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명 이연주, 2010년 과기대 최고경영자과정 9기 졸업, 2005년 연변여성에 처녀작발표 방송과 잡지에 수차 수상
[서울=동북아신문]해님이 덜 깬 아침이다.  전날 밤, 늦게까지 책 보다나니 눈까풀이 천근만근인데 갑자기 전화신호음이 고음을 뽐내며 울려댄다.  나는 핸드폰을 아무렇게나 들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누구이냐고 물었다. 

“옥화야, 너 오늘 도문중조변경까지 운전해 줄 수 있어? 미국에서 여동생이 이탈리아계 남편과 함께 왔는데 거기 한번 가보고 싶데…….”

평상시에 가깝게 지내던 언니의 부탁이라 두말없이 선뜻 대답했다. 나 또한 그 걸음에 변화되는 고향의 모습을 눈에 담고 싶었다. 어찌 보면 봉폐식 생활이나 다름없는 일상에서 단 하루라도 해탈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창문을 여니 동산에서 어느새 해님이 부끄러운 듯 빼죽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순간 해살이 온몸을 쫙~ 감싸고 청신한 공기가 콧구멍을 시원하게 자극했다. 마치 잠자고 있던 세포가 재활하는 것 같았다. 해님을 마주하고 길지 않은 팔과 다리를 구부렸다, 폈다하며 운동하고 나서 나는 갈 준비로 서둘렀다. 어쩌다 함께 가보는 시골행이라 우리는 이야기도 할 겸 길옆의 자연풍경도 구경할 겸 낡은 포장도로로 에돌아가기로 했다. 천천히 차를 몰며 차창너머로 힐긋힐긋 산자락을 쳐다보니 한해의 끝자락에서 이 가을을 떠나기 싫어 한껏 빨갛게 약이 달아오른 몸매를 과시하는 단풍나무 잎들이 한눈에 안겨왔다. 계절의 흐름에 무디어진 나의 시신경을 자극하기에 충족했다. 얼핏얼핏 지나가는 길옆의 정경에 감탄하노라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해관에 이르니 홍수가 남긴 잔여물을 토해내는지 시꺼먼 물이 양안을 적시며 흘러가고 있었다. 올해 들어 100년래 처음으로 큰 홍수가 범람했는지라 강역이 발 디딜 자리조차 없을 정도로 지저분할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아주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머나먼 미국 땅에서 글에서만 보아오던 중조변경 이였던지라 무척 호기심이 동하는지 신대륙을 발견한 듯 이탈리아계 남자는 연속 셔터를 눌러댄다. 그리곤 알아도 못들을 영어로 부부간이 대화를 주고받으며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는 것 이였다. 이 순간 지식의 한계를 한껏 느끼며 어쩐지 기분이 씁쓸해났다. 오래간만에 형제간이 만나서 서로 회포를 푸는데 틈새에 끼우는 것이 멋 적어서 나는 그곳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는 두만강 여울목에 위치한 내 고향으로 차머리를 돌렸다.  고향의 산야는 여전히 아름답고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강변에서 뛰놀던 아이들과 정겨운 아줌마들의 빨래 방치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이 퍽 한적함을 느끼게 하였다. 이맘때면 콩가을 한창인 밭에서 황소의 영각소리와 장난치던 애들의 목소리도 메아리쳤었는데……. 산굽이를 돌아 유유히 흘러가는 두만강, 수많은 사연을 담고 있는 어머니 강, 전설의 강, 어릴 적 엄마가 보고플 때마다 나는 이 강기슭에 찾아와 혼자 실컷 울다가 집으로 돌아가군 했다. 나는 늘 내가 앉았던 의자처럼 넓적한 돌바위를 찾았다. 30여년이 지나도 돌 바위는 하도 커서 누구든 어쩔 수 없었는지 여전히 그 자리에 못박혀있었다. 그동안 잊고 살았던 지난날. 아니, 잊고 살았다기보다 잊으려 애썼던 소녀시절. 화사한 햇빛아래 돌바위에 앉아 귀를 간지럽히는 뻐꾸기 소리를 듣노라니 내 기억은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12살 되던 해, 할아버지 빚 문서가 아버지 앞으로 넘겨지자 엄마와 아버지는 매일이다 시피 다투었다. 부지런하고 고지식하고 말문이 무거우신 아버지는 열심히 일해도 살림이 늘어 못나니 가끔씩 엄마를 살림살이 헤프다고 꾸지람하셨다. 그러면 엄마는 이전에 시집 올 때부터의 역사까지 끄집어내서는 맞받아쳤다. 당신네 부모들은 딸밖에 모르다가 마지막엔 빚만 잔뜩 떠넘긴다며 염치없다고 야단쳤다. 한마을에서 살면서 언제 한번 손자, 손녀를 거들떠도 보지 않다가 빚만 안겨준 할머니 처사가 엄마로선 분노할 만도 했다. 허나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부모들이 다투면 중간에서 녹아 나는 건 우리들뿐이었다. 다른 애들은 하학하면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가지만 나는 저녁때가 되면 집 들어가기 싫어서 여름철이면 강가에 있는 넙적한 돌바위에서 숙제도 하고 고양이밥이랑 뜯어 먹 군 했다.  어느 하루, 하학하고 집에 들어서려는데 안에서 큰소리로 엄마와 아버지가 말다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둘째 아들을 믿겠다고 우리를 본체만체하구 딸들 하구만 쑥딱거리더니 무슨 염치에……그리구 재봉침이랑 쓸 만한 건 둘째딸한테 다 주 던 게 빚만 잔뜩 남겨주니 내 좋겠슴둥?……” 엄마가 악을 바락바락 쓰며 아버지한테 대들었다. “아들인데 내가 안 물면 누가 물겠소? 무슨 말이 그리 많아?” “내가 말이 없게 됐슴둥? 죽을 때 딸집에 가서 콱 죽으랍소……” “말이면 다 하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더 때립소, 아예 죽여 버립소, 나두 살기 싫습꾸마……” 와당탕 소리와 함께 엄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부리나케 달려 들어갔다. 삼검불 같은 머리를 한 채 엄마가 구석에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아버지는 당장 잡아먹을 듯 눈에 분노를 잔뜩 품고 있었다. 나는 구들로 뛰어 올라가 아버지한테 매달려 발만 동동 굴렀다. 다섯 살 되는 여동생은 뒤늦게야 상황파악을 했는지 엄마ㅡ엄마ㅡ하고 부르며 작은 눈에서 콩알 같은 눈물이 비오 쏟는 것이었다. 여덟 살난 순한 양 같은 남동생은 멍하니 서서 어쩔 줄을 몰라 두리번댔다. 아버지는 에익ㅡ 하더니 아래 칸으로 씽하니 달려 들어갔다. 짜장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아래 칸에 달려 들어간 아버지는 도끼를 들고 나왔다. 나는 엄마를 찍으려는 줄 알고 기절초풍했다. 당장 그 도끼에 맞아죽는 줄 알았다. 나는 아버지ㅡ하고 부르며 엄마 옆에 붙어 섰다. 무뚝뚝한 아버지는 감히 엄마를 찍지 못하고 분노를 삭이느라 콩크리트 마루를 쾅하고 내리쳤다. 시멘트 조박은 아버지의 분노를 담고 사방에 아픔이 되여 뿌려졌다. 움푹 패어진 마루는 온 가정에 평화를 깨고 나의 어린 가슴에 깊은 상처로 남고 말았다.  실망한 나머지 그길로 엄마는 막내여동생을 데리고 이모네 집으로 떠나갔다. 다섯 살부터 계모 손에서 갖은 욕과 매로 불쌍하게 자란 엄마는 언니가 친정집 엄마 맞잡이인 셈이었다. “엄마, 가지마요ㅡ 엄마ㅡ”하며 내가 옷자락을 붙잡아도 “너와 춘호는 아버지하구 살어……너네까지 데려가면 다 같이 굶어죽는다……”하며 사정없이 내 손을 뿌리쳤다. 목 메여 부르며 산굽이까지 따라가도 엄마는 뒤돌아 한번보지 않고 총총히 떠나갔다. 엄마 손에 끌려가는 여동생은 자꾸 뒤돌아보며 “언니, 언니, 빨리 따라와-”하며 손을 흔들어대며 안 가려고 발버둥질하는 것이었다. 엄마가 산굽이를 지나가니 표연히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좀만 더 가면 산기슭엔 온통 무덤천지였다. 더 이상 따라가도 소용없었다. 엄마가 떠나버린 산굽이에 우두커니 서 있노라니 외딴섬에 홀로 버려진 느낌이었다.  시골의 저녁노을은 빨리도 사라지고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난데없이 까욱ㅡ 까욱ㅡ 까마귀 떼가 날아와 울어대며 내 마음의 처량함을 더해주었다. 뒤이어 온 하늘에서 시꺼먼 구름이 몰려오더니 바람이 일기 시작하였다. 산기슭의 무성한 나무들이 바람에 머리를 풀어헤친 미친년처럼 좌우로 사정없이 흔들리며 당장 나를 삼켜 버릴 것만 같았다. 또 시꺼먼 나무숲에서 당장이라도 누가 뛰쳐나올 것만 같았다. 더럭 겁이 난 나는 더 이상 소리도 못 내고 멍하니 서 있다가 종 주먹을 쥐고 줄달음쳐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가 없는 집은 초상난 집 같았다. 더욱이 여동생이 두고 간 빨간 목도리를 볼 때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엄마가 없는 나날 썰렁한 집에서 동생을 돌보며 학교 다니기란 말이 아니었다. 남동생을 챙겨주고 장판 닦고 시냇물을 길어오고 비 오면 부엌에 물이 올라오는데 그것을 퍼내는 것은 내 몫이었다. 아버지가 탄광에 가서 밤일을 할 때면 동생과 둘이 긴긴밤을 지새워야만 했다. 잠자려고 불 끄고 드러누워 밝은 달빛이 창문을 엿 볼 때면 엄마생각이 더 간절해서 늘 베개를 적시군 했다. 허나 종이로 덕지덕지 붙인 천정에서는 쥐새끼들이 머가 그리 좋은지 무리지어 짹짹거리며 조용한 집에 소란을 피워댔다. “저 쥐새끼들은 엄마 있을 테지? 저리 좋아하는걸 보니……”  쥐새끼들이 당장 내려와 목덜미를 물것 같아 무서우면서도 한편 아무 고민도 없고 흥이 나서 뛰노는 쥐새끼들이 부러워났다. 눈물이 또 소리 없이 흘러내린다. 밝은 달님도 내 모습이 가증해보이는지 구름 속으로 살며시 숨어버린다.  원체 공부를 잘하고 성격이 밝던 나는 점점 눈에 초점을 잃어갔다. 엄마가 떠나간 몇 달 뒤, 어느 날 저녁, 아버지는 나 보고 엄마 생각이 안 나는가고 물으셨다. 나는 그동안 참았던 설음에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엄마를 쫓은 장본인은 아버지라고 생각했기에 그동안 많이도 미워했고 담벽을 쌓고 살아왔던 나였다. “너한테 참 미안하다. 오늘 교장선생님이 아버질 찾아왔더라. 네가 공부성적이 형편없이 내려가고 시간에 근본 집중 못하고 멀 고민하는 것 같다고 하더구나. 아버지더러 애들을 보더라도 자존심 버리고 엄말 데려 오라더구나, 네가 아버지를 미워 하는 거 안다. 사실 아버지도 힘들어, 불쌍하게 자란 너네 엄마를 잘해 줘야하는데…… 아버지가 넘 했다…… 네가 날 대신해서 엄마를 오라고 편지를 쓰면 안 되겠니?” 그말에 나는 놀랐다. “예? 엄마를 오라 해람까?” 나는 눈물을 훔치고 넘 기뻐서 활짝 웃었다. “ 응, 그래…… 너 아버지가 엄말 오란다고 나대신 편지 쓸 수 있겠니?……” 나는 인츰 “됨다 !!”하고 대답했다. 무뚝뚝한 아버지가 엄마를 얼리는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일이 있어서 마실갔다 오겠으니 그동안 편지 써놓아라 응? 내일 아버지가 너 대신 편지 부칠께……”  나는 즉시 네모칸 필기장을 꺼내서 또박또박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보고 싶은 엄마에게: 엄마, 그동안 잘 보내셨습니까? 우린 모두 잘 보내고 있습니다. 리화는 아무 탈 없는지요? 넘 보고 싶습니다. 아버지도 엄마를 무척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춘호와 나는 이제부터 돈을 아껴 쓰고 먹고 싶은 것도 참을 수 있습니다. 사달라고 떼를 쓰지 않겠습니다. 아버지도 더 열심히 일하겠답니다. 그러노라면 우리도 빚을 벗고 잘 살날이 꼭 올 것입니다……. 편지를 쓰는 내내 흐느껴 울다가 나는 소르르 잠들어버렸다. 어느 때쯤 됐을까, 잠결에 인기척 소리가 들리는듯해서 눈을 떠보니 아버지가 쓰다만 편지를 들고 있었는데 눈귀에 뭔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무뚝뚝하고 무섭게만 느껴지던 아버지도 눈물이 있는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또다시 눈물샘이 솟아올랐다……. 열흘이 지난 어느 날, 반주임 선생님이 나한테 편지가 왔다고 교무실로 왔다가란다. 긍정코 엄마한테서 온 편지라고 생각하고 날듯이 기뻤다. 나는 학교 뒤마당의 구석진 곳에 가서 속지부터 뽑았다.  옥화야, 그동안 무사히 지냈니? 엄마가 너희들을 두고 온 게 항상 맘에 걸린다. 네가 쓴 편지를 받았다. 니 마음은 이해하는데 난 너 네 아버지가 무섭구 싫다. 내가 맞아죽으러 가겠니? 엄마를 자꾸 오라고 하면 아예 자살하고 말겠다…….  “자살?……” 여기까지 읽고 더 읽어 내려갈 수 없었다. 그것보다 더 큰 일이 어디 있으랴, 그 나이에도 자살이란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도 남음이 있는지라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영~ 영 엄마 없는 애가 될 걸 생각하니 눈앞이 새까매났다. 학교 구석진 담벽에서 소리도 못 내고 흐느껴 울고 난 나는 교실로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나는 두만강가로 줄달음쳐 갔다. 내가 늘 엎디어 공부하던 그 넙적한 돌 위에 앉아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다. 어른들은 대공무사한줄 알았는데 애들처럼 자존심 대결하며 꼬치꼬치 캐는 것이 죽도록 싫었다. 자식들의 생각은 도무지 안하는지…… 사품 치며 흐르는 강물에 뛰어들어 나의 모든 고뇌를 씻어 버리고 싶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엔 너무나 큰 충격이었던 것이다. 언뜻 눈앞에는 소학교 1학년생인 남동생이 떠올랐다. 누나 ㅡ하고 뒤에서 방불히 부르는 것 같았다. 얼른 고개를 돌렸다. 뒤돌아봐도 동생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안 돼ㅡ 내가 죽음 안 돼ㅡ” 동생을 위해서라도 살아야한다. 넓은 돌 바위에 앉아 흐르는 강물 소리에 내 울음을 희석해서 한껏 실어 보내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나는 엄마가 보내온 편지를 오리오리 찢어서 강물에 흘러 보냈다. 아버지가 안 보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됐던 것이다. 나는 돌 바위 위에 엎디어 엄마한테 편지를 써내려갔다. “엄마, 돌아 와줘요, 넘 보고 싶습니다. 엄마, 꼭 올 거라 믿습니다…….” 나는 눈물방울로 얼룩진 편지를 종이배로 고이 접어서 두만강에 띄워 보냈다. 엄마가 있는 곳까지 제발 가라앉지 말고 가주기를 바라면서……。  이튿날 아버지는 나보고 “옥화야, 앞 집 한어선생님이 그러는 게 너한테 편지가 왔다던데 내 좀 보자. 엄마한테서 온 편지지?……”라고 손을 내미셨다. 가슴이 철렁했다. 그 와중에도 두뇌회전이 빨라 나는 인차 책갈피 속에 넣었었는데 체육시간 보고 들어 온 게 편지가 없어졌더라고 둘러 붙였다. 자존심이 강하신 아버지는 뜻밖에 “아무래도 내가 너네 엄마를 데리러 가야겠다”라고 하셨다. 나는 어떻게 말해서 아버지 마음을 돌려세울지 막연했다. 아버지가 찾으러 가시면 엄마는 꼭 도망치지 않으면 자살 할 텐데…… 단 가마 위에 올라선 개미처럼 안절부절 못했다. 나는 얼결에 “엄마가 이제 며칠 뒤 온다고 했씀다. 우릴 기다리람다……”라고 슬쩍 거짓말을 했다.  그래도 아버진 “너 에미 시집와서 고생만 했는데 내가 넘 했다. 내일 데리러 갈 테니 그동안 동생을 잘 돌보아라. 빨라야 이틀이 걸릴 거다……”하며 친척처럼 사이좋게 보내고 있는 명근 아재집에 나와 남동생을 맡기고 푸름한 새벽에 첫 버스 타고 떠나셨다.  떠나가신 바로 그날 저녁, 근심 속에서 어렴풋이 잠이 들었는데 밤중에 “옥화야, 너 네 엄마 왔다”라고 명근아재가 날 부르는 것 같았다. 엄마란 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정지와 윗방사이 문을 여니 아닌 게 아니라 꿈인지 생신지 진짜로 엄마가 눈앞에 나타났다. 나는 엎어질듯 뛰어가 엄마ㅡ 하고 품에 안겨 실성할 듯 울어댔다…… “사랑해서 미안해…… 좋아해서 미안해……” 경쾌한 핸드폰 신호음이 울렸다. “너 어디야?, 인젠 돌아 안 갈래?……” 같이 온 언니가 날 부른다. 떠나기에 앞서 나의 동년을 지켜주고 보듬어주고 달래여준 두만강을 애정어린 눈으로 다시 한 번 뒤돌아보았다. 푸른 산을 배경으로 도도히 흐르는 그 강물위에 나의 부모에 대한 경모의 마음을 담아 종이배를 띄워 보냈다. 언젠가는 또 기적이 일어 날거라는 기대를 하면서. 쪽박 차고 두만강을 건너 허우허위 넘어온 이 땅위에서 2세, 3세, 4세, 아니, 그 후세들이 영원토록 배고픔과 모자람과 아픔이 없이 서로 사랑하면서 잘 살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또한 우리 이주민의 아팠던 추억도 싣고 멀리멀리 흘러가주길 속으로 빌고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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