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admin] 래원: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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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카마》호 선상살인사건 10주년 특별기획(1)  얽힌 매듭 풀고 화합의 장 만들자

다시보는 《페스카마》호 사건

한국과 중국이 수교한 이래 가장 처참한 사건이 《페스카마》호   선상살인사건이다. 《페스카마》호란 한국해양수산 소속 원양어선 《페스카마》호 15호를 말한다. 《페스카마》호는 괌, 사이판 등지에서 어로작업을 하는 이른바 원양어선이다. 중국조선족 7명, 도합 24명이 승선하고있었다. 1996년 6월 7일 부산을 출발한 《페스카마》호는 1주일후 괌부근의 티니안섬에 도착했다. 중국조선족 7명은 6월 14일 북경을 떠나 서울을 경유해 5시간만에 사이판에 도착해 티니안섬에서  《페스카마》호에 승선했다.

선상생활

6월 16일, 《페스카마》호는 출항했고 중국조선족들은 배멀미를 하면서 선상에서 작업준비를 학습했다.  알아듣기 힘든 용어를 리해하려 노력했는데 심술궂은 갑판장은 선원들의  궁둥이를 치고 욕하기가 일쑤였다.

6월 16일,  선상에서 갑판장의 본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중국선원 리춘성을 희롱하고 때리는것이 마치 노리개와 같이 취급하는것이였다. 다음날 인도네시아인 노만이 보도줄을 단단히 잇지 못했다고 얼굴을 구타당했고 중국조선족 백충범은 틀린 보도줄을 가져왔다고 구타를 당했다. 호출에 좀 늦게 나왔다고 갑판장에게 구타당하고 검사에 불합격했다고 화가 난 선장이 단체로 구타를 하고 욕을 하는 등 중국조선족선원들은 선장과 갑판장의 가혹한 처벌과 욕설에 견디기가 어려웠다.

큰 사건이 하나 6월 27일에 발생한다. 조업구역에서 참치떼를 발견하고 작업을 시작했으나 조업이 제대로 되지 않자 화가 난 선장은 쇠파이프로 리춘성의 머리를 쳤다. 이것을 피하다 어깨를 맞은 그는 선장에게 대들었다. 화가 난 선장은 일항사에게 도끼를 가져오라 했다. 겁에 질린 중국조선족선원들은 전원 웃층으로 올라가 문을 닫고 방어를 했고 하선을 희망했다. 선장은 당일 항명에 대한 징계위원회를 열고 토의과정에서 어느 정도 노여움을 가라앉혔다. 선장은 다시는 조선족들에게 손대지 않기로 하고 조선족들은 다시 열심히 일을 배우기로 했다.

선상반란

6월 28일,  조선족 선원이 모두 아파 작업을 할수 없어 작업을 거부했다. 6월 30일 저녁 선장은 중국조선족을 모아놓고 하선희망자를 파악하고 하선경제보증서 서명을 요구했다. 여기에는 사모아까지의 경비  50만원과 사모아 구치소에서의  3개월간 구류생활하는 비용 200만원을 내게 되여있었다. 이에 더해 조업 손실금까지 부담시키겠다고 위협을 가했다. 이에 조선족 전원이 선장에게 사과하고 계속 복무하기를 애원했으며 다음날인 31일에는 고급약을 갖고 선장실을 찾아가 애원했다. 그러나 선장은 랭랭했다. 이에 8월 1일 중국조선족 선원들은 최일규 방에 모여 자살을 론했으나 백충범, 최금호 등의 의견으로 선장과 갑판장을 죽이고 죽자는 결의를 했다.

반란음모는 징계위원회에 회부되던 날 시작되였다. 중국조선족들은 배를 탈취한 다음 선원을 죽이고 배를 침몰시킨후 떼목을 만들어 일본이나 한국으로 표류하려 했다. 이들은 인도네시아인 3명과 중국인 1명을 랭동창고에 가두었으나 랭동창고가 작동하지 않아 이들이 살아있는것을 발견하고 이들을 랭동창고에서 꺼내 몽둥이로 때려 실신시킨후 바다에 수장했다.  이를 목격한 19세의  최동호는 맹장염으로 다른 배에서 옮겨온 청년인데 범행장면을 목격한 최동호를 산채로 수장해버렸다. 중국조선족이 인도네시아인 6명을 살해하려 하자 이들이 일항사 리인석과 같이 무인도에 가서 살겠다고 하소연해 이들을 방치했다.    8월 2일 2시, 전재천(全在千)이 주동이 되여 선장면회를 요구했다. 선실문을 열자  3명이  달려들어 선장을 바줄로 묶어 선수창고에 넣었다가 살해하고 갑판장 등 7명도 살해했다.

선장을 잃은 《페스카마》호는 공해상에서 표류하기 시작했다. 8월 6일 생존자 전원을 살해한다는 소문이 돌자 인도네시아인들이 단합해 흉기를 들고 반란선원과 대치하다 량쪽이 화해하고 흉기를 모두 바다에 던져버렸다. 배가 8월 24일 오전 10시경 일본 도리시마섬 부근에 이르자 조타실에서 어창으로 내려가는 전재천을 보고 인도네시아인들이 반란선원들을 밀치고 밖으로 나와 전재천과 격투끝에 그를 바줄로 묶고 일본어업지도선을 보고 물에 뛰여들어 구제를 요구했다. 일본 경비정에 인도된  반란선원은  8월 31일  부산 해양경찰에 인계되였다.

재판

주범인 전채천은 길림성 사람으로 22세에 중산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휘남현조선족 중학교에서  13년간  근무한 교사였다.

한국에서는 27개 시민단체가 《페스카마》호 사건 판결에 대해  사형은 과중하다는 탄원서를 법무부에 제출했다.

피고인을 변론하기 위해 방한한 중국조선족변호사 조봉은 범행동기에 관해 경제적인 파탄에 대한 절망만이 아니라 장기간 비인간적인 인격모독에 비롯된 울분의 분출과 인간을 죽음의 벼랑으로 몰고 갈 때 본능적인 결사저항이 사건을 유발했다고 변호했다.

1997년 4월 9일에 부산 고등법원 제2형사부 《페스카마》호 사건  제2심  3차 심리에서 조봉은 1심 판결에서 범죄사실에 대한 성격규정이 정확하지 않고 이 사건이 일반적인 형사사건이 아니라 사회의 각종 모순이 축적된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작업환경이 험악하고 폭행이 란무해 고생스러운것을 참조하며 이러한 사건으로 그간 30여명이 사망하고 70여명이 중상을 입은것을 고려해 이번 사건이 모범적이기를 바란다고 했다. 2심에서는 주모자 전재천을 제외한  5명에  대해 1심의 사형에서  무기로 형을 감했다.

좌담회

조봉변호사는 한국법률사상 처음으로 외국인 변호사로서 한국법정에 섰다. 조봉변호사 귀국후 《길림신문》, 《장백산》 잡지사 등 언론인, 정계, 교육계, 기업계, 사업계 등 중국조선족 대표 30명이 장춘에서 좌담회를 가졌다. 조봉은 좌담회에서 중국과 200만 조선족이 깊은 관심을 보여 이번 사건은 잘 풀릴것이라고 했다. 이 좌담회에서는 중국조선족을 대표해 한국피해자 유가족에게 사과할것과 죄는 지은대로 가기에 살인자체를 변명할 생각은 없다고 했다. 그리고 외국로무송출만이 잘사는 길이 아니라는 인식을 새로이 했다. 죄담회는 조선족이 락후했기때문에 동족에게서도 멸시와 천대를 받는다고 하고 스스로가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나갈것을 다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선족문화를 한국에 알리고 한국문화를 조선족이 리해하도록 노력할것을 다짐했다. 이에 좌담회에 참석한 중국조선족대표 일동은 우리 민족 력사에 기여할수 있는 공정한 판결을 바랄뿐이라고 결론지었다.

선상반란을 일으켰던 전재천(당시38)씨는 후날 재판부에 보낸 탄원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매일 욕과 몽둥이, 쇠파이프 등으로 맞아 진저리가 나고 눈치밥을 먹으며 하루에 작업 21시간, 흐리멍텅한 정신상태로 있습니다. …》《고기 한마리 값보다 못한》 처우와 학대에 시달리던 조선족선원들은 《하선요청》마저 거부당하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살인을 저질렀다고 한다. 하지만 범행의 대가는 랭혹했다. 한국의 법원은 《범행의 원인이 가혹한 선상폭력에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전씨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전씨를 뺀 나머지  피고인에게는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한국 해당  단체와 《페스카마》호사건  피고인 가족, 조선족 각계가 가진 좌담회

조봉변호사를 서울로 바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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