연락책의 역할을 합니다. 어느만큼 큰 역할을 하는지는 그 작용이 어느만큼 발휘되는지 봐야 되겠지만 수퍼 연락책의 역할을 함에 있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다른 방면에서 살펴보면 궈완다는 홍콩이 내륙지역의 발전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없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예전에 국제화를 말할 때는 미국화를 이야기 했지만 지금의 글로벌화는 중국화이기도 합니다. 지금 세계는 중국과 비즈니스를 하지 않거나 교류를 하지 않고 국제화를 논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는 내륙지역의 신속한 발전하고 있으며 선전의 빠른 발전에 대해 홍콩은 이 거대한 시장을 무시할 수 없고 그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고 이 사회를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홍콩의 일부 학자들은 홍콩이 반환된 후 지난 20년간 내륙지역과의 융합에 대해 홀시해온 부분에 대해 반성을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홍콩의 저명한 사회학자 뤼다러(吕大) 선생은 2년 전 ‘중국 뉴스 위크’와의 인터뷰에서 홍콩이 이 방면에 부족점이 많다고 분석했다. “내륙 지역에서 발생하게 될 변화에 대해 홍콩은 정확하게 평가하지 못했습니다. 어찌보면 거의 준비를 하지 않았고 내륙 지역과 홍콩의 융합이라는 큰 과제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단순하고 직접적으로 생각해 홍콩이 국제관계를 잘 보존하고 글로벌 경제 발전에만 초점을 맞추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홍콩은 중국 최고의 글로벌 도시 지위를 확보한 시점에서 국가발전 과정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습니다. 1997년 전후로 대부분 사람들은 호옹과 세계와의 연결에만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외국기업이 계속 홍콩에 자리 잡고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의 운영 본사를 홍콩에 두는지, 홍콩의 국제화 정도가 낮아진 것이 아닌지 등 주제에만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홍콩 반환 전후에 내륙지역에 대해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고 특히 주강 삼각주의 미래 발전과 홍콩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제대로 분석하지 못했습니다.”
비록 매 주마다 내륙지역에 오지만 린지옌평은 내륙지역의 발전이 상상이상이라고 말했다. “개혁개방 이후 15년은 사실 그 발전 속도가 늦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15년은 그 발전속도가 빠릅니다. 저희들은 매 주마다 내륙지역에 가지만 이렇게까지 빨리 발전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는 예전에 홍콩의 젊은이들이 내륙지역에 가서 일을 할 때 홍콩에서 받던 3배의 월급을 받아야만 가려고 했고 그외에도 보너스를 지급해야 된다고 말하면서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했다.
내륙 지역 빠른 변화의 내재적 요인과 외부 환경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앞으로 홍콩이 대면해야 할 가장 큰 도전이다.
2017년 7월 1일 캐리 람이 신임 홍콩 행정장관으로 취임했다. 린지옌펑은 신임 행정장관과 여러 해 동안 알고 지냈으며 “캐리 람도 추진력이 강한 사람이지만 량전잉과 일하는 스타일이 완전히 다르다”고 했다. 그는 신임 행정장관에 대해 “너무 많은 의견을 들으면 자신의 주견이 없어져 좋은 것만이 아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발란스를 유지하고 홍콩 사회발전의 평형을 유지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팡저우는 캐리 람은 공무원 체제에서 성장한 정치인으로 행정업무를 잘하기로 유명하며 집행능력이 강하기 때문에 이번 행정부는 정책 추동면에서 예전보다 추진력이 빠를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현재의 시정이 맞이한 가장 큰 도전은 현재 홍콩의 행정환경과 경제사회 모순은 일시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 “깊은 구조적 모순은 단기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정책을 앞으로 밀고 나갈 것인가? 이는 신임 행정장관이 떠안은 가장 큰 도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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