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유재: 중국 소주 常熟理工学院 外国语学院 朝鲜语专业 교수/ 한국 숭실대학교 현대문학 박사졸업/ 재한동포문인협회 해외이사
검은 여백

가끔 여백이 나를
데려가는 자리에 가보면

거기에 결이 다른 소리들이 사라지지 않은 채로 모여있다

참 오랜만이야 잘 지냈지

이건 요즘 자주 듣는 소리다 그동안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탓도 있겠고 인사가 그럴 수도 있겠다

술 한잔 할까

전화 저편에서 맥주나 빼갈 그리고 누룩 냄새를 먼저 내밀며 울려오는 소리도 있다 대개 거절 못하게 된다 그런날은 의식을 잃을 수도 있는데 깨어나보면 익숙한 방이던가 혹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좋아하던 여자가 건넸던 소리를 아무리 찾아보아도 거기에 없었다

그녀는 미소만 지었을 뿐이고 나는 먼발치에서 쳐다보면서 헛기침이라도 소리로 남긴 것 같지를 않다

전군 수요일까지는 보고서 올리세요

네 하여 나는 나의 대답 대로 아마도 실행하면서 하늘을 몇번씩이나 쳐다봤다가 아득히 빌딩 아래를 흐르는 인간군상들과 잘도 섞인 차량이 반사하는 빛에 눈이 부시다가 점차 귀밑이 희어지고 눈가에 주름 잡혔을 테고

이때 소학교 선생님이 문득 나타나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나는 당황할 것이다 그래서 급히 그 자리를 떠나 어릴 때 그 오막살이에 가보았는데 아무도 없었고 풀이 울바자 보다도 더 높고 빽빽하게 앞마당 뒷마당을 채우고 있었다 언제 잠근 자물쇠인지 생전 못본 것이었는데 녹이 많이 슬었다 중학교 운동장을 다녀오기도 하였는데 그렇게 많은 청소년들이 나의 질문에 모두 도리머리를 했다 그만 상심해서 울었다

그러다가 잠을 깼고 나는 작은 방 내 집에서 언제부터 내려치고 있었는지도 모를 햇빛무더기에 채찍처럼 얻어맞고 있다

2017.08.21

골목

점심치고는 너무 늦고 저녁은 약간 이른 시간에

실내 장식이 얼핏 바라본 패쪽만큼 어설픈 어느 작은 음식점을 찾아들었다 요리 하나만 대충 시켜두었는데 주문받는 아주머니 억양이 아무래도 동북지방의 부식토에서 삭혀진듯 진하여 잠깐 망설이다가 고향을 물어보지는 않았다 훌쭉한 베낭에서 꺼낸 얇은 책에서 아무렇게나 스친 첫 단어는

골목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들어온 곳이 골목이기도 하였다 시켜둔 것이 나오기 전에 방금 들어왔던 그 문을 나가 골목에 섰다 실말이지 골목은

사람을 외롭게 하는 데가 있다

그러면서도 안온하게도 한다 들어와서 어떻게 나갈지를 잘 몰라할 수도 있고 드디어 어디에 더 가지 않아도 될듯한 안온감이 왼쪽과 오른쪽처럼 길을 사이에 두고 직선으로 혹은 구불어지며 붙어 있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몇십년전 친구가 여기 어딘가에서 나를 향해 걸어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내가 오래 못본 친구만큼 낯설다 하지만 웬일인지 처음 와본 골목에서 떠올린 것이 이래야만 될 것 같았다 또 이제 저녁이면 오래된 집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 같기도 하였다

막힌듯 앞을 알 수 없는 전방과
뒷걸음질 치면

왔던 그곳을 암기하면서 다시 큰길에 설 수 있는 골목 어느 귀퉁이 음식점에서 이제 점심도 저녁도 아닌 밥을 혼자 먹어야 한다 물어본 적은 없었지만 꼭 동북사람인 아주머니가 소리친다

밥이 나왔어요 식사하세요

골목에 서서 나는 그런 소리를 꿈꾸듯이 듣고 있어야 할 것이다

2017.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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