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제19회 KBS북방동포 대상 체험수기 공모작

오른 쪽으로부터 세번째 남태일 수상자.
[서울=동북아신문]2017년 10월 5일. 이날은 우리 가족들에게 특별한 날이었다. 절강성 항주에서 영영이가 <항주 한국어 어학원> 문을 연 지 1년이 되는 날이었다. 나는 가족들과 함께 개원 1주년 행사 축하를 위해 항주로 떠났다.

출발할 때는 유난히 맑은 날씨였는데 항주에 도착할 즈음 하늘은 갑자기 구름을 실어 나르더니 끝내 차가운 가을비를 뿌렸다. 차가운 비는 가로수의 나무 잎을 때리며 착잡한 나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 같았다. 학원에 도착하자 강의실에는 이미 영영이 부모와 친척, 친구들, 그리고 수강생 5명이 행사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4월 2명 밖에 남지 않았던 수강생은 그나마 몇 명 늘어나 5명이었다.

깔끔한 옷차림으로 단상에 선 영영이는 아주 세련 된 여성미를 드러내고 반짝이는 눈빛과 은은한 미소에는 자신감이 비치어 있었다. 개원 1주년 인사에서 영영이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 참석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외부의 형세가 좋지 않는 요즘, 저의 부모님들과 주변의 친구들은 무엇 때문에 한국어에 그렇게 집착하느냐고 자주 묻습니다. 그럴때마다 나는 거침없이 대답했습니다. 인간이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중국에 보석 같이 아름다운 것들이 많은 것처럼 한국에도 진주처럼 아름다운 것들이 참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한국어는 특히 아름답습니다. 한국의 시가(詩歌)와 속담 중에는 중국의 성어처럼 인생의 철학과 생활의 예지가 많이 배어 있고, 한국어가 탄생한 과정에서도 한인들의 지혜의 숨결이 베어들면서 세상에 알려 진 것입니다. 때문에 나는 한국어를 배웠고 또 다른 많은 중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국어를 비롯해 진주같이 아름다운 것과 진보적인 것들 을 배우고 공유하기 위해 이렇게 노력하고 있습니다.

멀지 않아 북한도 나라체제가 바뀌어 중국처럼 개혁개방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가 되면 지금의 수강생들이 통역사 혹은 사업가가 되어 양국의 가교 역할을 할 것이며 북한 주민들이 행복한 나날을 영위하는데도 많은 도움을 줄 것입니다. 나는 우리의 수강생들과 함께 한국어 어학원을 잘 꾸려 나갈 것입니다. 나는 한국어 강의를 할 때마다 가슴이 뿌듯하고 행복감을 느낍니다. 그것은 내가 하고 있는 한국어 강사라는 직업을 사랑 하고 또 한국어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영영이의 흔들림 없는 강한 의지와 깊은 울림이 있는 인사말을 들으면서 무거웠던 나의 마음은 봄눈 녹듯이 점차 녹아내리고 우리가 처음 만나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나의 머릿속에서 스쳐지나갔다.

5년 전이었다. 지인의 소개로 중국 절강성 동양시 번화가에 한국식 팥빙수가게를 개점했다. 동양시는 워낙 더운 곳인지라 개점과 동시에 팥빙수를 찾는 사람아 많았고 반년 후에 체인점도 생기었다.

그 날 나는 항주공항에서 동양시로 가는 버스 타고 이동 중이었다. 도중에 나의 옆에 중국 농촌 아줌마 두 명이 탑승했다. 두 아줌마는 남방 사람들 특유의 높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나의 시선을 끄는 것은 한 농촌여자의 손에 쥔 한국 화장품 “숨. 스크릿 에센스”였다. 한국화장품을 손에  쥔 여성은 자기 딸의 얼굴 피부가 거칠어졌는데 바로 이 한국 화장품을 바르면서 피부가 좋아졌다고 자랑했다. 그러면서 이 화장품을 사려면 20일 전에 예약해야 한다고 했다.

버스 안에 있는 승객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그녀의 손에 쥔 화장품으로 집중됐다. 바로 그때였다. 오토바이 한 대가 달리는 버스 앞으로 갑자기 굽어 들었고 버스가 급정거 했다.  사람들의 몸은 앞으로 쏠리고 그녀가 쥐고 있던 화장품이 손에서 날아가 다른 의자 밑 쇠붙이에 부딪치어 ‘퍽’ 소리를 내면서 산산 조각났다. 그녀는 어쩔 바를 몰라 얼굴색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비닐봉지에 쏟아진 화장품 액을 두 손으로 모아서 담았고 그 과정에서 깨진 화장품 용기의 유리조각이 손가락에 깊이 파고들어 갔다. 순간 붉은 피가 떨어져 화장품 액에 엉켜버렸고 그녀는 태엽이 풀린 인형처럼 그만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드렸다. 얼마나 가슴이 아파서면 어른이 되어서 많은 사람 앞에서 주저 않자 울 수가 있겠는가.  

나는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상처를 싸매주고 한 장의 명함을 건넸다. 그리고 말했다.
“ 우리 딸이 지금 한국에서 화장품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아주머니 집 주소를 알려 주면, 딸에게 전화하여 똑 같은 화장품을 사서 부쳐드릴게요. 너무 속상해 하지 마십시오.”
그 일이 있은 지 일주일 후였다. 가게에서 일을 보고 있는데 낯선 전화가 걸려왔다. 야무진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먼저 자신은 내가 버스안에서 만난 화장품 아줌마의 딸이라고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께서 잘 알지도 못하는 저희에게 귀중한 한국화장품을 보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비록 우리 집은 시골이지만 엄마 아빠는 진심으로 사장님을 초대하고 싶어 하십니다. 시간을 내어서 꼭 한번 방문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녀의 집은 동양 시에서 좀 떨어진 농촌이었다. 버스에서 만난 화장품 아줌마와 대학 다니는 딸이 마중을 나왔다. 딸 이름은 ‘고영(高英)’인데 ‘영영’이라고 불렀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반짝이는 눈빛, 그리고 발달한 관골과 앞이마를 보는 순간, 개성이 있고 자신의 주장을 고집 하는 여성이라는 것을 첫눈에 알 수 있었다. 택시에 올라 나의 옆에 앉은 영영이는 비록 처음 만났지만 나를 오래 알고 지낸 옆집 아저씨마냥 허물이 없었고, 참새들처럼 쉴 새 없이 말했다. 이야기 중 의외로 나 보다 한국 드라마나 연예인들을 더 많이 알아 깜짝 놀랐다. 한국을 바라보는 시각과 한국드라마 대한 평가는 매우 조리 있고 때로는 진솔하면서도 유머감각이 돋보였고 입담이 좋았다. 첫 느낌이 앞으로 강사나 교사를 하면 매우 적합한 스타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날 나를 초대한 것은 영영이가 간절히 원했던 일이라고 했다. 자기는 한국 드라마를 보기 시작하면서 점차 드라마에 대한 관심이 한국문화와 사회로 옮겨 갔고, 대학을 졸업하면 한국으로 유학을 가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그러나 한국에 인맥이 전혀 없어 부모님들이 동의하지 않을 터라서 고민 중인데 마침, 아저씨 같은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어 다행이라고 깔깔 웃으며 말했다.

 그들이 사는 마을에는 저 멀리 큰 산에서 하얀 띠 같이 흘러내리는 계천 물이 감돌아 흐르고 마을 뒤 야산에는 녹음들이 우겨져 있었다. 특유의 청량한 공기가 떠도는 아늑한 남국의 농촌 마을이었다. 집안에 들어섰을 때, 집안에 뿌린 짙은 향수 냄새 속에서도 약간 비릿하면서도 누릿한 냄새가 돼지를 도살하여 파는 정육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반갑게 악수를 청하는 영영이 아버지의 듬성듬성한 머리카락과 거칠고 검붉은 얼굴만 보아도 정육점을 오래 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는 중국에 사는 조선족이고, 한국 사람과 조선족은 한 뿌리인데 사는 나라가 다를 뿐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영영이 아버지는 별생각 없이, “그러면 한 가족과 같아요. 우리 형제들도 아버지 집에서 분가해 나왔어도 다 한 가족이라고 해요.”

중국 남방의 원주민들은 한국 사람과 조선족을 잘 분간 하지 못하고 매우 혼동해 한다. 사업이나 하고 양복 입고 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한국 사람이라 생각하고 조선족은 장백산 아래 두매 산골에서 하얀 옷을 입고 벼농사나 짓는 소수민족이라고 알고 있다.

영영이의 깔끔한 방에 들어갔을 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방은 한국 연예인들의 사진 전람실이었다. 정면 벽에는 한국의 영화배우 배 용준과 최 지우가 남이섬에서 촬영한 ‘겨울 연가’의 큰 사진이 걸렸고 오른 쪽 벽에는 권 상우, 왼쪽에는 송 중기 사진이 각각 걸려 있었다. 그리고 화보에서 오려 낸 나도 잘 알지 못하는 한국의 젊은 연예인들의 사진이 여기저기에 걸려 있었다. 나는 한류열풍이 대단하다는 것을 그때서야 실감했다. 그들 때문에 지도에서도 찾기 힘든 타국의 농촌에까지 대한민국이 아세아에서 우뚝 솟은 경제, 문화 강국이라는 것을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방을 둘러보고 영영이가 한국에 대해 그토록 호감을 갖고 사랑하는 것에 대해 감동을 받았다. 나는 영영이를 보고 우리 가족들이 힘을 모아 한국으로 유학을 꼭 갈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했다. 이때, 옆에서 듣고 있던 영영이 아버지는 딸의 유학 계획에 펄펄 뛰며 반대 하였다. 그는 갑자기 하늘에서 큰 독수리라도 날아와 병아리 같은 자기 딸을 납치해 갈 것처럼 당황해 하였다.

“우리 고 씨 집안은 몇 십대를 내려오면서 외국이고 유학이고 가지 않아도 한 가족이 모여서 오붓하게 잘 살았어요. 외국에 아는 사람도 없는데 어찌 어린 딸을 유학 보네요, 유학은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조상 때부터 외국이란 꿈도 꾸어 보지 못하고 평생을 돼지나 잡아 고기나 팔던 아버지에게 딸의 외국 유학이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영영이 어머니 또한 한국에 아는 사람도 없는데 어찌 여자아이를 유학 보낼 수 있겠냐면서 대학을 졸업하면 좋은 신랑 만나 시집만 보네면 된다는 식이었다. 그러자 듣고 있던 영영이는 나의 팔을 잡고 사정하듯이 말했다.

“아저씨 이봐요, 우리 엄마는 벌써 나를 시집보낼 생각만 하고 있어요, 아저씨 이렇게 하면 안 될 가요? 먼저 저는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요, 그리고 누가 뭐라고 해도 앞으로 유학은 꼭 갈거에요.” 
나는 즉석에서 한국 딸에게 전화를 걸어 한국어 교과서와 한국어회화 CD를 보내주라고 하고, 며느리가 한국에서 중국어를 가르친 경험이 있어 주 3회씩 우리 집에 와서 며느리에게 한국어를 배우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영영이가 한국어를 배우려고 하는 것은 결코 취미나 말하는 정도의 목적이 아니었다. 한국어를 배우는 그녀의 열정은 타오른 불길 같았고, 6개월이 지난 후 며느리가 감탄할 정도였다. 이렇게 열정이 많고 빨리 배우는 학생은 처음으로 보았다고 했다. 공부하던 도중 가끔씩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이전에는 한국문화의 기원이 대부분 중국문화라고 생각 했어요, 한국은 중국의 부속국이 라고 역사에 기록 돼 있었기 때문에 중국어를 알면 한국어를 금방 배울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한국어는 독립적이고 배울수록 어려워요. 특이한 것은 저는 한국어가 어려울수록 더 매력을 느껴요.”

그렇게 한국어를 배운지 1년이 되고 대학 졸업 날도 다가왔다. 하루는 영영이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우리 가게를 찾아왔다. 영영이는 한국유학 의지를 굽히지 않았고 결국 부모들도 딸의 고집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때 마침, 한국에서 공부하는 딸 지영이도 옆에 있었다. 세살 아래인 영영이는 딸 지영이를 보고 언니라 불렀고 지영이도 영영이를 친동생처럼 아꼈다. 지영이는 깔깔 웃으며 영영이 아버지에게 술 한 잔을 부으면서 말하였다.

“아저씨, 저는 동생이 없어요, 앞으로 영영이를 친동생이라 생각할거에요, 영영이가 한국 에 유학가면 제가 다 책임지고 알아서 도와줄게요. 3년 후에는 영영이가 세련 된 유학생, 훌륭한  딸이 되어 돌아 올거에요. 안심하세요.”

자기네 딸은 외국유학을 절대 보낼 수 없다고 펄펄 뛰던 아버지는 오늘 따라 약주를 많이 마셨다. 그의 얼굴 표정은 밝았어도 눈귀에는 감격의 이슬이 맺혔다. 고 씨네 집안에서 영영이는 처음으로 외국에 가서 공부하는 인재가 됐�뙲�볞쫓式�E�뙲�볞쫓式�E국에 가서 공부하는 유학생으로 되었다. 아버지는 조상들에게 정중히 제사상을 올리고 동네 사람들을 초대하여 푸짐한 마을 잔치까지 벌였다.

영영이가 3년의 한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자 동네사람들은 하나같이 알아보지 못할 만큼 변했다고 말했다. 밝고 세련 된 영영이의 모습은 잔잔한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처럼 그들의 마음속에서 파장이 컸다. 그들은 나에게 어떤 조건이면 자기네 자식들도 한국유학을 갈 수 있냐는 질문이 이어졌다. 

귀국 후  영영이는 오래 전부터 생각 해왔던 <한국어 어학원> 개원 계획을 하나둘씩 준비했다. 드디어 2016년 10월 5일 항주에서 <항주 한국어 어학원> 문을 열었다. 처음 시작할 때 8명이었던 수강생은 2017년 2월이 되자 17명으로 불어났다. 그때는 외부의 환경이 한국어학원을 운영하는데 매우 유리한 상황이었다. 영영이도 자기가 선택한 일에 대해 만족하고 강단에 올라서 강의할 때면 즐겁고 행복감을 느낀다고 했다. 어학원에는 날마다 신입 수강생이 늘어나고 어학원 교실에서는 마치 봄을 맞이한 꽃동산 마냥 강사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고 학생들의 목소리는 지저귀는 산새소리 같았다.

2017년 3월, 찬바람이 불어치면서 외부의 환경은 어학원을 운영한데 불리하게 되었다. 수강생들은 하나 둘씩 학원을 그만두었고 4월 중순에 이르러서는 단 두명 밖에 남지 않았다.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어 버렸다. 그 무렵 소문을 듣고 학원에 찾아 갔었다. 의외로 영영이는 생글생글 웃으며 나를 맞이했다. 그 날 영영이는 이미 문을 닫은<한국어 어학원> 강사 네 사람을 만났다고 했다. 그들을 통해 원래 한국어를 배우던 수강생들의 명단과 전화번호를 알아 왔다고 하였다. 수강생들과 상담하는 중 한 명이 계속 한국어를 배우겠다고 하여 영영이는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당시 상황에 깊은 우려를 표시했고 잠시 쉬었다가 상황이 달라지면 다시 개원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조언했다. 하지만 영영이는 오히려 반짝이는 눈빛으로 나를 설득했다.

“저는 아저씨를 만난 후부터 모든 일이 매우 순리롭게 잘 되었어요, 한국어를 배울 때부터 시작하여 한국유학, 어학원 개원에 이르기까지, 순풍에 돛 달은 배 같이 너무 순조로웠어요. 때로는 나에게 너무 과분한 행운이 찾아온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어요. 그러나 갑자기 하늘에서 비바람이 몰아쳤네요. 그러나 저에게는 항상 확고하면서도 특별한 예감이 있어요. 지금의 현상은 잠시이고 머지않아 나의 꿈이 꼭 이루어질 수 있다는 그런 느낌이죠.

우리는 큰 도리를 떠나서 한국국민의 성숙도와 배려지수가 높다는 것은 누가 뭐라 해도 사실이에요. 따라서 이런 것들이 뒷받침을 해줘야만 중국인민들의 행복수치도 높아질 수 있지요. 이런 진보적인 것을 인민들에게 홍보하는 것도 내가 한국어를 가리키는 원인이 되고 있어요. 임대료와 운영비용은 제가 밤에 기술자료들을 번역하여 벌은 돈으로 충당하면 될 것 같아요. 어떤 명인이 말하기를 ‘인생에서 온 정열을 쏟을 수 있는 일을 발견한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했잖아요. 저는 목표가 있고 아직 젊어요. 지금은 좀 힘이 들어도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질풍지경초(疾風知勁草)’라고 했어요. 거센바람이 불면 강한 풀인지 알 수 있듯이 한번 지켜봐주세요. 저는 부모님이나 아저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한국어 학원을 잘 꾸려나갈 겁니다.”

며칠 전 영영이로부터 안부전화가 걸려왔다. 영영이는 요즘도 변함없이 이른 아침부터 지하철 출구에서 대학교 정문 앞에서 전단지를 뿌린단다. 낮에는 수강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밤에는 부족한 학원 운영비용을 마련하느라 한국어 기술 자료를 중국어로 번역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한국어를 사랑하는 영영이의 굳센 의지와 실행력에 고마움과 함께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자기 목표를 향해 달리는 영영이에게 태풍을 막아 주는 든든한 나무, 눈비를 막아 주는 우산 같은 또 하나의 가족이 되어주고 싶다.

남태일 약력:  
E-mail: mocha520@naver.com
2016년 한국<문예감성> 수필 부분 등단, 현재, 중국 절강성 이우시에서 한식식당 운영. 재한동포문인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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