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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금철 회고록] 스승님과의 축구 인연
[편집]본지 기자  |  pys04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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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1.17  11:3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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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동북아신문]오랜 세월이 흘러갔다.  오늘 늦게 나마라도 스승님과의 축구 인연을 더듬어 보느라니 감개가 무량하다.

스승님과의 첫 만남은 정확히 아홉살때로 기억된다.
호기심으로 꽉 찼고 뭐든 다 갖고싶을 때이기도 했다.
 
   
▲ 스승님(앞줄가운데)과 연변대학축구 총감독 리재호(앞줄 왼쪽 두 번째)교수 등 제자들. 앞줄 오른쪽 첫 번째 사람 저자 최금철씨. 
 당시 공부도 하면서 한편으론 학교무용대에서 춤군으로 활발한 면도 보였던 나는 어느 하루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공을 다루며 장난치고 있다가 우연히 강마른 체구에 훤칠한 키를 가진 한 중년 사나이의 눈에 잡히게 됐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 중년은 바로 당시에 룡정체육학교 청소년 운동중심에서 축구감독을 도맡고 있던 김승태 스승님이였다.
 
그날 스승님은 축구공을 가지고 장난치는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다가오셔서 한번 제대로 된 축구를 배워보지 않겠냐고 물어보았다.난 누군지도 모르고 그냥 배우고 싶다는 대답을 해버렸다.
이것이 인연이 되었다. 며칠 뒤 김승태 스승님은 학교 무용선생님과의 대화를 거쳐 나를 학교 무용팀에서 빼내왔고 나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그토록 가고싶었던 현체육학교(지금의 룡정시) 축구팀 일원으로 뽑혀 들어갔다.
 
 처음으로 받아 입었던 운동복은 지금도 잊을수 없다. 겨울철이였던 만큼 아래에는 두터운 빨간색 운동바지에 우에는 윈쪽가슴위에 룡정체육학교라고 흰글자로 꼭 찍혀진 곤색 운동복을 발급 받았는데 그당시 서로가 없이 살던 세월이라 이런 멋진 운동복은 충분한 자랑거리였다.
 
운동복을 차려입고 거리에 나서면 위풍이 당당했고 주변의 부러운 눈매들을 한몸에 끌어않았다.
축구에 있어서 스승님은 나무랄데 없는 전문가였었다. 우선은 승부에 대한 의욕이 남달리 강했고 팀을 묶어세우는 조직력도 빈틈없이 깔끔했다. 게다가 팀을 만들고 훈련시키고 시합을 치르는 일련의 과정에서 남다른 식견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승부에 들어가서 보여주는 랭철한 통찰력과 과단한 판단력들은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그 시대의 축구는 지금과는 달리 돈갖고 하는 축구가 아니였다.
당시 룡정현 축구대표팀은 각 향진을 비릇한 룡정 시내의 여러 학교들에서 싹으로 보이는 학생들을 뽑아서 한 학교에 집결시키고 집중훈련을 시키는 방법으로 꾸려나갔다.
오전엔 공부하고 오후에나 주말때는 거의 매일 휴식없이 축구 훈련이나 다른 지역팀들과의 시합들을 조직해 가군했다. 낡아서 터지고 찢긴 축구공은 가죽풀로 때서 차기도 했고 우리가 신은 운동화들은 태반이 구멍난 것들을 다시 우에다 가죽을 덫대고 접착물로 땜질한 것이였다.외지로 시합을 다닐때도 우린 바람한점 가릴수없는 큰 트럭에 앉아 다닐때가 많았는데 누구 하나 불편함을 호소한적 없었고 차우에선 늘 웃음꽃이 피여나군 했었다.
 
비오고 눈오는 날에도 휴식은 없었다.기후조건이 너무 악랄하여 더는 운동이 불가능 할때에는 교실에 난로불을 피워놓고 스승님께서는 축구에 관한 이론적이고 필요한 얘기들을 해주시군 했다.
 
60년대부터 세계축구의 돌풍을 일으켰던 브라질 축구로부터 구라파의 축구에 이르기까지. 당시 축구계의 거장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있던 브라질의 베리(贝利)나 화란의 크로이브(克鲁伊夫) 그리고 독일의 베컨뽀얼(贝肯鲍尔)에 이르기까지 스승님은 많은걸 알고 계셨으며 짬짬이 그들의 성장과 이루어낸 업적들에에 대해서 들려주는 흥미롭고 의미있는 얘기들은 우리의 어린 심령에 크고 푸른 꿈들을 심어주었다.
그때의 축구는 4-2-4 진영을 많이 구사했다. 우리팀도 이 진영에 많이 익숙해 있었다. 때론 스승님은 가운데 심장구역이 력량이 부족된다고 판단될 때는 4-3-3 진영도 구사했는데 당시 70년대 축구에선 보기드문 일이였다. 후에는 방어 위주와 돌연 습격이 핵심인 4-4-2진영이나 4-5-1진영 같은 전술체계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림기응변식의 재치있는 축구도 이끌어 냈다.
 
훈련과 시합중에서는 또 방어와 진공상태에서의 위치변화와 구역내에서의 배합, 그리고 위치에 따라서 제각기 서로 다른 역할과 움직임에 대해서도 일일이 세심하게 가르치군 했다. 특히 축구는 움직임과 부딪침속에서 공을 공제하고 배합을 위주로하는 집단적운동이라고 스승님은 늘 강조하셨다. 공을 주고받을 때는 항상 신체중심을 낮추고 움직임속에서 공을 처리해야 된다고 하셨으며 더우기 축구란 대방과의 부딪침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기에 선자리에서 공을 주고받는건 금물이라 하셨다.진정한 능력은 운동중에서 부딪치는 가운데서 공을 다루고 공제할줄 아는 거라고 거듭 강조하셨다.
 
1973년 여름. 60년대의 폭풍우와도 같은 문화대혁명의 시련을 겪은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조직되는 전국소년 축구시합이 길림성 사평시에서 열렸다.
 
북경, 천진, 대련, 광동팀을 포함한 전국 13개 지역의 축구대표팀 건아들이 이번 대회에 참석했다. 그중 김승태 스승님이 이끈 룡정안민학교팀은 주와 성에서의 선발전을 거쳐 영예롭게 이 대회에 참가할수있는 입장권을 획득했다.
 
   
▲ 사평전국대회 개막식 입장 장면
당시 인구 13만도 안되는 조그마한 도시에서 인구가 몇배.몇십배되는 도시의 축구팀들을 상대로 하나하나 적수들을 꺽고 길림성을 대표하여 전국대회에 출전한다는것은 하늘의 별따기처럼 쉬운 일이 아니였다.
 
떠들썩한 축복속에서 우린 기차에 앉아 원정길에 올랐다. 기차를 못타본 친구들도 많았다. 그때는 지금처럼 교통 도구가 발달돼 있지도 않았다.사평까지 가려면 무려 10시간 이상 달려야 했다. 그래도 좋았다.우린 행복했고 축구를 할수있다는것이 너무나 다행스러웠다. 시골에서 메고온 쌀밥을 기숙사에서 해먹으며 구멍난 운동화를 땜질해 신고 뽈을 차도 부자처럼 생각됐다.
 
그때의 사람관계는 단순했고사생관계도 지금같지는 않았다.사평에 도착해 짐을 풀어놓은 우리는 한방에 네명씩 배치됐다.나는 다른 한친구와 함께 스승님과 한방에 들게됐다. 스승님이라고 특별한 배치는 없었다. 당시 인솔자로 같이 가신 학교 교장 선생님도 우리와 한방에 들었다.
 
식사때가 되면 우리 밥상에는 늘 큼직큼직하게 썰어서 올라오는 개고기 안주가 있었는데 다른팀들 밥상에는 없는 걸로 봐선 우리민족이 개고기를 즐겨 먹는다는걸 알고 호텔 측에서 특별히 더 주문해서 올린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또 스승님의 분부를 받고 때론 밥상에 남은 안주들을 침실에 갖고 올라오기도 했는데 스승님은 그때마다 쉬시기전에 약간씩 반지술을 드시기도 했다.
 
사평에서의 첫단계 경기는 A조와 B조로 나뉘여 소조별로 시작됐다.
우리의 첫경기는 천진팀과 이루어 졌다. 도시애들은 입은 옷부터가 달랐다.고급스러워 보였고 피부 색갈도 우리처럼은 검지 않았던것 같다.
 
경기가 시작됐다. 처음 한동안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피동에 빠지는가 싶더니 우리팀은 차츰 정신을 가다듬고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다.좁은 구역내에서의 짧고 준확한 패스도 이루어졌고 날아오는 공을 침착하게 받아 그대로 반대편 변에다 쭉쭉 뽑아주는 날카로운 공처리도 있었다. 또 갑자기 날아오는 공을 여유있게 받아 변선으로 요리조리 돌파하다가 중앙 위험구역에 자로잰듯 정확히 패스하는 공도 있었다. 그리고 중간 구역에서의 갑작스러운 돌파를 거쳐 멋진 슛까지 날리는 정채로운 장면도 수시로 연출 됐다.결과는 2:0.우리팀의 승리였다.
 
조선인의 작고 매운 고추맛과 호랑이다운 날카롭고 용맹한 전투력을 그대로 보여준 한판의 경기였다.
첫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고실력에 대한 확고한 믿음도 가지게 된 우리팀은 또 스승님의 빈틈없는 전략전술에 맞춰 이어지는 북경팀.무한팀과 같은 강팀들과의 연이은 소조 경기에서도 절대적인 우세를 보여주면서 소조 1등의 자격으로 최후 결승전까지 올라갔다.
 
인기는 급상승했다. 고향에서도 축하의 메시지들이 끊임없이 닐아왔고 호텔의 예쁜 누나들은 우리팀 대원들만 보면 엄지손가락을 내들었다.우리팀 중에는 중국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할수 있는 친구가 한명이 있었는데 그 친구는 언어우세로 호텔 누나들의 예쁨을 독차지하다싶이 했고 나중에 호텔을 떠날때는 누나들의 귀중한 선물까지 받으며 부러움을 자아내기도 했다.
 
마지막 결승전은 저쪽 소조에서 일등을 하고 올라온 대련팀과 맞붙게 됐다.
양 팀의 특점으로 볼때 두팀은 다 높은 전술적 수양과 뛰여난 기술적 재능들을 가지고 있었다. 대련팀은 키꼴면에서 현저한 우세가 있었고 우리팀은 왜소해도 강한 투지력이 돋보였다.
당시 대련팀의 총감독님은 80년대에 중국프로축구련맹경기가 회복된후 료녕팀을 이끌고 각종 국내 프로경기에서련속 10관왕의 영예를 따낸적있는 당시에도 중국 축구무대에서 급격히 그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던 떠오르는 샛별 리응발 (李应发)선생님였다.
 
그야말로 한판의 예측할수없는 경기가 될것 같았다.비슷한 전력에서는 두 대표팀 감독님들의 두뇌 싸움이기도 했다.
 
불꽃티는 경기가 시작됐다.
대련팀은 여전히 4-2-4 진영을 들고 나왔다. 이에 맞서 스승님은 의외에도 앞에서 있었던 시합에선 한번도 써먹지 않았던 4-3-3 진영을 들고 나왔다. 그것도 아예 림기응변식으로 한쪽변은 완전히 죽여버리고 대신에 상대적으로 빈약했던 중간 심장구역에 인원을 더 증가하여 중간지역의 통제권을 보강하는데 력점을 두었다.
 
군사상에서는 적을 이기려면 자신의 약한 것은 보강하고 적의 허점은 치고들어가라는 말도 있다. 축구도 례외는 아니였다.그동안 시합을 치르면서 대련팀을 깊이있게 연구해온 스승님은 그날 통수자의 탁월한 지휘 재능을 남김없이 발휘했다. 한쪽변을 완전히 죽여버리고 대신에 변칙적으로 중간구역에 사람을 한명 더 증가하여 중앙 통제권을 보강하고 경기의 주도권을 쟁취했으며 대방의 수비수 한명을 거의 할일없는 허수아비로 만들어 버리며 나중엔 자신의 우세한 병력으로 대방의 치명적인 허점들을 파고들어서 끝내는 최후의 승리를 얻어냈다.
 
마지막까지도 우리팀의 전략적인 전술에 적응하지 못했던 대련팀은 시종일관 피동적인 국면을 돌려세우지 못하고 끝내는 2:1이라는 약소한 차이로 패배하고 말았다.
 
   
▲ 결승전때 대련팀 문전에서
   
▲ 금메달 목에 걸고 학교의 영도들과 한 자리에서
   
▲ 사평에서 전국 일등 한뒤 최성림 현위서기를 비롯한 현위 영도들과 한 자리에서
 
당시 승리의 기쁨은 너무도 컸다. 반짝이는 금메달을 목에 걸고 큰 트럭에 앉아 고향길 어구에 들어섰을때 수천수만의 환영 대오가 길거리에 나와 우리와 같이 뜨거운 기쁨을 함께 나눠 주었으며 연변방송국을 비릇한 각종 매체들도 다투어 우리의 사적을 보도했다.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도 마음은 여전히 설레인다.
1979년도 김승태 스승님은 또 한번 룡정1중 축구팀을 이끌고 섬서성 서안에서 펼쳐진 전국 중학생 3호컵 전국대회에 길림성을 대표해서 출전하게 되는데 거기서도 스승님은 여러차례의 관건적인 시합에서 뛰여난 전술배치와 지휘능력을 빈틈없이 발휘하여 모든 적수들을 물리치고 영광의 금메달을 따냈다.
 
   
▲ 1979년도 3호컵중학생 전국축구경기 1등 후 학교 영도들과 한 자리에서
 어디에 서있으면 어디에서 강열한 에너지와 빛을 내뿜는 스승님이시였다.
60년대에는 프로축구를 뛰고 그 뒤에는 청소년 축구인재양성사업에 종사하기까지 수십년. 김승태 스승님은 축구에 대한 하나의 끈질긴 집념으로 자신의 모든 심혈과 영혼을 연변축구, 나아가서는 중국의 축구발전을 위해 쏟아부었다.
 
그이는 선후로 원 오동팀 감독으로 활약했던 고훈, 리호은과 같은 훌륭한 인재들을 가르치고 키워냈으며 현재 연변대학에서 축구 총감독으로 있는 리재호 교수, 80년대 원 길림축구팀에서 한때는 주장으로 활약했던 강한원 선수, 그리고 전국민이 거의 익숙히 알고있는 축구건장 고종훈 선수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축구 인재들이 그이의 손끝에서 가르침을 받았고 또 훗날의 성취를 이루기도 하였다.
 
   
▲ 스승님(앞줄 가운데)과 원오동팀 고훈감독(뒷줄 가운데) 등 제자들 연변군분구 복역 시절
   
▲ 스승님과 제자(왼쪽 세 번째 원오동팀 감독 고훈)들
어찌보면 지난 40여년간.연변의 축구는 거의 전부가 김승태 스승님과 그이의 진수를 이어받은 유능한 후배들이 같이 힘을 합치고 호흡하며 이끌어 오고 발전시켜 왔다고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니였다.
덕은 쌓은데로 갔다.
 
그동안 연변청소년 축구사업 발전을 위하여 혼신의 열정을 쏟아 부은 그 공헌과 능력이 인정되여 1980년 초, 해당 상급부문에서는 스승님에게 한층 더 높은 차원에서 청소년축구인재양성사업을 주도해줄 것을 요청해 왔고 스승님은 그에 응하여 그 당시 성축구1팀에 인재들을 발굴해서 수송하는 임무를 주로 감당하고 있던 성축구2팀의 총감독으로 정식 초빙되여 임명장을 받으셨다.
 
그 사이 나는 여러가지 원인으로 스승님의 곁을 떠나 다른 학교로 가게 되였으며 나중에는 북경의 한 대학에 입학하여 축구와는 다른 길을 걷게 됐다.
 
   
▲ 팔달령에서 스승님과 남긴 마지막 사진
 1983년 봄, 나는 마지막으로 스승님의 얼굴을 보았다. 당시 스승님은 남방의 축구훈련기지에 대원들을 거느리고 가서동기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잠간 북경에 들렸다. 그때 스승님은 친히 내가 공부하고있는 학교에 찾아 오셔서 학교에서의 학습, 생활 정황에 대하여 일일이 물어 보시고 흡족한 미소도 지었으며 이틑날에는 금쪽같은 시간을 떼내여 대학 선배이자 초중 선배인 같은 전업의 선배누님까지 같이 데리고 즐거운 팔달령 구경을 시켜주고 돌아와서는 맛있는 음식도 사주었다.
 
그런데 그번 스승님과의 만남이 나한테는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1983년도 45일 청명날. 스승님은 저택에서 주무시다가 의외의 돌연성 심장마비로 우리의 곁을 영영 떠났다.그리고 열정과 격정으로 활활 불살랐던 위대한 축구인생에도 종지부를 찍으셨다.당시 그이는 마흔여섯의 너무나 아까운 나이셨다.
 
스승님이시여, 영생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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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금철 지음
 
최금철 약력:
19613월 중국 용정시출생.  1984, 북경중앙민족대학 민족어문학부 수업. 졸업후 연변일보사농촌사업부 경제사업부 기자로 다년간 근무. 그 시절 딸을 안아보는 기쁨, 담략, 원견, 박투 등 다양한 장르의 글들을 백여 편 신문에 발표. 수상 경력은 있으나 다른 간물엔 투고한 적 없음. 1995년에 연변일보사에서 퇴직하고 개인 사업을 하면서 글을 손에서 놓았음. 현재 북경금영주식회사서 이사로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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